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다섯 번째 계절 : 부서진 대지 3부작 1 부서진 대지 3부작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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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명심하라. 한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모든 일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사람은 죽는다. 옛 질서는 무너진다.   

 새 사회가 탄생한다. “세상이 끝났다”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행성은 변함없이 존재하기에.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왕좌의 게임을 보면, 특히 대격돌이 벌어지기 전 시즌 전반에 걸쳐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ing)'는 말을 경고와 각성으로 자주 듣는다. 겨울을 춥고 혹독하다. 안그래도, 이미 배경은 얼음 방벽은 눈덮힌 겨울이 자주 나타나기에 매번 존 스노우와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앞으로 올 겨울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겨울일지 얼마나 혹독하고 긴 겨울일지 몸서리쳐진다. 한 때 지구가 빙하기에 들어 많은 종들이 멸종하는 종류의 긴 겨울이라면, 곰과 개구리들이 겨울잠을 식물들이 땅 속에 숨어활동하지 않는 종류의 매년 겪는 소프트한 겨울이 아니라, 살아남기 어려운 종말을 예견하게 된다. 이런 긴 겨울은 훨씬 이전 르 귄의 소설에서도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우주의 어떤 행성에서 별을 도는 주기가 매우 길어 생기는 긴 겨울인데, 십여년 혹은 수십년씩 지속되는 이 겨울을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는 철저하게 가족 계획을 통제한다. 


휴고상 홈페이지에 가면, 정말로 상의 종류가 많다. 과학 및 판타지 분야의 컨텐츠를, 단편, 중단편, 중편, 장편, 시리즈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코믹북, 비디오, 기타 여러가지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그 중 단연코 가장 맨 앞을 장식하는 분야는 당연하게도 장편소설이다. 그런데 휴고어워드 홈페이지를 가보면 2015년 류츠신의 삼체를 끝으로, 3년간 한 작가가 계속해서 장편 부문에 우승을 차지했고, 그 작품은 <부서진 대지>라는 하나의 시리즈 안에 속해 있다.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계속해서 늘려 속편을 내는데, 그게 계속 최고상을 받고, 고로 다른 장편 작가에게는 우승의 영광이 피해갔다. 대체 어떤 작품일까. 3편 연속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는데 매번 눈높은 휴고상 심사자들의 기대를 저버지리 않는 작품, 3회 연속 가장 영예의 장편소설에 이름을 올린 작품. 출판사에서 그토록 마케팅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목빠지게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도 안나와서, 나오기 전에 영문판을 구해 조금씩 읽다 흐지부지했는데, 번역본이 나오는 바람에 마저 읽을 수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는 책은 아니었지만, 한국판조차도 읽기가 아주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지진과 화산 활동 등으로 지구가 마구 요동치는 세계관 자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하여서 그런 감정이입들을 꿀꺽 꿀꺽 삼키면서 읽어나가는 일 자체가 진중한 독서를 요구한다.


SF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들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들의 능력은 마블의 캐릭터들과 어느 정도 맞닿아있다. 약간의 마법적 요소와 거기에 붙인 과학적 수식. 이 존재들이 하는 역할이 단지 마법적 환상만을 보여주고 악과 대항하여 멋지게 싸워 이긴다면 헐리우드 대형 블록버스터들이 애정하는 공식의 스토리들이 되겠지만, 이 존재들의 의미를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게 한다면 의미있는 과학 소설로서 빛날 것이다. 여기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 지구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마법적 존재지만, 그 능력 때문에, 인간에게 배척받는다. 


오로진들은 인간일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다. 단지 대지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타고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마녀사냥을 하듯 오로진을 발견하면 죽인다. 폭력의 두께는 두려움의 강도에서 나온다. 지구가 흔들리고 마그마를 내뿜고, 활발한 지각활동을 하면, 그것을 잘 다스려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오로진들이지만, 신체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을 때 그러한 종말에 가까운 지각 활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도 바로 오로진들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한 아이가 죽었다. 2인칭으로 지칭하는 너(에쑨)은 사랑하는 아기를 잃었다. 자신이 오로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10년째 결혼중인 너는 두 아이가 있었고,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남편이 아기를 죽였다. 바닥에는 아기의 시체가 있고, 남은 딸아이와 남편의 행방은 모른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남편을 찾아 죽이기 위해, 너는 마을을 떠나 헤매기 시작한다.


