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나남창작선 115
김주욱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폰이 삼성에게 자신들의 디자인 침해를 주장했던 내용 중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모양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미국 내 법정에서 대부분의 애플의 주장에 삼성이 패소했지만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 이라는 디자인 부분에서는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애플의 영원한 세계적 조롱 거리가 됐다. 우리는 사각형, 세모, 네모와 같이 일반적인 형태에 대해 그것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태생적으로 네모이고 납작할 수밖에 없는 스마트 폰 모서리에 디자인 변화를 주기 위해 조금 둥글리고 슬림하게 만들었다고 디자인 침해를 주장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빈약한 지를 반증한다. 그러나 진실은 둥근 모서리 디자인 너머에 있다. 삼성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애플이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아이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용자 인터페이스 등을 집중적으로 벤치마킹하여 여러가지 디자인적 조합들을 다각도로 응용하고 변형하여 전설의 명기가 된 갤럭시 시리즈를 세게 시장의 정상에 세웠고, 그 결과 세계 시장 탈환에 성공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은 애플 주장의 일부일 뿐, 전체적으로는 누구라도 인정할 명백한 표절이었다. 

 

처음,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 이건 내 수준의 제한된 언어와 빈약한 사유로 리뷰가 가능한 종류의 소설이 아니야.. 였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던 중 내가 만난 키워드는 '표절'이라는 자극적인 단어였다. 이 작품(표절)을 쓴 김주욱 작가가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라 주장하는 기사였다. 게다가 공모전 심사 위원에서 자신이 낙선시킨 작품을 표절했다니, 쇼킹 그 자체였다. 신동아 2013년 3월호 기사이고 인터넷에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 이것이 다시 소설로 엮여 나왔다.


기사 중 실명을 밝히지 않은 K라는 비평가 겸 교수는 '그 텍스트를 가져다놓고 다시 읽으면서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신동아는 표절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근거로 교수이면서 동시에 문학평론가인 사람의 권위를 이용하면서 막상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어떤 문학평론가가 그러는데 표절 맞다더라.라는 거다. 문학 비평가가 표절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소신을 실명으로 직접 표절을 사회에 알리고 비평하는 것이 비평가의 의무 아닌가? 그 비평가는 무엇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는가. 김주욱이 주장하는 중견문학인들의 문학권력 때문에? 그렇다면 비평가들은 모두 문학권력의 눈치만을 살피고 그들에게 기생하고, 표절당한 젊은 문학지망생의 억울함을 묵과하나? 

 

소설가 이승우는 책에서 G라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 책에서 G라는 인물은 대략 이렇게 묘사된다.

비평가들로부터 윤리적 관점이 창작의 궁극적 동기여서는 안된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G는 후배들이 자기를 보는 줄 착각하고 계속 재미없는 농담을 했다.24

항상 예의바른 행동에 억양도 나지막하고 차분한 선비인 양했다. 24
맛없는 안주같은 중견 소설가 27
G의 의뭉스러운 눈빛을 계속 피해가며 25
유독 G는 의뭉스러워서 대면하기 싫었다. 29

 

독자는 이렇게 처음부터 표절을 당했다고 상상하는 작가의 임의적 감정과 판단에 의지해, G로 변신한 이승우를 만난다. 작가가 표절의 주장을 소설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면 자신의 판단을 납득시킬 수 있는 행동과 대화에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이 책에 한 인간으로서의 G는 없다. G의 인격과 도덕성은 정당한 사유 없이 형용사로 정의된다. 소설 <표절>은 1인칭 시점으로 '내'가 느낀 G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로 전달하다가, 3인칭으로 시점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3인칭 전지적 시점에서도 작가는 객관적이지 않다. G의 내면에 깊숙히 들어가서 G의 고뇌와 G의 처절한 창작에 대한 몸부림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G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여 마땅찮은 시선을 보낸다.  

 

형님은 문학상과 창작기금 잘 챙겨 먹잖아요.

부러우면 너도 열씸히 써. 먹물들이 좋아 할 얘기로 말이야. 128

이 소설 <표절>에는 또 다른 소설이 있고, 그 속에 또 다른 소설이 있고, 그 속에 또 소설이 있다. 소설들 속에서는 알파벳으로 된 인물들과 사람이름으로 되 인물들이 섞여 있는데, 알파벳 대문자 이름은 실제 현실의 인물들을 말하고 이름으로 된 인물은 완전 가상의 이름을 말하는 듯하다. 그 모든 소설 속 소설에는 이승우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그의 정보들을 그대로 가진 G가 등장하고, 그 G는 계속해서 의뭉스럽고, 탐욕스럽고, 창작의 소재가 고갈되어 베껴쓸 다른 작품들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여자 교수와 여자 아이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늙고 심술맞은 기득 권력이다. 한편 본인을 빗댄 Q는 그와는 반대이다. 그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디자인과 직접 발로 얻은 정보로 남들보다 앞서는 창작물을 만들어 내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모방한다. 그리고 자신 Q의 작품과 작품 활동을 끊임없이 알리고 방어한다.

 

골치 아픈 철학적 사유가 깔린 부분을 읽으면서는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몰라도 작가가 인간 존재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린 것 같아서 밑줄 치면서 곰곰이 따져 보기도 했다.

다시 실제 작가가 표절 이라 주장한 실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를 들어 피카소의 작품이 누구의 표절작이라고 하자. 우리늘 피카소의 그림이 매우 훌륭하기 때문에 그것이 누구의 작품을 실제로 표절한 것이든 아니든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화가의 작품에도 경외감을 갖게 되고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처음 원작자가 사용한 기법, 사용 재료, 의미, 미학적 가치 등등.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에서 표절을 말하려면 해당 작품의 서사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주욱 작가와 말이 안통하는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작가는 이승우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승우의 글은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골치아픈 철학적 사유가 깔린 부분이고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이고,  '문학상과 창작 기금을 챙겨먹'기 위해, '먹물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만을 쓰는 중견 작가이다. 작가 김주욱에게 이승우의 글은 먹물들이 좋아할 글이지 자신은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가 표절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대신 이승우가 가진 팩트들을 가진 작가 G를 창조하고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부패하고 무능한 문학 권력과 변태적이고 의뭉스런 인격을 불어넣어 인신공격을 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이승우 작가의 모든 정보를 이용해서,  G라는 교수의 꼬투리를 잡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견 소설가는 공지영 박범심류의 인기 작가가 아니고 매체에서도 무관심한지라 사생활이 노출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G에 대한 행동과 심리 묘사가 얼개 없이 허술하다.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창작지원금과 책의 홍보용으로 인용된 그에 대한 비평 등은  Q의 G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G는 거의 이런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주입시키기에 급급하면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작품에 대해서는 직접 구체적으로 비평하지도 못한다. 

