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의 모험 -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상 세계들로의 여행
로라 밀러 엮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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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100'이라는 광고 카피가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목차를 보면 이 카피가 실은 이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임에 동감하게 된다. 100개의 이야기는 커다란 컬러 도판에 실린 관련 명화와 함께 다섯 개의 챕터로 시대별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가 환상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속해있는 익숙하고 따분한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현실에서는 물리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독자를 아득한 꿈과 환상 속으로 안내한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믿기지 않는 일들은 다시 현실을 비춘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이야기를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인간의 삶만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고대의 신화와 전설 편에서는 고대부터 1700년까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약 20개의 책 중 실제 첨부터 끝까지 단기간 내에 끈기있게 완독을 한 책은 오디세이아와 산문 에다, 돈키호테 밖에 없지만 그래도 읽은 책이 나왔을 때는 반가왔고, 안읽은 책들의 개요를 알 수 있어서 더없이 빠져들었다. 사실 이런 신화들은 오며가며 제목들은 대개 들어서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게 언제 어느 공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 책을 읽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신화와 전설들을 인류라는 전체적 시각에서 그 맥락을 이해하며 바라볼 수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호메로스),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 베오울프, 천일야화, 마비노기온, 산문 에다(스노리 스툴루손),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아서 왕의 죽음), 토머스 맬러리(광란의 오를란도),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선녀 여왕(에드먼드 스펜서), 서유기(오승은), 태양의 도시(토마소 캄파넬라),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폭풍우(윌리엄 셰익스피어), 달나라 여행(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광휘세계’라는 신세계에 관한 보고,(마거릿 캐번디시) 여기까지가 편집부가 뽑은 17세기라는 긴 기간동안 쓰여지고 전승된 위대한 전설과 신화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한권 한권 모두 방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실제 이야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어린이용 축약본이 과연 필요할까, 축약본은 흥미 위주로 쓰이기 때문에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 읽은 축약본을 읽고 그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성인이 된 후에도 실제 스토리를 읽지 않게 되고, 그 때문에 원전의 깊이를 세상에서 감추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현상이 우려되기도 한다. <돈키호테>와 <걸리버여행기>가 대표적이다. 


이후 챕터는 과학과 낭만주의(1701~1900), 환상소설의 황금기(1901~1945), 새로운 세계질서(1946~1980), 컴퓨터시대(1981~현재)로 나뉘고 각 시대에 해당되는 신화, 전설, 서사시, SF, 판타지 모험서들이 빼곡하게 책장을 메운다.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 팀이 작업을 하여서 각 작품에 대한 해설과 총평은 딱히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지면이지만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 자체를 요약 전달하는 것도 있고, 비평에 가까운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최근 읽은 소설이 나타날 때면 그 작품을 읽을 때 그걸 골랐던 나의 안목에 자랑스러움이 생기면서 막 흐뭇해지는데, 그 중에서는 순전히 우연히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아무거나 집어 들었는데 얻어걸렸던 작품도 많다. 지극히 일부 중에서도 아주 조각만 읽었지만 H.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신비한 이야기란 건 알았지만 해당 단편은 듣도 보도 못했던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어쩌다 손에 들어온 토베 얀손의 <무민 가족과 대홍수>(무민 버전이 하도 많아 이건 이게 그건지 그게 그건지 확실치 않음)이 그런 것들이다. 