그리고, 너 에쑨 외에 여러 시점의 다른 오로진들의 삶이 교차 묘사된다. 어린 소녀 다마야는 학교에서 놀다가 우연히 자신의 능력이 발각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부모는 그녀를 마구간에 숨겨두고 '가디언'이 될 샤파에게 잡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펄크람이라는 곳으로, 오로진들을 모아 두고 교육시키는 공동체다. 그들의 능력을 조절하여, 인류에게 쓸모있는 일을 하도록 교육하는 곳이다. 이제 다마야는 그곳의 다른 소년 소녀들과 함께 학교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조정하여 지구에 일어나는 각종 자연재해들, 쓰나미, 지진, 화산폭발 등을 조정하는 법을 배운다. 


이미 펄크람 조직의 일원으로서, 손가락에 계급을 표시하는 4개의 반지를 낀 시에나이트는 알리아라는 항구 도시의 골치 거리는 산호초를 조산력의 힘으로 청소하라는 임무를 맡는데, 아직 계급이 낮아, 10반지를 낀 상급자와의 동행을 배정받는다. 10반지는 오로진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고난도 기술을 가진 최고 상급자를 지칭한다. 그런데, 펄크람의 오로진들은 지구를 구하는 임무 외에도 또다른 임무가 있는데 바로, 펄크람의 인구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어진 상급자와 임신을 하여 지역 사회에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한다. 


임신이라는 게 여성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 당연히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 10반지 상급자는 바로 그녀의 임무를 돕기 위해 동행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펄크람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씨를 제공해야 할 대상이다. 초호화판 꼭대기 층에서 큰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열반지 상급자는 그녀가 나타나자 무례하게 굴고 투덜거리며 푸대접을 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섹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내키지도 않는 섹스를 해야 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운다. 그러나 그의 솔직한 무례함이 그녀를 더욱 전투적으로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자식 만들기 의무를 마치고 이 상급자에게 잘보여 더 많은 공훈을 쌓아야 더 멋진 조산술(지구를 다스리는 능력)을 행하며 멋진 삶을 살 수 있음을 안다.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만족해야 마땅할 상급자 알라배스터는 퉁명스럽고 불만이 가득한 채로, 마지못해 시에나이트의 섹스에 겨우 응하고, 둘은 산호초 청소를 위해 먼 길을 말을 타고 알리아로 떠난다. 


애초 죽은 아들의 시체와 마주하고 길을 떠난 너, 그 아들을 죽인 남편과 그 남편이 다시 죽일 딸의 행방을 찾아 떠난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예닐곱살의 어린 아이와 동행을 하게 된 너는 그 아이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고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서로 돌봐주며 동행하고, 우여곡절 끝에, 거지꼴의 한 무향민과도 동행하게 된다. 알리베스터와 티격태격 길을 떠난 시에나이트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여행 도중 상상도 할 수 없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이 잉태하여 태어나게 될 아이들, 이미 알라베스터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들이 겪어 왔고 겪게 될 비극의 전말 같은 것이다. 이 모든 일들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음모가 있음을 서서히 깨닫는 그들...


한편 어린 다마야는 이미 샤파가 자신을 수호자로 칭하며 그녀를 펄크람에 데려올 때부터 서서히 자신과 같은 종족이 저주받은 족속이며, 펄크람에서만이 그들을 통제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곳임을 자각한다. 압박감 속에서 많은 것을 공부하고 익히는 그들은 마법과도 같은 조산술을 배우고 익히지만 학교 분위기는 해리포터가 우정을 쌓고 모험을 하는 그 멋진 마법학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소한 일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해도 구해줄 만한 정의에 찬 교관은 없다. 사소한 일로 또래 아이들에게 왕따와 괴롭힘을 당해 쫓겨날 만한 위기에 처하지만, 혼자만의 계략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도 복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혼자가 되어, 유일한 취미로 펄크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탐험한다. 그러다가, 유메네스의 지도층의 아이인 비노프가 남몰래 펄크람에 숨어들어 온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찾는 곳을 돕다가 들키게 된다. 


