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맛있을까 - 옥스퍼드 심리학자 찰스 스펜스의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음식의 과학
찰스 스펜스 지음, 윤신영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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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트로피직스Gastrophysics 는 미식학과 물리학 Gastronomy와 physics를 합성한 단어로 음식의 맛을 뇌과학과 심리학 등등의 과학과 융합하여 연구하는 새로운 분야로 책의 원제이디도 하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맛을 느끼는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배고플 때 먹는 거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조건 말고도 맛 이외의 감각과 함께 결합하면서 더욱 풍성한 맛과 맛에 대한 기억을 창출해낼 수 있다.


저자의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어떤 그릇에 먹느냐 혹은 어떤 소리가 나느냐와 같은 것들을 연구한다. 요리 방식이나 재료와 같은 맛을 느끼게 하는 조건이 아닌 맛을 느끼는데 영향을 끼치는 외부적인 요소들 말이다. 먹는 일는 모든 인간에게 매일 하루에도 여러번씩 일어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 욕망은 어떠한 형태로든 해소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먹는 행동은 대개 만시간의 전문가 법칙에 필요한 수행 시간을 만족시켰을 것이며 따라서 누구든 먹는 것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 기호가 기준이어서 자신만을 충족시킨다. 자기 자신을 위한 전문가인 셈이다. 내가 맛있게 느꼈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이 느끼리라는 법이 없기에 이런 학문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저자가 한국에 왔을 때 미슐랭 별을 받은 냉면집에 함께 갔다가 긴장했다단 이야기를 듣고 일단 서양과 동양의 외식문화의 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저자들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영국의 팻덕 레스토랑과 스페인의 무가리츠와 엘 셀러 드 칸 로카, 스웨덴 교외의 페비켄 등의 레스토랑은 우리 같은 일반인은 꿈도 꿔보지 못할 만큼 대단히 비싼 고급 레스토랑이고 평양 냉면집은 미슐랜 스타를 받았다고는 하나 메뉴 자체가 누구든 들어가볼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 예상되는 식당 아닌가. 사실 식당과 레스토랑은 다르고 밥 한끼 제공하기 위한 일반음식점에서 맛과 분위기보다 더 많은 걸 기대한다는 게 무리다.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음식과 함께 제공하는 분위기, 소리, 식기의 질감과 색, 서비스, 음악, 냄새 등등이 얼마나 맛에 영향을 느끼느냐를 연구한 내용들이다. 이와 곁들여 그런 결과들을 실제로 구현한 실제 레스토랑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밥을 떠먹여준다는 레스토랑에서부터 연극 공연인지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갈 수 없을 만큼 식문화가 하나의 체험 문화로 바뀌고 있는 추세도 엿볼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맛을 풍성하게 느끼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감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각적 효과는 일반적인 레스토랑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흔히 쓰는 발법이다. 예쁜 그릇에 맛있어 보이게 플레이팅을 하고 깔끔한 식탁보릉 씌우고 무겁고 좋은 수저 세트를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같은 음식이라도 무거운 식기와 커트러리 세트에 담으면 맛있어 보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분식집이나 저렴한 식당에서 쓰는 플라스틱 식기가 주방의 서빙과 설겆이 등 노동과 가격까지 줄여주는 데에는 고객에게 같은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덜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대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맛에 들이는 정성 만큼 식기류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메뉴에 붙인 이름도 맛의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심해에서 잡힌 파타고니아 이빨고기였을 때 팔리지 않던 생선의 이름을 칠레산 농어로 바꾸자 인기 메뉴가 되었다. 파스타 샐러드를 파스타를 곁들인 샐러드로 이름만 바꿔도 건강요리로 변신한다.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제품에 가짜 농장의 이름과 가짜 생산자의 이름만 붙어도 소비자는 그 음식의 가치을 더 높게 평가한다.이름과 라벨에서 브랜드와 가격까지 음식을 먹기 전에 접하는 각종 정보는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해 맛을 다르게 느끼게 한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우리는 모두 다른 미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특정 분자를 후각적으로 느끼는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으로 인해, 어떤 냄새에는 민감하고 어떤 냄새는 후맹인 사람들의 여러 조합으로 구성된 인간 사회는 그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 만큼이나 같은 음식을 다르게 느낀다. 고수에 대한 호불호에서 특히 큰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어떤 고수에서 감귤처럼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하는 사람과 절대로 먹고는 싶지 않은 비누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극단적 차이가 유전적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맛에 대해서는 특히 쓴 맛에 민감한 집단이 있는데 진화의 역사에서 독성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쓴 맛에 대한 민감도를 증가시켰을 거라는 견해다. 