까마득 오래 전에 읽어서 다시 봐야 할 소설들 마이클 쉐이본의 <유대인 경찰연합>가 있고, 어릴 때 읽어서 아마도 축약본이었을 테고 기억도 나지 않는,  <보물섬>, <나니아연대기>, <오즈의 마법사>, <해저2만리> 등등, 최근 5년 내에 다시 읽었던 것 같기도 한 <어린왕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반쯤 읽고 여전히 읽고 있는 중이라고 우기고 있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게르 멘 브란텐베르크의 <이갈리아의 딸들>, 해리포터 시리즈(원서로 사서 그런거니 스스로에게 이해를 구함), 관심 있어서 사두고 아직 펼쳐도 보지 못한 책들이 널렸고, 무엇보다도 최근에 읽었고 예스블로그에서 리뷰까지 찾아볼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스노리 스툴루손의 <산문 에다>, 미겔 데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여행기>,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커트보니것<제5도살장>,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하루키 <1Q84>,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올 수밖에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필자들이 설명하고 논평하고 이야기해주는 것들 사이의 갭들을 글자로 채워가는 즐거움이 아직 잘 모르는 이야기들의 겉을 핥는 것보다 더 크다. 


읽으려고 사둔 책도 몇권 있었고 보도 듣도 못한 생전 처음 제목과 저자를 들어보는 책들도 많았다. 특히 맨 마지막에 소개되는 동시대 작품들의 경우 제목은 익숙한데 읽을 생각도 못한 책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미국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많아서다. 장르 문학으로의 입지가 굳건한 유명 작가의 작품 중 딱히 1개만 꼽기도 어려웠을 거 같다. 모든 작품이 골고루 다 주옥같은, 내가 좋아하는, 르귄 여사의 작품은 <어스시의 마법사>를 꼽았다. 얼마전 <로캐넌의 세계>와 <어둠의 왼손> 등 헤안시리즈의 몇 편을 읽고 어스시 보다는 헤안 시리즈에 더 관심이 갔기에 , 어스시를 1편만 먼저 읽었는데, 해리포터 시리즈보다 훨씬 앞서 출간된 책이지만, 해리포터에서 등장하는 주요 핵심 요소를 어스시에서 많이 차용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마법사 학교라든가, 마법사의 돌, 그리고 볼더모트를 지칭하는 "you know who"가 사물의 이름에 진정한 힘이 들어있다는 사상적 기반등을 찾아볼 수 있고, 조지 마틴 RR의 하늘을 나는 용은 로캐넌의 세계에서 주요 통신수단이고, 'The winter is comming'이라는 유명한 말 역시, 다가오는 재앙, 혹은 긴 겨울에 대한 암시와 긴 공전 주기를 갖는 특별한 행성이 배경인 로캐넌의 세계와 어둠의 왼손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물론 르귄 여사 역시 소설의 여러 요소를 신화와 전설에서 많이 차용하였으므로 단적으로 오리지낼러티를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한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가 다른 소설의 매우 주요한 모티브로 동작한다는 것은 그 오리지널 소설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이 우리가 만나는 일상적 사물의 곳곳에 색상과 그림의 요소들이 침투해있는 것처럼 르귄의 책들에서는 현재 상업적으로 드라마와 영화 등의 매체에서 유래없는 성공을 거둔 작품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영감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도 기승전르귄예찬으로 빠졌다.  보고 싶은 책도 많고, 그 이유도 끝이 없는데,  그래서 이 책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삼박 사일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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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 1서〉 4장 16절


고골의 단편 <외투>를 읽다 보면 19세기 러시아에서 가난한 서민에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에 맞설 외투 하나를 장만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골보다 약 반세기 후대 문인이었던 톨스토이의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두 수선공 부부에게는 헤진 낡은 외투 조차 둘이서 하나를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옷이다. 모든 생활비가 먹는 데 다 들어간다면 어떻게 외투를 장만할 수 있겠는가. 요즘도 값비싼 브랜드의  최고급 재질 거위털 패딩이나 캐시미어 코트 같은 것들은 서민적 월급으로는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렴하고 따뜻한 대안도 시장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둘이 같이 번갈아 입던 코트 마저 더는 입을 수가 없게 될만큼 다 헤어져 버렸다. 벼르고 별러 2년을  모으고 또 모아 부인은 드디어  2 루블이라는 약간의 돈을 모았고 외상으로 받을 돈을 3루블을 받아 합치면 외투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남편에게 외상값 3루불을 받아 코트 만들 가죽을 사 오라고 내보낸다. 추운 겨울 구두공 세몬은 아내의 낡은 외투 속에는 아내의 누비옷을 끼어 입고 외상값을 받으러 다닌다.


