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즈 보르코시건 : 마일즈의 유혹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5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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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가 경험하는 세타간다 제국은 30 세기 미래의 기술이 만들어 낼 가상의 낯선 인류와 계급과 문화 제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 원래 제목이 《세타간다》인데 이런 식의 고유명사가 독자들의 관심을 쉽게 끌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인지 한국어판에서 《마일즈의 유혹》으로 바뀌었지만, 그래서 이러한 제목의 변경은 전체 내용을 편협하게 축소시키는 느낌이다. 이번 편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편에서건 남성 호르몬이 최대치에 오른 나이의 마일즈는 항상 매력적인 여성들에게서 유혹을 받고, 그 때문에 문제를 자초하기에, 이번 편이라고 해서 여성 문제에 관해 그리 특별하다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시리즈의 전편들과 비교할 때 《마일즈의 유혹》의 다른 점은 전투씬이 없다는 거다. 전편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세타간다 제국에 외교 사절단으로 방문한 마일즈는 게놈을 통해 유전자의 선택 교배에 따라서만 후세가 결정되는 이 사회의 문화와 예절을 배우는 중이다. 사실 1편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항성계를 연결하는 웜홀 문제로 수백년(600년이었던 걸로 기억) 간 나홀로 항성계에서 고립 시대를 겪는 동안 보수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중세풍의 황제정과 보루라는 귀족 사회가 지배하는 문화를 갖는 바라야 행성도 21세기의 눈으로 볼 때 굉장히 이질적이다. 그러는 동안 전 우주에 걸쳐 가장 많은 항성계와 도약 웜홀의 지배권을 가진 세타 연합의 지배자는 독자인 21세기 지구인의 시각으로 볼 때 뿐만 아니라 바라야인의 시선에서도 신비롭고 이질적이면서 이해불가능하고 괴상한 점 투성이다. 


전투신이 빠진 이번 편에서 새로운 전투는 보이지 않는 어떤 계략과 마일즈와의 두뇌 게임이다.여기에 세타간다의 유전자 풀을 지배하는 은둔적 호트 여성과 우연히 엮인다. 우주선에 침입한 괴한을 처치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막대 모양의 정체 모를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그게 호트족의 후세 유전자 정보를 보관하는 정보를 여는 유일한 열쇠다. 어쨌든 이 월등한 유전자 조작 인류인 호트 여성은 그들을 보자마자 저항의 여지를 주지 않고 열병처럼 확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들은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으며 자신들 외에는 절대로 외부에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쇠를 가진 마일즈를 찾은 호트 리안은 열쇠를 돌려받기 위해 구형의 떠다니는 거품에 은폐한 자신의 모습을 마일즈에게 드러내고, 가뜩이나 남성 호르몬이 콸콸 쏟아지는 왕성한 나이의 마일즈는  이 거부할 수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유전적으로 구현한 여성에게 빠져버리고 만다. 


제국보안사에 근무하게 된 마일즈는 팔촌 형 이반과 함깨 세타간다의 황태후 장례식에 사절단의 자격으로 왔지만 신체적 약점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열등감과 뛰어난 두뇌로 어떻게 해서든 인정욕구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 그가 관여하게 된 사건은 그 목적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불분명하다. 이반의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의 이반은 마일즈와 함께라면 더욱 두드러지지만 야망이 없고 상사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은 그가 마일즈와 한팀이 되는 것은 여러가지 위험한 일에 말려들고 협조하게 됨을 의미한다. 바보 이반과 키작은 마일즈를 보고 있노라면, 왕좌의 게임이 자꾸 생각난다. 누이를 사랑한 제이미 라니스터가 이반처럼 물러터지지지도 않고 마일저가 티리온처럼 노련하고 전략적인 인간인 건 아니지만(이 점은 아직 그가 청소년기라서라고 이해) 두 사람의 케미가 (원작이 쓰여진 시점에서 볼 때 크게 서로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돋보인다.