또한 미뢰는 아주 낮은 온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찬 청량음료를 실온에 두었다가 마시면 몸서리치게 달게 느껴진다고. 식품 회사들은 단맛을 내기 위해 바닐라 향을 첨가한다. 이제 아이스 커피에 그토록 많은 양의 설탕을 넣는 이유를 알겠다

그닥 집중이 요구되는 책은 아니었으나 막상 리뷰를 쓰려니 뭐라도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어서 아쉽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거나 할 계획이라면 필수로 읽기를 권하다. 일반인에게는 매일 먹는 먹거리의 맛을 먹거리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요소로 느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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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을 읽은 이유는, 책 속의 어떤 이상화된 가상의 인물과의 만남이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영원히 삶을 지배할 것 같은 학업이라는 억압과 굴레 속을 지나가고 있을 때, 문득 문득 불빛처럼 책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창조된 인간의 내면과 상상적 교감이 기성 세대가 기대하는 ‘꿈’과 ‘미래’에 어떤 부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른이 보기에는 달갑지 않은 책읽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는 점 때문에, 공부하지 않으면서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외우지 않아 받은 불이익은 곧바로 성적표에 나타났지만, 읽는 대신 외웠다면 한없이 더 궁핍했을 가장 활발할 나이의 정신적 활동을 책이라는 매체가 풍요롭게 해준 건 분명했다.


최근에 책을 읽는 이유는 좀 다르다. 아마도 예전에 받았던 그런 느낌, 책 한 권을 끝내고 나서도 인물들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살아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말을 걸고 하던 무엇인가가 가슴을 가득 메우고 풍부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너무나 생생해서 책을 덮고도 한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인물이 만든 책.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브 백작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한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뺀다면 내용은 크게 설명할 게 없다. 2천만명이라고 했던가 2백만명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수의 목숨이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과 숙청으로 학살 되고 있을 때 구시대 인물(귀족)의 자택감금은, 그 이후 백작의 수십년간 감금 기간 백작의 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비하면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처벌이었다. 그의 대저택은 이미 인민의 이름으로 접수했을 테고, 4년째 스위트룸에 묶고 있던 백작의 거처는 종탑의 작은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다행인건가. 그가 묵던 메트로폴 호텔은 모스크바 최고의 호화 호텔로, 최고급 식당과 대중적 식당, 바, 세탁소 상점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입점해 있어 남의 도움이 없어도 생활에 그닥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호텔 문을 한 발작만 나가도 그는 바로 총살된다.


소설의 제목에 신사라는 말이 쓰였는데, 신사와 영국신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신사라는 이미지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신사다운 면모는 신사의 정의를 새롭게 원위치시킨다. (자신도 동의했던) 시대의 요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러시아와 시대의 배반을 종신구금형이라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만으로도 소설의 도입은 독자를 로스토프 백작의 정신세계로 깊이 이입시킨다.


니나와의 만남과 자연스런 이별, 우연히 돕게 된 여배우와의 하룻밤 정사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와 사랑, 최고급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게 되고, 식당 삼총사들과 맺는 작고 충직한 관계들, 재봉사를 비롯한 호텔 직원들과의 자잘한 관계들. 이런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일생 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 생긴다. 호텔 감금이 시작된 초창기에 열세살 소녀였던 니나가 청년당원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남편이 체포되어 행방을 찾기 위해, 6살 소피아를 잠시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조용하고 착한 아이지만, 아이는 아이. 가뜩이나 좁은 방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차지하는 공간은 예상을 넘어서고, 그동안 만들었던 고요한 생활의 질서는 깨어지고,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백작은 쩔쩔맨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온다던 니나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감금 초기 그를 늘 찾아던 둘도 없는 친구 미시카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몰래 그를 만나러 오는데, 그가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알고 보니 자네가 가장 운이 좋았다는 것.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지루할 새 없이 자잘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시카의 죽음과 함께 밝혀지는 비밀이 있고, 백작에게 사실상 딸이 되어 훌륭히 자란 소피아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 오랜 시간 감금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듯했던 백작이 드디어, 딸의 장래를 위해 위험하고도 대담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장면 등의 클라이맥스와 안도감으로 맺는 결말이 찾아온다.