생활고는 그에게 구두를 맞춘 농부들에게도 다르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구두값은 받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다. 반면 외투 가죽상은 그에게 외상은 절대 안된단다. 겨우 수선비의 푼돈을 받아 술을 진땅 마시고 수선할 털신 한켤레를 덜렁덜렁 들고 돌아오다가 혹독한 추위에 발가벗은채 웅크리고 앉은 한 청년을 발견한다. 그냥갈까 도와줄까 고민하던 구두수선공은 외면하던 발길을 돌려 자신의 헤진 외투를 벗어 입히고 신발을 신겨 집으로 돌아온다. 당장 가족의 끼니인 빵조차 부족해 걱정을 하던 마트료냐는 새 외투를 만들 가죽은 커녕 헤진 외투까지 남에게 주고, 군입까지 달고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잔뜩 화가나서 소리를 질러댄다. 그칠줄 모르던 잔소리는 청년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는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잦아들고, 이어서  가족이 먹을 빵과 차를 나누어주고 집에 머물게 한다. 


한 밤중에 벌거벗겨진 채 추운 거리에서 웅크리고 있던 이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구두수선공도, 그의 아내도 사정을 물어보지만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고,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이름은 미하일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집에 묵으며 구두 수선일을 배워 돕기 시작하는데, 구두 만드는 솜씨가 빼어나 가게는 날로 번창하고 멀리서까지 믿고 맡기려고 이 곳을 찾아오는지라, 살림은 나날이 


한 거만한 신사가 독일산 고급 가죽을 들고 나타나, 1년이 지나도 헤어지지 않도록 부츠를 지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고소미를 시전하여 감옥에 넣을 것이라 협박하며 돌아간다. 세몬은 자칫 낭패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썰미도 정확하고 빠른 미하일에게 일을 시켰는데, 헐, 부츠 대신 슬리퍼를 만들어 놓지 않는가. 놀라 자빠지려고 하는데, 그 부츠를 부탁했던 신사의 하인이 나타나서는 자신들의 나리가 마차에서 갑자기 죽었다며 부츠는 필요없고, 대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미하일을 더없이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게 된 이들에게,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구두를 맞추는데 그 중 한 아이는 발을 절고, 미하일은 아이들을 마치 오래동안 알던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연을 알고 보니 이렇다. 6년 전 남편이 나무를 베다 깔려 죽은 후, 만삭으로 홀로된 아이들의 엄마가 홀로 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그 아기 중 하나가 죽은 엄마에게 깔려 장애를 입었고, 자신도 8개월된 아이가 있었던 이웃이었던 이 여인이 젖을 셋에게 나누어 키우다가 자신의 아이는 2살때 죽고, 이 아이들을 입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천장을 향해 미소짓던 미하일은 이제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알린다. 알고 보니 미하일은 대천사 미카일이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죄를 지어 인간의 땅에 떨어졌고,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어서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와라. 그러면 세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벌거벗은 채로 인간의 땅에 떨어진 대천사 미카엘은 쌍둥이들을 만난 후에야 하느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진리 중 마지막까지 물음표 상태였던 남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고 이제 세 개의 해답지를 들고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구두수선공과 아내를 만나면서 첫날 알게 되었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거만한 신사의 일화를 통해 알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 쌍둥이들을 길러온 여인에게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진리는 무엇일까요? …. 는 아이들 독서토론 주제일 듯. 


농민의 교육에 힘써왔던 톨스토이는 농민들을 위해 쉽고 재미있는 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외>로 알려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누구나 복음서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러시아 민화를 각색한 것들이라고 작가해설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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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4-2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혜심 <소비의 역사> 보니 옷도 중요한 유산 품목이더군요. 옷을 차등 분배하는 것에서 고인과 얼마나 각별했던가를 살펴 볼 수 있던^^; 패스트 패션 시대지만 이런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이야기가 그저 옛날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요즘의 계급 차도 그에 버금가는 거 같아서겠죠.