괴한에게 빼앗은 물건이 세타간다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한 물건이며 이것은 죽은 황태후가 정체된 세타간다의 부흥을 위해 계획한 거대한 작전의 음모임을 알고도 이를 일리안이나 상사에게 즉각 보고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과 이반 더 나아가서는, 일이 잘못되는 경우 애당초 괴한을 보냈던 목적인 상대쪽의 계략에 빠져 유전자 열쇠를 훔친 스파이로 침략의 빌미를 주게 되고 결국 바라야 행성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매우 민감하고 정치적인 사건임에도 자신의 힘으로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직감에 능수능란한 거짓말과 밥먹듯 하며 호투 귀족, 겜 귀족, 상사 등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직접 사건의 본질을 캐기 시작한다 


본격 탐정 쟝르로 보기엔 개연성이 살짝 갸우뚱하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흐름은 광대한 우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세타간다에서 바라야 제국을 희샹양 삼아 벌이는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탐정 소설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호트귀족의 열쇠 도난 사건을 이해하려면 세타간다의 독특한 지배체계와 문화, 관습, 제도를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는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 때문에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텍스트가 많아져 다른 편에 비해 속도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행성의 두뇌가 결국은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한 신인류로의 변화, 그에 따른 21세기에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확고한 승계 방식의 카스트 계급 형성, 전통적 부부 및 가족 제도의 소멸과 새로운 대체 가족의 대두에서 비롯된 가능성있는 미래임에 동의하게 된다. 


여러 항성계의 많은 세타 행성들을 지배하는 자는 호트 귀족의 황제로 황제와 황태후 호트귀족과 그 배우자의 역할은 상호 보완적이지만 독립작이기도 하다. 호트와 호트 부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부부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친밀감과 사랑을 기반으로 형성된 가족이 아니라 유전자를 공유하는 공식적인 배우자일 뿐이다. 그 이유는 세타라는 사회 자체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번성허고 유지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가 섞이는 게 아니라 호트의 메인 게놈 속에 선택적으로 유전자를 자르기와 붙여넣기로 후세를 선택 배양하는 것이다. 이 일의 책임과 권한이 황태후에게 있고 황제는 그것을 손대지 못한다.



호트 계급 여성들은 완벽하게 은둔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다. 그들이 공적인 행사에 나올 깨는 둥둥 떠다니는 의자에 타고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거품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닌다. 아랍의 부르카를 연상할 수 있는데, 그들과 달리 이러한 은둔이 이 사회에서는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특권이다. 공적 파티에서조차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사회에서는 예의에 해당한다. 


먼 미래에는 현재에 비윤리적이라고 금지한 많은 것들이 여러 우회로와 느슨한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고 결국 지금은 질병예방과 장애의 표식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는 인간 유전자 조합 기술이 어떤 식으로든 큰 전기를 맞게 될 사건이 무한한 미래의 역사에 기다리지 않을 보장이 있을까. 소름끼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유전자 기술에 의한 번식 방법이 ‘난수적인 자연 진화의 낭비를 피하고 그 대신 이성의 효율성을 추가’한다고 믿는 호트 귀족들의 가치관이다. 수백만년 진화의 결과를 크리스피 유전자 가위로 쌍둥쌍둥 자르고 붙이고 이어서 원하는 외모, 성격, 두뇌를 가진 인간을 창조해 내고 그 게놈은 바로 호트 귀족의 여성인 황태후가 독점한다는 게 이 사회에서 아주 소수의 호트족이 스스로를 가치있게 만들고 전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다. 그런데 어느날 황태후는 이러한 지배 질서의 전복을 꾀하고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세타간다와 바라야는 마치 일본과 우리나라처럼 침략과 약탈의 뿌리깊은 역사를 가진 탓에 심적으로는 엉숙이지만 약소국과 대형제국이라는 틀 때문에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하고 교류하늠 상태다. 엄청나게 큰 규모로 한달여간 지속되는 장례식에서 마일즈가 경험하는 문화는 이질적이지만 호트 귀족은 뛰어난 마일즈가 과외 교습을 받아도 때때로 실수할만쿰 복잡하고 흥미롭다. 유전자 조작으로 결정된 소수의 지배자 계급인 그들은 하류 계급 역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조작하고 조절한다. 자연 임신과 자연 분만으로 태어난 인간을 '생물'로 지칭하며 우리가 동물(?)한테 그러듯 생물취급한다. 우리가 생물인건 맞는데, 막상 선택된 게놈에 인공적으로 편입된 유전자들과의 결합으로 태어는 그들이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 건 뭔가 억울하다. 