몇몇 장면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은 현실에서 만난 것처럼 생생하고 또 몇몇 장면은 잊지 못할만큼 감동적이다. 니나가 마스터 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던 장면, 백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낡은 바지를 세탁소에 가져가 재봉사에게 바느질을 배우면서 둘이 주고받는 정겨운 대화들, 자살하려고 종탑 지붕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직원과의 해프닝, 두 마리 개를 컨트롤 하지 못해 쩔쩔매는 여배우와를 돕던 첫 만남, 그렇지만 백작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은 니나가 아이를 데려와 맡기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러시아의 설원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준 서구 영화, <닥터지바고>적 비애를 연상시킨다.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공산당원으로 성장한 니나는, 당에 충성하고 열성적인 모습으로 비처지는데, 결과는 결국 남편의 숙청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니시카의 말이 옳았다. 백작이 살아남은 것은 스탈린의 광기가 아닉 광범위한 처형과 학살을 낳기 전 단계에서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금이 처형이 아닌 감금으로 끝난 데에는 더욱 아이러니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이것은 스포라 여기까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 들어 읽은 소설 몇 개가 마음 속을 걸어다니고 있는데, 언제까지 머물지는 모르겠다. 지난 달쯤 알라딘에서 기획으로 열 몇 개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이라는 제목으로 소설 여러권을 골라서 세트에 묶어 전자책 3개월 대여로 판매했는데, 이미 구매한 책들과 많이 겹쳤지만, 벼르다 사지도 읽지도 못한 책들과, 내겐 생소한 책들이 섞여 있어서 대여했다. 지금 여러권 읽었는데 한 마디로 주옥같다.


무엇보다도, 기획세트 대여의 가장 큰 동기가 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은 마케팅도 많이 해서 잘 알려져있긴 하지만 끝까지 이토록 생소하고 낯선 먼 이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을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느낌으로는 100명도 넘을만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정독할만한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내 경우 종이책으로 읽으라고 했다면 끝까지 못읽었을테지만, 없는 난독증도 일으킬 듯한 생소한 라틴어 이름들과 지명들을 읽어주는나 대신 이북의 읽어주기 기능 덕분에 끝까지 듣는 데는 성공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끝까지 읽으면 험난한 길을 끝내고 목표지점에 다달을 때같은 성취감을 주는 책이다. 쌍동이같이 똑같은 두 사람이 추구한 문학과 삶은 앞에 언급한 모스크바의 신사와 비교할 때 한 마디로 시궁창같지만, 무기력한 시대의 문학에 저항하고 끝없이 비루하고 구차한 삶을 헤치며 살아간 두 사람 역시 내 머리속에서 한동안 살아있을 듯하다.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반해버려, 그의 다른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고 <2666>도 읽고 있는데, 사실 그의 소설이 캐릭터가 살아나올듯 생생하기 보다는 뭔가를 캐는 듯한 탐정적 문법을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어주지 않은 인물들의 마음 그 꽉닫힌 미지의 마음을 통하는 온갈래의 길에서 서성이게 된다. 이런 책들은 일단 번역에 감사함























개구지고 말썽꾸러기 소년이지만 수줍고 다정하게 다가와 머리속을 배회하는 착한 소년이 있다. 