이렇게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쓰인 이야기는 위기의 절정에 다달을 때 쯤 서서히 하나로 뭉쳐지며 각 시점의 인물들 및 주변인물들의 정체 관계 과거 등등이 드러나게 되는데.. 거의 모든 반전들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다시 쿵 하는 새로운 반전이 독자를 맞고 있다. 혹자는 지구를 괴롭힌 인간들에게 울리는 경종의 메시지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지구 대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하고 그 지구와 어떤 에너지의 교감을 통해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종족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어떤 메시지적인 의도로도 깎아내릴 수 없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 이 소설이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며, 남편과 딸을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결국 발견한 것은 엉뚱한 과거였으니, 앞으로 무한하게 많은 이야기의 꼭지들이 펼쳐져 있다. 이 책이 1월에 나왔는데, 2편과 3편도 슬슬 번역되어 나올 때 쯤 된 거 아닌가 싶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편을 찾아 헤매는 너. 하지만 같은 이유로 너를 찾아 다녔던 사람이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될 때, 끝나지 않는 돌고 돌아 되풀이되는 세상의 이치를 느낄 수 있다. 겨울은 언제 올건가, 오기나 할 건가 하고 오매 불망 겨울을 기다리며 10년을 보아왔던 왕좌의 게임 팬들처럼,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섯번째 계절, 그 종말은 언제 어떤 식으로 불어닥칠 것인지도 읽는 내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야,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인지, 앞으로 올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 너의 이야기에 더욱 배가 고파진다. 


알라베스터와 씨에나이트와의 관계 역시 굉장히 기이하다. 함께 자식을 낳고, 함께 키우는 관계이니 비록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부사이지만, 둘은 동시에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성은 충실히 동시에 둘을 만족시킨다. 이런 쓰리섬적인 관계가 영화나 일반 소설을 통해 묘사될 때 매우 부적절해 보이게 마련이지만, 정말이지 저자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세 명 모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지구는 지금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항상 분노하여 일순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통채로 없앤다. 그렇다면 아버지 대지, 지구는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 여기 약간의 힌트가 있는 대목이 있다. 노래를 통해 전해지는 전승을 통해 시에나이트가 추측하는 장면이다. 


전설에 따르면 ... 아버지 대지는 생명을 창조하지는 않았으나(생명은 우연히 발생했다.) 그에 만족했고, 매료되었으며, 그 기이하고 방종한 아름다운 것이 자신 위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살폈다.    그러다 인간들이 아버지 대지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대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물을 오염시키고 지표면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을 살해했다. 대지의 억세고 단단한 피부를 뚫어 구멍을 내고 맨틀의 피를 흘리고 뼛속에 담긴 달콤한 골수를 쪽쪽 빨았다. 그리고 인간의 힘과 오만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오로진이 아버지 대지조차 용서할 수 없는 잔악한 짓을 저질렀다. 대지의 유일한 자식을 죽인 것이다. ... 그의 사납고 맹렬한 분노가 다섯 번째 계절, 즉 붕괴의 계절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현되어 거의 모든 생명들이 죽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죽었는 줄 알았던 알라베스터가 살아 나타나 엄청난 일을 저지른 장본인임을 자처하며 이런 말을 한다. 


“말해 봐라. 달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어떻게 2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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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섯 번째 계절 : 부서진 대지 3부작 1 부서진 대지 3부작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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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만큼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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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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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쓰던 글이 길어져서 이어서 계속 쓴다. 이전 글 가기 클릭 https://blog.aladin.co.kr/705307136/10894358 


복습을 하자면, 연금술사가 들려주는 첫번째 이야기 속의 하산은 20년 후의 자신에게서 보물상자가 들어있는 곳을 알게 되어 큰 부자가 된다. 두번째 이야기의 아집은 20년 후 구두쇠 수전노가 되어 많은 재산을 궤짝에 감춰두고 궁핍하게 사는 미래의 그를 목격한다. 미래의 자신에게서 20년간 안쓰고 모은 돈을 훔쳐 현재로 가져온 아집은 그 돈으로 평소 흥모했던 여인에게 결혼도 하고 흥청망청 쓰지만 행복은 잠시 뿐이다. 아내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훔친 모든 재산을 바쳐 아내를 구하고, 다그치는 아내에게 모든 전말, 겨우 직공인 그의 모든 허황된 돈잔치들은 미래의 그에게서 훔친 돈이었다는 사실을 얘기한다. 이를 안 아내는 매우 화를 내어 둘은 20년후의 자신에게서 훔친 그 돈을 평생 모아 갚기로 작정하고, (정해진 대로) 자린고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는 다시 하산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20년 늙은 하산의 아내 라니아는 어느날 부터 자신의 집에 들락거리며 밥을 먹는 한 젊은이를 눈여겨 본다. 그녀는 한 눈에 남편과 밥을 먹는 바로 그 사내가 자신이 20년전 사랑한 젊은 하산이라는 사실을 알아본다. 자신들의 첫사랑을 스포할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은 하산에게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하산의 아내 라니아 역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오랫동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던 젊은 하산의 아름답고 충만한 모습을 엿듣고 훔쳐본다. 젊은 하산에 대한 욕망을 키워가던 라니아는 어느날 남편이 젊은 하산과 작별한 후 다마스쿠스로 출장을 떠나자, 그녀는 카이로로 가서 남편이 말한 시간의 문을 찾아가고, 젊은 날 사랑했던 하산을 찾는다.