하지만 그런 유전자조작 여인들의 완벽한 미는 마치 일생에 한 번 누구나 걸리는 질병처럼 치명적이다. 이상한 일에 휘말려 탐정행세를 하게 된 마일즈의 이번 편의 쓸데없는 모험과 호기심은 자신도 그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괴한의 습격때부터 상부에 보고했더라면 어쩌면 보기 좋게 모반자의 음모에 말려들어 세타간다와 바라야 사이에 전쟁 촉발의 빌미를 주었을 것이라는 마일즈의 확신 밖에. 결과적으로는 마일즈가 또 한번 바라야 제국을 구하는 일이 되었고, 과정적으로는 열등감과 인정욕구 혹은 공을 세워 승진하려는 속물적 욕구 혹은 치명적 유혹 때문인 듯한데.. 이렇게 과감하게 일을 끌고 나가면서도 심리적으로는 갈팡질팡하는 마일즈는 여전히 귀엽고 매력적인 작은 악마적 캐릭터다. 이제 스무살.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된다.



먼 미래에 어떤 과학이 현재의 숱한 한계들을 극복했을 때 도래할 수 전혀 새로운 사회를 제시했기에 나로서는 그 어떤 전투적 소설보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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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p Studio Paint, 캐릭터를 살리는 배경 그리기 노하우
요-시미즈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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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상세히 얘기하기 전에 우선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림 및 아트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최신 도구를 이용하여 멋진 일러스트를 그리는 과정 자체에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실제 산업에서 어떤 툴들이 이용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당연히 이 책은 클립 스튜디어 아트의 기초 사용법이나 강의가 아니라, 배경 그리기 노하우에 관한 책이다. 붓으로 그림을 그릴 때 붓의 선택과 붓에 대한 성질 사용 법 물감과 캔버스 등의 자재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어야 하듯, 디지털 일러스트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선택한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법은 대략적으로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일러스트 하나로 모든 걸 다 하는 줄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프로들은 채색 소프트웨어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가 바로 그 채색 프로그램이다. 


물론 책에서 제공하는 테크닉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본적이고 단편적인 방법은 책에 나와있지만,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소개는 없어서 클립 스튜디오 아트 한국어 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짐작했던 것처럼 클립 스튜디오 아트는 그리기와 채색 작업에 특화된 소프트웨어이며, 종이에 펜과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우수한 태블릿 엔진을 장착하여, 현존하는 최고의 필압인 8192 단계를 제공하는 와콤 태블릿의 8192 단계의 필압을 모두 지원하여 정교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책과 함께 세 개의 커스터마이징된 브러시를 제공하는데, 이미 1천여종의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브러쉬가 제공되고 있다는 홈페이지 소개를 토대로, 얼마나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쓸 수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매뉴얼은 영어로만 지원되는 듯하고, 딥러닝에 디반한 AI 자동 채색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아도브사의 모든 도구들이 CS 버전으로 매달 통장에서 돈을 뜯어가는 것과 달리, 무엇보다도 이 소프트에어는 전통적인 판매 방식으로 한 번 구입하면 영원히(?) 소유하고 업데이트도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책을 읽기 전에, 책의 부록으로 영진닷컴에서 함께 제공하는 부록 파일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http://www.youngjin.com/reader/pds/pds.asp 에서 스케치로 시작하여 다양한 과정을 거쳐 채색이 완성되어 가는 부록 파일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워낙 많아서 그림 완성 및 변형 단계의 일부를 축소해서 화면을 배치해봤다. 


