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나 판타지 소설은 휴고, 네뷸러, 로커스 수상작(혹은 수상후보작)이라는 명함을 달지 않고는 국내에서 번역되기 힘들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한 때의 대중적 성공을 기반으로 아무리 허접한 작품을 내놔도 잘나가는 작가가 득세하는 이상한 시장에서, 저자의 명성만으로 작품을 선택하기엔 신뢰가 떨어진다. 내용이 너무 복잡해서 수상작이라는 권위를 빌려 이 작품을 소개한다면 앞서 말한, 휴고 네뷸러, 로커스 수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다. SF계의 최고 문학상으로 꼽히는 이 세개의 상을 그 해에 모두 석권했으니, 그 해에 장편을 낸 다른 작품들은 지못미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작가의 명성과 심사자들의 타입이 상이한 여러 작품상을 동시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굿리즈나 아마존 평에 별점 테러가 많다.  별점 테러에 대한 반박 댓글도 엄청 많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재미가 쥐뿔도 없고 말도 안되는 설정이다 라는 게 별점 테러리스트들의  이유이고, 반박 댓글러가 하는 말은 그건 멍청해서 이해를 못하는 너님의 뇌용량을 탓해야지 왜 책을 탓하냐, 니가 휴고 수상작을 이렇게 폄하할 권리가 있는거냐 라는 거다. 나는 양쪽 입장 다 이해가 갔다.  


책의 호불호는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과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초딩의 지식을 가지고 애초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자신의 입장에서 별1도 아깝다. 그렇다고 내가 초딩보다 더 나은 과학적 지식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아는 것만 연결시켜도 충분히 새롭고 멋졌다는 인상이다. 우주 과학 박사이면서 미래학자로서 이미 많은 현상들의 예측한 바 있는 지식으로 무장한 데이비드 브린이 소설 속에 끼워넣은 먼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이해할 과학적 기반이 상식으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이 책은 정말로 무용지물이 된다.

황당하게도, 맨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독자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돌고래 우주인(?)이다. 스트리커호라는 거대한 우주선이 물로 가득찬 어떤 행성 키스럽에 불시착해 있는데, 이들에게 닥친 어려움이 단지 망가진 우주선 뿐이라면 다행인 상황이다. 돌고래 150명, 인간 일곱 명, 침팬지 한 명이 스트리커호의 탑승 인원이다. 지구생명체를 위협하는 외계인들이 이  행성 위쪽에서 서로 이 지구인들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고, 우주선의 안쪽에서는 유전자 변형 돌고래 우주인들과 몇몇의 인간, 그리고 침팬치들이 위기를 헤처나가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선장은 돌고래고 돌고래 선장은 돌고래 선원들과 돌고래 연구원들을 총지휘한다.

그럼 몇 안되는 인간과 한 마리 아니 한 명의 인격을 갖춘 침팬지는 무엇일까? 침팬지는 이 우주선에서 가장 저명한 연구원이고 인간들은 돌고래와 침팬지를 감독하는 한 레벨 위의 생명체로 돌고래의 주인종족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명체의 기능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이 미래 사회에 지능과 인격을 지닌 사피엔스들은 다른 동물 종들을 보호족으로 선택하여 유전자조작으로 인격과 지능 자아 영혼 기타 등등의 인간과 유사한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개조하고 그들을 자신의 보호종으로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대가로 그들에게 봉사받는다  이 봉사의 기간은 은하계 표준으로는 몇만년간이다. 그동안 인격체가 된 이 새로운 종들은 자신의 종들을 번영시키고 자신의 마더종족들을 섬긴다. 인간이 자기들의 후손 종족으로 선택한 종이 침팬지와 돌고래인데 침팬지는 이미 인간과 융화해서 같은 환경에서 서로 구분 없이 잘 살고 있고 돌고래는 아직도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 있는 종족이다.

