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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망가
강상준 지음 / 로그프레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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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저서 <위대한 영화>를 벤치마킹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제목보다 나를 더 반갑게 만든 것은 ‘망가’란 단어다. 흔히 만화라고 부르지만 한참 일본만화를 볼 때 망가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예전에 비해 거의 일본만화를 보지 않고 있지만 한때 열독했던 독자라는 자부심이 있어 꽤 많은 망가를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자부심은 목차를 보면서 단숨에 날아갔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제목도 꽤 있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제목이 채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재 중인 만화를 감안하면서 세도 읽은 망가는 열 편도 되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일본만화에서 멀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매혹적인 만화 가이드란 문구에 동의한다. 이 책 이전에 영화잡지 등에서 걸작으로 평가한 만화를 찾아서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동네마다 도서대여점이 활황이었던 시기다. 집으로 들어갈 때 몇 권을 빌려 읽고 다음날 또 빌려보던 시기였다. 너무 많이 읽어 읽을 책이 없다고 고민했는데 불과 십 여 년 만에 새로운 목록이 나왔다. 이중 대부분은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제목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목록의 첫 문을 연 작품은 예전에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본 <강철의 연금술사>다. 반가웠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기억을 새롭게 하고 나의 기억과 맞춰보는 작업이 이어졌다. 완결되지 않은 애니만 본 것 가지고 이제 완결된 망가와 같이 놓고 이야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즐거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일본만화의 대부분이 주간 만화잡지에 연재가 된 후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불과 몇 개월만 기다리면 단행본이 나오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들은 일주일을 참는 것도 힘들다. 한참 <슬램덩크>가 유행할 때 매주 서점을 달려갔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단행본이 나온 후 다시 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완결된 후 다시 1권부터 보고, 애니도 봤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처럼 <슬램덩크> 2부가 나오길 바랐다. 그런데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인 <베가본드>나 장애인 농구 <리얼> 연재로 바쁘다. 물론 작가는 2부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다린다. 혹시나 하고. <리얼>은 그렇게 나에게 복잡하게 다가왔다.

 

연재가 긴 만화의 경우 읽다가 중단된 경우가 많다. <베르세르크>나 <원피스>가 대표적이다. 만화방을 갈 때면 늘 찾아서 읽던 일본 만화가 이 두 편이다. 물론 이 두 편의 애니는 이미 봤다. <원피스>는 모두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냥 볼 게 없어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중독된 망가다. 단순한 이야기만 나를 매혹시킨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체 등도 크게 한몫했다. 열심히 읽을 때 몰랐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금방 알게 된다. <지뢰진>을 볼 때 그 그림에 감탄했는데 이 두 망가도 좀더 여유있게 들여다보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오>를 그린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한국만화의 경우 이제 웹툰으로 거의 변해 이런 재미가 살짝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솔직히 말해 이 책에 실린 서른두 편의 망가만 가지고 위대한 망가라고 하기는 무리다. 만화가의 대표작을 어떤 작품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대로 놓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두 편 정도만 연재한 작가라면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편이라면, 아니 대중적으로 더 알려진 작품이라면 어떨까? 이런 의문이 저자에 대한 설명과 작품 해설에서 자주 떠오른다. 이것은 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거나 각자의 취향에 맡겨야 할 부분인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이 있다. 이 목록에 나온 작품들이 엄청나게 매력적이란 것이다. 이전에는 시간이 남아돌아 좋은 만화를 열심히 찾아 읽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 책을 빌릴 곳도 그렇게 많지 않고, 사서 보기에는 이미 있는 책만으로 책장이 넘쳐난다.

 