그림에서 살펴보듯,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실무에서 직접 응용이 가능한 그리기 제작 과정을 담고 있다.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의 아주 기본적인 사용법과 용어, 특전 브러시의 사용법, 입체를 그리는 기본 방법들이 매우 간략하게 그림 위주로 소개되어 있고, 33쪽부터 바로 실무에 들어간다. 위에서 예를 들은 배경의 이름이 벚꽃 지는 거리인데, 이 씬 외에도 총 8 개의 씬의 초기 스케치에서부터, 마지막 완성 단계, 그리고 변형까지를 단계별로 설명하고, 상세한 단계 컷은 jpeg 파일로 제공된다. 


배경은 원근법적 지식이 없어도 그럴 듯하게 그릴 수 있는 하늘, 구름, 자연물 등과  원근법이 필요한 배경으로 나뉠 수 있다. 위의 그림과 같이 지면이 포함되지 않으면, 원근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건물이 포함되거나 실내, 지면 등이 있다면 원근법의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 세 개의 씬은 원근법이 필요없는 모티브와 구도를 선택하여, 주로 무플 위 부분을 중심으로 자연적 배경을 하는 그림을 설명하고, 이후 씬은 보다 복잡한 원근법적 지식이 필요한 씬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린다.  처음 배경은 회색으로 채우는데, 완성 이미지와의 인상 차이를 줄인다. 배경 채색이 끝나면 캐릭터의 채색 후 머리속의 이미지와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실루엣을 가장 먼저 그린다. 이후 간단한 러프를 그리고, 라이팅을 넣고 배경 이미지를 조금씩 완성해 나간다. 


8개의 씬에 필요한 테크닉이 각 단게별로 그 때 그 때 소개되어 있어 유용하다. 초원 그리는 방법 나무 그리는 법, 소품 그리는 법 같은 기본적인 그림 기법도 틈틈히 소개되고, 사진 합성, 색함성 등의 트릭, 인상주의나 추상주의를 연상시키는 고난이도 <인식 그리기> 기법 등도 소개된다. 저자가 진격의 거인, 갑칠성의 카바네리 등의 일러스트에 참여했다고 소개되어 있으며, 여기 나온 그림들이 영화나 포스터에서 익숙한 듯한 씬이라서, 이런 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책이었는데,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거나, 직접 제작을 원하는 사람들이 입문하고 실습까지 실무적 느낌으로 해보기에 적당한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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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 / 문학동네 / 1918년 7월


이안 매큐언 소설을 몇 권 읽은 독자로서,  그의 소설에 대한 인상은 대체적으로, 심각한 역사적 혹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블랙 유머가 지적으로 세련되게 잘 배합한다는 것이다. 태아의 입장에서 햄릿을 재해석한 <넛셀>이 어두운 인간의 이면을 매우 영국스러운 유머로 풍자했다면, <솔라>는 작품은 조금은 더 소리내서 웃을 수 있는 코믹스러운 요소가 구석구석 배어있다.


피부가 노출되면 바로 얼어버리는 북극의 살인적 한파 속에서 스노우 모빌로 신속해 이동해야 하는 상황의 한 복판에서도 신체는 그 환경과는 무관하게 한결같이 자신의 순환 사이클을 멈추지 못해서 생기는 비극이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그 잠시의 빙벽 배설 행위로 인해 저온에 노출된 신체의 중요한 일부가 스노우 모빌에 돌아와 달릴 때, 똑 떨어져 겹겹으로 입은 바지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마비된 감각으로 느끼는 장면이 그 중 압권이다. 


작품이 주는 웃김이 순수한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있다. 지구를 구한다면서 자기 집 관리나 자기 자신 조차 건사하지 못해, 사랑하지도 않고 결혼 생각도 없는 여자 집으로 향하는 남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환경보호자들이 당연히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하는 행사인 북극의 환경 파괴 현장 체험에 가서 목격하는 탈의실의 카오스. 신체적 약점(뚱보에 늙고, 키작고 등등)과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꼬이는 온갖 타입의 여자들.