 

이승우의 작품 <지상의 노래>는 무겁고 어렵고 복잡하고 옴니버스 형태의 다중적 인물이 각기 다른 세계를 살아가다가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구조적으로 복잡한 형태를 갖는다. 게다가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작품의 일부인 6장 카다콤 중에서도 일부인 미용실이라는 작업공간이다. 300여 쪽 중 서너장에 불과하고, 그 서너장 중 마저도 나의 판단으로는 <허물>의 풍경, 주제와는 비슷하지 않다. 미용실 내 거울 이 나오고, 소파에 앉았다는 표현을 <허물>에서 먼저 썼으니 표절이라는 주장이다. 그림의 예를 들자면, <허물>이 인물화라면, <지상의 노래>는 대성당의 벽화라고 할 때, 벽화의 한 쪽 구석 아주 작은 어떤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 인물화  그림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6장 카다콤 부분을 펼쳐보자.   미장원 장면은 그 중 주요 인물인 후의  인생 여정 중 매우 일부이며 미용사와 미용실 자체의 공간적 배경은 이 작품내에서  거의 상징성을 갖지도 않는다. 후가 접대하는 사모님은 미용실이 아닌 마사지실이고 그 공간은 김주욱이 <허물>에서 묘사한 생동감 넘치는 미의 창조로서의 공간과 달리 폐쇄된 금기의 공간이고 사람들 몰래 육체적 욕망을 사고 파는 공간이다. 또한 후가 미용실에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김주욱의 <허물>과는 달리 미용 기술을 배우거나 욕망을 채울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누이를 찾기 위해서다.  그가 찾는 그의 누이가 1장쯤의 어딘가에서 시골의 미용실에서 떠나기 마지막까지 일했기에 누이는 도시의 어딘가에서 미용실을 할 것이란 정보를 듣고,  이 도시 저 도시의 미용실을 하나씩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성접대까지 하게 되는데 누이의 소식을 알려주는 그 성접대의 공간인 마사지실이 바로 <허물>에서 그대로 베꼈다는 그 생동감넘치는 미용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상의 노래>에서 성행위가 이루어지는 마사지실이라는 공간은 <허물>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미용실, 식당, 커피전문점, 술집, 길에 채이는 이런 일반적인 직업군에 대해 소설적 모티브니, 영감이니 하는 말로 자신만의 아이디어라며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은 아이폰의 모서리가 둥근 네모를 자기들만의 디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그냥 네모 자체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  두 소설은 주제도 문체도 다르고 소설을 크게 분류하자면 범주 자체가 다르다. 허물은 미용실에서 일어나는 현장감이 자세하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특정 행위에 대한 배경적 묘사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지고 인물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행동하는가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생생한 현장감이 없고, 또, 그래서 <지상의 노래>에서 후가 전전한 곳이 미용실이건 식당이건 당구장이건 목욕탕이건 별 상관이 없다. 단지 누이가 있을 만한 곳이며, 성을 판매할 수 있기만 하면 소설의 정체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만큼, 미용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중요한 곳이 아니다. 반면 <허물>에서 미용실은 소설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큐나 현장 취재보다도 더 상세하게 미용 행위, 미용 용어, 미용인에 대한 예술적 갈망이 드러난다. 또한 <허물>의 최명규가 미용실을 전전하는 이유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인 것에 반해 <지상의 노래>에서 후가 미용실을 전전하는 이유는 오로지 누이가 일하는 미용실을 찾기 위한 여정일 뿐, 미용 기술을 배우거나 할 목적은 전혀 없다.

 

소설은 삼각 ,사각적인, 중첩의 액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내부 액자와 외부 액자들 사이들이 딱히 구별해야 할 이유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또한 같은 인물이 액자 사이를 오가는 유기적 관계도 잘 드러나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로서는 왜 이런 구조를 택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맨 안쪽 가운데 있는 소설이 실제 김주욱이 이승우에게 표절당했다는 작품 <허물>인듯 한데. 이것은 표절의 문제를 떠나 단독 작품으로 읽는 재미가 있다. 미장원 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생생함이 작품에 생기를 주고, 뱀 사육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치밀한 현장 취재가 강렬한 행동 사건들과 맞물리며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그러나 이 맨 안쪽 작품만으로 소설을 냈다면?  물론 <표절>만큼 이목을 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작품 <표절> 및 표절 스캔들을 둘러싼 김주욱 작가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진실로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맨 안쪽 소설에서는 G나 Q, R과 같이 현실 인물로 설정한 알파벳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순수한 문학의 형태는 차명규와 김원장 최건호라는 완전 허구의 이름을 이 안쪽 소설일 뿐이다. 그 바깥쪽은 모두 김주욱 자신 Q와 이승우 G가 현실에서 그들이 가진 객관적 팩트들을 그대로 가지고 반복적으로 재등장한다.

 

