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바다 - 미술여행작가 최상운의 사진과 이야기
최상운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남쪽 바다를 보면서 자랐다. 태어난 곳에서 바닷가까지는 100미터 조금 더 되는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바다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본 바다와 탁 트인 백사장이 깔린 바다는 달랐다. 일단 시원하고 가슴에 신선한 바람이 와 닿았다. 이전까지 바다하면 어시장의 생선들과 비릿한 냄새와 어선들이 버린 스티로폼 등의 쓰레기가 먼저 연상되었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 이런 부둣가를 보면 반갑고 낯익다. 누구나 바다하면 먼저 떠오르는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 것이다. 이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던진 것은 다양한 바다를 보면서부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일곱 장을 SEA라는 표기로 나누었다. 많은 곳이 아는 바다지만 낯선 지명도 상당히 나온다. 한국 바다만 따로 모아놓지 않고 해외의 바다가 같이 넣은 것도 조금은 특이하다.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한국의 바다 대부분은 제주도와 관계있다. 제주 비양도, 우도, 마라도, 가파도, 애월, 제주, 서귀포 등이 책 속에 나온다. 제주에 가서도 섬은 거의 간 적이 없어 대부분 이름과 방송으로만 본 곳이다. 언제 한 번은 가보고 싶지만 늘 마음만 먹고 있다. 군산의 선유도도 이제 다리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니 한 번쯤 갈 것 같다. 이렇게 이 책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가보고 싶은 열망을 살짝 부채질한다. 그렇다고 수많은 외국의 바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미술여행작가라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른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사진들이었다. 구도와 배경 등이 전혀 내가 기대한 것과 닮지 않았다. 오히려 각 장 마지막에 실린 화가들의 그림이 더 인상적이었다. 터너, 고흐, 인상파들, 쇠라, 호퍼, 모네 등의 그림 말이다. 사진들보다 오히려 그림이 긴 시간을 넘어서 더 분명하게 그 바다의 이미지를 더 잘 전달해주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들이다. 사실 바닷가 풍경은 인터넷 검색하면 더 멋지고 전문적인 사진들이 쏟아진다. 뭐 그림도 그렇지만 이렇게 연결해서 감정과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

 

분량에 비해 글자가 많지 않고 오랫동안 들여다봐야할 사진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 금방 읽었다. 잠시 멈춘 곳은 대부분 기억과 추억이 머문 곳이다. 그리고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서 뽑아온 바다에 대한 문장들과 그가 경험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다. 낯선 만큼 신기해야 하는데 여행 서적이나 방송 등으로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덤덤하게 다가온다. 이 덤덤함을 뛰어넘는 순간은 언제 작은 에피소드가 있을 때다. 가끔 기억과 추억이 연결되면 격렬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반가움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가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진 것이다. 또 읽었지만 무심코 지나간 문장에서 뽑아 올린 글들은 다시 음미한다.

 