CREBBP 2019-04-29 10:12   좋아요 0 | URL
한국에선 고인이 입던 옷은 약간 좀 뭔가 거림칙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나아졌지만 그래서 중고 거래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인이 무슨 병에 걸렸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밍크 코트 같은 고가품은 또 사정이 달라지겠지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안톤 체호프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이다’


얄타라는 지명은 얄타 회담으로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 등장했던 관계로 친숙하다.  이 소설에서 안나와 구로프 두 남녀가 만나게 되는 일탈의 공간이다. 우크라이나 아래 크림반도에 위치해 있는데,  톨스토이는 여기에 여름 별장을 가졌으며 체호프는 몇년간 이곳에 체류했었다고 한다.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불륜의 원조격인 안나 카레리나와 첫이름이 같다. 기차역에서 브론스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길고도 상세한 불멸의 서사 속에 담긴 안나 카레리나의 이야기와 달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얄타의 나른하고 지루한 휴양지에서 만남과 그 이후 계속되는 불륜이 아주 짧은 단편 속에 간략하게 담겨있다. 




부유하고 성실한 남편과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정사를 벌이고 파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리나와 유사하다.  안나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녀의 변덕,  그녀의 불륜으로 인해 그녀 주변 인물들의 심리 상태까지 톨스토이의 붓끝으로 속속들이 시대 속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안나 카레리나와 달리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감정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구로프가 느끼는 방식과 구로프에게 던지는 몇 마디 말에 의지한다. 


휴양지에 혼자 온 구로프는 이미 또래의 아내에게서는 싫증을 낸 지 오래로 외도를 밥먹듯 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일종의 우월적이거나 혐오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여성을 '저급한 인종이'라 지칭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상대를 갈아치우며 여성 편력을 드러내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에게 여성은 즉각적인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대상으로 설령 뛰어난 미모와 정신을 소유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오래 가는 경우가 없고, 그 일탈로 인해 오히려 늘 곤경을 겪게 하는 존재이다. 같은 기간 얄타에 혼자 온 안나가 스피츠 한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쉽게 접근해서 쉽게 정사를 벌이고 때가 되어 헤어지는 아주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얄타에서 헤어지며 이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임을 서로에게 인정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잊혀지리라 생각했던 안나를, 모스크바로 돌아온 구로프는 한 달이 넘어도 잊지 못하고 더욱 더 절절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온통 마음 속에 안나 뿐인 구로프는 그 이야기를 주위에 하고 싶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죽하면 아내에게라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동료에게 얘기를 꺼내지만 주위를 끌지도 못한다. 결국 그를 둘러싼 모든 일상의 사교는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진다. 단지 안나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가득한 구로프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사는 도시로 찾아간다. 하루를 종일 집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체념하지만 곧 (그녀가 관람할 게 뻔한) 오페라 공연 소식을 듣고 극장에 나타나 안나의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막간에 키스를 퍼붓고 애정을 고백한다. 깜짝 놀란 안나. 구로프 못지 않게 그를 그리워했던 듯 보여지는 안나는 당황해하지만, 자신이 모스크바로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한다.  이제 둘은 매달 대학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모스크바에 하루씩 와서 호텔에 묵으며 구로프와 밀회를 갖는다.


그는 안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딸에게 자상한 모습을 연출하지만 위선을 알고 탄식한다.   자신이 매일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진실된 세계가 아니며 가식의 세계이며 오로지 안나와의 짧은 만남만이 진실된 세계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거짓의 세계에 살아가야 함을 막막해하고 슬퍼한다. 안나를 대하는 그의 마음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진실만의 세계일까. 