두번째 안쪽 액자에서  김주욱 자신은 Q이고 자기 작품을 표절한 교수는 G이다. 이 두번째 액자에서 G는 실제 언론에 알려진 교수의 약력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방대 교수,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작가, 노벨상 후보감, 관념적인 글,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설적 모티브로 삼는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실제 인물의 객관적인 평가와 팩트를 소설의 인물에 그대로 차용하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부정적 이미지를 덮어 씌었다. 표절에 대한 의심이 진의라고 해도 그 방법이 노골적이고 치졸하다. 상습적인 표절, 여대생을 향한 음흉한 시선, 긴 생머리에 대한 은밀하고 변태적 욕망이 그런 것들이다. 반면 본인과 대응되는 Q라는 인물은 본인 삶에 대한 애착과 자전적인 저술 태도가 배어있다. 일본 잡지에서 디스플레이 디자인을 그대로 베꼐내는 풍토 속에서 독특한 소재를 이용한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고, 자신이 만든 시안이 다른 브랜드에서 그대로 도용당한다. 또 공모전에 출품할 의상 스케치를 여자 디자이너에게 보여줬는데 제작이 불가능하여 포기했던 디자인을 그 여자 디자이너가 그대로 갖다가 수정하여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고 유명 브랜드로 이직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인의 분신인 Q를 옹호하려면 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환했으며, 왜 K라는 교수를 통해 소설을 쓰게 했는지.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베끼는걸까? 이 소설에서처럼 표절이 Q에게 유독 많이 일어나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가 워낙 독창적이고 우수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이디어를 베끼는 건가? 혹 모서리가 둥근 네모는 모두 아이폰의 아류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이제 세번째 액자로 나와 보자.  이 프레임은 아마도 이것이 넌픽션이라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과 Q, 이승우와 G를 직접 연결시키기 위한 장치로 쓰인 듯한데, 여기서는 작가 G가 표절했다는 Q의 주장의 세부 내용을 분노와 좌절감과 섞어 전달한다. 여기서도 객관적인 사실에 주관적인 감정을 섞어 진실을 왜곡한다. 여기서도, Q와 G 사이에 실제로 오간 이메일과 표절 시비에 대한 G의 대응 내용, 뉴아시아 기사 내용이 픽션을 거의 가져다 쓴 듯했고, 나머지 부분 G 작가의 작가로서의 비양심적인 심리 묘사로 강한 Q의 감정 이입을 유도한다. 문학으로 갖추어야 할 은밀함이나 메타포 없이, 직접적으로 감정적으로 표절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비루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여기까지가 마지막 액자에서 K라는 교수가 이 표절 사건을 소설화 한 소설이다. 맨 바깥쪽 액자는 그 전 액자 세 번째 액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K라는 교수가 Q를 대신해서 그 안쪽 소설들을 쓰고 바깥쪽으로 나와 원래의 1인칭으로 전환된다. K교수는 여류 소설가이고 후배 Q를 대신해서 표절 시비를 소설로 쓰는 역할을 한다.  이 마지막 액자가 실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걸 조금 더 강조하기 위해 K라는 인물을 1인칭으로 등장시켜 G에 대한 1인칭적 느낌과 주관적인 서술을 보태고 Q를 초월자적 선의의 인물로 묘사하는 데 이용된다. Q가 나에게 다가와 키스한다는 이 뜬금없는 마무리. 이건 또 뭥미. 이런 여러겹의 프레임적 구성은 참신한 시도라기 보다는 G를 향한 일차원적 분노를 겹겹이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사실 이렇게 길게 리뷰를 쓸만한 컨텐츠를 갖지는 않았다.  단지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고 난 후 표절 시비가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는 전혀 실리지 않고 유독 한 잡지사에 기고된 후 그 정황을 알고 싶었는데.  기사에서 주장한 것 이상의 컨텐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책 내의 작가의 원 소설 <허물>과 <지상의 노래> 둘 다 읽어본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표절 이라는 자극적 소재와 마치 중견 소설가의 비리를 고발하려는 듯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이 책은 뜨기 위해 작정하고 둔 치졸한 무리수로 읽히는 건 왜일까. 책을 읽는 행위는 자기 시간을 투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신이 앙심을 품은 기성 작가에 대한 표절의 고발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이용하여 시선을 끌고, 창작이라는 문학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소중한 독자의 시간에 왜곡된 자신의 주장과 넋두리를 심는 건 표절만큼 위험한 발상이다.
 

삼성이 아이폰을 베껴 천문학적 배상금을 물도록 판결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서리가 둥근 네모 라는 디자인적 요소에 대한 애플의 주장은 조롱거리이다.  아이폰이 미국 법정에서 삼성을 상대로 이긴 건 삼성이 실제로 구석 구석 많은 디자인 요소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벤치마크하고 표절했기 때문이지 모서리가 둥근 네모 라는 일반적인 형태 때문은 아니었다. 



height="90" src="http://api.v.daum.net/widget1?nid=53894500" frameborder="no" width="10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산드라 2014-04-1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신 분은 이 작가에게 애정이 있는 분 같네요. 이 작품이 그런 사연이 있는 작품인 줄 몰랐습니다. 덕분에 알게 되었고 <표절>만 읽은 저로서는 이 작품은 그저 표절이라는 문단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 생각해 보게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자기 창작물은 소중한 거 아닐까요? 그런 시비가 있었다고 해서 자신의 작품을 그 사건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을거 같은데요. 소설은 그냥 소설인 거죠 뭐.

CREBBP 2014-04-23 19:57   좋아요 0 | URL
소설은 복수하기 위해 쓰여졌는데, 복수도 제대로 못한 거죠.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제 관점에서는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는 시도였을 듯 싶습니다. 조금 격앙된 톤으로 썼다가, 조금씩 고쳤습니다. ㅎㅎ

우리두리 2014-04-1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사기 전에 이 리뷰를 봤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네요. 첫장을 읽자마자 아 이거 잘못 샀다는 느낌이 팍 왔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건 아니건 이런 흥미로운 소재를 제대로 풀어내기에는 작가의 역량이 부족한 듯 싶습니다. 재미없는 소재는 아니나 글을 너무 못 쓰셨더라고요. guiness님의 글을 읽으니 작가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으셔서 그랬나봅니다.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길게 리뷰를 쓸 만한 컨텐츠가 없어요.

CREBBP 2014-04-23 19:59   좋아요 0 | URL
제 말이... 저는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를 읽으면서 어떤 경외감 같은 게 있었는데,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만일 표절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너무나 실망할 것 같아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시껄렁한 잡글 2/3, 감수성 돋는 사색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글 1/3 정도 된다. 잡글은 주로 김중혁이 썼고 사색적인 글은 주로 김연수가 썼다.김중혁의 글은 처음엔 주로 주변 일상사여서 재미없다가 끝으로 갈수록 점점 유머러스하고 익살맞아진다. 

 

이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네21에 이 칼럼을 연재한 때는 2009년. 그들이 각자 스페인 남부와 스웨덴에서 여행담도 아닌 여행담으로 컬럼을 때우기 시작해 중간 중간 조금 진지했던 시점은 고 노무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우리를 남기고 떠나가셨을 때, 용산참사가 있던 때, 그리고 DJ마저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였다. 뒤편으로 갈 수록 컬럼은 점차 자리가 잡혀 둘의 주고받음에 하모니가 생기지만 전체적으로는 라디오 토크쇼에서나 할 법한 잡담들도 일관되게 채워져 있다. 