저자의 글을 보면서 시간이 되면 우선 읽고 싶은 목록이 만들어졌다. 두더지, 마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불새, 사채꾼 우시지마, 원아웃, 인어 시리즈, 플루토, 하나오 등이다. 이 중에서 가지고 있는 책도 몇 권 있으니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시간내어 일독해봐야겠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을 펼쳐 작가의 글과 비교해봐야겠다. 나의 감상과 어떤 차이가 있고 같은 감상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 책은 전문가적 입장에서 만화를 분석하고 해석하다보니 망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아는 척하는데도 좋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망가를 읽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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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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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로 낯설게 만난 황정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출장길에 가져갔다가 돌아오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지 않은 분량이라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소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낯선 문체와 이야기에 놀라 한동안 그냥 묵혀두었다. 내일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다른 책을 읽었다. 일주일 이상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손에 들고 집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펼쳤는데 나나의 이야기는 더 낯설게 다가왔다. 역시 낯선 문장이 조금만 집중하지 않으면 뭔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조금 힘들게 끝까지 읽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쓴 말이다. 소라가 먼저 자신과 자기 가족과 나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면 나나는 임신한 자신과 애 아빠 모세와의 관계 등을 차분히 들려준다. 이야기는 두 시간이 겹치지 않고 이어서 펼쳐진다. 소라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은 나기의 이야기가, 그리고 마지막엔 나나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각자의 이야기 속에 소라, 나나, 나기의 이야기가 뒤섞이지만 항상 중심에 있는 것은 화자들이다. 자신들의 시각에서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자신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솔직히 말해 낯선 문장과 문체를 제외하면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고 힘든 소설이 아니다. 흔히 보는 이야기라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소라와 나나는 자매고, 아빠는 기계에 빨려 들어가서 죽었다. 그 날 이후 엄마 애자는 정신을 놓았고, 더 나쁜 환경의 집으로 이사한다. 하지만 이 이사에서 그들은 최상의 이웃을 만난다. 바로 나기와 그 엄마 순자다. 아빠가 죽은 후 보상금 모두 다른 가족이 챙겨갔다. 소라 가족에겐 한 푼도 남겨두지 않은 가족이 나중에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위악적이고 위선적인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빠의 엄마이자 형제였다는 이유로 그들은 오랫동안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은 그들을 만나고, 그들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찾아간다. 이 부분을 보면서 이들이 착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살짝 의문이 든다.

 

아빠가 죽은 후 그들은 편모 아래에서 살았다. 엄마 밑이라고 하기에는 그 엄마가 너무 넋을 놓고 산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족이라면 나기와 그의 엄마 순자가 더 적합하다. 나기 네 밥을 먹고 자랐고, 순자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졸업했다. 도깨비 사연으로 소라 네와 나기 네가 이어진 후 이들의 관계는 아주 밀착되고 이웃사촌을 넘어 그냥 가족 같다. 김치가 남아 만두를 만드는 에피소드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이들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든다. 이와 대조적인 가족으로 나나의 애인인 모세 네 가족이다. 모세가 가족이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너무나도 도식적으로 생각하는 그것을 당연하게 말하고 나나에게 강요한다. 나나의 선택에 공감하는 것도 바로 요강을 둘러싼 작은 이야기로 충분하다.

 

소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나기와 연결되는 누군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나기의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온다. 그의 짝사랑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아 이 자매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말한다. 소라 자매의 엄마 애자가 죽은 아빠를 잊지 못하는 것이나 나기가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이 이어진다면 나나의 사랑은 한 사람에 묶여 있지 않다. 분명 소라도 사랑을 했을 텐데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니면 이야기 속에 단서를 흘렸는데 놓친 것일까? 나나가 혼자 애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소라가 이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도 사랑은 이 자매와 배속의 아이와 이어준다. 일상의 힘겨움이나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거나 불편을 느끼기보다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계속하겠습니다, 란 말을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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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6-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의 문체는 저도 적응이 아직 어렵더라구요
 
알마의 숲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8
안보윤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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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산길을 걷는다. 눈 덮인 산길이다. 이 소년이 산길을 걷는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다.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인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깊은 산 속에서 인터넷에서 본 자살매듭 묶기로 목을 매려고 한다. 묶은 고리 속으로 목을 밀어넣는다. 죽으려는 순간 새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얼굴에 새똥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다. 죽으려는 소년이 왜 이런 걱정을 할까 살짝 의문이 생긴다. 그때 옆 허공에 세로로 그어진 기다란 선을 발견한다. 그것은 틈이다. 버둥거린다. 목에 감긴 줄이 그의 생명을 앗아간다. 무언가가 소년을 호되게 내리친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살았다. 정신을 잃는다.

 

한 소년의 자살 시도에서 시작한 소설은 곧바로 이상한 세계로 넘어간다. 그곳은 바로 제목대로 알마의 숲이다. 이 숲은 이상하다. 알마와 알마의 삼촌만이 사는 세계다. 올빼미라고 불리는 남자도 있지만 그도 어느 날 갑자기 문을 통해 이 세계에 떨어진 남자다. 언젠가 사라질 예정이다. 문이라는 곳을 통해 이상한 생김새를 가진 동물들이 떨어진다. 안대를 한 오리라든가 하는 것처럼. 그리고 알마의 생김새도 특이하다. 레고 모양이라니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모습이다. 어쩌면 이것은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인 레고 세트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단 한 번도 그 장난감을 가지고 아들과 놀아준 적이 없지만.

 

엄마는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다. 그녀는 아이를 아주 냉정하게 키운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에 아이를 끼워넣는다. 열 살짜리 아들 방을 녹색으로 도배를 한다.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색이라는 이유로. 아들은 그 색에 강한 압박을 받는다. 어느 날 다른 색으로 도배한다. 이 잠시의 일탈은 곧바로 엄마의 새로운 녹색 도배로 덮여버린다. 엄마는 아들에게 왜 낙서를 했는지 묻지조차 않는다. 이론에 능통하지만 소통은 전혀 하지 않는 전형적인 이론가형 엄마다. 자신의 위신을 위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이곳이 아들의 마음에 들지만 좋은 대학을 보내려는 욕심에 다시 서울로 불러 학원들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녀에게 아이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 같다. 아버지도 이 엄마와 잠시 다투지만 그 어떤 도움을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답답하고 갑갑하다.