 작가 심윤경을 겨우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았지만, 난독증에 걸린 소년의 일대기에 1979년과 1980년에 일어났던 역사적 비극과 개인적 비극을 통해 한 가족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름답고 짠했다. 콩가루 같은 한 가정의 갈등과 문제는 시대가 안고 있던 시대의 표상과 다름없었고, 갈등과 아귀다툼만이 지배하던 가정에 희망을 비추고 서로를 이어주던 것(스포 때문에 ..)의 상실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의 종식과 더불어 잠시나마 살랑살랑 불어왔던 민주화에 대한 봄바람이 군부 구테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수천의 양민이 학살되었던 시대의 비극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희망이 사라진 후,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의 끝에서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난독증 소년이 보여준 해법을 갈등의 시대에 어떻게 해석해야 각자의 몫이겠지만, 소년의 맑은 마음이 그리고 그가 떠나보내야 했던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오래도록 여운처럼 맴도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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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2015년 김보영의 소설을 번역 출간한 적 있는 SF 잡지 클락스월드에 2019년은 많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9개의 단편을 번역하고 그 첫번째 소설을 출간했던 4월호 이슈 155에서 편집자 닐 클락스는 길거리 혹은 세상 반대편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중국의 SF가 세상에 빛을 보고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기를 맞이했던 건 우리나라에서는 <종이 동물원>과 <제국의 위엄>이 출간된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가 처음으로 자신이 번역한 중국 단편들을 보내 그것을 2011년에 싣기 시작하면서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켄리우를 몇년 동안 꾸준하게 출간한 중국 SF 소설이 몇 년 이상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판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있는 잉여적 상황에서, 단지 영어권에 전달되지 못해서 묻히는 훌륭한 작품이 많다는 것을 잊기 쉽다고, 그래서 변방의 언어로 적힌 소설들에 관심을 갖고 출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클락스월드 매가진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2019년 총 9개의 작품을 게제하기로 하였고, 이미 배명훈, 김보영, 듀나, 복거일, 정소연 등의 작품이 한회 혹은 두회에 걸쳐 게제되어 있다. 가장 최근 호가 8월호인데 지난 달에 이어 2회째로 듀나의 <The Second Nanny>가 게재되어 있다. 




가끔 가장 최신의 따끈따끈한 과학소설이 땡길 때는 클락스월드에 들어가보곤 하는데 재밌게 읽은 봇 소설이 하나 있어서 소개한다. 웰스의 살인봇 일기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읽게 된 건데 살인봇 일기와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2017년도에 나왔고 아마도 휴고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거나 혹은 단편상까지 받았거나 그런 작품이다. 과월호까지 모두 온라인에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작품은 읽어주기까지 한다.  길지 않고 온라인이라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은 우리의 구세주 파파고님이나 구글번역가님께 부탁해서 읽으면 된다. 

SF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불리는 범주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넓고 깜깜한 우주에서 우주선에 탄 채로 떠다니면서 할 게 쌈질 밖에 할 게 더 있나.  게다가 중세시대의 이야기를 우주로 옮겨운 것일 뿐인 듯한 비슷비슷한 설정의 클리쉐가 많은 분야가 또 이 분야이기도 하다. 로봇이 주인공이 되면 좀 달라진다. 예를 들어 murder bot diaries의 경우 먼 미래, 먼 공간 속 행성이 배경이지만, 장르적 크리쉐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최소한으로 줄였고, 고집불통 착한 로봇의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1인칭 시점으로 끌어가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작년인가 재작년 휴고상 목록에서 제목에 이끌려서 찾아 읽었다. 


우주선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기에, 자잘한 액션 묘사에 쓰인 어휘가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궁금증은 풀릴 정도였다. 예전의 로봇 주연 소설들이 대개 반란을 일으켜 인간과 전쟁을 주로 한다면 요즘 소설 속 로봇들의 주제는 의식을 가진 봇의 다양한 캐릭터의 특성이 잔재미를 준다라고나 할까. 어느날 잠에서 깨어난 다용도 로봇은 자기가 비활성화된 동안 엄청난 시간이 흘렀으며, 그 엄청난 시간 속에서 봇들의 세계 역시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봇들은 전문화되었고, 봇넷이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 봇넷 커뮤니들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던 거였다. 수세대 만에 깨어난 봇9은 보다 근사하고 멋진 일을 수행하고 싶었지만, 우주선으로부터 해충을 퇴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주선 역시 봇의 일종으로 휘하에 모든 종류의 봇들을 거느리고 조정하고 있다. 