 

재밌는 건 자기들이 시시껄렁한 글을 쓰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독자에게 주지시키거다. 알고 있거든. 그런데, 가끔 진지 모드와 잡담 모드를 자주 회전하는 김연수와는 달리 좀 더 시시껄렁한 쪽에 무게를 두는 김중혁이 더 그 소리를 많이 한다. 시네21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느니 이러다 짤릴 것 같다느니 명색이 영화 잡지이니 영화 칼럼을 써야 하는데 처음부터 별로 준비가 안되어 있거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편집장의 요청을 억지로 받아들여 없는 시간 짬을 내 쓴 글 같다.

 

처음엔 서로 친한 초딩 동창이라는 점을 이용해 둘 사이의 일화나 관계를 바탕으로 흥미를 끌만한 거리를 찾아 좀 유머러스하게 나갈 작정이었던 듯 싶다. 근데 썩 웃기지도 않고 썩 재밌지도 않다. 그 둘 사이에 절절한 애정전선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한 건 아니다. 소설 쓰고 번역하면서 먹고 살기 힘드니 쉬엄쉬엄 쉽게 써지는 글도 써야 많이 팔리고, 돈도 벌고, 유명 베스트작가의  소셜 포지션이 유지되니까. 진짜로 형편없는 글로 심심하면 책 한번씩 내는 유명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포트노이드의 불평 이라는 영미 소설을 함께 읽는 중인데, 불친절하게 앞뒤 설명도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영문 모를 불평을 읽다가 지겨위질 때 꺼내 들면 휘리릭 휘리릭 페이지 수 잘 넘어간다. 또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 김중혁 작가의 엉뚱발랄싱겁진지함을  조금 알다 보니 시시껄렁한 자기 얘기도 그의 스타성에 대한 대가로 너그러이 읽어줄 수 있는 친절함이 샘솟는다. 그에 비해 김연수는 참 다재다능하다. 쉽고 가볍게 쓴 글인듯 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건, 그의 문학적 출발이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원칙은 그렇다. 격렬하게 현실을 풍자하지 않으면서도 불가능한 디테일을 사용했다면 그건 서사적 곤경을 손쉽게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확률이 높다.23

 

칼럼을 시작하면서 둘 다 별로 영화를 자주 안보는 편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한 칼럼당 한 편씩은 보고 쓰는 것 같다. 처음엔 옛날에 본거 울궈먹는 듯했고 나중엔 울궈도 국물 안나오는지 개봉관 영화들 들고 나온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컬럼이라면 좀 더 성의 있게 같은 영화 한편을 두고 약간의 갑론을박이 있었으면 조금 더 긴장됐을 듯 싶다.

 

왜냐면 우리도 한번 쯤은 이런 아이러니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언제? 사랑이 끝난 뒤. 늘 언어는 사랑보다 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무지한 채로 사랑하고, 이별한 뒤에야 똑똑해진다.25

 

김연수의 감성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여성 팬들이 꼬이지 않을 재간이 있나.

 

지난 5월 말, 1988년 이후 우리 세대가 흉내내며 살았던 거대한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세계는 붕괴했다.  내 시점을 타인과 공유 할 때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와 타인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최종적으로 구축됐다. 여긴 상대성 세계다. 중략 이제는 그걸 인정 해야 만 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계 다. 기나긴 청춘이 이로써 끝났다. 151

 

김연수는 2009년 5월의 절망을 이렇게 적고 있다. 386 세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흉내냈고, 그것은 끝났다고 했다. 영화 <마더>의 김혜자에 대한 평론적 시각에  그 날의 절망을 절묘하게 오버랩했다. 김중혁은 사색 대신 유머를 선택했다.

 

<인간 김연수>

 

 

김중혁 술자리에서 잠드는 후반부만 빼면 유쾌하다. 40대가 더 기대되는 인간 ★★★★ 

그는 이렇게 시네21의 20 자평처럼 인간 김연수에 별점을 매겨 평가해본다.

 

사람이 만일 바뀔 수 있는 거라면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의심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의심을 어떤 식으로든 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놓여 있을 때에야 가는 것이리라.중략. 자신을 의심 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바꿀 수 없다. 194

그리고 김연수가 전 호에 제기한 의문에 가끔 이렇게 포텐을 터트린다. 영화 차우의 제인 구달과 비델 사순 장면도 국가대표의 까불지마 장면도 실제 영화를 볼 때보다 김중혁이 웃긴 이유와 웃긴 장면을 설명해 놓은 글이 더 웃겼다. 어제 오늘 소설 보다가 많이도 낄낄거린다. 혼자서 미친X처럼.

 

부질없는 일인 줄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모든 경상도 사람들을 대신해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과하고 싶다. 힘을 합치자고 내민 손을 물어 뜯어버린 그 모든 이빨들에 대해서, 무임승차를 하고도 돈을 대신 내 준 사람을 걷어찬 그 뻔뻔한 무지에 대해서. 223 김연수

DJ가 자신의 그래프를 끝내고 좌표 바깥으로 사라졌을 때 나 역시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을 본듯한 기분이었다. 231김종혁

 

그랬다. 같은 해 우리는 내 마음 속에 단 한 분 나와 내 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했던 대통령 한 분을 부엉이 바위 밑으로 밀었고, 근대화 과정의 불의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정치인을 잃었고, 용산 건물의 화염속에서 내 동포들이 불에 타 죽는 것에 분노하지 않고 묵과했고,  김중혁과 김연수는 씨네21에 시시껄렁한 컬럼을 썼고, 나는 미 미시간 주 앤아버라는 작은 대학도시에서 거리에 사람이 넘치는 생동감있는 도시 풍경을 가진 한국이 마치 내 땅이 아닌 것처럼 외면했다.

 

* 볼만할 영화 <걸어도 걸어도> <업>-픽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위라는 말은 저속한 비속어는 아니지만 행위 자체가 민망한지라 우리는 말할 때, 그 단어를 직접 쓰지 않고 여러가지 에둘린 표현을 쓴다. 성기는 엄연한 신체의 구성품인데도 거룩한 유전자 전달의 목적 보다는 똥오줌과 같이 더러운 것을 배출하거나 비도덕적 혼외 정사의 상징처럼 만들어진 특정 용도의 비속어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고, 오늘날의 십대들은 그게 뭔말인지도 모르고 태연하게도 즐겨쓴다. 나도 '꼴리는 대로' 라는 표현이 마음 끌리는 대로라는 말인줄 알았다.