 

알마는 눈물을 흘리면 죽는다고 한다. 절대 이곳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알마를 울리는 것이다. 알마의 과거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녀의 전생은 지독하게 슬프다. 그녀가 사는 숲 속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이유도 생각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장난감이 잠시 동안 즐거움을 주지만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어떤 아이가 삼촌의 관심을 너무 독차지하면서 그녀가 삼촌 몰래 문안으로 밀어넣었다. 소설 속 묘사대로라면 특이한 외모를 가진 알마가 이렇게 사는 것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그래서 그녀의 이 감정이 소년의 자살과 충돌한다.

 

올빼미가 소년에게 한 마디 한다. 너의 이야기는 지독하게 재미없다고. 왜 소년이 자살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만 그의 반응은 늘 이렇다. 그리고 소년이 이 산 속으로 오게 된 사연 중 하나가 나온다. 학교 폭력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 사람들의 오해가 만들어낸 일 때문이다. 그의 엄마조차 믿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아이를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나 방어를 위해 이용할 뿐이다. 사랑이 사라진 가족은 이미 가족이 아니다. 아이는 사육되고 있었다. 이것을 견디고 넘어서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틈 속으로 들어가려는 아이에게 삼촌은 말한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 같은 게 있겠냐”고. 다시 말한다.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라고. 이제 소년이 틈이라고 말하고 알마는 문이라고 하는 곳이 열린다. 소년은 그 문을 넘어가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선택일까? 어느 쪽이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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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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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었다. <공중그네>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작품들을 읽었었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손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을 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읽지 않고 단지 쌓아두었을 뿐이다. 그의 책이 나오면 언제나 관심을 가진다. 서스펜스부터 유머까지 멋지고 재밌게 아우르는 작가가 그렇게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이전 작품이 재간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2014년 신작이다. 그래서 더 반가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소설에 나오는 두 여주인공이 나를 사로잡았다. 광고처럼 이 여자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구성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두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처음은 나오미, 그 다음은 가나코다. 이 둘은 동창이다. 가나코가 결혼한 후에도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나오미는 백화점 외판직원이고, 가나코는 은행원인 남편과 결혼한 후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처음에는 나오미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그 다음은 가나코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시선만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이어진다. 처음 나오미의 이야기를 읽을 때 혹시 가나코의 이야기 속에서 반전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의문은 가나코의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단숨에 사라졌다. 그리고 더 긴장되고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나오미는 큐레이트 자격을 가졌고 이 일을 하길 바랐다. 현재는 백화점 외판부 직원이다. 어느 날 백화점에서 중국 화교들을 대상으로 외판 활동을 한다. 고가의 상품들을 진열해놓고 팔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시계에 관심을 둔다. 300만 엔의 고가 시계다. 비싸다며 아쉬워한다. 성공적인 외판을 끝낸 후 정리를 하는데 그 시계가 없다. 어수선한 와중에 사라진 것이다. 나오미는 그 여자가 가져갔다고 생각하지만 증거가 없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전당포에 그 여자가 맡기려는 것이 찍혔다. 그냥 신고한 후 잡으면 되지만 중국 화교의 큰손이 연결되어 있어 백화점은 신중하게 접근한다. 약간 밋밋하고 평이하다고 생각했던 전개에 긴장감이 생긴다. 바로 이 시계를 훔친 아케미와 나오미의 대결 때문이다.

 

어느 날 나오미는 연락도 없이 가나코를 찾아간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열린 문 사이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남편 다쓰로가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충격이다. 어릴 때 나오미의 엄마가 아빠에게 맞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실수로 한 번 휘두른 것이 아니라 악의적인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 폭력이 얼마나 가혹하고 지속적인지 알고 있는 나오미는 경찰에 신고하고 이혼하길 바란다. 하지만 가나코는 이것이 알려질 경우 일어난 다른 피해를 먼저 걱정한다. 매 맞는 아내들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또 다른 이유인 나오미 엄마의 경우는 경제력과 친구들 때문이다. 나오미는 무심코 말하다. ‘네 남편을 죽이자고’.