하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애초에 돌고래가 우주에 가게 되었을까. 그들의 유전자 조작 기술과 인공 신체 기술은 매우 발달해서 이런 것 쯤 일도 아니지만 읽는 내내 이건 좀 무리수로 읽히는 부분이다, 아무리 유전자조작을 한들 물리적 생김새가 다른데 어떻게 물속에서 사는 돌고래가 우주선을 조작해서 우주로 나가고, 게다가 망가진 선체를 수리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한쪽 구석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돌고래를 개량해서 인간이 가진 지능을 심어주기까지 했는데 그깟 팔과 손 쯤 기계로 얼마든지 작동 가능하게 설정했고 (이해는 잘 가지 않지만) 인간과 상호 의사 교환이 가능한 시스템을 정교하게 갖추어 놓았다. 가령 우주선은 거대한 물탱크로 되어 있지만 인간과 돌고래 모두가 모여 의사 소통하는 언어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물론 인간 역시 물 속에서 공기에서만큼 자유롭게 활동하고 얘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이들에게 닥친 문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스트리트호가 키스럽 행성에 꼻아박혀 망가졌다는 거다. 다행히도 키스럽 행성은 주로 물행성이면서  금속이 도처에 자라고 있어서 자연에서 금속을 채집하고 제련까지(물속에서?) 하는 듯하고 어떻게든 우주선을 수선해서 귀환을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두번째는 스트리크호가 키스럽 행성이 불시착하기 전 은하에서 엄청난 규모의 고대 우주 선단을 발견했는데 여기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은하계의 모든 호전적인 종족들이 이들이 선단에서 발견한 정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이 지구 생명체들을 차지하기 위해 불꽃을 튀기며 대기권 밖에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주선 내의 반란이다. 이 일은 둘째 문제와도 관계가 있는데 선장이 내린 결정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부선장과 일부 돌고래들이 고대 선단에서 가져온 정보를 외계인들에게 주어버리고 대신 안전 귀환을 약속받겠다는 생각으로 선장을 해치고 우주선의 지휘권을 강탈하는 계획이다.

그렇다면 선장의 계획은 무엇이기에 이런 어려운 시기에 반란까지 생기는 걸까. 우주선을 수리하는 와중에 탐험대는 외계동족들 중 지구인에 우호적인 종족의 거대한 우주선이 침몰해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이 우주선에 스트리커호를 숨기고 위장을 해서 빠져나가자는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 인간 선원의 자발적 희생적 유인작전이 관여하고 우주에서 여러 종족들이 전투를 벌이는 급박한 사정을 틈틈이 보여준다. 

발달된 문명을 가진 은하인들에게 지구인은 미개인이나 다름없다.  지능을 가진 다른 모든 은하 종족인들은 문명을 이룰 그 지능을 스스로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시조 종족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외계인들의 사피엔스적 지능은 자연발생적으로 진화에 의해 생겨나는 게 아니라 문명 종족이 생물체를 선택해  유전자 조작을 통해 그들을 지능화 문명화 시켜 노예처럼 이용하고 계약이 끝난 하위 종족은 덕립하여 문명을 이루고 자신도 다른 생물체를 문명화시키는 방식으로 우주 종족들의 문명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최초의 문명을 이룬, 인간으로 축소하면 아담과 이브 같은 시조 종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오래 전에 멸종했지만 종교적으로 전 은하계 종족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런데 시조 종족과는 상관없이 나홀로 진화해서 보호종족까지 거느리고 있는 ‘미개한’ 지구인들이 고대 유령 선단에서 가져한 유물이 이 시조 종족과 관련이 있기에 모든 은하인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이되어 있던 것이다.

(이후 주요 반전 스포)
책을 읽는 재미는 고유한 모양과 특성을 가진 다채로운 생물체들이 주인 종족의 필요에 의해 유전적으로 개량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돌이켜보게 한 점, 이들이 불시착한 키스럽이라는 행성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적 생명체와 이들을 다루는 인간적 시점과 외계의 시점 돌고래와 인간의 교류에서 착안한 지적 진화에서 생기는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성적 끌림 등 아주 많은 자잘한 요소들이다. 물 속에서 발견한 이상한 식물들과 금속섬이라고 불리우는 지표의 이상한 특성이 알고 보니 광물 채집에 이용하기 위해 무리하게 유전자 조작되어 고통받는 한 지적 생명체의 후손이더라는 것과 같은 깜짝 놀랄만한 반전 역시 곳곳에 숨어 있다.