 

내 세대의 대부분 기간 중 수많은 성기와 성행위를 뜻했던 비속어들이 대중화되면서 저급함의 감도가 완화되는 동안, O지 라는 단어가 꿋꿋하게 금기화된 비속어로서의 위치와 지휘를 박탈당하지 않은채 숨겨 보호되는 데에는 뭔가 불가사의한 이유가 있을 거 같다. 금기를 뛰어넘는 문제작이라는 카피라이트는 행위보다는 단어의 사용에 더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주에서 금서로 지정한 것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금기시된 단어들이 책을 메웠기 때문이지, 그 내용이 인간의 비도덕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타락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번역자 정역묵은 많은 고심을 했겠지만 단어의 선택에 있어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왜?. 원서가 언어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면 번역서도 금서가 될만큼 강한 언어를 써야하지 않은가. 거기에 몇십년동안 차마 조폭 형님들조차 모셔두고 쓰지 못한 보호받은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O지다. 이 책에 그 단어는 태깅감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그 붙이는 난에 O지 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포트노이증은 저자 필립 로스가 만들어 낸 가상의 병명이다.  소설 내의 정신과 전문의 슈필포겔이 맨 앞장에 맨 뒷장에 한 번 나오는데, 포트노이를 상담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포트노이 병으로 명명하고 이를 발표한 것으로 짐작하도록 설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의 전부를 구성하는 그의 독백은 슈필포겔과 상담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읽힌다.  특히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곁들인 설명은 포트노이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 불가능한 애증을 설명한다.

 

이렇게 근사한 병명을 하나 얹으면  그의 난해하고 망측하고 어이없는 자기비하적 성적 행동과 고백을 이해하기가 편해진다. 가령 사춘기의 과도한 자위와 독립 이후의 문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는 그리 문란하지도 않은) 성관계는 유대인으로서 민족 정체성과의 치열한 싸움이며 동시에 애증 관계의 엄마에 대한 반항과 자기 방어로 나타난 기제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달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런어웨이>에 실린 소설 <침묵>에서 주인공 줄리엣의 딸이 가출한 단서를 이 책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엄마라면 가출 말고는 살아낼 방도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엇다. <런어웨이>는 내면 심리 묘사를 직접 작가를 통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유추하도록 만드는 편이었는데, 엄마 줄리엣은 '딸과 떨어져 지낸적이 없다,',  '우리 딸은 엄마에게 불평할 기회를 한번도 준 적이 없다.', '딸애는 나에게 기쁨을 준다,', '하루라도 연락하질 않으면 못견딜 것이다,',  '산만한 자기와는 달리 땔애는 사색적이다' 라고 딸과의 관계에 대한 단서를 주었다. 딸은 어떤 캠프에 들어갔다가 바로 쪽지 한 장 안남기고 수십년동안 사라져버리는데, 줄리엣은 독자에게 그 오랜 세월동안 품어왔을 원망과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책을 덮고도 왜 떠났을까. 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렇게 엉뚱한 책에서 그 단서를 찾다니. 결국 딸에게 그 엄마는 자신과 결부된 모든 세상과 함께 버려버리고 영원히 잊고 싶은 그런 종류의 엄마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엄마들이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엄마들은 자신이 자식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포트노이의 냉소적인 불평 속에 드리운 엄마라는 존재의  압도감은 섬뜩하고 집요하다. 식탁에서 4살 짜리 아이에게 칼을 들고 남기지 말고 먹을 것을 강요하고, 하교 길에 프랜치프라이를 사먹는걸 알게 되었을때 쓰레기를 먹는다며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부짖는다. 날카로운 불평에 가득한 회상이긴 하지만 이렇게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강압과 회유를 통해 끊임없이 전통적 가치관과 관습의 틀에 옭아매는 부모가 있다면 포트노이병이 가상이 아닌 실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까지 생각이 미친다.

 

유대인 가정은 대체로 모계의 입김이 센듯하다.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에서도 유대인 하워드는 30살이 넘어서까지도 엄마와 같이 살면서 모든 가사는 물론 치과에 데리고 가는 일까지 중요한 일의 결정을 엄마에게 맡긴다. 그런 가정이 유대인의 일반적인 가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포트노이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인습적 전형성에서조차 비켜져 있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개처럼' 일해 경제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권위는 바닥이고, 어머니의 입김으로 집안의 모든 게 움직인다. 중학 중퇴 정도의 학력인 아버지의 가정내에서의 무기력함은 어머니의 강압적 요구가 만들어내는 불만에 불만족을 보태면 보탰지 어떤 방법으로도 릴리프를 주지 못했다.

 

 

사실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긴 분노의 시기동안 내가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터져 나올 것만 같던 아버지의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일 밤 저녁식사를 할 때 내가 무지하고 야만적인 송장 같은 아버지에게 퍼붓고 싶었던 나의 폭력 역이었죠.63

 


그가 시달리는 것은 부모와 가정의 인습적 틀의 뿌리가 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그 까다롭고도 촘촘하게 삶을 규제하는 율법들을 생활 속에서 엿볼 수 있고, 한 때 우리나라 부모들의 훌륭한 양육의 본보기로 삼았던 유대인의 양육방식의 실제를 접할 수 있다. 맞다. 사춘기마저 20대로 옮겨 놓는다는 헬리콥터 맘이 등장한 배경에는 알게 모르게 지향해왔던 유대인 모방적 교육철학이 보태어졌을 지도 모른다. 

 

코셔 방식의 엄격한 조리과정을 통과한 것만 먹는 까다로운  식규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만감, '이방인'과의 엄격한 분리, 각종 종교 기념일 예식과 복장... 유대인의 삶은 정말로 민족 주체성 하나로 타이트하게 조여져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좋다. 그들이 옳다고 치자.  그들의 신이 수억의 지구인들 중 그들 민족만을 선택해 구원해줄 주거나 말거나 거기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치자. 그들은 왜. 그 긴 세월 2천년동안 나라 없이 핍박과 냉대를 받으며 함께 나라를 이루고 살 작은 땅떵어리 하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오면서 바다 건너 먼 땅에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그 민족적 어둠의 시대에조차 섞이는 걸 거부하고 조소를 참으며 그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걸까.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무엇일까. 그들의 지배계급이 신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은 피지배계급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 순종적으로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제하도록 만든 걸까.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차라리 나더러 밖에 나가 도둑고양이나 나무를 위해 옷을 갈아 입으라고 하지 그래. 그건 그래도 존재하기라도 하잖아. 92

 

 

온 세상이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어머니는 모르세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에요. 중략.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되겠어요110

 

 

홀로코스트의 시대 무력하기만 했던 자신들만의 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걸까. 그들은 왜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걸까. 포트노이에겐 그리도 참을 수 없던 온갖 종류의 엄격한 규율이 그들의 정체성을 지킨것일까. 우리를 보라. 한 땅덩어리에서 단일민족으로 500년동안 국가를 이루고  지켜온 유교적 관습이 한 방의 개화기 이후 단 백여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않은가. 물론 형식적인 부분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우리는 태평양과 대륙이라는 거대한 지리적 경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똘똘 뭉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서구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 민족은  2천년이 넘게 흩어져 살면서 어떻게 그 까다로운 율법과 억압적 양육 방식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은 것일까.  