다섯번의 이혼과 그로 인한 노벨상에 걸맞지 않은 빈털털이 신세의 이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화자가 굳이 독자에게 드러내지 않은 숨은 매력이 있을 수는 있겠다. 재치있는 말주변이라든가 혹은 (겉으로 보이는) 세심한 심적 배려라든가. 가장 설득력있는 추측은 끊임없이 여성을 쫓고 평가하고 작업거는 평소 한결같은 태도에 20년 전에 성취한 노벨상의 권위가 합쳐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외모지상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권위가 상쇄시키는 이성적 인간적 불호감은 철통같다. 노벨상은 말할 것도 없고, 돈과 권력, 스타적 유명세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이안 매큐언이 워낙 유명해서 노벨상 수상자인가 했더니 부커상을 몇 번 받았지만, 노벨상은 아닌 듯하다(어쩐지 읽는 재미가 있다 했더니ㅋ).  하지만, <솔라>에 등장하는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 수상자이고, 젊은 시절 넝쿨째 굴러들어온 이 노벨상이라는 세계적 권위의 수상이력은 그의 나머지 삶의 대부분의 부분을 떠받치고 부양하는 토양이 된다. 


20년동안 아무 연구도 진척된 것 없이, 이런 저런 위원회의 장과 같은 한직을 쫓아다니고 대중강연과 연설로 먹고 사는 동안에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일차원적 탐욕이다. 돈, 여자, 술, 음식, 권력. 노벨상 수상자가, 자신의 외도로 인해 이미 관계가 끝난 네번째 부인의 외도를 질투해, 그를 살인자로 조작하고, (자신 때문에) 죽은 연구원이 남긴 연구 내용을 가로채, 지구를 구한다는 명분과 유명세, 돈을 탐닉하는 모습은 악한자의 전형이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다보면, 그런 그가 그렇게 악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연된 사회의 부조리에 익숙해지면, 그런 일은 특히 큰 권위를 등에 업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더럽게) 살아가는 방식은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분명 윤리적으로 아주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하고 있는데도, 마이클 비어드에게는 지구를 지킨다는 명분이 있다. 자신이 훔친 아이디어를 제안한 연구원이 살아있을 때는 포스트닥인 위치에서는 구현 가능성이 없는 그 아이디어를,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의 이름으로  구현하고자 설득하고 애쓰는 모습이 악의 이면을  드러내고, 외면했던 그 태양광 합성 에너지를 구현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연설을 하던 와중에 남성우월주의로 오해받아 분노한 대중에게 조소와 모멸을 받는 장면은 악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한다.


그의 악은 마블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절대적 악이 아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사회의 저변에 만연했지만 전체가 한꺼번에 모두 드러나기 전에는 그 깊이와 밀도를 알 길이 없는, 그저 원래 사회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다는 듯 조금 못마땅하게 인정하고 모두들 조금씩 그 사회의 작동 원리에 동조하는 어떤 거대한 힘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탐욕을 방해한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런 대가를 치를만한 인간임을 꾸준히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모습, 죽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쳐 대규모 사업을 벌리고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노력에 밥숟가락 하나 더 얹으려는 사기꾼 집단 취급하는 심리. 이렇게 그가 악을 행하는 상대들은 마이클 비어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속물이고 탐욕스럽게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나누자고 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악한 인간이 또다른 악한 인간들을 볼 때의 시선. 그것 때문에, 마이클 비어드의 행위가, 결코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악의 행위로 읽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영화 <어톤먼트> 덕분에 더욱 널리 알려진 작가지만, 영화적 비주얼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바꾸고 싶지 않아, 가장 재미있다는 대표작 <속죄>를 책으로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책표지가 바래가고 있는 중.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칠드런 액트>를 꼽고 싶다. <검은 개>는 1992년 작인 것 같은데, 첫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 두 마리 검은 개를 서로 다르게 의미 부여하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삶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려지는 듯하다.


검은 개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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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5-28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칠드런 액트> 재미나게 읽었더랬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책이 나오면 어쨌든 사두게 되는 작가 중의 하나인 듯.