이 전문화된 봇들은 크기가 매우 작고, 종류도 청소봇, 함체봇, 식크봇 등 다양한데, 알고 보면 우주선을 움직이고 관리하는 자동화된 부품의 업그레이드된 버전 정도로 보인다. 봇들의 명칭은 숫자로 된 시리얼로 되어 있다보니, 4030이니 123456이니 하는 봇들이 볼 때 봇9이란 까마득한 전설의 봇이다.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막 깨어나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을 때,  자신은 그 개념조차도 알 길이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그렇게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숲속의 공주와 봇9의 다른 점은 그는 인간이고 그것은 기계라는 점이다. 이 구형 멀티봇이 처음에 봇넷을 알게 되었을 때 봇넷의 존재 필요성을 의심한다. 태생 자체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봇들은 애초에 시스템으로부터 받는 탑다운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존재 목적이 아니었던가. 자기들끼리의 상호 대화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존재 목적에 어긋나지 않은가. 하지만 봇들이 쉬는 시간에 봇넷의 액세스를 허용한 것은 그들의 최고 책임자인 우주선(역시 봇임) 자체다. 정보의 공유는 봇들의 효율성과 능률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는 걸 알아챌 만큼 우주선은 똑똑하다.




봇9은 Incidental이라 불리는 해충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잠들어 있던 수세대간의 문화적 기술적 갭을 업그레이드 하지만, 그동안 인간들은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 지구를 향해 가고 있는 외계인들의 우주선과 사투를 벌인다. 지구와 충돌을 막기 위해 우주선체 자체와 충돌하여 장렬히 희생하자는 인간적 인간들과, 똑똑한 머리와 엄청난 개체수로 인간과, 지구, 그리고 자신들까지 모두를 구출하고자 하는 봇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하고 귀여운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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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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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전쯤 루키우스 아폴레이우스가 쓴 산문 방식의 소설로 세계 최초의 산문 방식의 장편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였다고 하고 공간적 배경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연안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로마로 간다. 장편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 여러 다른 소설들이 비중이 별로 없는 작중 인물들을 통해 전달되는 천일야화와 비슷한 형식이다. 주 스토리의 드라마틱함과 주인공의 고생담의 비중이 전체 이야기들 중 가장 크므로 장편 소설의 범주라규 해도 큰 무리는 없다. 돈키호테를 비롯한 여러 근대 소설들이 이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고나 차용했다고 한다.

호기심 강한 루키우스가 마법 덕후여서 덕질하다가 당나귀로 변해 온갖 구박에 맞아가며 이리 저리 팔려다니면서 겪는 잔혹사에 가까운 모험담이다. 하인들을 거느리고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고생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당나귀로 변한 루키우스는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하는 일상적 노동이 몹시도 서툴고 괴로와 게으르고 못되먹은 당나귀라는 오명을 쓰며 팔려가는 곳마다 죽을 고비를 맞는다.

로마 시대이긴 하나 그리스 신화적인 세계관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주이야기를 포함한 모든 이야기들의 주제는 파괴적이고 신화적 방탕함에 기초하고 있다. 애욕이 엄치는 여인들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정부를 집안으로 들이고 정숙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황금에 눈이 멀어 쉽게 자신을 차지하려는 방탕한 이웃을 집에 들인다. 양아들을 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리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이 주인공 당나귀가 유명해지자 당나귀에 정욕을 느껴 큰 값을 지불하고 육욕의 하룻밤을 보내는 귀족 부인도 있다.

아름답고 부자인 이 부인과 당나귀가 보내는 정욕의 하룻밤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주인은 이 신기한 행위를 만인에게 공개하면 큰 돈을 벌게 될거라 생각하고 사자밥이 되기로 되어 있는 사형수와 원형극장의 무대에 펼쳐진 침대에서 정사장면을 연출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꽉 들어찬 인파 한 가운데서 사람과 당나귀가 정사한 장면이라.. 이건 현대식 포르노에서 조차 꿈도 못꿀 금기 아닌가. 어찌어찌 위기는 모면하지만 하나의 위기가 끝나면 늘 다른 더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큰 줄기 서사는 변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가 그를 구해주기 전까지는.

