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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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미있지만 난해하다.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인데 나가는 진도가 느리다.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더 걸려 다 읽었다. 책 표지에 ‘반드시 천천히 읽을 것’이란 문구가 있는데 딱 맞는 말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작가가 깔아놓은 몇 가지 쉬운 설정도 놓치게 된다. 어떤 단편은 노골적으로 <경고>하면서 똑 같은 내용을 그대로 적었다. 혹시 다른 부분이 있나 하고 찾아봤는데 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괜히 그 글 속의 의미를 열심히 찾았다. 작가의 노림수에 당한 것이다. 덕분에 같은 글을 몇 번 읽었다. 재미있는 경험이다.

 

용은 전설의 동물이다. 서양과 동양의 용 모양이 다르다. 이 소설 속 용은 당연히 서양 용이다. 이렇게 적으니 판타지 소설에 대한 글을 쓰는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113편의 글 중에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도 있다. 아니면 상징으로 읽으면 된다. 첫 작품 <전염병>에서 단어들이 사라진다고 한 것이나 앙헬라가 만든 캐릭터인 에우세비오가 다른 이야기 속으로 달아나서 이런 저런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이 에우수비오는 닮은 꼴 대통령과 함께 가장 자주 출연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닮은꼴>은 똑같은 이야기인가 하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다른 변주가 발생한다. 그 뒤로는 또 다른 이야기로 바뀐다. 제목도 유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재밌는 이야기다.

 

상징과 풍자로 가득하다. 솔직히 말하면 상징보다 풍자가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몇 가지 단편에서 얼마나 현실의 부조리한 모습을 풍자했던가. 당장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쉽게 한두 편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잔고>에서 키스 횟수로 하루를 정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기발한 발상에 놀란다. 마이너스가 된 그를 아내의 키스가 제로로 만들고 평온하게 잠든다, 그 사이에 다른 여자와 불륜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담한 남자다. 이런 남자들이 아주 가끔 등장한다.

 

말장난처럼 읽히는 단편도 있다. 어떤 단편은 제목만 있고 내용이 백지다. <어느 기억상실증 환자의 기억>이 바로 백지다. 이런 파격은 알기 쉬운 것이지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첫사랑>에서 오래된 추억과 기억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왜곡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주 함축적이고 사실적이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데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각 단편이 분량이 다른데 의도적인 변주로 이야기를 비튼 것도 있다. 읽으면서 어딘가에서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뒷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몇 편은 살인자들을 다루었는데 그 마무리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최고의 살인자의 모습이나 완벽한 살인을 자랑하고 싶었던 살인자의 현재에 대해서.

 

113개의 단편을 퍼즐이라고 부르면서 이야기들을 맞출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것 같다. 아닌가? 퍼즐이란 평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모양이다. 작가가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말이다. 다 읽은 후 다시 읽을 때 순서를 무시해도 되지만 처음 읽을 때 순서를 무시하면 앞에 쓴 몇 가지 재미를 누릴 수 없게 된다. 기발한 상상력과 은밀한 욕망 등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풍자와 엮이면서 현실을 비현실로 연결하고, 이것이 다시 현실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폭발 장치>에서 이 뉴스를 보는 지역이 우리가 흔히 뉴스에서 보던 곳임을 감안하면 조금 더 쉽게 다가오려나. 독자의 경험과사고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책이라 나중에 다시 읽으면 색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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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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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툼한 책이다. 한 가족의 3대를 다루는데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과 다르다. 할아버지 다케지로는 러시아인 할머니 기누와 결혼해 혼혈 3남매를 낳았다. 기쿠노, 유리, 기리노스케다. 유리는 결혼해서 6개월 산 후 이혼했고, 기리노스케는 단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 기쿠노는 약혼자를 버리고 나가 유부남과 관계를 맺고 딸 노조미를 낳는다. 7년 만에 노조미를 임신한 채 돌아와서 도요히코와 결혼해서 아들 고이치와 딸 리쿠코를 낳았다. 도요히코는 회사 직원 아사미와 불륜을 저지른 후 막내 아들 우즈키를 낳았다. 이것이 이 집의 관계도다. 이들이 모두 한 집에 산다. 거대한 서양식 집에서.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들려준다. 시간 순서는 아이들이 자라는 사이사이에 어른들의 과거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앞에 쓴 복잡한 관계에 대한 설명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집안 사람들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는 사람이나 연인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도 몇 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엮인 관계인 채로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이 이 집에 있다. 바로 아이들을 공교육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다.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는다. 책 도입부에 고이치, 리쿠코, 우즈키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한다. 자유롭게 집에서 놀면서 월등히 우월한 교육을 받던 이들이 먼저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존 학생들도 이들을 배척한다.