CREBBP 2019-05-29 07:59   좋아요 0 | URL
현존 영국 작가 중에서는 줄리안 반스와 이언 매큐언을 좋게 읽은 것 같은데, 이 분이 좀 더 웃긴 거 같아요
 
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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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의 평생혼 제도가 인류 공통의 문화로 자리잡은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만일 이 제도가 따지고 따져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유전자의 무작위적 변이는 전혀 다른 방향의 문화와 제도로 인류를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작가가 상상한 세계에서는 인공수정 기술의 보편화와 성욕의 소멸화로 인해 전혀 다른 결혼제도를 갖는다. 이 사회는 남녀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께 아이를 만들 수는 있지만 성교는 터부시된다. 성교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부부 이외의 애인을 갖는게 보편화되어 있는데 혼외 애인 사이에서 성교가 보편적인 건 아니다. 성교는 욕망이라기 보다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게다가 혼외 애인은 살아있는 인간인 경우보다는 캐릭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회애서 주인공 여자는 자라면서 자신이 엄마와 아빠 사이의 교미로 태어난 사실이 비정상이고 구역질나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치스러워하고 숨기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저주 혹은 비정상의 유전자만은 피해갈 수 없다. 그녀는 성욕이 왕성하여 첫사랑인 어떤 만화 캐릭터와 성교를 경험하고(실은 마스터베이션)는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성교 행위를 탐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혼내 정사라는 근친상간 행위에는 큰 저항감을 느껴 어느날 남편이 성적으로 접근하자 역겨움에 토하고 난리 부르스. 현재의 남편과는 성적인 이끌림없이 편안하고 친근한 가족적 친밀함으로 오누이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에게 생긴 혼외 연애를 격려하며 북돋아주며 훈훈하게 살아가지만 둘다 연애 자체에 큰 상처를 입고 실험 도시 지바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상처받은 이유가 재미있는데 끊임없는 연애와 성교를 하는 여주는 어느 날 남친이 그걸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짤 수 없이 해왔지만 도저히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고백을 듣고 사실상 두 사람의 행위는 성교가 아니라 마스터베이션이었음울 깨닫는다. 반면 남편은 정신적으로 사랑 자체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겨워 우울증과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반복적 자살 충동을 겪는다.

여기까지가 1부인데 성진국의 면모를 아주 잘 드러내는 전개와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불편을 느낄 한국 독자가 많을 것 같다. 그렇다고 설레게 야시시한 느낌이 아니라 뭔가 날것의 묘사를 그대로 포르노 화면처럼 전달하는 느낌이다. 캐릭터를 사랑한다던지 성교 과정을 탐구하며 따라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조금은 장난과 과장이 큰 청소년 대상의 수위있는 라노벨 정도쯤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는데 2부가 되자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어 디스토피아처럼 여겨지는 세계관이 펼쳐진다. 


그들이 정착한 실험도시 지바에서 인공수정으로 남편이 아이를 낳고 그토록 거부해왔던 그 사회의 시스템에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동화되는 과정인데. 여기서 핵심은 공동육아 시스템이다. 인공수정으로 임신하고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누가 누구의 엄마인지 구분이 없는 곳. 양재추 밭처럼 끝없이 펼쳐진 신생아의 밭에서 '아가'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공동으로 양육되고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스타일로 자라나는 곳. 식탁의 치킨이 되기 위해 혹육 소고기가 되기 위해 비좁은 우리에 때가 되면 쏟아지는 닭장 속의 닭들이 샹각난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의 성이 더이상 세대 전달이라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성욕 자체도 퇴화할 수 있다는 가정은 흥미롭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성행위의 탐구라는 묘사는 때때로 불편하다. 흥미로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진지하지 못한 세계관의 설절, 가령 캐릭터와의 섹스나 연애 같은 설정은 다소 유치한 느낌도 있다. 세계관과 서사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느낌도 받는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과 주제에 주인공이 억지로 끌려간다는 느낌도 떨칠 수 없다. 