 

포트노이가 크면서 점점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집안의 부조리와 모순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좋은 머리와 천성적인 의협심을 품은 진보주의자의 눈으로 성장과 함께 깨닫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포트노이는 타고난 의협심과 정의감과 영특함 유대인으로서의 모순적 자만심과 배타성 사이에서 반항과 배교라는 선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인 어머니의 그림자를 털어버리지 못한채 길을 잃고 자위에 몰두하며 죄책감을 갈구했다.

 

 

청소부를 마치 노새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존엄성에 대한 열망이 아예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구요. 112

 

유대인을 가르켜 흔히 하는 말 중에 부모가 살아있는 유대인은 15살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서른이, 마흔이 넘어가도 유대인의 아들은 소년인 채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인 듯하다. 그는 유대인의 양육방식과 자식에게 거는 기대에 극한의 환멸과 저항을 느낀다. 착한 아들, 나의 천사, 집안의 기둥. 아이들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체벌과 강압 뿐만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아이의 장래에 목을 거는 부모의 과한 기대는 앨릭스에게 천벌처럼 무거운 부담이다.

 

 

나를 위해 그러지마세요. 제발 당신 삶이 지금 이 모양인 이유를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앨릭스를 내밀지 말아 주세요! 나는 모든 사람의 존재의 이유가 아니니까요! 나는 내 평생 그 짐을 지고 다니는 걸 거부 합니다! 172

 

 

우리 자신이 너무 안쓰러워 큰 거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네요. 유대인 부모의 아들들. 슬퍼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들이 말이에요. 이 죄책감의 거친 바다를 흔들흔들 헤쳐 나가느라 지긋지긋한 멀미에 시달리면서요.173

그 억압과 강제를 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쇠라도 녹일 듯한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구와 호기심을 성적 방종을 통해 방출한다. 그래봤자 소년이고, 그래봤자 자위다. 그가 참을 수 없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사를 핑계로 자위를 하러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집안은 이방인들의 음식을 사먹어 그렇게 됐다며 홀라당 뒤직어지고, 그의 끈적한 배설물은 욕실의 이곳 저곳으로 튀고.. 곳곳에 웃음이 터지는 부분은 이런 종류의 강박을 죄책감으로 끌어내는 자기비하적 코미디다.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이용 가능한 구멍에 이걸 계속 꽂아댈 것인가? 처음에는 이 구멍에, 그러다가 이 구멍이 지겨위지면 저기 있는 구멍에... 하는 식으로. 이게 언제 끝 날 것인가? 아니, 왜 이게 끝나야 해?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규범에 순응하려고 ? 151

 

그는 자위의 시절이 끝나자 부모가 금기하는 이방인, 즉 앵글로 색슨 백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며 성적 방종의 끝까지 지만 그와 동시에 죄의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도 싸운다.  포트노이는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는 자신을 혐오하는 듯 자신을 조소하고 비웃는다. 백인 여자 친구의 집에서 백인 이방인 문화를 동경하는 방식은  집요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조롱과 야유이다. 

 

 

나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고맙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심지어 생명 없는 물건에게도. 나는 의자로 걸어가 바로 의자에게 말합니다 실례합니다. 고맙습니다. 냅킨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며 나도 모르게 냅킨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322

 

 

 

좋은아침 그가 말합니다. 중략. 그는 8시부터 12시 사이에 시간들이 좋기를 바랍니다. 즉  즐겁고 유쾌하고 유익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우리모두 서로서로 4시간동안 기쁜 마음으로 많은 것을 이루기를 바라는 겁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보세요. 정말 멋있습니다. 좋은아침. 똑같은 것이 좋은 오후에도 적용됩니다. 또 좋은 저녁에도. 또 좋은 밤에도. 이럴수가. 324

 

그리고 그의 성적 욕망은 유대인으로서는 유대인이 아닌 자신에게 금지된 이방인 백인과의 행위로 향하고 그 행위는 성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선생님 내가 내 X지를 이 여자들 보다 여자들의 배경에 더 깊게 꽂는다는 겁니다. 마치 X을 통해 미국을 발견한 것처럼. 미국을 정복할 것처럼. 3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조차 사랑하지 못한다. 그가 그토록 저항해온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에게 스탬프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유대인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유대인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서른이 되도록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방황하며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가엾은 유대인은 결국 자신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2천년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유랑을 시작한다. 유랑 중 그가 도달한 곳은 유랑의 민족 유대인이 최종 기착한 팔레스타인의 땅 바로 그 곳 이스라엘이다. 그 곳에 어머니같이 강철같은 유대인 여인이 있다. 그 곳에서 그는 발기하지 못하고. 자기 땅에서 발기하지 못하는 그는 유대인을 품지도 못한다. 포트노이는 스스로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인식한다.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것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양육방식인데 포트노이가 정작 화나는 대상은 아버지이다.  그에게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머니 자체인데, 스스로는 그렇게 신을 부정하고 배교를 했음에도 결국 자신을 위해 종교를 바꾸지 않을 거라는 여자친구를 끝내 용서하지도 못하고 헤어진다.

 

마지만 장을 넘기자 슈필포갤은  말한다. 자 상담을 시작할까요. 그의 상담은 어디부터 시작될까. 이 부분은 좀 이해가 안간다. 이제까지의 독백은 슈피포겔에게 하는 말로 이해를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슈필포겔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인 듯하다. 진실은 여기까지이고, 그는 유럽에서 온 심리상담박사에게 거르고 순화해서 자신을 전달할 것이다. 그는 그런 비속어를 쓰지는 않도록 교육받은, 부모가 살아있는 유대인 남자는 15세인, 15세 유대인이므로.