 

집에서 자라다 보니 아이들에게 친구가 거의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면 친구가 하나 둘 생긴다. 원래 비단 장사를 하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다케지로가 영국에서 돌아온 후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 후 이 일이 집안의 가업이 된다. 할아버지의 교육관도 특이하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의 경우 1~2년 동안 해외에서 놀면서 공부할 기회를 준다. 돌아오면 당연히 회사 일을 해야 한다. 이 집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기리가 해외 생활에 관한 몇 개의 에피소드를 풀어낼 때 고요하고 정적인 이들의 일상에 파탄이 일어난다. 물론 가장 큰 파탄을 불러온 것은 큰딸 기쿠노의 7년 가출과 임신이겠지만 평생을 홀로 살면서 조카들의 훌륭한 삼촌 역할은 한 그는 이야기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키다 보니 괜히 한 인물에게 정을 붙인다. 바로 첫장과 끝장을 담당하는 리쿠코다. 그녀는 이 집안 여자들과 다른 길을 간다. 대학도 다니지 않고 소설을 써서 상을 받은 후 전문 작가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녀는 기리 삼촌과 함께 소설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장남인 고이치가 자신이 아닌 여자 친구 교코를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이 드러난 것을 비교하면 더욱더. 이것은 우즈키의 성장과 또 다른 삶을 보여주는 모습과 비교된다. 큰 언니 노조미가 대학을 졸업한 후 베이징대학에 유학을 간 것은 이 집안 남자들의 놀기 위한 유학과 대조되는 모습이며, 이 집안의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고이치가 가업을 이어받지만 다른 남매들은 기존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이것은 분명 시대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3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실제 2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1대 할머니의 이야기는 반전 같지만 우리가 알고 삶의 외양이 얼마나 다른 이면을 가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적지 않은 시간을 다루면서 한 가족의 성장과 소멸 과정을 보여주면서 삶의 유한성과 애잔함을 느끼게 만든다. 혼혈로 엄청난 미모를 지녔던 엄마와 유리 이모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교육관이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유리 이모의 엄청난 결벽증이나 리쿠코의 짧은 초등학교 경험 속에 나온 구토 등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고통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들을 사회와 떨어져 있게 만든다. 관계가 좁아진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넓어지지만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갑갑함을 느꼈던 순간들의 대부분은 유리 이모와 관련되어 있다.

 

한 가족 전체가 화자로 등장하여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각각의 인물들 삶이 파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왜 기리 삼촌이 독신으로 살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고, 고이치는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왜 직접 표현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할아버지 다케지로의 목소리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1960년에 시작해 2006년에 끝나는 이야기 속에 완고한 아버지나 따뜻한 할아버지로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이 놀라운 집안을 만든 그의 모습이 너무 희미하다. 러시아인 할머니 덕분에 그들만의 용어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감탄을 했다면 책 제목에 나온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란 말이 의미하는 ‘자유만세’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화목한 것 같은데 하나씩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과정 속에서 들여다 본 그들의 모습은 결코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에서 달콤한 한숨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어쩌면 가장 적합하고 함축적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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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베트남 - 생생한 베트남 길거리 음식 문화 탐험기
그레이엄 홀리데이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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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여행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도 가본 곳은 몇 나라 되지 않는다. 그 대부분도 태국이었다. 베트남은 왠지 쉽게 가지 않게 된다. 회사의 지사가 있는 곳이지만 내가 하는 일은 그곳에 갈 일이 없다. 그래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다가 쌀국수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이 그곳에서 먹은 식당을 말할 때 호기심이 폭발한다. 하나같이 모두 맛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쌀국수를 좋아하기에 더 그 식당에 가서 포를 먹고 싶다. 또 한 번은 호치민 근처의 해산물 식당에서 아주 저렴하게 게와 새우를 먹은 이야기를 들었다. 한 번 놀러오면 자신이 가이드해주겠다고 말하지만 왠지 불편을 끼치는 것이 싫어 쉽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언제가 가게 되면 꼭 먹고 말겠다는 의지만 남겨 놓고 있다.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베트남 음식의 설명과 사진이 곁들여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대는 책을 받고 펼치자마자 사라졌다. 표지에 나오는 사진을 제외하면 단 한 장의 음식이나 식재료 사진이 없다. 400여쪽의 책이 글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통해 그 이미지를 얻으면서 다음에 가면 그 음식을 한 번 먹어봐야지 했던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자가 글로 표현한 것을 내가 알고 있는 한도 안에서 그 음식의 모양과 맛을 상상해야 한다. 알고 있는 베트남 음식이라고는 쌀국수 집에서 먹은 것이 전부인데 말이다. 몇 가지는 태국 음식에서 그 이미지를 빌려온 것도 있다. 책 내용과 상관없이 이 불친절한 편집이 조금 많이 아쉬웠다.