#스타타이드라이징 #데이비드브린


˝키스럽의 생물체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칼슘이 아니라 다른 금속들이었다. 생물체가 모든 금속을 빨아들이는 생체 필터 역할을 해 바닷물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방에 금속과 금속 산화물이 온갖 다채로운 색으로 빛났다. 등뼈가 번쩍이는 물고기며 은빛 씨주머니가 달린 해초 따위의 모든 생물체가 다른 행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엽상체의 녹색과는 너무도 다른 색을 띠었다.

토시오는 계기판을 통해 순수한 주석 덩어리와 크롬 성분의 물고기 알 한 무더기, 여러 가지 순도의 청동으로 된 산호군을 발견했지만.˝

“5백년에 불과한 유전자 개량 작업으로 인류가 1백만 년 동안 발전시켜 온 모든 것을 돌고래에게 줄 수는 없었다. 신돌고래들은 여전히 소리와 몸짓으로 감정 대부분을 표현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돌고래를 보며 늘 뭔가 재미있어 싱글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제 돌고래들은 다른 표정도 지을 수 있었다. 근심 어린 표정까지도. 토시오가 볼 때, 지금 히카히의 표정은 돌고래가 근심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정 같았다.”

옛 지구에는 몇 세기 전 〈무서운 아이들〉 소동이 일어났던 곳을 구경하기 위해 은하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인류가 주인 종족의 보호 없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공공연하게 내기를 걸곤 했다.

물론 모든 종족에게는 주인 종족이 있었다. 우주를 여행하는 다른 종족의 도움 없이 우주여행 기술을 습득한 종족은 전무했다. 침팬지와 돌고래도 인간으로부터 우주여행 기술을 배웠다. 신비에 싸인 최초의 종족인 시조들 이래, 말을 하고 우주선을 조종하는 종족이라면 모두 다른 선배 종족의 도움으로 그 정도의 문명에 도달했다. 또한 그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존속해 온 종족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시조들이 꽃피운 문명은 모두 도서관에 담겨 계속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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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는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인데, 즉 그동안 벌려놓은 수많은 갈등 해결과 결말이 개연성을 가지고 주인공들에 의해 직접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난데없이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해결한다는 냉소적 의미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가장 먼저 쓰였는데, 여전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서도 차용되고 있다. 십여년 전 쯤 진중권이 심형래의 디워를 까다 까다 언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대 액션물들 대다수는 위기를 모면하는 효과로 부분적으로라도 데우스엑스 마키나를 활용하지 않고는 존재 기반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싶다.) 무슨 영화 평에 수천년 전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언급하나 싶어 원본을 찾아보니 이렇다.

“사건의 해결은 플롯(이야기) 그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메데이아나, 또는 일리아스에서 (희랍군의) 출항에 관련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장치에 의존해서는 안됨이 명백하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4b[1]). “


또한, 희극시인 안티파네스 역시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작품을 총체적으로 구성할 능력이 없는 시인들의 궁여지책에 불과하다.[2]고 했다.

브레히트도 냉소적인 면에 있어서는 진중권 삘이 나는 당대의 예술가가 아니였을 듯 싶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비교불가능한 큰 차이가 있다. 진중권은 말(비평)만 하고 예술을 하지는 않지만, 브레히트는 직접 창작활동 자체로서 시대와 예술을 조롱하고 비판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직접 사용하므로서 그것의 사용 의도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지목되어 그의 모든 저술의 출판이 금지당했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망명해야 했던 다수의 좌파 작가 중 하나였을 뿐인데 말이다.

원래는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를 개작한 것인데, 몇 번의 개작을 통해 탄생한 「서푼짜리 오페라」는 인물 간의 관계와 극의 진행의 세부 사항은 거지 오페라와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한 오페라가 아닌 〈음악과 노래가 있는 연극〉이라는 형식으로 창작되었다. 즉, 이야기의 전체 스토리는 존 게이, 극 중 음악의 가사는 자작시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비용(Francois Villon)의 시, 그리고 음악은 클래식 오페라 작곡가가 아닌 실용 음악가 쿠르트 바일의 음악 이런 것들의 조합으로 탄생했다.