그녀가 젊은 하산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하산을 본 라니아는 젋은 시절 함께 했던 사랑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늙은 하산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강한 애정과 욕망을 느낀다. 라니아는 평생 충직하고 충실한 아내였지만, 젊은 하산에 대한 욕망은 떨칠 수 없는 강렬한 것이다. 이것은 배신일까? 시간이 흘렀지만 같은 대상을 지금은 덜 사랑하고,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어 버린 옛 사랑을 더 사랑한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라니아는 하산을 유혹하기 위해 집을 구해 살림을 차리고, 그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를 유혹하기도 전에 사건이 발생한다. 하산은 한 보석상에게 다가가 하산이 결혼 당시 자신에게 선물한 목걸이들을 그것을 얼마에 팔 수 있는지 물어본다. 보석상은 그것이 매우 진귀한 보석상이라 큰 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다음 날 다시오라고 얘기한다. 자신에게 준 목걸이를 팔려고 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니아는 우연히 그들 옆에 선 두 남자가 하는 얘기를 엿듣는데, 이 남자들은 사실 하산이 나무 밑에서 파낸 금괴의 주인인 도적떼의 일원이었고, 하산이 팔려고 하는 목걸이를 알아보고, 하산이 이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였다. 도적들은 내일 하산이 목걸이를 보석상에게 팔면 그에게서 돈을 빼앗고 때려눕히자는 계획을 알게 되고, 이를 수습할 계획을 짜게 된다. 


연금술사도 지속적으로 말하고, 또 이슬람교도적인 결정론적 세계관이어서, 라니아는 자신이 그 목걸이를 계속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기지도 않고, 하산의 목숨도 온전하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상황을 목격한 것 역시 알라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하산과 그의 행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 


라니아는 다시 20년 후의 현재로 돌아와 목걸이를 가지고 시간의 문으로 간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향한 곳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방향이다. 그곳에는 지금보다도 더 늙은 20년 후의 라니아가 40년 전 남편에게서 받은 문제의 그 목걸이를 챙겨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하산을 돕기 위해 정교한 시나리오를 모의하고, 함께 시간의 문을 빠져나가 20년 전(그러니까 그 당십터는 40년 전)의 하산이 목걸이를 팔려고 하는 곳에 도착한다. 두 미래의 라니아에 의해 목걸이와 하산은 도둑떼로부터 무사히 구출되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라니아는 아직 결혼 전이며 이 목걸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아직 하산의 스토리에 등장하기도 전이다. 


똑같은 목걸이를 팔려하는 여러 여인의 등장으로 모든 게 오해였다고 잘못 알게 된 도적떼는 돌아가고, 어린 하산을 구한 성숙한(?) 라니아는 본격적으로 젊은 하산을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먹이고 포도주를 대접하여 침대로 꾀어들인다. 방을 모두 어둡게 하고서야 베일을 벗은 라니아는 드디어 젊고 아름다운 하산과의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녀가 생생히 기억하는 하산의 자신만만하고 능숙한 기교와는 달리, 하산의 행동이 어설프고 어색하다는 걸 알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여기서 기억의 오류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하산이 어린 신부에게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능숙하게 행동하게 한 배경에는 성숙한 부인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둘은 매일 그녀의 집에서 만나 아트오브 러브를 전수받는다. 결국, 20년후의 라니아는 20년전의 매력적인 하산을 만나러 가서, 매력적인 하산을 만들고 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베푸는 애정 행위가 다시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 올(온) 것임을 안다. 모든 사랑의 기술을 전수한 라니아는 이제 하산과 이별할 시간이 되자, 가구와 집을 정리하고, 둘이 다시는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떠난다. 20년 후의 현실로 돌아온 라니아는 이제 다마스쿠스에서 돌아올 남편을 흡족하게 기다리고 있지만, 젊은 하산과의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자신이 과거 20년 전에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 시간의 문의 반대쪽에서 2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현재 화자가 연금술사를 만난 곳은 바그다드이고, 앞서 말했듯이 이 상점은 이제 겨우 일주일 되었다. 그러니까 이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는 왼쪽 방향으로 들어가면 그 곳 20년 전에는 이 문이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도착 지점이 없고, 설령 간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없기에) 다시 현재로 되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카이로로 가기로 한다. 카이로에 원래 있던 시간의 문은 이제 그의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사막을 끼고 있는 이 공간 배경에서 탈것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사막 여기저기에 도둑들이 출몰하는 곳에서 카이로와 바그다드 까지의 거리는 멀고도 험하다. 카이로에 있는 시간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현재 시간으로 카이로까지 이동하고, 거기서 시간의 문을 통해 20년 전으로 간다. 그리고 그 과거에 다시 바그다드로 와서 일을 바로 잡은 후,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문을 가기 위해 카이로로 돌아가서 현재로 돌아온 다음 다시 바그다드로 오는 것이다. 왕복 세 번의 여행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그는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까. 이미 결정된 현재는 과거의 미래이며 과거에 가서 무슨 행동을 해도 바뀔 수가 없다. 그가 팀을 꾸려 카이로와 바그가드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고초를 겪고, 칼리프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해 많은 천일야화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모두 이 과거를 오가는 시간과 공간 여행에 있다. 