 

저자는 베트남을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라고 부른다.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동남아를 갈 때면 길거리 노점상들을 자주 본다. 작고 허름한 식당도 적지 않다. 가능하면 이런 곳에서 먹으려고 한다. 물론 유명한 식당이나 푸드 코트에서 먹는 경우도 많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비위생적이란 생각과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몰라 어려웠다. 인터넷 카페의 정보를 통해 주문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한국 여행객들이 자주 가는 곳이다. 아니면 외국인들이라도.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서 현지인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주문한다. 상대적으로 입맛이 까다로운 내가 아예 먹지 못할 정도의 음식이 나온 적은 없다. 이때의 경험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저자가 베트남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길거리 음식을 하나씩 먹고 즐기는 과정을 보면서 나의 짧은 경험이 떠올랐다.

 

베트남 출장을 갔다 온 직원 한 명이 현지 거래처 직원과 해장용으로 닭피를 마셨던 이야기를 해줄 때 경악했다. 그런데 저자는 처음으로 현지인과 함께 간 곳이 바로 돼지 자궁을 요리하는 곳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가 베트남에 오기 전 전북 익산에서 일 년 정도 머물렀다고 하지만 이 정도의 것은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도 예전에 태반을 먹거나 애저 등을 먹은 적이 있으나 그가 그것을 먹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니까. 그가 이 책의 첫 이야기를 이것으로 시작한 것은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 경험을 넘어가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든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분짜다. 나는 이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다. 그럼 왜? 아내가 하노이로 놀러가서 가장 맛있게 먹은 유일한 음식이 분짜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쌀국수조차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음식이 목차에 나오니 반가웠다. 사진과 맛에 대한 설명을 기대했는데 역시 앞부분이다 보니 실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이 음식을 먹게 되었는지, 얼마나 맛있는지 알려주지만 식당 정보와 사진이 없다 보니 혹시 하노이로 가게 된다고 해도 먹어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가기 전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어가서 먹고 올 테지만.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라고 했을 때 한국도 한때는 그랬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노점과 포장마차가 우리의 허기를 채워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기업처럼 변해가는 과정에 있지만 많은 곳에서 새로운 음식과 유행하는 음식들이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 나오는 베트남만큼은 아니다. 또 하나 감안해야 할 것은 저자가 이곳에 간 시기다. 1997년 여름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베트남이 덜 발전했었다. 한때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던 오토바이의 물결이 지금은 사라졌다고 하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물론 이 책을 내면서 다시 간 것 같은데 아직도 많은 길거리 음식점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의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고, 문명화 혹은 현대화의 물결 아래 점점 길거리 음식점은 사람들의 삶에서 밀려나고 있다. 저자가 살던 때도 경찰의 단속을 피하고 벌금을 내면서 자기 가족을 돌보던 음식점이었는데 말이다.

 

저자는 괜히 아는 척하기보다 아는 만큼만 글로 적었다. 자신이 그곳에 생활하면서 먹고, 인터뷰한 것을 적었는데 외국인이라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허브에 대한 부분은 더 그랬다. 약간은 알고 있던 부분이지만 하노이와 사이공(호치민)의 음식 및 문화의 차이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분명해졌다. 묵직하고 직선적인 하노이의 음식에 비해 다채롭고 변화를 잘 받아들이는 호치민의 음식에 대한 비교와 설명은 나의 취향은 어디일까 하는 궁금점을 드러내었다. 호치민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영향을 받다 설탕을 많이 쓴다고 했을 때 라오스에 가고 싶은 나의 의지를 살짝 흔들었다.