소설도 아니고, 일반 연극 대본도 아니고, 더욱이 음악이 있는 연극의 대본인데, 이 책의 독자는 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본을 읽는다. 연출과 연극 배우와 무대와 조명과 그리고 음악 이 모든 것의 효과가 내는 극적인 분위기를 전적으로 상상력에만 의지해야 하므로, 실제 극이 올랐을 때 느끼는 감동을 비슷하게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시에 붙인 음악이 주는 효과는 텍스트에만 익숙한 독자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다.

다행히도, 독일에서 상영된 듯 보이는 제법 큰 규모의 연극 녹화 동영상과 1930년대 만들어진 영화 동영상을 찾아서, 그토록 궁금했던 가사의 음들과 노래 실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음악과 연결되니 작품을 이해하고 느끼는 폭이 훨씬 풍부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오페라와도 형식이 조금 다르고, 연극과도 조금 다른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연극에서도 브레히트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관습과 전통을 깨고 낯선 것들을 시도한다. 작가 해설에 의하면 그 중 하나가 노래의 역할이다. 기존 연극에서 노래는 인물의 개성을 강화하고, 심리적 정황을 묘사하고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한다면,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새로운 극의 형태를 서사극이라고 했던 모양)의 기능은 극적 사건을 중단하고 정황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후렴구와 민중시 같은 사실적이고도 풍자적 묘사의 가사는 짧은 극중 대사들이 담을 수 없는 당대의 상황과 모순, 갈등을 설명한다.

대사집 만으로도 전체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고, 딱딱하다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이 불식될 수 있을 만큼 풍자적인 내용이다. ‘런던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거지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 피첨 부부와 그의 딸 폴리, 런던에서 가장 잔인한 갱스터의 두목 맥, 런던에서 가장 엄격하고 무섭다는 경시청장 브라운, 그의 딸 루시, 피첨 부부에게 고용된 거지들, 맥에게 고용된 갱스터들, 창녀들이 등장하는 액션 코미디,  로맨스를 두루 갖춘 극이다. 맥과 폴리 루시의 삼각관계, 피첨과 거지 사이의 약탈관계, 범죄자 맥과 경시청장 브라운의 결탁 관계에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약탈과 폭력과 순애보까지 깨알같이 표현하는 이 새로운 (실용)음악 연극이 당대에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노래에 의하면 강도, 강간, 살인을 서슴지 않은 맥은 창녀들은 물론이고 지체높은 ‘아가씨’로 묘사되는 폴리와 루시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본인이 감옥에 갇혀도 그를 두고 경쟁할만큼 경쟁력있는 남성일 뿐만 아니라, 브라운 경장 역시 그의 투옥을 마음아파 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돕는다. 하지만 창녀들의 배신으로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더는 사형 집행을 미룰 수 없게 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악인인지 알기에 뭐 주인공이긴 하지만 공개 처형되는 것도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브레히트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연극은 현실과 다르기에 연극이지 않은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 때 등장하는 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난데 없이 개입한 신은 다름아닌 여왕이다. 여왕의 메신저는 맥의 처형을 중단시키고 뜻하지 않은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다.  얼마나 기교적이고 날카로운 조롱인가.

현실에서 사회적인 불공정함이나 부당함을 해결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니 현실과 같은 극을 만들다 보면, 불공정함과 부당함에 무게를 실어 스토리를 진행시켜 봤자, 결국 우리가 사는 삶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를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현실에 없다. 마술적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가능한 그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극과 소설 속일 때 뿐이란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브레히트는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현실의 삶에서 말을 타고 오는 구원자는 없다. 가난한 이가 구원되는 일도 없다.

지 않겠어!


[1]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8.  [2]에서 재인용

[2] 필록테테스 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준석, 서양고전학연구 26, 2006.12, 41-55 (15 pages)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것을 나누는 것, 왜 아니겠어?    
모두들 선하면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으리.    
누군들 하느님의 광명 속에 살고 싶지 않겠어?    
선한 인간이 되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별에서    
식량은 빠듯하고 인간은 야비하지.    
누군들 평화 속에 조화롭게 살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렇질 않아.    

