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1 - 그의 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오광 지음, 김택규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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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4대성인, 근엄함이었다. 걱정했다. '소설'과 '공자'를 싶게 연결짓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건 이유없는 걱정이었다. 혹시 나와 같은 생각에 망설이고 있다면 일단 몇 페이지만 넘겨 보시길. 시작부터 강렬하게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다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헤쳐가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 그의 사상, 논쟁…재미와 학문적 깊이를 겸비한 그야말로 '명작'이다.

제나라, 노나라 양국의 동맹회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동맹회담이라고는 하지만, 제나라의 국력은 노나라를 압도하고, 꼬투리를 잡아 노나라 군신을 살육하려고 하는 이름뿐인 동맹회담이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노나라를 위해 제나라의 음모에 맞선다. 제나라의 대재상 '안영'의 음모, 공자의 논리정연한 대응, 흥미진진하다. 한가지만 살펴보자. 제나라측은 자신들의 '보정'을 선물로 주며 노나라가 이를 받을 경우, 예법을 빌미로 살육하려 한다. 하지만 공자는 노나라 군주의 옥패를 정에 묶어 제나라 태공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난다. 논리정연한 공자의 대응은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 결국, 노나라는 공자의 활약덕에 제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난다.

공자는 노나라의 개혁을 위해 사병혁파 등을 주장하지만, '양호'등 기득권세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다. 관련 서술을 보자. '일행은 마차 일곱 대를 몰고 남문을 나와 곡부를, 노나라를 떠났다. 그들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부담없이 웃고 있었다. 부담은 죄다 곡부에, 노나라에 남겨놓았다. 공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노나라를 떠나 한해 한해 각 나라를 전전하며 무려 14년을 떠돌 운명임을.'(p.117) 이렇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공자일행은 월나라 범려를 만난다. 범려는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대패당했으며, 월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인의로 월왕과 월나라를 구해 달라'고 청한다. ('와신상담'이란 고사로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한 것) 이에 공자는 제자 '염구와 사마우', '자공과 공야장'을 시험한 뒤, 자공과 공야장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기로 한다. 과연 이들은 오왕 부차를 설득할 수 있을런지? 결국, 월왕 구천은 부차의 마부가 되어 목숨을 부재한다. 잠시 치욕을 감내하고 목숨을 부재하여 미래를 도모하자는 범려의 주장을 받아 들인 것이다.

전성자의 초청으로 제나라에 가게 된 공자일행은, 전성자의 음모와 대재상 안영의 건강상태를 알게 되고…이어질 혼란상황을 예견한다. 재상 안영의 나라를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던, 명재상 안영.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다. 초반부 공자, 노나라 군신들과 대립각을 세우던 그를 보고 악인이라 단정지었던 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단지 그는 생각이 달랐고, 충성해야 할 대상이 달랐을 뿐이다. 결국 제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향하는 공자일행.

위 영공은 정치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학'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학과 함께 자고, 음식도 학에게 먼저 먹이는 등 그의 '학'사랑은 유별나다. (누가 알았던가, 이런 그의 모습에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놀랍게도 그는 위나라의 권력을 형식상의 부인인 미녀 '남자'에게 일임해 버렸다. 이어지는 '남자'와 공자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역시 신이 아닌 하나의 인간이었다. '남자'의 빼어난 미모에 마음이 흔들리는 공자.(p.232) 저자의 서술을 보자. '후대 사람들은, 성인의 마음은 탐욕과 무관하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그건 그들의 바램일 뿐이었다.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공자에게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p233) 하지만 소문은 이상하게 퍼져, 공자와 남자가 남녀관계를 맺었다는 말까지 나도는데….

한편, 위나라 태자 괴외는 부친과 남자를 주시하며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공자는 위 영공, 괴외, 남자 사이에서 예와 정의를 위해 노력한다. 과연 위나라는 어떻게 될런지?

<공자>시리즈는 공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제대로 재현해 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인물과 사건. '대작'이란 말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 '중국대륙의 김용'으로 불린다는 작가 '가오광', 기억해 두겠다. 그의 다른 작품 <사마천>, <진시황의 한>등도 빨리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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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1-2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뭔가 역사와 관련된 책들은 그다지 취향에 맞지는 않는데,(제가 잘몰라서;;;) 강력추천이라니...저도 봐야겠네요.+_+

쥬베이 2008-01-24 18:12   좋아요 0 | URL
저는 역사관련된 책 좋아해요^^
사실 <공자>시리즈는 크게 기대안했는데, 정말 재밌는거 있죠
흥미진진한 중국드라마를 보는 듯하면서, 교훈이나 깊이는 대단하고...
놀랐답니다.
 