 

재미있는 인터뷰가 하나 있다. 저자가 길거리 식당의 아줌마를 인터뷰하는 것인데 엄마와 딸의 답이 다른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정통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딸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바꾼다고 말한다. 맛있다고 말하는 다른 음식점 주인들이 모두 자신이 정통적인 방식으로 만든다고 말했기에 이 부분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육수를 직접 만들지 않고 치킨 스톡 같은 것으로 맛을 낸다고 했을 때 머릿속은 조미료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육수나 국수를 만드는 방식을 보면 한국의 설렁탕이나 곰탕 같은 음식이 떠올랐다. 이럴 때면 식당과 음식과 주인들의 사진이 없는 것이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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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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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누구나처럼 동화를 참 좋아했다. 집에 있는 동화책을 다 읽고 친구집에서 새로운 동화책을 발견하면 빌려 읽었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살아오는 동안 많은 힘과 재미를 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그렇게 좋아했던 동화의 이면을 조금씩 보면서 어릴 때 느꼈던 감동과 안타까움이 완전 다르게 다가왔다. 한때는 아예 잔혹동화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형제의 동화가 원작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던 적도 있고, 디즈니가 원래의 이야기를 망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동화를 읽는 그대로 재미를 느낄 나이가 지나간 것이다.

 

그림형제가 각 마을을 돌며 이야기를 모아 동화를 낸 것처럼 현대도 이 동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단순히 예쁘고 연약한 공주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전사의 이미지를 씌운 동화도 있고, 아예 그림형제에게 퇴마사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는 작품도 있다. 동화 속에 담긴 상징을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 속에 재해석한 작품도 가득하다. 한때 텔레비전을 켜면 신데렐라 스토리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구전문학이 텍스트로 바뀐 후 다시 시대 속에서 변주를 시작하고 있다. 이 단편집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모두 여덟 편의 나쁜 동화가 실려 있다. 나쁜 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동화에서 기대하는 전개와 행복한 결말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내용도 그렇게 동화스럽지 않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편도 있다. 동화 속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른 작품들이다 보니 이 단편집을 단순하게 동화를 재해석했다고 말하기도 조금 어색하다. 표제작 <빨간구두당>의 경우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 멈추지 않는 소녀 이야기를 빌려 색이 사라진 세상 속에 색을 보는 사람을 등장시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흑백만 존재하는 세계에 빨간 구두를 신은 아가씨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다. 하지만 이 색을 보고 느끼는 사람은 일부다. 지배세력은 이들을 처벌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그 속에는 전체주의 혹은 근본주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인간들의 이기심과 사악한 욕심도 같이 곁들였다.

 