폴리와 피첨 부인  유감이지만 그 말이 맞아요.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요.    
피첨  유감스럽게도 내 말이 맞지.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    
누군들 지상에서 파라다이스를 꿈꾸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걸 허락하나?    
아니,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아.    
너를 몹시 걱정하던 네 형제.    
고기가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성실하게 사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부인    
네 사랑이 충분하지 않으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감사하며 사는 것.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아이    
노년에 빵이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인간적인 것.
누가 그러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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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장면이 머리속에 맴돈다. 영화로도 나왔다고 해서 찾아서 대충 봤는데, 오래된 영화인데도 소설에서 풍기는 황폐한 분위기를 나름 잘 표현했고, 연기도 괜찮았다.

아랫동네 윗동네라는 말이 계속 나와서 업타운 다운타운 같은 걸 그렇게 번역한 건가 했다. 핵전쟁 같은 걸로 황폐화된 도시에 남자들이 사람이랑 텔레파시 형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개랑 어울려 살고 있고, 일부는 지하에 세계를 만들어 살고 있다. 소년은 글도 못읽고 역사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인데 반대로 개는 소년에게 글도 가르쳐줄 만큼  똑똑하고 지혜롭다.  소년은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활동을 개에게 의지하고, 소년은 개를 먹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윗동네에서는 전쟁때 여자들을 다 죽여버려서 여자가 거의 없고, 여자와 섹스하고 싶은 욕구는 간혹 눈에 띄는 여성을 강간하여 채운다.

종말론적 세계 속의 허구 속에서 여성은 성적 욕망의 분출구에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한 존재다. ‘정치적으로 옳지 않‘게 다루기에 읽으면서 굉장히 읽을 때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포스트아포칼립스라고 하더라도, 생존자들은 나름대로 먹고살 궁리를 하기에 폐허 위에 남겨진 것들을 사고 팔며 상업적 이익을 받는 무리들이 있는데 주인공 소년은 혼자서 개랑 같이 지낸다. 어느 교활한 패거리들이 남아있는 포르노 필름들을 접수하고 이어 붙여 영화 상영을 하는데, 생존자들은 개랑 같이 와서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하는게 일상이다. 어휴. 어두 컴컴한 곳에서 개와 남자들이 한꺼번에 그러고 있는 장면이란걸 상상하다니 그렇게 필름 속의 여성을 상대로 단체 자위를 하던 어느날 그 영화관에서 소년의 개가 ‘여자 냄새‘를 맡는다. 그들(개와 소년)은 아랫동네에서 올라온 호기심 많은 여자가 남장을 하고 성욕을 달래러 영화관에 온것으로 추측한다.

남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여자가 한 명 나타나면 모두가 다같이 달려들기 때문에, 여자의 안위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쟁탈전 때문에 나머지들을 경계하며 개의 코를 이용하여 여자를 추적하는데, 여자가 예전에 학교였던 건물의 체육관의 일부 남아있는 건물에서 남장옷을 벗고 원래 옷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소년은 이제껏 강간할 때 경험했던 종류의 느낌과는 다른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여성이라면 성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소년의 눈에 이 여성의 여성스러움이 이제껏 살아남기 위해 가지고 있던 폭력성과 방어성을 허무는 순간이다. 이 때 느끼는 낯선 감정에서 독자는 둘 사이의 관계가 러브 스토리로 발전하길 기대하지만, 그리고 조금은 그렇게 흘러가지만, 문명이 파괴된 현장에 사랑이 남아있을 리 있을까. 없을까. 여자 냄새를 자기 개만 맡으라는 법은 없고, 성욕에 환장한 짐승같은 무리들에게 포위되어 두 사람과 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에 처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강간하려던 소녀와 강간이 아닌 섹스를 하는데, 알고 보니 소녀는 다른 목적이 있다.