 

 

*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읽는 경우에 따라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소리내서 발음하기 어려운 음흉한 욕설과 비속어를 포함한다. 필립 로스라는 미국 최고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정보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인지 예측이 어렵겠으나, 이 책이 필립로스가 서른살 중반쯤 쓴 책임을 감안한다면(1960년대) 성적으로 그리 과한 건 아니라고 생각된다.중간중간 아메리칸파이 류의 코믹한 부분이 많지만, 또 중간중간 갑자기 배경설명도 없이 장면이 바뀌고 인물도 바뀌고 누구를 향해 무엇을 얘기하는 지 모른채 불평하는 걸 읽어야 하는 지루함도 있다. 말년에 쓴 에브리맨과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영화로 제작된 휴먼스테인과 비교한다면... 젊을 때가 역시 패기 한 번 좋구나... 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6-10-14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히 흥미롭네요. 유대인은 모계혈통으로 인지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엄마가 유대인인 것 보다 확실한 건 없겠죠... 코셜도 도마가 세개라고 하더라고요. 육류 유제품류 채소류던가 서로 섞이면 안 되니까 조리도 설거지도 따로 한다고요. 현대에 와서까지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가정은 드물테지만 가끔 안식일 지킨다고 문명을 거부하는 모습들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그려지더라고요. 아미쉬처럼은 아니고 전깃불을 켜고 끈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정확하게는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안 그래도 리뷰 찾는다고 책 검색했더니 표지에 c word가 눈이 들어와서 이 책 뭐지?? 했어요. 이런 내용일 줄이야.... 참 유대인들은 흥미로와요. 혹시 핀켈스타인이 쓴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책을 읽어보셨을까요? 유대교로 개종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나 그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이스라엘의 실태 등등을 알 수 있어요. 이 책도 봐야겠습니다 ㅎㅎ

2016-10-14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먼댓글연결 방법 안내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1F/1B 참 재밌게 읽었다. 빨간 책방에서도 가끔 매력적이고 묵직한 목소리를 듣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더 매력적이다. 김중혁은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을 능청스럽게 끌고 가며 독창적이고도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번 작품은 Deleting을 소재로 하는 장편 소설이다. 언젠가 빨간책방에서, 자신의 인터넷에 쓴 글들이 자신이 죽어서도 가상세계의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생각을 하면 섬뜩하다는 말을 이동진과 함께 하면서, 그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이 소설인가봉가.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소설은 사람의 발자취, 흔적을 지워주는 탐정의 이야기다. 탐정 구동치와 계약한 사람은 죽은 뒤에 기억되고 싶은 부분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p. 328).

읽고 싶은 책 1순위

 

2. 완전변태

 

 이외수는 트위터로 유명해지기 한참 전, 문단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때에도 동향인 춘천에서는 유명인이었다. 그의 기이한 외모와 모험(?)적인 행동들은 가벼운 가십거리였지만 그의 작품보다 더 유명했다. 그래도 아주 초창기의 문학을 좋아했었던 기억이 있는(이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나는 한동안 소설을 내지 않는 그가 소설가로서의 영감이 바닥나서 그냥 기인으로서의 이미지와 잡글, 잡그림으로 먹고 살기로 작정 했나부다 했는데 2005년 이후 9년만에 소설집을 내놓았다.

 

아마도 1981년작, <들개> 였을 듯하다. 기억에 있는 이외수의 소설 중 대략 이런 내용이 있다. 3일을 굶으면 새벽에 마을에서 첫 밥을 짓는 냄새를 제일 처음 맡고, 길거리 전봇대가 떢볶이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빈 건물에 살면서 허기 때문에 쥐를 잡아먹는 대목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기와 가난 위에 얹어 놓은 삶의 치열함과 젊음의 치기를 맑게 흘려 넣은 소설류를 토크쇼에 TV 광고, 정치판까지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존재가 된 지금 기대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내는 소설인 만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 저지대

 줌파 라이히. 풀리처상 수상작가. 5년만의 신작. 

 『저지대』는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선택으로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두 형제와 가족의 70여 년간의 일대기다. 부조리와 사상과 혁명으로 어지러운 인도와 제3국 미국이 배경인 이 작품은, 누군가의 자식이자 형제이자 남편인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남은 가족이 어떤 상실감을 겪어나가는지, 거기서 어떤 선택이 비롯하며 어떤 인생행로가 뒤따르는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직선적으로 그려나간다.

지난 작품들에서 개인의 문화적 배경과 인간관계를 인종과 국적을 넘어 보편적 문법으로 파고든 작가답게, 줌파 라히리는 인도의 현대사를 작품에 끌어오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기억과 상처 그 인간적 정서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더듬는다. 이 작품이 특정 문화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수미일관 진중한 자세를 유지하는데도 막힘없이 읽히는 건 쉬운 언어로 물처럼 편안하게 틈입하는 줌파 라히리만의 문체와 스토리텔링 덕분이다. <출판사 소개글>

 

 

4. 오리지널 오브 로라

 

 미완성의 책에 대해 왜 그리 찬사가 쏟아지는지 궁금하다.

"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남긴 미완성 유작. 나보코프는 죽기 전 원고를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아들 드미트리는 오랜 고민 끝에 작품을 출간하기로 결정했고, 원고는 나보코프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나보코프는 원고지가 아닌 인덱스카드에 초고를 집필했다. 그리고 카드 뭉치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문장을 고치거나 순서를 재배치하는 식으로 글을 수정하다가, 원고 정리가 끝나고 나면 초고를 전부 불태워버렸다. 즉 미처 완성하지 못한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나보코프의 창작 현장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인 셈이다. 나보코프의 친필과 원고가 쓰인 인덱스카드의 모습을 그대로 소개하기 위해, 인덱스카드 각 장을 페이지 상단부에 실었다. <출판사 소개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아이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암 환자에게는 항암제보다는  고통을 잊도록 도와주는 진통제가 더 절실하다. 절망이 끝을 보이지 않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는  어쩌면 이런 책이이야 말로 절실했던 건지도 모른다. 필요는 수요를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비루한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홀로 내 던져진 청춘에겐, 그리하여 산업 역군이 되어 있어야 할 총명한 인재들이 공무원 과거 시험 준비로 영혼이 바싹 마른 고달픈 청춘이 되어 버린 시대에겐 위로와 치유와 같이 달콤한 언어 외에는 달리 그들을 구제할 대안이 없을지도 모른다.

