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이 사는 법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지음, 조일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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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이 사는 법>은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유부남 시리즈' 세 권 중 작가가 선별한 목록에서 다시 역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맞을 만한 이야기를 추려 묶은 소설집이다.(p.395참조) 선별하고 추리고 추린 베스트 앨범과 같은 작품. 하지만 이야기 초반 떨떠름 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화적 이질감, 독특한 이야기전개, '이 정도 포스라면 굳이 외국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나'란 생각까지 들었다. 기발하고 대담한 국내작가들은 많다.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반부 느낀 아쉬움이 어느 순간 감탄으로 돌변한 것이다. [결혼 첫날밤에 일어난 일](p.209)부터 완전히 몰입했다. 두고두고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일정 수준의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이 계속 이어진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이 뒤쪽에만 몰려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수록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은 일관되어 있으며 취향이 갈릴만큼의 차이는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진가를 조금 늦게 발견했고, 천천히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 진거라고.

[키신저와의 인터뷰], [마지막 여인]등 초반부 수록작품엔 주인공의 독백과 심리묘사가 많다. 거기다 남미특유의 유머감각에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특징을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느냐가 최대 관건.

뒤늦게 발견한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진가라. 뭘까?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옛날 이야기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있다. 결혼 첫 날밤을 보내던 아내가 느닷없이 남자라고 고백하는 [결혼 첫날밤에 일어난 일](p.207)은 남미의 결혼문화가 근저에 깔려 마치 옛날 이야기를 접하는 듯 흥미롭다. 또한 [룩소르 호텔에 온 여자](p.233)는 미스터리 추리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구성이 빼어나다.

둘째,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소재에 관심을 둔다. 사실 직접적으로 초현실적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남미 고유의 문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속에서 평범한 것도 몽환적으로 변해버린다. [수상한 그림](p.283)이나 [사라진 남녀](p.311), [룩소르 호텔에 온 여자](p.233)등의 평범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는 박성원 작가가 <우리는 달려간다>에서 선보인 환상적인 작품세계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 <유부남이 사는 법>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특징을 좀 더 세분해 정리해 보고 싶고, 잠깐 언급한 박성원 작가의 <우리는 달려간다>와 좀 더 자세히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 작품도 쪼개고 쪼갠 시간으로 힘겹게 읽었다. 여유가 생기면 찬찬히 다시 정리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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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5-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요즘 바쁘시군요. 그래도 틈틈이 좋은 책 읽으면서 망중한을 즐기세요.^^*

쥬베이 2008-05-20 20:5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칼리 2008-05-2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한 "입문서" 같은 역할을 하는 리뷰예요. 모르고 읽는 것보다 파악하고 읽는게 훨씬 흥미로운 독서가 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o^ 지금 처한 바쁜 여건이 잘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쥬베이 2008-05-22 08:51   좋아요 0 | URL
칼리님 감사합니다^^
저는 항상 역자후기나 해설을 먼저 읽고 책을 읽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저게 좋다라고요ㅋㅋㅋ
 
사월의 마녀
마이굴 악셀손 지음, 박현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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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일개 독자주제에 주제넘은 짓을 하는건 아닌지 조심스럽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사월의 마녀>는 머지 않아 고전의 반열에 오를 명작'이라고. '깊이 있는 주제의식, 빼어난 작품성, 비교할 수 없는 흥미진진함을 겸비한 보기 드문 명작'이라고.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은 스웨덴 최고권위의 아우구스트 문학상 수상작이다. 내가 느낀 감동이 혼자만의 감동은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사실, <사월의 마녀>는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내용과 서술방식도 깊이있게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마이굴 악셀손을 믿고 차분히 집중하면 어느 순간 이야기속으로 빠져든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울림이 가슴을 친다. 새삼 깨달았다. 쉽게 읽히는 책보다, 조금씩 마음을 사로잡는 책의 은은한 매력이 훨신 인상적이란 걸.

