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작가 미겔 시후코의 <일루스트라도>를 읽고, 책에 나오는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키피디아로 검색을 해봤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뻔뻔한 작가는 이 흥미진진한 메타소설 속에서 그 흔적을 쫓는 가공의 인물을 다양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방식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전형적인 메타소설의 양식을 빌려, 각종 시, 메타소설, 인터뷰, 블로그 댓글과 자학적 유머까지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출신의 미겔 시후코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 적합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필리핀 국회의원 출신 아우구스토 시후코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아테네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 통치 아래 선각자들이란 뜻의 <일루스트라도>는 스페인 식민지배 아래 필리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중산 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그룹이다. 이 중에는 실존 인물인 필리핀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도 포함되어 있다. 미겔 시후코는 <일루스트라도>를 자신의 야심찬 데뷔작 제목으로 삼았다.

 

미겔 시후코는 직접 본인의 이름으로 메타소설 속에 등장해서 미국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짜배기 필리핀 작가크리스핀 살바도르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던 <불타는 다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필리핀의 모든 추악한 사실을 담은 <불타는 다리>는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시후코는 필리핀 역사를 관통하는 살바도르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조국 필리핀과 망명지 캐나다/미국을 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필리핀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초보 작가이기는 하지만, 이런 심각한 주제만으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크리스핀 살바도르를 추모하며, 동시에 조국 필리핀을 떠나 캐나다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적인 삶을 사는 21세기 자발적 망명객이자 이방인의 초상을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다시금 마닐라로 돌아가 스승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그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메타 소설적 창조인지 독자는 헷갈릴 지경이다. 전형적인 미국 여인으로 등장하는 뉴욕 여친 매디슨과의 관계는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정체된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군부의 쿠데타 위협이 일상화되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가 희화화된 필리핀 국가의 현실을 작가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을 다룬 SNS 열전(熱戰)과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필리핀 청년 에르닝 이십의 에피소드를 눈여겨 보았다. 모든 사건 사고가 인터넷 소셜 네트워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곧바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신()소통의 시대의 위력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조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정착을 시도하는 필리핀 신인류의 전형으로 나오는 에르닝 이십의 과장된 좌충우돌기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낮추며 블랙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치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국과 필리핀, 태평양이라는 시공을 가로 지르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의 소설에서 크리스핀의 과거를 쫓는 여정은 어느 순간 서사를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수단으로 뒤바뀐다. 그가 왜 죽었고, 그가 남긴 필생의 역작 <불타는 다리>의 행적은 중요하지 않다.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찬 상태로, 크리스핀의 과거 아니 조국 필리핀의 과거 속에서 부유하는 작가의 실존만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50년 역사를 아우르는 필리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조명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중첩되는 <일루스트라도>는 확실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공의 인물인 크리스핀 살바도르가 소설 속에서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의 변혁을 바랬던 것처럼, 그의 창조자 미겔 시후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앞으로 계속될 작가의 도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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