지나버린 사랑, 과거에 무심히 뱉어버린 말 한마디가 다시는 주어 담을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상흔을 남기며 인생에 회환만을 불러올 때, 우리는 과거에 가서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한다. 그는 온갖 고초 끝에 과거에 도달하지만 결국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닯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현재가 과거인데 이를 어떻게 바꾸나. 그러나 한 가지 그 위험한 여행을 감행한 대가를 돌려주는 계기가 생기는데, 바로 다양한 층위의 기이하고도 신기한 이야기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이 소설의 절정은 바로 그토록 사소한 것, 하지만 목숨을 걸을 가치가 있을 중요한 어떤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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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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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테드 창의 소설은 짧은 단편들 하나하나가 모두 주옥같다. 먼저 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을 때도 한 문장 한 분장이 직조하는 놀라운 이야기의 탄생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번 작품집도 먼저 읽은 <소프트웨어의 객체 주기>를 포함하여 겨우 세 개 읽었을 뿐인데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표제작보다 먼저 실려있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판타지와 SF를 천일야화와 아라비아 나이트의 이국적 분위에 흠뻑 적신 멋지고 재미있고, 신기하고 환상적이고도 기이한 시간여행 소설이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걸 담을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우선 전체 구조는 천일야화적인 프레임을 가진다.  이야기의 시작은 화자가 칼리프 앞에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화자가 왜 칼리프 앞에서 이런 신기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마지막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하고 난 뒤에야 밝혀지게 된다. 천일야화의 화자는 죽음을 유예하기 위해 매일 밤 칼리프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칼리프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매일 화자의 목숨을 연장시켜준다. 이 이야기의 화자 역시 자신의 죽음을 유예하기 위해 이토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인지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맨 바깥쪽의 프레임이 칼리프 앞에 선 화자라면 그 안쪽의 액자 속에는 화자가 한 상인이자 연금술사에게서 들은 세 개의 이야기가 있다. 화자 바슈라는 해외 곳곳에서 값비싼 물건들을 거래하는 상인이며, 진귀한 물건을 귀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새로 생긴 상점에서  한 연금술사를 만나는 장면을 칼리프에게 묘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가의 가장 핵심 상권에 새로 자리 잡은 상점에 들어가서 만난 한 연금술사는 바슈라에게 새로운 물건들을 보여주는데, 연금술사가 만든 진귀한 물건들과 그의 말에 매료된 화자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그가 만든 시간을 여는 문을 알게 된다. 이 문은 말하자면 시간을 가로지르는 웜홀인 셈이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20년 전으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20년 후로 가게 된다. 연금술사는 이 시간 여행 문을 카이로에 있는 상점에 설치했는데, 그 문을 통과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화자에게 들려준다. 