SF로서는 아쉬운 작품이지만 서사적으로는 꾸준한 충격 요법 때문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은 작품이었다. 후반부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충격적 결말은 인상적이었으나 지나친 동어반복적 설명은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 단편이나 중편 정도로 압축해서 여운을 살렸다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훌륭한 작퓸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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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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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텔라는 늑대여자다. 늑대일 때는 제시, 여자사람일 때는 스텔라로 불린다. 여자는 한달 중 며칠은 늑대로 변신한다. 늑대와 인간의 시간은 7배 차이가 있다. 시간은 삶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 늑대이거나 인간이거나 사는 시간에 상관없이 스텔라는 제시의 시간을 산다. 늑대의 시간을 2년간 살았을 때 인간의 나이로 14세가 되었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를 발견한 생물학 교수는 그녀의 변신 사실을 학계에 알리지 않고 그녀를 소유한다. 늑대일 때는 길들이고 소녀일 때는 사랑한다. 남자는 서른 중반이다. 1년에 7살씩 나이가 먹는 소녀는 몇년 내 그녀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아지는 날이 올 테고 늙고 병들어 죽는 날도 뒤따르리라는 사실을 걱정한다. 그는 그녀가 영원히 아름다울 거라고 안심시킨다. 

매달 돌아오는 변신이지만 변신 그 자체에는 극심한 고통이 뒤따른다. 뼈가 뒤틀리고 새 자리를 잡기 위해 고통으로 신음하고 소리지르고 몸을 뒤트는  동안 그는 그녀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보살펴준다. 늑대일 때도 소녀일 때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를 매혹시킨다. 변신 과정의 고통마저도 성적인 자극이다. 제시(늑대)가 3살이 되고 스텔라(그녀)가 20살이 되자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다다르고 교수들 모임에서 늘 다른 교수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로 인해 교수 부인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들 모두는 스텔라와 섹스하고 싶어하고 조나선은 그런 스텔라를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4발짐승 제시의 나이로 4살이 되자  스텔라는 27세가 되고 여전히 아름답다.  5살이 되자 남자와 같은 나이가 된다. 여전히 그윽한 아름다움과 지적인 매력이 솟아나지만 평평한 배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엄청난 시간을 복근 운동에 쏟아야 하고 가느다란 주름을 감추기 위해 세심한 화장을 하고 타이트하고 섹시한 옷 대신 이국풍의 느슨하고 세련된 패션 감각이 필요하다. 이제 다른 교수의 부인들은 그다지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며 그녀의 지적 매력이 더욱 돋보인다.  점점 스텔라는 남편의 사랑과 새로운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식 탐구에 보다 몰두한다. 모임에서 그녀가 가진 방대한 지적 세계를 우아하게 드러내고 여전히 매력적이다. 


늑대 나이로 5살 6살이 되자 40세 50세로 급격히 진행되는 노화를 주변에서도 눈치채고 괜찮은지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다. 늘어진 피부와 주름은 진한 화장으로도 더는 감출 수 없고 노쇠하고 무거운 몸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 이제 여자들은 그녀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지만 그녀 자신이 새로 들어온 젊은 여자 교수를 미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보던 욕망하는 눈길로 새로 온 젊은 여자 교수를 모두가 바라본다. 그녀도 똑같이 자신의 남편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불안과 질투를 느낀다.


그녀의 나이는 70세 80세로 급격히 노화된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서서히 변해가던 남편은 이제 그녀의 고통스런 변신을 지켜보거나 돌보지 않으며 제시에게도 학대에 가까운 방치로 그녀를 섭섭하게 한다. 조나선이 돌보지 않아, 늑대는 인간으로 변신한 후에야 무겁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똥들을 스스로 치우며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지쳐간다. 이제 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다. 출렁거리는 살들을 지방흡입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보지만 잠자리마저 회피하고 침대에서는 멀찌막한 구석으로 몸울 웅크리고그녀를 점점 멀리한다. 외로움에 지쳐 울다 지쳐 잠드는 날들이 늘어간다.