<사월의 마녀>의 등장인물을 삼각구도로 정리해 보자. (초반 후베르트손, 크리스티나, 마르가레타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약간 혼란스럽다. 먼저 인물의 관계양상부터 알아가는게 좋다.) 삼각구도의 한 축은, 피가 섞이지 않은 세자매 '크리스티나, 마르가레타, 비르지타'(A)이다. 이들은 부모의 부재내지 학대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엘렌에게 입양되어 양육된다. 다른 한 축은 바로 엘렌(B)이다. 그녀는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지만, 여러 사정때문에 곧 아이를 버린다. 세명이나 되는 아이를 입양한 것은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였을까? 마지막은 바로 엘렌에게 버려진 아이, 데시레(C)이다.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놀라운 능력을 가진 미스터리한 인물.

이후 삼각구도의 세 꼭지점(A, B, C) 사이 숨겨진 진실과 삶, 애증, 고뇌등이 이어진다. 놀라운 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서술이다. 기본적으로 중년이 된 이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지만, 매우 빠르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 때문에 독특한 긴장감이 유지된다. 또한 입체적으로 등장인물을 분석할 수 있다. 이는 작품의 품격을 한차원 높혀준 요인중 하나이다. 

세자매 '크리스티나, 마르가레타, 비르지타'(A)에 대해 살펴보자. 부모에게 버려져 지하세탁실에서 발견된 아픔을 간직한 마르가레타는 물리학자가 된다. 마르가레타의 독특한 남자관계가 부각된다. 학창시절 나눴던 앙드레 선생과의 불륜에 가까운 사랑, 그리고 좌절. 크리스티나는 의사이다. 다른 두 자매에 비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부각되진 않는다. 비르지타는 가장 비참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지만, 방탕한 삶을 살며 인생을 소비해 버렸다. 늙고 비루한 창녀, 이게 그녀의 현실이다.

마이굴 악셀손은 이야기를 균형있게 구성했는데, '펌프 쌍둥이'(p.149이하)는 크리스티나의 이야기. '벚나무 공주'(p.325이하)는 마르가레타의 이야기. 'Mean Woman Blues'(p.473이하)는 비르지타의 이야기이다. 이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미소'(p.283이하), '천칭거울'(p.443이하)은 데시레의 이야기이다. 이런 커다란 흐름속에서 조금씩 등장인물의 삶을 알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장애를 가지고 버려진 아이, 데시레(C)를 살펴볼 차례다. 주인공격인 데시레는 초반부엔 모호하며 의문투성이다. 그러다 '베난단티'(p.126. 베난단티에 대해선 각주를 참조하시길.)에 대한 설명이 나오면서부터 데시레는 본격적으로 부각된다. 데시레는 출산과정에서 벌어진 사고때문에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말을 할수도 없다. 하지만 이는 신체적 장애일뿐, 정신은 멀쩡하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물리지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여자 스티븐 호킹'정도라면 이해가 빠르겠는가?) 더욱 놀라운 능력(p.129이하)을 데시레는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베난단티를 능가하는 초월적 능력, 공기중에 퍼져있는 산소처럼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유령처럼 다른 사람의 몸도 빌릴 수 있다.

데시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데시레를 담당하는 의사 후베르트손. 그는 데시레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주고, 여러가지 배려를 한다. 생모 엘렌에 대한 이야기, 데시레의 출산도중의 사고, 버려지게 된 과정(p.139이하) 등도 그가 이야기해 준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들의 이중성을 경멸하는 데시레지만, 점점 후베르트손에게 마음을 연다. 데시레와 후베르트손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주목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하나의 관점이다. (마지막에 데시레와 후베르트손의 뜨거운 사랑도 그려진다. p.466이하. 비록 다른 여자의 몸을 빌어 이룬 사랑이었지만.)