행운의 하산 이야기

두번째 안쪽 프레임에 있는 각각의 주인공들은 카이로에서 시간 여행 문을 통과하여 자신의 미래의 모습과 만난다. 첫번째 밧줄 직공 하산은 청년이 카이로의 상점에서 시간의 문을 통과해 20년 후 큰 성공을 거둔 (늙은)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20년 더 나이먹은 (늙은) 하산은 과거의 자기 젊은 자신이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젊은 하산에게 미래의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깨알같이 일러준다. 자주 20년 후 자신을 방문하여 충고를 듣는 덕분에, 자잘한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작게 시작한 장사도 번성해가지만, 어느 날 소매치기 아이에게 지갑을 도둑맞았다가 잡은 사건이 있게 되고, 왜 그 이야기를 미리 해주지 않았는지 늙은 자신에게 묻는데, 둘은 대화 끝에,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미리 아는 것만큼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 또한 멋지다는 걸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20년후의 자신은 젊은 그에게 도시의 서쪽으로 가서 어느 나무 밑을 캐라고 알려주는데, 시키는 대로 했더니 보물이 가득한 금괴가 발견되어 그 돈으로 씨앗삼아 크게 사업을 벌이고, 대부호가 된 것이다.  


20년 자신의 자잘한 충고가 일상의 작은 성공들을 일구기는 했지만, 도시에서 가장 갑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나무 밑에서 발견된 보물상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거기에 있었는지 늙은 하산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이 궁금한 젊은 하산은 20년 후의 자신에게 가서 물어본다. 지금의 너처럼 나 역시 늙은 하산에게서 알게 되었지. 알라의 뜻이라고 밖에 다른 설명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렇게 행복한 하산의 이야기가 첫번째 이야기이다. 


시간여행의 가장 묘미는 타임 패러독스이다. 과거로 가건 미래로 가건, 시간 여행을 통해 무엇을 바꾸면 현재건 미래건 그 임니 존재한 시간 자체가 사라지는 거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판타지를 가장 매료시키는 장치가 얼마나 더 말이 안되게 꼬아놓는가 하는 것인 것 같다. 아무튼 밧줄공 하산은 20년 후의 자신 역시 자신의 성공은 20년후의 자신에게서 행운의 보물 상자를 알게 되었고, 그 20년 후의 하산은 다시 20년 후의 자신에게서 행운의 보물 상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20년 후의 나이가 되면 젊은 자신과 조우하여 자신이 다른 시간의 자신에게서 들었던 똑같은 말을 과거의 자신에게 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는 삶을 타임 루프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불운의 아집 이야기

이것은 연금술사가 화자에게 들려주는 첫번째 이야기로 시작에 불과하다. 연금술사가 들려주는 두 번째 이야기는 더욱 기이하다. 양탄자 방직공인 아집은 하산의 이야기를 들은 후,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만나러 같은 문을 통과하여 간다. 하산의 이야기 20년 후 부자가 되어 있으리라 기대한 아집은 20년 후에도 현재 아집이 사는 똑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크게 실망한다. 20년 후에도 전혀 부자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20년 늙은 자신은 젊은 자신에게 부자가 될 만한 아무런 충고도 도움도 되어 주지 못했단 말인가. 조용히 집 앞에서 미래의 자신을 기다래고 있던 아집은 낡은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실패한 자신을 목격하지만, 앞에 나서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다가, 그들이 사는 집에 들어가서는 20년간 더욱 더 낡아빠진 초라한 살림살이들을 보고 더욱 실망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돈을 모아두는 나무 상자가 여전히 자신의 열쇠로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 열어보고는 놀란다. 그가 조금씩 저축해두던 그 나무궤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었던 것이다.  부를 가졌으면서도 전혀 쓸 줄 모르는 인색하고 째째한 노인이 된 삶의 기쁨을 모르는 노인에게서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금은 보화를 젊은 자신이 훔쳐가서 평생을 즐겁게 먹고 쓴다면 더욱 행복한 자신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어르면서 젊은 아집은 20년 동안 모아둔 자신의 20년 후의 금은 보화를 모두 훔쳐가버린다. 


20년후의 자신에게서 20년동안 모은 돈을 훔치는 젊은 아집은 생각한다. 이러한 부는 이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해. 늙은 자신에게서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돈을 빼앗기는 사람은 20년후의 늙은 자신이지만, 그 돈의 수혜를 보는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금괴를 가지고 카이로에 있는 연금술사의 문을 통과해 20년 전의 젊은 자신으로 돌아온다. 늙은 자신이 애써 모은 돈을 훔쳐 온 아집은 그 돈으로 큰 집을 사고 흥청망청 물쓰듯 돈을 쓰고 다니다가, 평소 사모하던 타히라에게 청혼하여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지만 2주째가 되어 그녀가 납치당하고, 납치범들은 그에게 큰 돈을 요구해 모든 재산을 그녀를 구하기 위해 써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버린다. 납치에서 풀려나고 남편의 모든 돈이 훔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타히라는 서로 노력하여 그 돈을 마지막 동전 한잎까지 갚자고 맹세한다. 그리하여 둘은 죽어라고 인색하고 째째한, 한푼이라도 생기면 20년후 자신에게 훔친 돈을 갚기 위해 모두 상자에 저축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20년째가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그 돈을 훔치러 오는 자신을 기다리게 된다.