솔직히 말해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편집이다. 어쩌면 내가 기대한 글들은 여행 작가들의 일상과 경험이 더 녹아 있는 여행기였는지 모른다. 파편적인 단상 대신에 말이다. 그리고 그 바다와 직접 관계있는 글을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런 예상을 뛰어넘은 재미와 감동을 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왠지 이 책은 아니다. 아쉬운 부분이다. 어쩌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 책을 뒤적인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다른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니까. 이 글을 적다 보니 더럽고 냄새나는 어린 시절 바다가 그립고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픈 열대
해원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픈 열대>란 제목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레비 스트로스다. 너무나도 유명한 인문학 서적이다 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인문학 서적이 아니다.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정한 액션 스릴러다. 사실 처음에는 이 소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신인의 첫 작품이고, 한국도 아닌 콜롬비아를 무대로 한 북한군 특수요원이라니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라고 미리 짐작했다. 출판사의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기대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펼친 책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먼저 읽은 독자의 호평이 없었다면 이 두툼한 분량을 아주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한국 액션 스릴러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그것을 충족시켜주었다. 북한군 특수요원 권순이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의 암호명은 장산범이다. 암살자 세계에서 너무나도 유명하다. 영어로는 마운틴 타이거로 불린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중반부터다. 그녀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도입부에 알려지고 바로 실제 능력이 발휘된다. 아마추어와 완전히 다른 능력은 그녀가 최고의 경호원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멀고 먼 콜롬비아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와 더불어.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다. 세계 최고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조직 이름이 메데인 카르텔이다. 한때 정부마저도 뒤흔들던 강력한 조직이다. 예전에 이 조직을 둘러싼 수많은 영화나 소설이 나왔다. 대부분 그들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권순이가 이 조직을 위해 일하게 하면서 나의 이성을 잠자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했다. 현실적으로 최고의 악당들인데 이들을 살짝 응원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데는 그들을 없애기 위한 조직이 너무나도 잔혹했기 때문이다. 카르텔과 비교해서 전혀 뒤질 것이 없다. 리타의 존재도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아이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악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늑대라고 불리는 조직이 메데인 카르텔을 없애려고 한다는 기본 설정에 권순이가 그 주변에 놓인다. 분량은 당연히 권순이가 많지만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이다. 보고타 도심에서 총이 쏟아지고, 포탄이 날아다닌다. 카르텔을 없애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그 음모 속에서 순이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수요원이 개인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한다고 해도 정규군 속에 갇히면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행운과 우연이 겹치면서 몇 번의 위기를 넘어가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순이의 능력이다. 너무나도 무섭고 강렬하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와 살이 터지고 내장이 흩날리는 묘사는 섬뜩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카르텔을 뒤에 놓으면 순이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온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한국 안기부 직원 덕진, 카르텔을 공격한 무리에게 성폭행까지 당한 열세 살 소녀 리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온 이전의 동료, 그녀가 겨우 살아나온 침몰한 배 속의 소녀들. 이런 인연들이 모여 권순이의 삶을 뒤흔든다. 침몰한 배에서 겨우 살아난 후 구출된 뒤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겪었던 일들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들 중 마지막 방점을 찍은 것은 역시 침몰하는 배속에서 구하지 못한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세월호 사건 당시 학생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액션영화도 많이 떠올랐지만 가장 먼저 든 것은 무협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용병으로 자신을 내려놓았지만 최고의 암살 요원이었던 그녀가 수많은 적들이 죽이는 장면은 무협 속 주인공과 다름없다. 최고의 저격수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긴장감은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길지 않는 시간 동안 수차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결코 그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그녀를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뭐 현대의 무협이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 캐릭터를 빌려온 것도 많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늑대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은 조금 허술하다. 적들의 작전이 치밀했다고 해도 그 파악이 너무 늦다. 그 속에 몇 개의 반전을 집어넣은 것도 과한 설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늑대의 조직력과 정보력으로 밀어붙여도 충분했을 텐데.

 

가볍게 읽기에는 그 속에 담긴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 많다. 가독성이 워낙 좋아 이 참혹함에 마냥 빠져 있을 수 없다. 순이의 트라우마가 그 순간에 탁 터진 것은 변증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순간의 설명은 조금 늦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마약을 둘러싼 콜롬비아의 전쟁은 평화로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룸살롱 같은 뜬금없는 장면은 아쉽다. 마지막에 카르텔이 무너지는 상황이 얼마나 충실한 고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허황되어 보인다. 곳곳에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을 충분히 가릴 재미와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는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이다. 이번 작품은 기존에 읽었던 작품과 느낌이 많이 차이난다. 새벽에 대부분 읽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이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전작들에서 느낀 기묘하고 기발한 발상들이 이번 작품에서는 기이하고 섬뜩한 느낌으로 변했다. 유쾌하고 오밀조밀하면서 기발한 재미를 준 이야기들이 어둠 속에 잠긴 듯하다고 해야 하나. 제목의 의미가 야행열차나 백귀야행의 야행일 수 있다고 할 때 이 둘이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혼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환상은 언제나 그 대상에게는 어렵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현실이 어디까지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과 밤의 불 축제인 진화제에서 만나 각자 하나의 기묘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작가의 동판화 작품들이다. 마흔여덟 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야행 시리즈다. 그 작가의 이름은 기시다 미치오다. 그는 원래 의도했던 작품을 모두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 이 작품들은 지역명이 붙어 있는데 다섯 이야기는 바로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각자가 경혐한 비현실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다섯 이야기 중에서 오하시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지막 구라마가 유일하다. 각각의 이야기 화자는 10년만에 모인 학원 동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항상 등장하는 것이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 동판화다. 야행과 대비되는 서행이란 작품의 존재를 알린 것도 이 이야기 속이다. 아직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작품이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 작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전체적인 설정이 더 어려워졌다. 단순히 밤과 낮, 어둠과 밝음의 대비가 아니다. 삶과 죽음으로 나누기에도 무리가 있다. 마경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서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조금은 부족하다.