 

견뎌라.
네 운명을 사랑해라.

 

이 어처구니 없는 운명론을 스스로 말하기는 챙피했던 모양이다. 니체를 빌려온다. 누구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철학자 니체를 끌어들이고, 아모르파티라는 뭔가 감각적이고도 세련돼 보이는 외국어인지 전문용어인지를 첨부하면 운명론이라도 면죄부가 주어질 지도 모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수상한 그녀>에서 노년 전문 교수가 학생들에게 노년의 특징 강의 도중 한 학생은 늙으면 뭐하러 사냐며 자기는 늙기 전에 죽을 거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도 어릴 땐 어른이 안될 줄 알았다. 어른이 되면 어떻게 살지. 어른이 감내해야 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와 노동을 떠안고 어떻게 살지. 두려웠지만 어찌어찌 살아졌다. 누구나 어른이 다가오고 피할 수 없이 어른의 책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평범한 가정에 시련이 닥쳐 나락으로 떨어져  죽는 것 말고는 달리 살 방법이 없은 것 같아도 대개는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 암에 걸리기고 하고. 차 사고도 나고. 하루 아침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배우자가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 그렇게 인생엔 온갖 시련이 있지만 저마다 교회를 가거나, 그냥 앉아서 참거나, 참지 못해 미치거나, 어쨌든 그렇게 살아간다. 너무 불행해져서 못 살것 같아도 그렇게 살다 보면 또 그 나름대로 적응하고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책도 어떤 사람들에겐 그런 상황을 지나는 순간엔 짧은 위로가 될 수 있다.

 

니체가 말했다는 아모르파티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철학적 용어인데 김난도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대략 그 운명론에 가깝다. 개인의 운명은 사회가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괜히 저항하느라 힘빼지 말고, 아무리 비루한 현실이라도 그 현실, 그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  아 알흠다워라.

 

육체적 통증이 격심할 때에도 한 순간만 살아넘기고 나면 견딜 수 있다 깊은 좌절이 그 바닥을 보여 주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호두껍데기로 단단히 감싸고 꼭 하루씩만  살아가면 견딜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신기하게도 지나간 얘기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74

 

사표를 원하는 직장인에게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면 떠나고 떠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자신은 공중목욕탕에도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면서 (자신과 같이 성공한 사람들을 본받아) 고독한 시간에는 자신을 성장시키라고 말하며, 결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준비나 자신감이 확실해 지는 시점이란 영원히 없으므로 마음 먹었으면 실행하라고 충고한다. 사랑에 대한 충고는 어찌 보면 그럴싸해 보일 수도 있겠다.

 

사랑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없다. 소통이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항상 곁에 있고,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더 이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랑은 다하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면 사랑은 유지된다.  그리고 그 소통의 끝에 섹스가 있다.184

이 말이 그럴싸 해 보인다면 소통 대신 아무 긍정적 단어나 갖다 붙여 보시라. 이해, 감동, 배려, 용서, 베품, 나눔, 공감, 등등등. '이해가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감동이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배려가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수백가지 단어를 넣어도 성립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 그렇게 만만한 거다. 사랑이 만만한 게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방법이 만만한 것이겠지. 그럴싸해 보이지 않나.

 

여기서 영감을 얻어 갑자기 떠오르는 사랑에 대한 나의  의견.  사랑에 대한 나의 빈 칸에는 소식이라는 말을 넣어본다. 소식이 끊겼을 때가 사랑이 끝났을 때이다. 소식을 전할 수 없는 백 가지 이유는 모두 핑계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면 천가지 이유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랑은 소통이니 이해니 배려니 하는 그런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이 지어내는 단어가  아니에요 교수님. 사랑은요 만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인거에요. 멀리 있어 그리운 마음은 환상이랑 부르는 거지요. 뭔가를 단순화시킬 땐 그것만이 아니면 안되는 고유성과 설득력이  필요하지 않나요.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로 소통할 수 없어도 왕자 옆에 있기 위해 인어는 사람이 된 거지, 소통할 수 없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거든요. 따라서 소통할 수 없으면 섹스도 무용지물이란 말은 틀렸어요.  소통할 수 있다고 해서 인어가 인어인 채였다면 왕자는 단 한 순간도 인어공주가 바라는 눈빛을 보내주지 않았을 거거든요. 다가갈 수 없으면 바라볼 수조하 없기 때문에 옆에 없으면 사랑이 끝난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변영주 감독과의 트위터 설전에서 변씨 편을 들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다만 별 거 아닌 한마디에 아무르파티인지 뭔지 외국말을 주워다가 철학자를 동원하고 별거 아닌 생각들이 마치 영혼잃은 청춘과 애어른들의 삶의 지침서인양 불티나게 팔리고 홍보되는 현실에 대한 작은 저항에 발끈해서는  만국민이 바라보는  공개 설전 트위터로 끌고가는 모습 역시 이런 종류의 착하고 예쁜 책을 짓는 멘토로서의 이미지와는 한참 다르다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은 앞으로도 쭈욱 안고 가셔야 할 듯.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 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 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 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이런 글이 프레시안에 가감없이 턱 하고 실렸을 때, 변영주가 느꼈을 기자에 대한 배신감을 생각하면 내 속이 다 쓰리다. 이런 말은 너랑 나 사이에서만 오프더 레코드로 한 말이잖니.  프레시안의 인터뷰 기자가 사적인 견해 오프더레코드를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화근이었어도 이걸 읽고 발끈 해서 공개 설전으로 치고 나서는 김난도 역시 어른이 되는 종류의 책을 써낼 만큼 성숙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서울대 최고 인기 교수이고, 온국민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라면 변영주가 한 말은 자신 개인을 향한 말이 아닌,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자본기득세력들을 향한, 즉,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잣대로 대안도 없이 이리저리 리드하고 자기 착취를 유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치유니 힐링으로 그들을 또다시 기만하고 있는 자기계발류 산업 자체를 향해 있다는 것 쯤은 알아차려야 했다.

 

아픈가. 아파하시라.  지적질 당해서 아픈 것이지, 몇백만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멘토의 권위에 난 작은 흠집 때문에 아픈 것이지,  절대적 고통, 절대적 절망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당신의 아픔은 당신이 위로하는 사람들의 아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