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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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를 정해 보았다. '사진으로 본 카스트로와 쿠바', '오스왈도,로베르토 살라스가 본 카스트로'. 제목에 오스왈도,로베르토 살라스 부자와 사진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카스트로의 쿠바>는 카스트로에 대한 평전내지 자서전이 아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쿠바혁명을 가까이서 지켜 봤던 살라스 부자가 사진을 통해 이들을 반추하는 형식이다. '글'보다도 '사진'이 주가되는 책. 행복한 여정이었다. 혁명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열정, 처음 접한 그들의 모습, 그리고 쿠바…. 많은 것을 얻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이러하다. 살라스 부자의 사진이 소개되고, 이를 바탕으로 그레고리 토지안의 글이 이어진다. 로베르토의 생생한 사진 설명을 곁들여서. 그럼 '살라스 부자'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제1장 전체는 바로 이들 부자 이야기다. (특히 오스왈도 살라스. 1장만 보면 '오스왈도 살라스'에 대한 책인 듯함^^) 미국에서 중하계층의 삶을 살던 오스왈도 살라스는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 쿠바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정부의 공식 기관지 <혁명>의 사진기자로, 카스트로의 수행원으로, 그가 카스트로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에 담았기에 우린 이 책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장부터 본격적으로 '피델 카스트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카스트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독재자' 이 하나였다. 하지만 알았다. 얼마나 편향된 생각이었는지를, 미국 중심 세계관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아직도 대다수 쿠바인들은 카스트로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카스트로가 쿠바인들을 억압하는 독재자라면, 왜 그들은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것인지, 부패한 바티스타 정부를 몰아냈던 쿠바인들 아닌가?

'피델 카스트로'의 젊은시절 사진(p.75,76)은 충격이었다. 수염 없는 깔끔한 얼굴에 균형잡힌 몸매, 말숙한 정장차림, 멋진 모델을 보는 듯 하다. (남자가 봐도 근사한 멋진 모습) 덥수룩한 수염에 긴 머리칼만 보다, 저런 말숙한 모습을 보니 놀랍기만.

그럼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뤄낸 쿠바혁명에 대해 알아보자. 미국내 반 바티스타 운동중 하나였던 '7월 26일 운동'을 주도하던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함께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벌인다. 57년 1월, '라 플라타'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해 점점 바티스타를 압박하던 반정부군은 '7월 26일 운동'의 후신인 시에라 마에스트라 반군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미국마저 바티스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 결국, 59년 1월 1일 새벽2시,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달아나고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다.(p.90이하 참조)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은 '체 게바라'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체 게바라 관련 내용은 '제5장'에 소개된다. 이 책이 체 게바라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 많은 비중은 아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다양한 사진을 접하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고독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p.165), 귀여운 딸 '일디타'의 손을 잡고 웃고 있는 모습(p.166),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앉아 집중하고 있는 모습(p.169), 바다위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독서하는 모습(p.170,171), 흙투성이 군화를 신고 자발적으로 근로를 하다 잠시 쉬는 모습(p.173 천진한 웃음과 약간 나온 배가 어찌나 정겨운지^^), 말하다 시가를 든 손을 강조하는 모습(p.181)등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보석같은 사진들이 기다리고 있다.

<카스트로의 쿠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잘 알지 못했던 카스트로, 쿠바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특히 살라스 부자의 사진은 인간 카스트로, 인간 체 게바라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의 열정, 숨결, 정신이 묻어나는 사진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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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구판절판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귀 안쪽에 있는 반고리판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감각신호들이 달라지는 현상이나 뇌의 지시를 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은 우주 공간에서나 신혼여행지에서나 늘 일어나는 일이다. -17쪽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까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애당초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고 깨문 게 아니다. 왜 먹지 않고 놔두느냐는 주위의 채근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먹을 게 없을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볼썽사나운 껍질뿐만 아니라 초라한 알갱이까지 갈부수고 난 뒤에야 차라리 그냥 막연하게 상상하던 때가 더 좋았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미혼녀와 유부녀, 그 사이에는 무중력의 공간의 황홀감 따위는 없다. 그저 혼자 빗자루를 들고 정리해야 할 부서진 감정의 껍질나부랭이들만 파몰아칠 뿐이다. -19쪽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 넣은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숲 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이어짐)-55,57쪽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빰에 물들고 싶은 저녁 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이어짐)-55,57쪽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며넛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라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이어짐)-55,57쪽

다락 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 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55,57쪽