데시레와 병실 동료들(마리아, 엘세게르드, 암네타) 이야기가 이어지는 부분(p.290이하)이 있다. 이 부분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뜻하지 않은 4명의 소녀들의 우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더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들은 복지국가란 이념하에 행해지는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로, 저자의 비판의식과 맞닿아 있다. 또다른 부분을 보자. 데시레를 버리고, 세명을 입양한 엘렌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져보면 그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한 아이의 불행을 대가로 세 아이의 행운을 샀으니, 엘렌은 나라 전체가 이익만을 추구하던 시대에 살았다.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것은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복지국가의 초기단계, 나라 구석구석이 깨끗해야 했고, 온갖 오류와 기형적인 것은 공공기관에 꽁꽁 숨겨둘 수밖에 없었다."(p.139)

엘렌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데시레 입장에선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몹쓸 엄마지만, 무작정 비난만을 할 수 없지 않을까? 당시의 사회분위기, 열악한 의료수준, 엘렌을 무조건 비난하는 건 또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운하지 않은 이 기분은 뭘까? 엘렌을 향한 비르지타의 일갈을 들어보자. "이 집에서 당신은 언제나 성녀였어. (중략) 그야말로 당신은 훌륭한 엄마였어. 어쨌든 마르가레타나 크리스티나를 버린 못된 생모들과는 달랐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당신은 한순간도 그애들의 생모보다 더 나을 게 없었다는 걸 말이야!"(p.588) 맞다. 비르지타의 말도 틀린것은 아니다. 아이러니 아닌가? 자기 딸은 버려놓고, 다른 아이를 입양해 훌륭한 엄마라고 믿어지는 상황이.

나름대로 정리했지만, <사월의 마녀>가 품고 있는 주제의식과 깊이있는 이야기를 모두하는 건 무리인 듯하다. 이제 할 말은 '읽어 보시라는 것' 이것밖에…. <사월의 마녀>, 최고다.

 

* 처음 이 책을 보고 '아릅답다'란 생각이 들었다. 강렬한 원색표지, 홀로그램 처리된 다채로운 나비문양, 깔끔한 편집과 두툼한 장정. 책이란 걸 넘어 하나의 예술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책장에서 괜히 한번 꺼내보고는 흐믓하게 오래 오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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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5-0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경이 언제인가요? 연작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나보죠? 출판사 책소개는 그저 그렇던데, 쥬베이님의 서평을 읽으니 무척 흥미를 당기이네요.^^ 아~~ 밀린 책은 많고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디고...OTL

쥬베이 2008-05-01 16:39   좋아요 0 | URL
배경은 현재입니다. 현재지만, 과거-1950,60년대를 회상하는 형식이에요
스웨덴이 막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즈음이라 보시면 될거에요^^
연작형식은 아니고, 등장인물을 촘촘하게 엮어서 서술하는 식입니다.
일본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성인데, A-B-A-B이런식으로 교차되는 서술이요. 정말 괜찮은 책이니 과감하게 사세요ㅋㅋㅋ 예쁘고 소장가치 있는 책이랍니다.

lazydevil 2008-05-02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낯선 스웨덴 문학이지만 쥬베이님이 강추하시니 여러모로 기대가 됩니다.^^*

쥬베이 2008-05-04 11:18   좋아요 0 | URL
^^ 제3세계 문학만의 독특한 매력을 알아가는 것도 좋더라고요~

칼리 2008-05-05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뜻하지 않게 오류와 기형을 갖고 태어난 "데시레"는 국가 성장의 거대바퀴에 희생된 개인...이랄수 있겠네요. 등장인물들의 구도와 관계를 잘 이해하고 따라가자면 많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품일것 같아요...쥬베이님의 책읽기는 스웨덴까지 가셨네요. 메모합니다. [사월의 마녀] , (마이굴 악셀손)

쥬베이 2008-05-06 05:3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맞아요^^ 데시레는 저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죠
칼리님께서 글을 자세히 읽어주시니, 제가 더 영광이네요^^
(전 지금 예비군훈련 출발합니다ㅋㅋㅋ)

칼리 2008-05-0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토방위의 임무는 잘 수행하고 오셨나요?^^)

쥬베이 2008-05-09 20:39   좋아요 0 | URL
네네^^ 어제 저녁에 복귀했답니다.
2박3일인데도 어찌나 짜증나고 피곤하던지...다시는 가기가 싫어요
돌이켜보니 어떻게 2년 군생활을 했는지 모르겠네요ㅋㅋㅋ
현역때도 안했던 축사탄사격도 하고, 사격도 하고ㅋㅋㅋ

칼리 2008-05-1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보러 들렀다가 갑니다~~~ 새로운 리뷰가 없어서 금단증상(?)이 오기 시작하네요 ^^ ;;;