개와의 교감, 소녀와의 사랑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소년, 지역사회의 역할과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소녀. 자신의 주인의 잘못된(?) 선택을 주시하며 항상 살아남을 수 있도록 리드하며 충성을 바치는 개.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둘 사이를 가르는 게 있다. 소녀는 아랫동네에서 남자 사냥을 하러 올라온 미끼였고, 소녀를 따라 아랫동네로 내려간 그는 이제껏 자신이 저질렀던 성적 쾌락을 남자 자손을 생산하기 의무로서 봉사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자 아기를 낳지 못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섹스 맘껏 하고 여자랑 같이 자고 하면 안되나? 노예로 싫컷 섹스하느니, 섹스없는 자유를 선택할까.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마지막 장면은 명시적으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너무나도 끔찍하고 섬뜩한 결론을 암시한다. 폭력적이고 섬뜩한 장면을 연출하는 소년이 소년이기에 짠하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제프리는 다섯살>은 늙지 않고 계속 다섯살 상태로 있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고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는 짧고 인상적인 소설이긴 했는데, 규칙적인 세상을 사는 인간에 대한 비약이 너무 심해 재미가 덜했는데, 영어로 가장 많이 읽히는 컨텐츠 10개 중 하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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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레드버리.  SF 대가 중 한명인데, 유난히 단편을 많이 썼다. 이미 현대문학에서 나온 두꺼운 작품집 하나 있어서 아작에서 두 개의 너무나도 예쁜 커버의 작품집이 나왔을 때, 많이 겹칠거라 짐작하고 뭔가 아쉬워했는데(주로 이북을 삼에도 불구하고 커버가 중요하다) 목차 살펴보니 겹치는 거 하나도 없더라. 단편 작품집을 사고 나면 주로 첫편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표제작을 읽는 편이다. SF와 환상을 서정적인 정서로 묘사하는 작가로 르귄을 따라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브레드버리는 르귄과는 조금 다른 서정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두 개의 소설 모두 딱 표지 이미지만큼 맑고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 여름을 이하루에> 이 작품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nightfall을 연상시킨다. (nightfall은 내가 읽은 최고의 단편으로 꼽을 수 있겠다) nightfall에는 태양이 두 개인가 세개인 행성에서 낮만 존재하고 밤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은 어둠이 무엇인지 모르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식 같은 현상으로 밤이 다가오고, 종말론적 사람들을 세상의 끝이라 여기는 둥 태초 처음 겪는 밤을 앞두고 저마다의 이론과 믿음과 과학과 온갖 생각들로 소란스러운 상황을 그렸는데. 두둥 밤이 오는 대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본다. 처음으로 별을 보는 그들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깊었다.


<온 여름을 이 하루에>는 지구 가까이 있는 금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nightfall에서는 태양이 없는 걸 모르는 행성에 사는 사람들 얘기고, 반대로 금성에서는 태양을 모르는 사람들 애기다.  곧 바로 닥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nightfall은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데 비해, 이 소설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면서도 조금 더 종말론적이고 어두운 배경에 스산하지만 태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아이의 마음에서 서정적인 슬픔이 느껴진다. 


금성에서는 짙은 구름에 쌓여 태양이 보이지 않고, 7년동안 비가 내려 컴컴한 지하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쨍 하고 해가 비친 적이 바로 그 7년 전이고 소설의 주인공인 학교의 아이들은 2살때 해가 났었기 때문에 태양이 어떤 것인지 경험이 없다. 그런데 지구에서 5살때 쯤 전학온 아이가 마지막으로 자기가 본 태양을 기억하고, 태양이 뜰 날만은 기다리고 있는데, 지구에서 왔다는 특수성 때문에 애들한테 따당하다가 막상 태양이 떠오르는 그 날, 해가 뜬다는 일로 아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사건이 터지는 내용이다. 


단편 중에서도 유독 짧은 단편들이 있는데, 이 단편이 그렇다. 매우 짧고, 아쉬운데, 태양을 그리워하는 소녀와, 컴컴한 어둠 속 인공태양광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태양에 대해 각자 상상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멜랑콜리의 묘약>에서는 몇 개 더 읽었는데, 표제작 보다는 그 다음 작품의 감동이 훨씬 심해서, 다시 다루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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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12-19 22:40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8-12-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REBBP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CREBBP 2018-12-19 22:41   좋아요 1 | URL
오 좋은 소식이군요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립님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 수상집>은 신간이 오히려 싸게 나오는 정책 때문에 매년 사서 보게 된다. 올해의 작품집에서는 어찌 하다보니 맨 뒤에 실린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박상영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다. 중간까지는 그냥 무난무난 큰 스토리도 없고 자기 얘기 길게 하는 그렇고 그런 단편인데, 소재가 퀴어라 나름 덕을 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퀴어가 아니었다면 별로 크게 감동적이거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퀴어라는 소재의 자극성 때문에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했다 중간 정도 읽을 때까지는. 