젊은 아집은 금궤를 훔친 후, 한 번도 카이로의 연금술사의 상점에 들르지 않았고, 미래의 자신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길고 긴 20년간의 저축 끝에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보물상자가 없어진 것을 보고서 그제야 자신이 빚을 갚았다는 것을 알고는 연금술사에게 와서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하산의 아내와 그녀를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 

세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스토리의 주인공 하산의 20년 후의 아내 라니아가 젊은 하산을 만나는 로맨틱한 이야기인데, 여기에 그가 이룩한 부에 관련한 엄청난 비밀과 판타지가 숨겨져 있다. 라니아의 이야기와 화자의 이야기 하나가 더 있어서 모두 다 이야기하면 더 길어져서...


다음 포스트에 계속 https://blog.aladin.co.kr/705307136/10897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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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신간에 카를로 로벨리의 신간이 떠서, 찾아보니 오래전에 읽었던 <모든 순간의 물리학>의 저자가 쓴 책이다. 작년에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나와서, 슬슬 읽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빛의 속도로 또 새책이 나오는구나.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새 책의 제목은 반대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다. 세 개의 책 제목이 물리학 책 제목 치고는 시적이어서, 원제를 찾아보니 까막눈이다. 영문 제목이 원제에 충실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 표지를 보고 영문 제목과 대충 대조를 해보면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Seven Brief Lessons on Physics 이고,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와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각각 The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The First Scientist: Anaximander and His Legacy 으로 한국제목 모두 원제에 충실해 보인다. 새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The order of time으로 모두 영문 오디오북 까지 검색된다. (Audible을 구독하고 싶지만, 듣는게 더뎌 별 메리트가 없을 듯). 영문 오디오북의 알라딘 판매 가격은 3만원대로 아마존 오더블 서비스를 1달에 15불 정도에 이용하면서 세 권을 들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비싸지만, 소장한다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이북을 이용하면서 기계음이라도 읽어주는 기능에 매료되어 영어원작의 번역본을 읽을 때 유튜브 찾아서 가끔 같이 듣곤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시간을 내서 정리를 해봐야겠다. 


(아래 <모든 순간의 물리학> 리뷰는 재업임에도, 서재 인기글에 떠서, 무척 찔리는 마음에,  오디오북에 대한 오전 중 경험을 토대로 내용을 약간 추가한다.)  영문판 오디오북을 구매하면 새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오더블에서는 20불 가까이 되지만 구글 플레이에서는 1만4천원 선으로 나름 합리적 가격인 것 같다. 미리듣기 해봤는데,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절제있고 세련된 오만하고 기품있는 영국식 발음을 저음으로 깔고 시를 읽듯 나직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읽어준다. 이 분의 책 자체가 물리학임에도 문장이 시적이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한글 책 읽으면서 영어 오디오북을 들으면 두 언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모호성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고, 영어 공부도 된다.



아무튼 카를로 로베르의 책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좀 띄어주는 분위기여서 이 책을 읽기는 했는데 짧았던 것만 기억나고, 도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출간 시기에 맞춰 내 리뷰를 찾아보니 2016년 초에 써 놓은 게 있다. 리뷰를 읽으면 대략 내용과 그 때 들었던 생각들이 기억이 나는 편인데... 별로 그렇지 않고 매우 새롭다. 새롭고 신기한 기억력이여. 어쨌든 대략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 저자인지는 다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재업한다. 