이미 얄타에서 개에게 뼈를 주겠다며 접근해서 정사를 벌이고 나서 안나는 자신이 타락한 여자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을 더는 존중하지 않게 될 거라며 울먹이며 죄책감에 흔들리는 그녀에게서 구로프는 짜증이 났으며, 이미 죄많은 여인의 모습을 느낀다. 타락은 여성 혼자서만 했단 말인가. 함께 한 타락에, 한 사람은 타락했다며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자책하고 애원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타락을 경멸한다. 여성의 타락했다는 호들갑에 속으로는 멸시와 조소를 보내며 여전히 그녀의 마음에 들도록 처신하는 구로프의 이 '진실된' 사랑이야말로 애초에 거짓으로 가득했다. 


안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나가 얄타에 온 이유는, 부족함 없는 상류 사회에서 성실하고 착한 남편에게 지루함을 느끼고는 뭔가 새로운 걸 찾아 서다.  호기심에 가득한 채 다른 삶을 기대하며 얄타라는 도시에 찾아온 배경에는 남편에게 한 아프다는 거짓말이 있다. 안나의 일탈에 대한 환상과 구로프의 여성 편력이 만난 것인데, 남자의 처신과 여성의 갈망은 뭔가 허위와 가식 속에서 뭔가 균형을 찾은 듯하다.


'다른 삶이 있을 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죠. 제대로 살아 보고 싶었어요! 제대로, 제대로…. 호기심이 저를 괴롭혔어요..(안나 세르게예브나)'


이제 둘은 도둑처럼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수밖에 없다. 남들과 함께하는 의미없는 모든 공적 사교가 끝난 시간 오로지 안나의 눈물과 함께 하는 짧은 만남은 서로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비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안나를 만나러 가는 날 머리가 세어버린 자신을 보며 여성들이 다 늙어빠진 자신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무얼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구로프의 실제 모습이 아닌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갖지 못한 어떤 환상을 구로프에 덧씌워 놀고 그 환상을 좋아한다는 사실 그 짧은 깨달음.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의미없는 일상과 진정한 사랑 중 무엇이 진실이냐는 물음에 답해야 할 사람은 독자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까지와 달리 추악해진 자신을 발견한 구로프가 이제 와서야 진실된 사랑을 하기 시작했고 도둑 사랑이라는 이 굴레를 어찌 헤쳐나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안나 카레리나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지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직도 호텔 방에 앉아 자신의 나이의 두 배인 늙어가는 구로프를 안으며 안타까움과 이룰 수 없는 연모에 눈물 흘리고 있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사내의 가벼운 조소와 거친 오만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늘 그를 선량하고 특별하며 고상하다고 말했으니,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그녀를 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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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아홉 가지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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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델센의 인어 공주가,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지느러미와 말을 포기하고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두 발을 얻었다면, 오스카의 동화에서 인어 공주를 사랑한 어부는 인어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영혼을 제거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어부와 그의 영혼> 이야기다. 동화적 순수함과 영혼의 의인화가 주는 기괴함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9개의 이야기가 모두 동화같은 이야기들이다. '같은' 이 아니라 이미 동화책으로 어릴 때 혹은 어린이들이 드글거리는 치과나 소아과 같은 곳의 대기실에서 흔하게 집어들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행복한 왕자>나 <저만 아는 거인> 를 여기 저기서 많이 본 듯 익숙했지만, 정독을 해보면 어린 아이들에게 단순한 교훈이나 흥미를 주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라기 보다는 훨씬 풍부한 컨텐츠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배경의 묘사 등은 충분히 아름답고 우화적으로 쓰여 있지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비극적인 결말을 갖는다. 크게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석류의 집> 두 파트로 나뉘는데, 각각 1888년도와 1891년도에 따로 출간된 동화집의 제목이다. 앞의 이야기들이 조금 더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직조된 것에 반해 뒤의 이야기들은 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들로, 두 파트 모두 삶의 비참함과 탐욕의 대조, 허영과 욕망, 죄, 구원 같은 무겁고 진지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그 이야기의 이면에 숨은 작은 디테일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의 해결불가능한 모순들을 풍자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어부와 그의 영혼>이 특히 흥미로와 요약을 남긴다. 