소설은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작품은 퀴어라는 소재를 쓰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퀴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한다.  그런 역설은 홍상수 영화를 까면서 동시에 홍상수 영화와 퀴어인 점만 다르지 홍상수 영화와 다를 바 없는 이 책의 주인공이 만든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찌질한 남자들의 찌질한 일상과 실패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시 홍상수 영화의 이미지들을 소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시 역설적이다. 


퀴어가 특별한 이유는 게이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소수자의 사랑은 소수이기 때문에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차지하고라도, 우연히 감이 와서 그도 나와 같은 부류임을 알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데  아 이 사람이 혹시나 양성애자라면 어쩌나, 양성애자에서 더더욱 게이혐오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어쩌나 이런 두려움은 사랑을 시작하기조차 어렵고 꺼려지게 만든다. 게이는 게이를 알아본다는데, 게이들이 가진 특별한 행동이나 습관 이런 것이 서로를 알아보게 할 수도, 어떤 신호가 그들 사이를 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전에 한쪽에만 귀거리를 하고 다니면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는 말들도 있었는데 이렇게 양성애자들이 게이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거 자체가 소수자의 인권 때문이 아니며,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흥미와 같은 소비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애초에 이 소설에 대해 의심했던 것처럼, 그 의심을 실제로 실행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마디로 퀴어가 잘 나가니까, 모 아이돌과의 염문설을 일부러 뿌려서 자신이 마치 게이인 것처럼 소문을 내고, 그걸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주인공 화자가 보기에 신파에 혹은 소수자 인권 플래그를 건 구토유발 억지감동에서 한술 더 떠, 절망하고 상처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나약한 스테레오타입의 허구의 게이들을 양산한다는 데 있다. 자기야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진짜 게이인데, 자기가 만든 영화는 이게 무슨 홍상수 영화냐, 진짜 게이의 삶을 모르는 일반인이 만든 거라 감동이 없고, 치열함이 없고 깊이가 없댄다. 그러면서 가짜로 진짜 게이가 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눈물을 쥐어 짜기에 그게 잘 만든 영화란다. 술 퍼마시기고 패악질을 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뒤질 위인이 못되는 주인공과 그의 애인은 왕샤는 니들이 게이를 아냐고 따지는데, 그 가짜 진짜 게이 영화 감독은 자기가 몇달간 게이클럽과 게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취재했다고 한다. 


둘은 돈을 모아 각자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자이툰 부대에서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하지만, 각자의 꿈을 향해 각자의 실패를 완성한 후에 재회한다. 우연한 재회지만, 그들은 자신의 젊음이 막바지에 달한 이 나이에 무엇을 이루었느냐 실패를 이루었음을 선언한다. 술마시고 개판치며 여자 후배를 집에 안보내려고 난리를 치다가 노래방 가서 여자도 안부르고 노래부른다고 차별당했다고 판단하여, 무선 마이크 두 개를 훔쳐 달아났다가, 들키는 등 온갖 찌질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그러니까 이 스토리의 메인 흐름이고, 이들 각자의 과거와 과거의 상처, 과거의 작은 영광들, 그리고 과거의 사랑, 그것들이 짬짬이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두사람의 가장 젊은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서사 자체는 많지만, 결국은 우리는 이모양 이꼴인거다 하는 모양새가 딱 홍상수 영화다.


실패란 무엇일까. 누군가 성공했다면, 그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결국 그토록 수많은 개인의 실패도 어떤 한 사람 혹은 한 사건의 성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실패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면 우리의 삶은 억지 영화처럼 신파와 비약과 오해와 절망으로만 가득찬 무엇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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