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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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한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모든 원고와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는 도서관이다. 일반적인 도서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24시간 늘 열려 있다. 한 밤중에도 누군가가 원고를 들고 와 벨을 누르면 나가서 받아주어야 한다. 도서관 직원은 그 책을 장서 원장에 적고, 저자에게 원하는 곳에 꽂아두라고 말한다. 이렇게 받은 원고가 쌓이면 지하 저장소로 옮긴다. 도서관이 받는 원고에는 제한이 없다. 나이도, 국적도, 장르도 따지지 않는다. 놀라운 장소다. 이 책이 나온 뒤 실제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일이다.

 

사실 브라우티건의 소설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워낙 유명하다고 하니 읽었을 뿐이다. 다른 작품도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의 독서법과 맞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비교적 쉽게 읽혔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었고, 몇몇 문장에서 하루키의 문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기시감에 비롯한 착각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정보 때문에 생긴 착각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자가 풀어낸 상징과 이미지는 읽는 동안 전혀 몰랐다.

 

화자인 ‘나’는 이 도서관 사서다. 어느 날 도서관에 와서 사서로 눌러 앉았다. 그리고 한 번도 도서관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세계는 도서관과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그의 연인인 바이다도 자신의 몸에 관한 시를 쓴 후 가져온 저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려워하고 저주한다. 아주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여자들은 질투를 품는다. 외모에 관한 에피소드 대부분은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 오고 가는 도중에 생긴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 남자들 중 한 명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화자는 고립된 곳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 이 삶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바이다의 임신이다. 둘이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임신중절이다. 이를 위해 지하 저장소의 포스터가 멕시코 티후아나의 의사를 소개해준다. 이 소설의 중반 이후는 티후아나로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의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바이다를 둘러싼 에피소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비인간적인 행동과 모습은 그 병원에 온 환자와 가족의 모습과 대조된다. 제대로 된 의사에 비해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비전문적으로 보인다. 어린 소년과 소년가 보조한다. 그렇지만 소독이나 위생적인 처리는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야기보다 문체와 사람들이다.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문체는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화자와 바이다와 포스터 등이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산다. 나는 도서관에, 포스터는 지하 저장소에, 바이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이들에게 도서관이 없다면 세상으로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 동안 도서관을 비운 것 때문에 나와 포스터는 직업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변화는 머무는 곳을 벗어나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머릿속은 두 가지 이미지가 떠돈다. 하나는 당연히 도서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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