 

나오미의 이야기는 가나코의 남편을 죽이기 위한 계획과 외판 활동 중 일어난 아케미와의 대립을 두 축으로 놓고 진행한다. 자신의 과거 경험이 친구의 현실과 겹쳐지면서 아주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이 완전히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하든지 이혼이나 신고가 우선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쓰로와 똑같이 생긴 중국인 린류키의 등장으로 이 계획은 점점 구체화된다. 살인이란 끔찍한 단어대신 제거란 영어 단어 클리어런스를 사용해 자신의 감정을 속인다. 이 부분을 보면서 매춘이란 단어를 원조교제라고 바꿔 부르는 일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어로 본질을 속이려는 얕은 속셈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아마추어적으로 차분히 진행된다. 왜 아마추어적이냐고? 그 이유는 가나코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가나코 이야기는 남편이 사라진 후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과 대응을 다룬다. 시댁은 놀라고 의문을 품고, 회사는 그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 일을 덮으려고 한다.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한 두 여자는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현실은 시누이 요코가 흥신소를 고용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계획에 허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감시사회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그녀들은 이것을 놓친 것이다. 가나코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계속 궁금하게 만들었다. 미숙한 그녀들의 실수가 드러날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복잡한 구성도 아니고, 끔찍한 연쇄살인이나 참혹한 살인현장이 펼쳐지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과연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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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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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여사의 소설 중 시대물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시대적 문제를 풀어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 이 시대물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시대물을 몇 권 사놓고 그냥 묵혀놓은 지 몇 년 지났는데 언제 시간나면 정주행 한 번 해야겠다. 처음에는 에도 시대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적응하고 나면 그 시대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린다. 첫 부분에서 이름과 관직과 상황 등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네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은 독립적이면서 앞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본 줄기는 도가네 번 번주의 시종관이었던 아버지가 할복을 한 후 그의 둘째 아들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에도에 올라와서 겪게 되는 몇 가지 사건을 연작으로 다룬 것이다. 이 아버지의 할복도 의심스럽다. 뇌물을 받은 것을 부인하는데 받은 영수증에 쓰인 필적이 자신의 것과 같다. 현대 미스터리물을 자주 보는 우리라면 당연히 똑같이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시대는 아직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고 신기하다. 붓글씨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던 시대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아버지는 혼자 할복을 시도하고 장남이 우연히 발견하고 그 목을 베었다는 것인데 아무리 사무라이 시대라고 하지만 끔찍하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장면들에서 이런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전에도 에도 시대를 다룬 소설을 가끔 읽었다. 하지만 그때는 번의 계급체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의 지식이 워낙 얕았고, 생각이 경직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쇼노스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수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포시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계급구조가 정체된 사회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도만 오면 이 사고와 현실이 뒤섞인다. 조그만 번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에도의 빈민은 하루에 한 끼는 쌀밥을 먹는다. 번에서는 어느 정도 지위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하루 벌어 사는 에도인에게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닌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 없는 지방 사람은 싼 방을 얻을 수밖에 없다. 쇼노스케가 살고 있는 도미칸 나가야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쇼노스케는 대본소 무라타야의 일을 도와주면서 생활비를 번다. 그 일이란 필사하거나 다른 소설을 수정해서 새로운 책을 내는 것이다. 이 일상을 주재한 것은 번의 에도 대행인 사카자키 시게히데, 일명 도코쿠다. 그를 만나면서 쇼노스케는 아버지의 뇌물 사건이 단순히 비리를 다룬 작은 음모가 아니라 거대한 음모를 짜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필적을 그대로 흉내내는 대서인을 찾아야만 이 음모를 중지할 수 있고, 아버지의 원한도 갚을 수 있다. 이 긴 소설의 기본 뼈대는 바로 여기에 있다.

 

큰 흐름이 하나 있지만 재미를 만드는 것은 역시 자그만 이야기들이다. 각 장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와 인연이 만들어지는 자그만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쇼노스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조그만 연적 관계나 꿈으로 생각했던 여인 와카와의 만남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도미칸 나가야 사람들과 엮이면서 일어나는 일상과 동명이인인 관계로 생긴 에피소드 등은 이 소설이 과연 미스터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잔잔하고 유쾌하다. 한 소녀의 납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나은 정과 키운 정의 관계는 쇼노스케와 어머니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고,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식적인 가족애가 제거된 모습이 너무 노골적이라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볍게 읽기에는 사실 조금 힘든 분량에 내용이다. 특히 마지막 장은 예상을 뛰어넘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쇼노스케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과 고뇌 등이 더욱 심화되고, 기존의 관습을 단순에 깨트리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모든 것을 다 알려준 것 같은 사람들의 숨겨진 마음이 드러나고, 자신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읽으면서 분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쇼노스케는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지키려고 한다. 약간 무력해보인다. 쇼노스케에게 그만큼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에도 최고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나가야 사람들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관심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가볍게 떠받친다. 가족보다 나은 이웃사촌들이다. 오랜만에 무딘듯하면서 날선 작품 한 편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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