우연히 인어를 낚아 올린 어부가 처음엔 그 인어를 풀어주는 댓가로 물고기들을 유인을 위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는데, 물고기도 물고기지만 자신이 그 인어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는 인어의 사랑을 얻고 싶어 구애하지만, 인어의 세계에는 영혼이 없으므로 영혼을 떠나보내야 구애가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영혼 따위,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는 영혼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한 어부는, 신부를 찾아가 영혼을 제거하는 방법을 묻지만, 신부는 노발대발하며, 영혼은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진 것이며, 인어야말로 버림받은 존재들이며,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짐승에 불과하며, 그런 사악하고 타락한 것들과 함께하려는 자네 역시 타락한 존재라며 내쫓아버린다. 


실망한 어부는 상인을 찾아가 자신의 영혼을 팔겠다고 제안하지만, 이번에 상인은 그의 영혼이 닳아빠진 은화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차라리 그의 몸을 판다면 노예로 사겠다고 제안한다. 이번엔 마녀를 찾아가는데, 마녀는 젊고 아름다운 어부에 반해 자기랑 춤을 추면 영혼을 파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하고, 드디어 영혼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알아낸다.


The shadow of the body is the body of the soul.


사람들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몸의 그림자가 아니라 영혼의 몸이란다. 바닷가에서 달을 등지고 서서 네 발에서 그림자를 잘라 버려. 몸의 그림자를 말이야. 그러고는 네 영혼에게 널 떠나라고 하면 돼.


그리하여 어부는 마녀에게서 받은 살모사 자루 달린 칼로 바닷가 모래밭에서 그의 영혼인, 영혼의 몸인, 그림자를 잘라낸다.  그의 영혼은 슬퍼하며, 어부에게 어부의 마음을 함께 달라고 부탁하지만, 만일 마음을 주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며 거절한다. 영혼은 비정하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달라며 재차 부탁하지만, 어부에게 마음은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기독교적 사고관에서 정신을 다시 마음과 영혼으로 나눈다는 발상이 신기한데,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를 보면, 오스카 와일드에게 영혼은 인간의 정신 중에서도 특정한 부분을 말하는 것 같다. 신부에게는 보석 같은 것, 하지만 상인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 사랑할 때에는 필요하지 않지만, 악과 선을 구분할 때는 필요한 것. 동물(인어)에게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있는 것. 게다가 마음과 영혼의 관계 역시 석연치 않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이 그의 마음도 달라고 하는 걸로 봐서, 마음은 몸에도 속할 수 있고 영혼에게도 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이란 어떤 종교적인 믿음 혹은 윤리적인 잣대, 선과 악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몸을 떠난 그의 영혼은 해마다 바닷가에 찾아와서 그를 부른다. 홀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경험한 모험담을 들려주는데, 인어 공주와 바닷속 왕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부에게, 그에게서 떨어져나간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유혹하는 상상도 못한 재물과 신기하고 기이한 모험과 세상 구경도 그에게는 별 관심사가 못되는데, 3년이 되던 해에, 하얀 발로 춤추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에, 자신의 인어 아내에게서는 없는 하얀 발에 대한 욕망이 생겨, 하루만 세상을 구경하고 오기로 동의하고 그의 영혼을 따라 나선다. 


