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누구나처럼 동화를 참 좋아했다. 집에 있는 동화책을 다 읽고 친구집에서 새로운 동화책을 발견하면 빌려 읽었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살아오는 동안 많은 힘과 재미를 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그렇게 좋아했던 동화의 이면을 조금씩 보면서 어릴 때 느꼈던 감동과 안타까움이 완전 다르게 다가왔다. 한때는 아예 잔혹동화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형제의 동화가 원작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던 적도 있고, 디즈니가 원래의 이야기를 망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동화를 읽는 그대로 재미를 느낄 나이가 지나간 것이다.

 

그림형제가 각 마을을 돌며 이야기를 모아 동화를 낸 것처럼 현대도 이 동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단순히 예쁘고 연약한 공주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전사의 이미지를 씌운 동화도 있고, 아예 그림형제에게 퇴마사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는 작품도 있다. 동화 속에 담긴 상징을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 속에 재해석한 작품도 가득하다. 한때 텔레비전을 켜면 신데렐라 스토리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구전문학이 텍스트로 바뀐 후 다시 시대 속에서 변주를 시작하고 있다. 이 단편집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모두 여덟 편의 나쁜 동화가 실려 있다. 나쁜 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동화에서 기대하는 전개와 행복한 결말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내용도 그렇게 동화스럽지 않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편도 있다. 동화 속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른 작품들이다 보니 이 단편집을 단순하게 동화를 재해석했다고 말하기도 조금 어색하다. 표제작 <빨간구두당>의 경우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 멈추지 않는 소녀 이야기를 빌려 색이 사라진 세상 속에 색을 보는 사람을 등장시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흑백만 존재하는 세계에 빨간 구두를 신은 아가씨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다. 하지만 이 색을 보고 느끼는 사람은 일부다. 지배세력은 이들을 처벌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그 속에는 전체주의 혹은 근본주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인간들의 이기심과 사악한 욕심도 같이 곁들였다.

 

단 한 편의 동화를 재해석하기 보다는 여러 편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든 경우도 있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가 대표적인 경우다. 기본적인 모티브는 개구리 왕자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동화를 짧게 인용하면서 개구리 왕자의 여정을 재미있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 결말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또 화자를 맹목적인 하인 하인리히로 만들어놓고 동화의 이면을 비틀고, 주변 인물이었던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기슭과 노수부>는 명확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없지만 영웅의 모험담이 결코 모든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현실의 높은 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했다는 동화의 결말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순무>는 읽으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농부의 기지가 수탈을 피하게 만들지만 결국 보복은 피할 수 없다는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존재의 죽음과 그가 묻힌 곳에서 자란 거대한 순무와 그곳에 붙은 뼈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혹하고 서늘하다. 거대한 순무를 진상받고 상을 내리기보다 그 땅을 수탈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본의 탐욕과도 닮아 있다. 긴 세월 속에 부당함과 거짓 등을 한두 번 정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넘어갈 수 있지만 지속적인 탐욕 앞에는 너무 무력하기만 하다. <헤르메스의 붕대>는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질투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가장 좋은 것을 나눠 가지지 못하고 숨겨야 했던 부분과 권위로 포장한 질투심이 엇나갈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보여준다. 이야기 속 한 부분은 아주 섬뜩하다.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는 한때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농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때의 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힘이 없는 여자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보여주는데 녹아 없어진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심상치 않다. <거위지기가 본 것>은 거위지기의 시선에서 어린 공주와 왕의 결혼을 지켜보고, 그의 진심어린 조언이 뒤틀린 관계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욕망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지도 알고 있다. 그의 욕망은 불나방과도 같다. <화갑소녀전>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새롭게 해석했다. 행복한 결말과 환상은 사라지고, 산업재해와 성추행 등이 그 속을 채운다. 익명으로 처리된 공장의 생산현장은 어딘가 떠오르는 곳이 있다. 현대 기업이 요구하는 몇 가지 가치가 실제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보여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