단 한 편의 동화를 재해석하기 보다는 여러 편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든 경우도 있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가 대표적인 경우다. 기본적인 모티브는 개구리 왕자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동화를 짧게 인용하면서 개구리 왕자의 여정을 재미있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 결말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또 화자를 맹목적인 하인 하인리히로 만들어놓고 동화의 이면을 비틀고, 주변 인물이었던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기슭과 노수부>는 명확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없지만 영웅의 모험담이 결코 모든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현실의 높은 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했다는 동화의 결말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순무>는 읽으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농부의 기지가 수탈을 피하게 만들지만 결국 보복은 피할 수 없다는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존재의 죽음과 그가 묻힌 곳에서 자란 거대한 순무와 그곳에 붙은 뼈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혹하고 서늘하다. 거대한 순무를 진상받고 상을 내리기보다 그 땅을 수탈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본의 탐욕과도 닮아 있다. 긴 세월 속에 부당함과 거짓 등을 한두 번 정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넘어갈 수 있지만 지속적인 탐욕 앞에는 너무 무력하기만 하다. <헤르메스의 붕대>는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질투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가장 좋은 것을 나눠 가지지 못하고 숨겨야 했던 부분과 권위로 포장한 질투심이 엇나갈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보여준다. 이야기 속 한 부분은 아주 섬뜩하다.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는 한때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농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때의 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힘이 없는 여자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보여주는데 녹아 없어진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심상치 않다. <거위지기가 본 것>은 거위지기의 시선에서 어린 공주와 왕의 결혼을 지켜보고, 그의 진심어린 조언이 뒤틀린 관계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욕망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지도 알고 있다. 그의 욕망은 불나방과도 같다. <화갑소녀전>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새롭게 해석했다. 행복한 결말과 환상은 사라지고, 산업재해와 성추행 등이 그 속을 채운다. 익명으로 처리된 공장의 생산현장은 어딘가 떠오르는 곳이 있다. 현대 기업이 요구하는 몇 가지 가치가 실제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보여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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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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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술 트릭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산산조각나면서 순간 멍하게 만들다 보니 감탄을 자아내기보다 뭐야? 하면서 욕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단서를 곳곳에 심어놓고 구성을 잘 짠 서술 트릭이라면 순수한 감탄과 함께 어디에 그 단서를 숨겨놓았을까? 하고 찾게 된다. 이 책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거대한 얼개 속에 독자가 먼저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고, 그 사실의 일부가 드러났을 때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서술 트릭은 선입견 없이 읽게 되면 금방 그 어색함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책을 읽는 독자라면 대부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처음에 살짝 어색함을 느낀다고 해도 이어져 나오는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새롭게 나오는 단서와 상황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서술 트릭은 잘 짜인 구성과 필력이 없으면 금방 그 트릭이 들통 난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서술 트릭을 다룬 미스터리를 읽을 때 속아 넘어가는데 아주 가끔 그 어색함이 계속 잔상처럼 남아 불편함을 느끼면서 트릭을 발견한다. 이것은 나의 추리력이 탁월해서 라기 보다 오랫동안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단련된 유형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운이 좋았다.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 7월 7일 오후 7시에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자살이 아니면 밀실살인이다. 겨우 반쪽의 글 속에 프롤로그를 마무리한 후 7월 7일 오후 7시 고묘소 빌라의 3층에서 살던 사카이 마사오라는 남자가 자기 집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부인 사건의 도입부다. 그리고 사카이 마사오가 어떤 남자인지 간단하게 설명한다. 청산가리를 먹고 고통스러워하다 창밖으로 뛰어내렸을 것이라고 경찰은 판단한다. 사카이 마사오는 신인 추리소설가로 어느 잡지의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뒤로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주변 친구는 자살을 부인하지만 경찰은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자살에 더 무게를 둔다. 여기에 작가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하나 슬쩍 흘려놓았다.

 

그 다음부터 이야기 구성은 간단하다.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추궁, 전개, 진상으로 이어지는 구성 속에서도 이것은 변함이 없다. 아키코는 의학책 편집자이자 사카이의 연인이었다. 그녀가 볼 때 사카이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신과 결혼을 약속하고 큰돈이 생긴 후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문을 품게 된 것 중 하나는 이전에 사카이의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이 그에게 전달한 적지 않은 돈이다. 도가노 리스코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업무상 출장을 갔다가 잠시 둘러 그녀를 만나고,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리스코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쓰쿠미 신스케는 르포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사카이와의 관계를 안 잡지사 편집장이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의뢰한다. 그와 사카이는 추리동호회에서 만난 사이다. 그냥 아는 사람을 만나서 몇 가지 정보를 덧붙여 글을 쓰면 되는데 <산악>이란 잡지에 실린 한 편의 소설 때문에 사카이의 표절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뀐다. 소설계의 거장 세가와 고타로가 산을 배경으로 쓴 <내일 죽을 수 있다면>과 사카이의 사후 발간된 <추리세계>의 <7월 7일 오후 7시의 죽음>이 거의 같은 작품이란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사카이가 이것을 표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추리세계> 편집부에는 사카이를 증오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야나기사와다. 그의 동생이 사카이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다.

 

사카이 마사오란 남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사람들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들을 추궁하고, 단서를 뒤지고, 증거를 모은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두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단서와 증거를 찾아 돌아다니고 조사하고 추리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다. 물론 약간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자신들이 지목한 인물에 상황을 맞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설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선입견에 빠진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한 설정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하나씩 트릭을 끄집어낼 때마다 읽으면서 내가 세운 가설들은 산산조각났다. 다 읽은 후 복기를 하면서 더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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