그러던 중 미술관에서 19세기에 그린 그림에서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굽은 등으로 차를 따르는 노인의 모습은 숨막히도록 아름답다. 그녀는 화가도 그 여인을 자신이 보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았음을 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 아픈 자각은 그녀에게 무엇을 알려주었을까.  조나선을 떠나 자신의 무리들이 있는 곳 자기가 떠나온 곳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왜 미련이 남았나. 무거운 몸으로 반나절동안 멋진 요리를 하고 식탁과 자신을 꾸며 놓고 대화를 시도하지만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진정한 대화가 될 리가 없다. 대화는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그는 함께 쓰던 방마저 떠나 다른 방에서 잔다. 침실에 남겨진 그녀는 후회한다. 똥 얘기를 하지 말 걸 그랬나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꺼낼 걸 그랬나. 홀로 침실에 남겨진 스텔라는 울다 지쳐 잠들고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이른 변신이 찾아와 고통에 몸부림치는데 침실 문을 안에서 닫아 놓은 걸 이미 때가 늦은 변신 단계에서 깨닫는다. 늑대 제시는 문을 스스로 열 수 없음과 방에는 먹을 것이 없음을 그리고 조나선이 그를 꺼내주지 않을 것임을 안다. 침실에 갇혀 화장실 변기 물로 갈증을 때우며 울부짖는 제시를 조나선이 꺼내주는 반전(?)이 일아나고 조나선은 제시를 착한 개주인처럼 달랜다.

그는 제시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다정하게 대한다 불쌍한 제시 배고팠지? 하지만 거기까지. 늑대를 꺼낸 조나선은 제시를 목줄에 짧게 매어 기둥에 묶어둔다. 조금 후 웬 젊은 여자가 집으로 찾아오는데 그에게 아내가 떠난 걸 위로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나선은 그 젊은 여자에게 밖에 있는 개는 누이가 맡겨두고 간 개라고 둘러댄다. 조너선은 어쩔 작정으로 왜 스텔라를 떠나지 말도록 말렸을까.  스텔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독특하게도 이 소설은 2인칭이다. 너라는 지칭으로 서술되기에, 마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스텔라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가 여성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전혀 나의 이야기가 아닐 때조처 일부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철저하게 남성의 성적 욕망만을 위해 대상화된 스텔라는 자신이 네 발일 때조차 본능을 억제하고 개처럼 조나선에 의해 길들여진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어떤 작은 별에서 어린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장미의 밀당처럼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길들여진다는 건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내가 온전히 내가 아닌 상대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계속 사랑하도록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 소설에서 스텔라는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의 감소를 왕성한 지식욕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매력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애초 조나선이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헛된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늙고 못생겨지면 자신을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 조나선은 뭐라고 대답했나. 늘고 못생겨져도 당신을 여전히 사랑할거가 아니라 안돼 당신은 늘 아름다울 거야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이 대답은 중의적이다. 당신이 늙어도 여전히 아름다울 거라는 뜻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이므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을 떠날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늙어도 그 초상화 속의 그림처럼 내적 아름다움을 그가 알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었다. 

발화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도 모를 것이다. 다만 그가 사랑한 건 그녀의 외적인 아름다움이란 것만은 확실하다. 노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오는데 만일 남성과 여성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늑대와 인간의 수명 및 성장 차를 이용하여 늑대인간을 페미니즘적으로 접근한 이 작품이 스토리 구조만 본다면 그냥 뻔한 나쁜 남자에게 당하는 바보같은 여자의 뒤늦은 자각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 시대는 변했고 이런 식의 프레임이 식상한 건 사실이지만 너라는 인칭의 영리하고 단아한 문체는 이야기가 의도한 메시지를 떠나 문학적으로 반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다. 

페미니즘, SF, 동식대 여성 작가, 등을 키워드로 하는 이 단편집에는 흔히 접항 수 없는 다양한 동시대 여성 작가의 단편들이 들어있다. 좋은 기획,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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