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해원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픈 열대>란 제목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레비 스트로스다. 너무나도 유명한 인문학 서적이다 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인문학 서적이 아니다.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정한 액션 스릴러다. 사실 처음에는 이 소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신인의 첫 작품이고, 한국도 아닌 콜롬비아를 무대로 한 북한군 특수요원이라니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라고 미리 짐작했다. 출판사의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기대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펼친 책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먼저 읽은 독자의 호평이 없었다면 이 두툼한 분량을 아주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한국 액션 스릴러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그것을 충족시켜주었다. 북한군 특수요원 권순이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의 암호명은 장산범이다. 암살자 세계에서 너무나도 유명하다. 영어로는 마운틴 타이거로 불린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중반부터다. 그녀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도입부에 알려지고 바로 실제 능력이 발휘된다. 아마추어와 완전히 다른 능력은 그녀가 최고의 경호원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멀고 먼 콜롬비아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와 더불어.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다. 세계 최고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조직 이름이 메데인 카르텔이다. 한때 정부마저도 뒤흔들던 강력한 조직이다. 예전에 이 조직을 둘러싼 수많은 영화나 소설이 나왔다. 대부분 그들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권순이가 이 조직을 위해 일하게 하면서 나의 이성을 잠자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했다. 현실적으로 최고의 악당들인데 이들을 살짝 응원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데는 그들을 없애기 위한 조직이 너무나도 잔혹했기 때문이다. 카르텔과 비교해서 전혀 뒤질 것이 없다. 리타의 존재도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아이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악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늑대라고 불리는 조직이 메데인 카르텔을 없애려고 한다는 기본 설정에 권순이가 그 주변에 놓인다. 분량은 당연히 권순이가 많지만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이다. 보고타 도심에서 총이 쏟아지고, 포탄이 날아다닌다. 카르텔을 없애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그 음모 속에서 순이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수요원이 개인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한다고 해도 정규군 속에 갇히면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행운과 우연이 겹치면서 몇 번의 위기를 넘어가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순이의 능력이다. 너무나도 무섭고 강렬하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와 살이 터지고 내장이 흩날리는 묘사는 섬뜩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카르텔을 뒤에 놓으면 순이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온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한국 안기부 직원 덕진, 카르텔을 공격한 무리에게 성폭행까지 당한 열세 살 소녀 리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온 이전의 동료, 그녀가 겨우 살아나온 침몰한 배 속의 소녀들. 이런 인연들이 모여 권순이의 삶을 뒤흔든다. 침몰한 배에서 겨우 살아난 후 구출된 뒤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겪었던 일들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들 중 마지막 방점을 찍은 것은 역시 침몰하는 배속에서 구하지 못한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세월호 사건 당시 학생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액션영화도 많이 떠올랐지만 가장 먼저 든 것은 무협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용병으로 자신을 내려놓았지만 최고의 암살 요원이었던 그녀가 수많은 적들이 죽이는 장면은 무협 속 주인공과 다름없다. 최고의 저격수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긴장감은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길지 않는 시간 동안 수차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결코 그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그녀를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뭐 현대의 무협이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 캐릭터를 빌려온 것도 많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늑대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은 조금 허술하다. 적들의 작전이 치밀했다고 해도 그 파악이 너무 늦다. 그 속에 몇 개의 반전을 집어넣은 것도 과한 설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늑대의 조직력과 정보력으로 밀어붙여도 충분했을 텐데.

 

가볍게 읽기에는 그 속에 담긴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 많다. 가독성이 워낙 좋아 이 참혹함에 마냥 빠져 있을 수 없다. 순이의 트라우마가 그 순간에 탁 터진 것은 변증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순간의 설명은 조금 늦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마약을 둘러싼 콜롬비아의 전쟁은 평화로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룸살롱 같은 뜬금없는 장면은 아쉽다. 마지막에 카르텔이 무너지는 상황이 얼마나 충실한 고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허황되어 보인다. 곳곳에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을 충분히 가릴 재미와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