주인공이 당나귀로 변한 건 여행인지 모험인지로 타지에 와서 어느 집에 묶고 있는데 이 집 하녀와 엮여 매일 정사를 벌이며 쑥덕거리다가 집 주인 마님이 부엉이로 변하는 마법을 보고 자신도 한 번 변해보게 그 마법 연고를 빌려달라고 부탁부탁해서 자초한 일이다. 그 집 하녀가 실수로 부엉이가 아닌 당나귀로 변하는 엉뚱한 연고를 가져왔던 것이다. 다시 사람으로 변하려면 장미꽃을 따먹어야 하는데 밤은 늦고 어디 장미꽃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과 그 집 당나귀가 있는 마굿간에서 잠을 청하면서 고난의 길은 시작된다. 이 말과 당나귀는 그들 눈에 주인이 아닌 신참으로 보이는 당나귀가 자기 구유에서 먹을 걸 먹자 마구 못되게 굴었던 것. 마침 그 집에 든 도둑들이 이 당나귀와 말들에게 이 집에서 훔친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싣고 가게 되었으니 무거워 죽을 지경이지만 맞아가며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결말 부분에 가서 완전히 톤이 달라지는데 고생고생하다가 도망쳐서는 신들을 부르며 온 마음을 바쳐 기도를 드리니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나 그를 인간으로 바꾸는 신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미꽃 화관을 먹고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이 일을 전후로 해학과 위트로 넘쳐나던 글의 스타일이 갑자기 신을 찬양하는 신전 모드로 바뀌는데 저자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면서 알게 된 신들에 대한 지식이 망라된 듯하다. 그 모든 신들은 각기 다른 지방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숭배되지만 결국은 하나로 모아지는 듯하며 이집트 신화의 요소와 기독교적 세계관이 배합된 느낌이다. 천일야화에서 느낄 수 있는 동양적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도 1800년 전에 쓰인 소설 형식이라는 점은 당대 사회를 알 수 있는 신뢰있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성서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압축되어 있어 그토록 다이나믹한 그토리임에도 문학적 접근은 어려운데, 이 글은 애초부터 이야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보니 자연스레 일상적 모습이 엿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영향인지 남녀노소 할것 없이 자유분방을 떠나 결혼 후에도 방탕을 즐긴 듯이 보이며 여성의 성적 욕망을 남성들보다 더 크게 부각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노예와 하인이라는 말이 섞여서 쓰였는데 어떤 구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노예들은 적어도 스파르타쿠스(드라마)나 독립전쟁 전 미국남부의 노예들처럼 비참하거나 핍박받지 않은 듯하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이 천일야화의 동양적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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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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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인물에 열 다섯번의 탄생과 열다섯번의 죽음이 있다.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고 죽어도 죽어도 계속해서 같은 운명을 가지고 되풀이해서 반복되는 삶과 죽음이 세계와 우주의 진리라도 해도, 산 육체에 담고 있는 기억이 죽은 상태에서 소실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다음 생에 가지고 태어나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축복이라면 기억이 축복이고 저주라면 변치 않고 반복되는 운명일 것이다.


해리 오거스트의 운명은 강간으로 영주의 하녀에게서 잉태되어 화장실에서 태어나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죽고 그 어머니를 잉태시킨 부모집의 충실한 하인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첫번째 삶에서는 그의 생부를 알지 못하지만 두반째 세번째 삶을 거치면서 자신을 냉대하고 외면하는 주인집 식구들이 자신의 생모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양부모에게 자신을 양육을 맡긴 생부와 그 식구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타임 리프와 타임 점프의 다른점이 전자는 주인공의 고유 타임라인 안에서 이동하는 것이고 후자는 다중우주와 관계되는 개념이라고 쿠오라에 누가 질문하고 답변한 걸 봤는데, 이런 장르적 구분의 표준이 확립되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해리 오거스트가 겪고 있는 세계는 이런 개념들과 익숙한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데가 있다. 타임루프.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것. 시간에 갇힌 영원한 생.


한 생에서의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 뒤로 가는 시간이란 리셋할때 뿐이므로 죽어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요기조기 마음에 안드는 순간에 가서 마음에 안드는 행동만 수선하는 게 가능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 젖을 빨고 똥오줌을 싸고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을 거쳐 전 생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억겹의 시간동안 똑같은 환경 똑같은 타임라인 내에서 새로 시작하면서 쌓이는 지식은 변함없이 흐르는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누적힌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같은 종족 중에서도 드문 기억술사다. 머든 걸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이 종적들은 생이 반복되면서 돈을 벌기 쉽고 전쟁의 포화와 집단 학살의 현장을 피해 안전하게 아늑하게 살기 쉽다. 지난 생의 기억 속에서 어느 경주마에게 걸 지 알려주니까. 세계를 예측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그 끔찍함에세 세계를 구하려 노력해 보아도 똑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양민이 학살되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개인의 영달이 목표이며 흘러가는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지난 생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성인 이후의 풍요로운 선택에 따르는 대가는 학대와 상처로 얼룩진 불우한 유아 시절의 낭비되는 몇 년의 시간이다. 기억은 생애 초기 3~4년에 걸쳐 서서히 회복되며 미숙한 육체 속에 갇힌 수백년이라는 나이와 경험은 지루함으로 점철된다.