질투란 숙주가 필요한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질투란 독립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딸린 감정이다. 주전선수가 아니라 후보선수라 사랑이 갈 때까지 가서 숨을 헐떡거리면 질투가 교체선수로 투입된다. 질투가 없다면 경기는 거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13세기 사람 앙드레 르 샤플랭은 "질투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했다. 자신들의 사랑을 충분히 확인한 사람들 중에는 급기야 질투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을 느끼는 부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을 만나서 질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를 위해서는 시기심이라는 단어가 준비돼 있다. 그런 점에서 어휘력이 부족하면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곤란이 따른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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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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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에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라는, 이성교제 문제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여고생이 자살사이트 익명게시판에 적어놓을 만한 문장이 나온다. 원서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문학사상사에서 낸 번역본에는 혹시 독자들이 이 문장을 놓칠까봐 고딕으로 인쇄한 게 눈에 띈다. 한샘국어식으로 따져서 밑줄을 쫙 그을 만한 중요한 문장인가보다. 그래서 우락부락한 인간들이 모여 앉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만큼 생각해봤더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뿐, 푸른 하늘에도 별은 떠 있듯 평온한 이 삶의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웅덩이가 숨어 있다.-38,39쪽

잊혀진다는 것은 물론 꽤나 슬픈 일이지만, 잊혀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마을은 괴기할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를 들으며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117,118쪽

어울리지 않기로는 '이런 걸 과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만 내게 잔뜩 남겼을 뿐인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보지 않으면 보고 싶었고 만나면 즐거웠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뭔가가 결여 돼 있는 듯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지는 어떤 것,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감미로워지는 어떤 것, 대일밴드의 얇은 천에 피가 배어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스케이트를 지칠 수밖에 없는 어떤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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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서평단 알림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 지음, 차익종 옮김 / 르네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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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릭 게코스키'는 옥스퍼드대 영문학 박사로 평론가 출신의 초판 희귀본 거래업자다. '희귀본 거래업자'라는게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거니와, 영문학 박사인 평론가가 희귀본 거래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그가 진행했던 BBC라디오 방송 '희귀한 책, 기막힌 사람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저자의 말부터 들어보자. "이 책은 초판본 수집가들이 찾아낸 20세기 중요 저서들의 내력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책의 내력뿐만 아니라 희귀본 거래업자의 내력도 함께 다루었다. (중략) 희귀본 한 권이 손에 들어왔다가 최종적으로 누구한테 어떤 곡절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제일 흥미 있어 하는 부분, 즉 금액이 얼마까지 올라갔는지 등등.(p.17,18)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이 출간되기까지 과정은 충격적이다. 무려 2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23번째 출판사에서조차 '허황되고 지루한 판타지, 별 볼일 없고 따분함. 요령부득'이라는 평을 받는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작품이 저런 대접을 받았다니…다행스럽게 젊은 편집자 찰스 몬티스의 노력과 E.M 포스터의 호평에 힘입어 이 명작은 힘겹게 빛을 보게 된다.

월리엄 골딩과 그의 문헌정리 작업을 하던 저자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가 본 윌리엄 골딩은 고집이 드세고, 신랄한 기분파다. 원고를 보여 달라는 저자에게 투덜거리고, 기분내키는 대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술을 좋아한다. 윌리엄 골딩은 말년에 금전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희귀본 거래업자인 저자에게 <파리대왕> 자필원고 판매를 의뢰한다. 단 100만 파운드를 받아오라는 단서를 달아서. 저자는 말한다. "20세기들어 그 비슷한 가격을 호가한 자필 원고는 카프카의 <심판>뿐입니다. 그렇게 지불하고 살 사람은 없습니다."(p.48) 하지만 윌리엄 골딩은 자필 원고의 가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고집을 볼 수 있는 모습.

[해리포터와 현자의 돌. J.K 롤링] 저자는 J.K 롤링이 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현자의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p.235)고 말한다. 그도 그럴 법 하다. <해리포터>시리즈 덕에 그녀는 영국여성 중 최고의 갑부대열에 올랐으며, 출판사와 저작권대행사 역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 작품역시 12군데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지금 그 출판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난 <해리포터>시리즈를 읽지 않았다. 어떻게 1권을 선물받아 앞 몇 페이지만 넘겨 봤을 뿐이다. 해리포터 열풍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도 비슷한 의견이다. "(전략) 그렇다고 너도나도 입을 모아 책을 칭송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중략) 로알드 달과 C.S 루이스의 작품을 원천으로 교모하게 짜집기한 데다가, 부모 간섭을 떠나 신나게 학교로 떠난다는 마법사 전설을 공공연히 덧씌워놓은 것이다."(p.243) 초판본 거래시장에선 해리포터 1권 <해리포터와 현자의 돌>의 초판본 가격이 폭증하지만, 저자는 '단단히 미쳤다'(p.242)고 생각한다. 그에게 해리포터 열풍은 '마법에 걸린' 뭔가 특이한 현상일 뿐이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무척 인상적이다. 희귀 초판본 거래업자이자 평론가인 '릭 게코스키'가 펼쳐내는 책이야기는 희귀 초판본처럼 소중하고 흥미롭다. 20세기 위대한 작가들과 관련된 에피소드, 희귀 초판본의 놀라운 가격등,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보시길 권한다. 소장가치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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