어부가 뭍에서 나가 영혼의 손을 잡는 순간 그림자는 다시 어부에게 달라 붙으며, 소녀를 보여준다던 그의 영혼은 그를 이 도시 저도시로 데리고 다니며 절도와 폭력과 살인을 교사한다. 어찌된 일인지, 어부는 영혼이 시키는 대로 어린 아이를 때리라면 때리고,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을 죽여 금덩이를 훔쳐내라면 그렇게 한다. 어부는 일단 한 번 떼어낸 영혼을 다시 붙였다면 두번째로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자신의 손을 동여매고 입을 막고 영혼의 지시에 저항하고 바닷가 앞에 서서 인어를 부르는데, 인어는 나타나지 않고... 부서지는 파도에 밀려온 하얀 거품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의 영혼의 타락은 어떤 의미일까. 어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3년간 그의 영혼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많은 경험을 한다. 이 부분은 다시 찬찬히 읽어야 해석이 가능할 것 같긴한데, 영혼의 타락은 그 도시에서 생긴일과 관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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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난해성이야 제쳐놓고라도, 이 작품이 연작인지, 단편인지, 헷갈렸다. 처음 줄간될 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과 <기교들>로 따로 출간되었던 것을 두개로<픽션들>에 합친 것이라 그렇다. 첫 작품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본편이 있고 그 본편과 연결되는 듯이 보이는 <1947의 후기>가 또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연작처럼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1947의 후기라는 제목을 갖지만, 목차상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속해있다.


내가 꼽는 '가장 잠에 빠지기 좋은' 책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첫권인데, (늘 읽다 잠들어서, 2편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이 소설 역시 잠을 불러오는 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비교적 얆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읽기만 하면 늘 잠에 빠져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의아했는데, <틀뢴>이 독자의 기선을 완전 제압해 놓은 후는 살짝 풀어주는 느낌으로, 그 다음부터는 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우선 해석적 난해성은 제쳐놓더라도, 실존인물들과 가상인물들이 마구 섞여 한도 끝도 없이 언급되어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이 요약 불가능한 이 첫번째 소설을 억지로라도 요약해보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이론들이 브리태니어 백과사전의 해적판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세계의 지식과 관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내가 내 식대로 파악한 전체적 줄기고, 실제로 그런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제목을 볼 때, 틀뢴은 17세기에 결성된 비밀 결사이고, 우크바르는 그 특정 판본의 백과사전에 실린 지명 이름으로, 실제 틀뢴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하는 국경과 역사,  언어, 문학 등이 모호한 세계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 저기서 그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매혹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 침투할까.


이 모호하고 이상한 세계의 국가들은 태생부터 관념적이고, 그리하여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동사로 이루어졌거나(남반구) 형용사로만 이루어졌다(북반구).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있고, 그들은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p23)’한다. 이 곳에서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므로,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언어 모두에서 왜 명사가 없는지를, 이해 가능한 몇 안되는 부분이다. 명사는 축약이고, 압축이다. MP3 포맷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역의 음폭을 모두 제거하여 깨끗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작디 작은 기기의 어느 작은 하드웨어가 담을 수 있는 적은 용량에 압축한다. jpg와 png 같은 사진 파일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정보들만 축약하여 효율적으로 저장한다. 이처럼 언어(명사)는 모호하고 들쭉날쭉하고 무한한 어떤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그 복잡성을 마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그 단어가 오랫동안 품어온 뜻에 어긋나는 의미들을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면 형용사나 동사는 다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고 단정(p25)’한다. 또다른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동시에 있다는 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연상되어 소름돋는다. 작품의 알레고리보다는 뭔가 괴상하고, 신비한 걸 찾다 보니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도 생각난다. 아니나 다를까, 진중권은 틀뢴의 이러한 알레고리를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사이버 스페이스와 연결짓는 통찰을 보인 바 있다. 해석보다는 모호한 채로인 게 더 선호될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틀뢴이라는 비밀 결사가 생긴 17 혹은 18세기와 같은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이 전면에 대신하면서 가치관,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된 것을 주목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은 일단 황당함에 있어서 <틀뢴...>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읽기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훨씬 수월했다. 그 중에서 <원형의 폐허들>이 가장 흥미로와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틀뢴의 난해성을 토로하다 보니 한쪽이 되었다. <원형의 폐허들>에 대해서는 훨씬 얘기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다음으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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