길어야 한 세기가 못되는 시간 속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여러 생애를 다루지만 그는 세기와 세기 사이에 대화하는 법을 터득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기막히게 신선한 대목이다. 어린 시절 구출처럼 이것은 협력으로만 가능하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크로노스 클럽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리는 세번째 생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기의 비밀을 말했다가 정신병원에 갇히는 혹독한 댓가를 치르다가 한 남자에게 구출되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한술 더 떠 자신을 통해 세계를 바꾸려고 그를 고문한다. 먼저 본 세상을 빠짐없이 털어 놓으라는 고문과 강압.  탈출과 실패를 거듭하던 해리는 기지를 발휘해 신문 광고를 통해 크로노스 클럽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구출을 요청한다.


구출이란 죽음이다. 지루하게 지고만 있는 컴퓨터 체스 게임을 재시작하듯 에잇 이번 생은 엉망이야 다시! 이렇게 재시작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상상할 수록 매력적이지만 리셋이후 유아라는 육체적 감옥에 갇히는 생애 초기 몇년은 가장 위험한 시기다. 또한 탄생위치와 시간이 알려지는 건, 태아 살인을 통해 영원히 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크로노스 클럽의 동료들은 불우한 어린 환경에서 서로를 구출한다. 그들의 나이가 다르기에 아이가 노출된 취약한 양육 환경에서 장학 재단 같는 걸 만들어 사회적 성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교육 등을 지원한다. 유아 시절 구출 작전 말고도 크로노스 클럽에서 하는 흥미로운 일이 바로 세대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들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속삭이는 방법은 꼬마가 죽을 때가 된 늙은이에게 가서 말해주는 방법이다. 


현재 해리가 태어난 해는 1900년대 초로 노환으로 죽는 보통의 생애에는 1980년대까지 더 길 때는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까지 보고 죽는다. 죽기 직전 그는 꼬마 아이의 방문을 받는다. 1980년대에 꼬마인 아이는 전생에서 평생을 살아 늙어 죽기 직전까지 21세기를 경험했고 따라서 21세기의 기억을 지녔으므로 늙은 해리와 두 세대간의 지식 교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꼬마가 늙어 죽기 직전에 21세기말에 태어난 더 후세의 꼬마가 22세기에서 전해줄 말을 한다면 두 세대간의 통신이 가능한 거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해리에게 전해지는 말이 있다. 30세기에서 전하는 목소리.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다.당연한 거지만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


반대로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다. 자신의 종족들이 눈치챌 수 있는 암호로 돌이나 무덤이나 그 무억이 되었건 수세기 혹은 수십세기의 후대가 찾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새겨 놓는다.


수많은 삶 속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외면하는 생부와 생조모들을 겪지만 각각의 삶들은 모두 다르다. 생을 거듭할 수록 지식과 경험은 더욱 넓어가고 거듭되는 삶의 비밀 우주에 대한 진실을 알 길이 없는데 그걸 풀어보겠다고 그러니까 평행우주 사이를 이동하는 퀀텀 미러의 개발을 착수하는 빈센트를 만나면서 그의 나머지 생들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지독히도 사랑했고 지독하게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SF적 장르적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깊고 멀고 슬프다.


질문은 여전히 많고 대답은 독자의 몫이다. 지난 생에서도 그 지난 생에서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 그는 매 생애마다 나타나 그 살인자를 죽이지만 그 때마다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살인자는 절규하며 스러진다. 나쁜 짓울 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 죽다니. 열세대 후손들이 속삭임을 통해 세계가 끔찍해지고 있다는 말에 그들이 세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라고 확인하고 빈센트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데 과연 그 이유가 빈센트가 수행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지나치게 빠른 발전일까 하는 것들. 한국말 읽는 것처럼 번역도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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