(2016년 모든 순간의 물리학 리뷰 재업)

찰스 다윈이 종이 진화한다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최초로 적었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는...'으로 서문을 시작했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기장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소개할 때에도 주저하는 말투를 썼다. 천재 아인슈타인이 광자를 증명했을 때도 '내가 보기에는' 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빛 에너지가 공간 속에 비연속적으로 분포한다고 가정할 경우, 형광물질이나 음극선 생산, 상자에서 나오는 전자기 방사선을 비롯해 빛의 방출 및 변화가 관련된 유사 현상들을 함께 관찰해야 이해하기가 더 용이할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빛 에너지가 공간 내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의 특정한 지점들에 위치하고 이동은 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각각 하나의 개체로서 생산되고 흡수되는 일정한 수의 '에너지 양자'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염두에 두었다. (p31, 재인용)"

 

'이 간단명료한 몇 줄의 설명은 양자이론의 진정한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것(p31)' 이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처음 상상하고 측정했던 양자 역학의 핵심은 전기장의 에너지가 양자(quantum)과 같은 덩어리 형태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빛이 무리를 이루어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1910년과 20년대를 지나면서 닐스 보어는 양자도약(quantum leap) 이론을 알아내어 발전시켰고, 하이젠베르크는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역학 기본 방정식을 쓰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손을 떠난 양자 역학은 최초의 이론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  이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 간담회와 서신, 언론 기사 등을 통한 수년간의 대화 끝에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몇 가지는 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 상태로 한 세기가 지나도록 같은 지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론이 확신이 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양자역학 방정식은 일상에서 매우 유용하게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 이론의 핵심은 현실은 상호작용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이론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증폭되고 있다. 현실의 본질에 깊이 침투한 이론인지, 혹은 우연히 맞아 떨어진 이론인지, 아직 완성하지 못한 퍼즐의 한조각인지, 혹은 우리가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신호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물리학계 지식의 중심에 놓여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20세기에 남겨진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서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두 학문은 각 영역에서 동시에 수많은 학문의 바탕이 되어 왔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우주학과 천체물리학, 중력파와 블랙홀 연구를, 양자역학은 원자물리학과 핵물리학, 기초입자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을 비롯한 수많은 학문의 바탕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모든 것이 연속적인 곡선 공간에서 설명되고, 다른쪽에서는 에너지 양자들이 불연속적으로 점프하는 평평한 공간에서 설명된다. 문제는 모순되는 이 두 이론이 모두 현실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연구 분야를 양자중력이라고 하는데, 이 학문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일관된 관점의 이론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된 두 개의 이론을 통합한 경우는 이 전에도 많았다. 뉴턴은 갈릴레오의 포물선과 케플러의 타원을 조합해 만유인력을 찾아냈고, 맥스웰은 전기이론과 자기 이론을 조합해 전자기 방정식을 찾았고, 아인슈타인은 전자기와 역학 사이의 심각한 모순을 해결하려다가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이며 이 책의 저자인 카를로 로벨라가 양자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결합하여 블랙홀의 본질을 새롭게 규명한 이론이 루프양자중력이다. 


루프양자중력이론의 핵심은 공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무한하게 나누어지지도 않지만 아주 미세한 크기의 공간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공간 양자들은 그 자체가 공간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 있지 않으며 공간은 각각의 양자들을 통합하여 만들어진다. 루프 방정식은 빅뱅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가 극도로 압축된 상황에 양자 이론을 적용하면 대폭발이 일어나며, 때문에 이 세상은 현재 이전의 우주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거의 우주가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압축돼 아주 작은 공간 속에 짓눌리다가 결국 재도약을 한 후 다시 확장하기 시작해, 현재 우리 주위에서 관찰되는 계숙 확장하는 우주가 된 것이라는 것인데, 이 재도약의 순간 우주가 호두껍질만한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을 때 공간과 시간이 모두 사라지고 세상이 수많은 가능성의 구름 속에 녹아 있는 양자중력의 왕국이 펼쳐지며, 양자 중력 방정식들이 설득력을 얻는다. 즉 현재의 우주는 그보다 한 단계 전의 도약에서,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는 중간단계를 통과하면서 탄생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명한다.


열은 언제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열에서 발생한다. 볼츠만은 그 이유를 확률적으로 설명하는데, 뜨거운 물질의 원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차가운 원자에 부딪히면서 약간의 에너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많고, 반대로 차가운 원자가 뜨거운 원자에게 에너지를 남겨줄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볼츠만은 이 가능성을 열역학의 배경을 설명하려 했으나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1906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시간적 현상은 세상의 미세한 상호작용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무수한 변수들의 평균을 통해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공간이 하나 하나 떨어져있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물이 어떤 공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도 어려워하는 것들을 독자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복잡한 물리학 법칙 속에 있는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들에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일반 독자들의 평범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대략 무슨 말인지에 알 것도 같다.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우주의 극히 일부분을 알게 되었지만, 이러한 우주는 우리 사고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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