 

오노미치, 오쿠히다, 쓰가루, 덴류쿄, 구라마 등은 모두 지명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 지역은 기시다 미치오의 연작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야행 시리즈에 나오는 건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늘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이어진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포가, 어느 곳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잔뜩 드리우고 있다. 아내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니라고 하는 여자, 죽음을 예언하는 할머니, 공터 한 가운데에서 불타는 집과 수상한 여자, 기차 여행 중에 만난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고생 등이 그렇다. 동판화 속 여인 이미지지만 얼굴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이 존재를 추정해야 한다. 10년 전 사라진 하세가와가 아닌가 하고.

 

유리 가가린이 빛나는 지구가 아닌 어둠에 휩싸인 지구를 말했다고 하면서 어둠을 강조할 때 각각의 체험담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체험담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장면과 상황은 정확하게 말해 범죄행위다. 이런 일을 10년 만에 만난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에게 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기묘한 장면들은 이런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동시에 서늘하고 오싹한 느낌이 조용히 찾아온다. 작가가 조용히 깔아놓은 상황과 장면들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오하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어디가 현실의 공간인지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 공간은 누구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기존에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 변화가 생겼다. 물론 좋은 쪽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는 이력을 가진 소설이다. 기자였던 작가를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들어서게 만든 작품이고, 91년 제9회 산토리 미스터리대상 가작을 수상한 후 수차례 개고 작업을 거쳐 200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어판 출간 10주년을 맞이하여 전면 개정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가작을 수상한 후 어떤 개고 작업을 거쳤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작은 충분히 아쉬운 점수다. 이런 점만 놓고 본다면 가작을 받은 작품과 현재의 작품을 비교해보고 싶은 욕망도 살짝 생긴다. 더불어 그 당시 대상작품이 무엇인지도.

 

살인사건의 시효가 24시간 남은 상태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사건은 15년 여교사의 추락 자살사건으로 마무리된 건이다. 그냥 시효 만료로 끝날 사건이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시청의 수사팀이 현장에 투입된다. 그리고 그 당시 사건의 용의자들에 대한 정보가 전달된다. 3명의 용의자 중 기타가 먼저 연행된다. 학생 때는 불량학생이었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건실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15년 전 그는 그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던 인물들 중 한 명이다. 이유도 모른 채 불려온 그는 15년 전 그들이 계획했고, 그 계획의 실행 도중에 마주한 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타로, 다쓰미, 다치바나. 이렇게 3명은 카페 루팡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학창 시절을 멋지게 마무리할 계획 하나를 낸다. 그것을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치는 것이다. 교장실에 숨어들어가 금고를 열고 시험지를 베끼면 끝이다. 이 간단한 말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숨겨져 있다. 학교에 숨어들어가야 하는 문제, 교무실과 교장실 자물쇠 문제, 금고를 여는 문제 등. 여기에 밤마다 학교에 머물면서 순찰하는 선생까지 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젊은 열정과 시간은 이 계획을 세밀하게 다듬을 수 있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획을 짠 카페의 이름을 따 루팡 작전이라고 불렀다.

