사물의 역습
에드워드 테너 지음, 장희재 옮김 / 오늘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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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폭우를 뚫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고씨동굴에 다녀왔다.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 그렇게 무더운 여름인데도 초강력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 같은 냉기가 전해졌다. 막 동굴탐험에 나서려는 순간, 안내하시는 직원 분이 동굴 우측에 주욱 진열된 헬멧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도 더운데 웬 헬멧이냐며 투덜거리면서 헬멧을 썼다. 그런데 높낮이가 천차만별인 동굴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머리가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천장에 부딪혔다. 만약에 헬멧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미국 출신의 기술문화 사학자 에드워드 테너는 헬멧을 비롯한 9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은밀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우선 서문에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게 될 주제인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 세계라고 정의하고, 테크닉은 우리가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간단한 기기들도 초기에는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초기 진공관 라디오 사용자들은 수신, 동조, 검출, 증폭 그리고 재생에 이르는 자그마치 열두 가지 이상의 절차를 숙지해야 비로소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요즘엔 쉽게 설명된 매뉴얼조차 읽지 않고 무턱대고 기기에 달려드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그런 복잡한 절차를 익힐 인내심이 있을지 궁금하다.

 

글의 서두에서 내가 쓴 헬멧은 고대시대 전장에서 적의 치명적 공격에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보호구에서 유래된다. 고대 이래 갑옷과 헬멧은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보호구였지만, 16세기 총기류가 보급되면서 헬멧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헬멧들이 부침을 거듭했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 분야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2차세계대전 즈음에 노동자들의 머리를 18킬로그램까지의 충격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산업용 플라스틱 헬멧을 개발해냈다. 전장과 위험한 작업장 뿐만 아니라 헬멧은 스포츠 분야까지 확산되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프로야구 타자들이 헬멧을 쓰는 모습이 이제 어느덧 일상화되지 않았던가.

 

에드워드 테너는 인류가 엄마의 젖을 빠는 행위를 첫 번째 테크닉으로 그리고 젖병을 인류가 접하게 되는 첫 번째 테크놀로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첫 번째 기술적 통과 의례는 무엇일까? 걸음마를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신발의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신발이 없다면 상처로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발이 발을 너무 잘 보호해서 발이 민감해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도 10억 이상의 인구가 맨발로 생활하지만 상처 없이 잘 지낸단다. 어쨌든 각종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본적인 형태의 샌들이라고 한다.

 

세계인이 즐겨 신는 일본식 샌들 다시 말해 조리(게다)는 일본의 기후에 최적화된 샌들의 형태를 고수한다. 살생을 금하는 일본의 종교적 이유 때문에 가죽신이나 부츠 대신 도입된 조리는 갇힌 발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조리의 글로벌화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물론 일회용품으로 전락해서 천지에 범람하는 플라스틱 조리 제품으로 인한 환경문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음악 건반과 타자 자판의 상호 작용에서 시작한 건반 역사에 대한 저자의 기술은 한층 더 흥미롭다. 서양 중세에서 발명된 가장 복잡한 기계 중에 하나라는 오르간에서 출발한 음악 건반은 하프시코드, 해머클라비어 같은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있었다면, 카를 바흐가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운지법은 테크닉의 혁명이었다. 비로소 서양 음악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될 피아노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 계층을 위한 전유물이었던 피아노 제작 기술에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과 상업적 홍보가 곁들여지면서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저렴한 피아노조차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아코디언이라는 대체품이 탄생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테크닉을 발전을 도모하듯, 피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기교를 지닌 연주자들로 넘쳐 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녹음 기술로 인해 사운드 엔지니어는 거의 무결점의 레코딩을 쏟아내고 있고, 고성능의 장비들과 편집기술 역시 완벽한 연주에 한몫하고 있는 중이다. 피아노의 경우, 엔지니어 보다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테크닉이 테크놀로지의 향상과 개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동일한 선상에서의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 보완 작용에 대한 정확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유사 이래 인류의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테크놀로지의 개선과 발전을 가져 왔고, 이를 이용하는 테크닉 역시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에드워드 테너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 세대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게 되는가이다. 가령 예를 들어, 조만간 상용화돼서 시장에 선보이게 될 예정인 에릭 슈미츠의 구글 안경 프로젝트는 스마트 시대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 이정표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나친 인터페이스에 의존한 나머지 발생하게 될 프라이버시 이슈 같은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변화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규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다가는 언젠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보그 인간이 출연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혁신 디자인의 세계는 장려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창의와 도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새로운 세기에는 또 어떤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이 우리 인류에 의해 재발견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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