 

루팡 작전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공한다.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다 문제가 생긴 것은 마지막 날이다. 교장실 금고를 열었는데 미네 마이코 선생이 시체로 나온 것이다. 시체를 다시 금고 속에 넣고 그들은 달아난다. 그 이전에 창문으로 뛰어내린 인물이 있다. 누굴까? 이렇게 선생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이전까지 학창 시절 학생들의 멋진 일탈을 그린 청춘물이 미스터리로 변한다. 그리고 금고 속에 있던 시체는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바뀐다. 경찰 조사 결과 유서의 발견 등으로 자살로 판정난 것이다. 15년 동안 새로운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소설은 기타의 진술을 하나의 큰 줄기로 삼고, 가지들은 경찰들이 채운다. 기타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은 연행하고 심문하는 것도 이 경찰들이다.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는 인물은 경시청의 미조로기 계장이다. 연행할 사람과 심문자를 정하는 것도 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24시간,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시간이다. 열정적인 경찰과 기타의 고백은 이 부족한 시간을 채워준다. 그것은 기타의 진술이 투신자살로 끝나지 않고, 이 사건 이후 기타를 비롯한 친구들의 사건조사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런 사건의 전문가인 경찰이 더 쉽게 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 사건과 함께 미조로기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같이 나온다. 3억 엔 강탈 사건이다. 카페 루팡의 주인이 몽타주의 인물과 닮았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적이 있다. 기타 등은 그를 3억 씨라고 부르면서 그가 범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세 명이 늘 머물고 루팡 작전을 계획한 곳도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장소와 인물의 관계를 촘촘하게 엮어놓았다. 사소한 만남과 돌발적인 행동이나 대사도 그냥 무심코 둔 것은 아니다. 그냥 읽고 지나간 대사 하나, 지문 하나가 나중에 큰 단서가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연을 풀어놓으면서 오히려 현실성을 떨어트린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기타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은 이 소설이 미스터리란 느낌을 지워준다. 15년 전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이 청춘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다. 아마 경찰들의 심문이나 사건 수사를 지우고, 몇 가지 장면만 손본다면 아주 멋진 청춘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알려주는 방식만 바꾼다면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청춘의 열정과 충동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추악함에 짓눌린다.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들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반전의 연속, 사랑, 열정, 인간관계와 과거로부터의 해방 등은 또 다른 확실한 재미다. 한동안 잊고 있던 거장 요코야마 히데오의 귀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량만 놓고 보면 조금 긴 단편소설 정도다. 160쪽이라고 하지만 그림과 한쪽 면에 많지 않은 글을 생각하면 정말 단편소설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큰 불만은 없지만 이런 분량으로 나오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비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읽고 서평을 쓸 때는 좋다. 얇아서. 책을 모두 읽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간 삽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삽화들에 좀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지나간다.

 

작가는 이 소설을 ‘기억과 놓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그의 손자와 아들이 등장하여 잃어가는 기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노인의 기억은 거대한 광장 크기에서 점점 작아져 작은 텐트로 축소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텐트지만 그 중간에는 노인의 기억만큼 큰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의 변화는 언제나 손자인 노아와 아내가 함께 한다. 노아를 부를 때면 언제나 노아노아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두 배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개그 코너에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정말 느끼하고 밥맛인데 말이다.

 

기억의 공간을 조금씩 잃어가는 노인과 그와 함께 하는 가족의 모습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한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대화가 오고 가고, 현실의 아이는 할아버지와 동행한다. 먼저 죽은 아내를 기억 속에 불러내어 그들의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고, 기억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아들을 지나 손자에게 이어지고, 둘은 원주율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래도 그의 곁에는 아내와 손자가 있다. 실제로는 아들과 손자가 있는 것이지만.

 

두려움은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생긴다. 기억을 놓는다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하지만 기억은 내가 원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퇴행은 그래서 무섭고 힘들고 어렵다. 손자를 잊는 것에 대한 손자의 답변은 정말 멋지다. 다시 친해질 기회가 생긴다고, 자신은 꽤 괜찮은 아이라고. 기발하면서도 아주 따뜻한 대답이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부모의 바람을 벗어난 자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자신의 바람과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우다보면 얼마나 이런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가.

 

길지 않은 글이지만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자신의 바람과 사랑과 삶을 간결하지만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아들의 기타를 지나가듯이 물을 때는 순간 뭉클했다.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았기에 생긴 감정이다. 아마도 그의 삶에서 오랫동안 걸려있던 응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들이 아빠가 되어 다시 그 아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에게 하는 말은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같이 걷고, 같이 있어주는 것 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억지로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기억과 이별을 아름답게 묶어 그려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