쥬베이 2008-05-17 22:13   좋아요 0 | URL
아하하 칼리님^^ 금단증상이라니^^
요즘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리뷰를 도통 못하네요
의무적으로 해야할 것도 있는데 말에요ㅋㅋㅋ
그래도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phylsb 2008-05-22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몇번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읽을 때마다 네 자매, 아니 그들의 어머니까지 포함해 일곱명 여성의 인생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근데 의문이 드는 것이 이 소설엔 남성이 부재합니다. 물론 후베르트손이 있긴 하죠.. 이 소설에서 후베르트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소설에서 이렇게 남성들의 존재가 미약하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요? 이 소설을 가부장적 사회에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 또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봐도 될까요..

쥬베이 2008-05-22 09:00   좋아요 0 | URL
phylsb님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남성의 부재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충분히 연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이굴 악셀손이 타킷으로 삼는건 복지국가를 지향하던 국가권력이지만,
국가권력과 남성은 거의 동일시 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유일하게 등장하는 후베르트손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데시레를 이해하고, 데시레역시 그에게 마음을 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가권력내지 남성의 이중적 성격, 즉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화합가능성을 내포한 동반자란 상징이 아닐까요?

이 작품에 대한 제반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해석가능성은 무한대입니다^^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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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했던 책이 별볼일 없는 경우도 있고, 부담없이 읽어나간 책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다양한 매력이 가득한 책이다. 조금씩 읽어가며 저자의 여정에 완전히 몰입했다. 같은 장소를 보고, 저자가 풀어내는 한문장 한문장 공감했다. 읽으며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기행에세이를 읽으며 이처럼 행복한게 있을까?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p.5)을 답사한 기행에세이다. 박제상 부인ㆍ선덕여왕 같은 삼국시대 여인부터, 나혜석ㆍ고정희 같은 근대 여인의 흔적까지, 저자는 흥미롭게, 때론 날카롭게 풀어간다. 인상적인 것은, 여정의 흥미로움과 고증의 치밀함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역사적 사건(정황)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박제상 부인의 흔적을 살피면서, 박제상 부인의 삶을 돌아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차를 분석(p.28이하)한다. 삼국사기가 박제상 부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김부식과 당시 고려의 시대상과 연결하여 설명하는데, 상당히 공감이 갔다. 또한 선덕여왕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 삼국의 정세등을  분석한다. 역사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 작품의 주요한 특징중 하나는, 저자 김현아님과 사진작가 '류'(유순미님)의 생생한 문답(p.58이하,118이하. p.217이하는 작가와 '봉소'란 인물의 문답이다. 동일인물인가?)이 중간중간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기행문의 생생함을 한층 부각시켜 여정속으로 몰입하게 한다. 은근슬쩍 오가는 문답속에 끼어들기도 하고, 오가는 문답이 저자와 '나'(독자인 나)의 문답이라고 믿기도 하면서, 마치 저자와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만끽했다. "선덕여왕이 당시 사람들한테 대단한 인기였나 봐. 이뻤나?" / "아무리 이뻐도 여왕이 됐을 당시는 이미 할머니였는 걸." / "선덕여왕이 할머니였다구?" / "할머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중년의 여성이었다는 거지. (후략)"(p.58) 어떤가? 대화속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은가?

또한 일련의 페미니즘적 시각(p.63,95,127)역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신라시대 근친혼을 이야기하면서, 진성여왕만을 음란하다며 비난하는 것을 꼬집는다. 즉, 진성여왕이 삼촌이 각간 위홍과 관계했다고 비난하면서 손녀딸뻘인 조카와 결혼한 김유신은 왜 비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요즘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근친혼내지 성윤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 비난, 그것도 여자임금에 국한된 비난은 분명 문제가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이는 '진성여왕의 황음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여성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한 야유를 유포시키고 있는 셈'(p.63)이라고.

난설헌의 시('연밥 따는 노래')를 '음란하다'며 비난하는 남성비평가들 역시 저자에겐 '쪼잔하고 비겁'(p.127)하게 보일뿐이다. 다른 것은 트집잡을 것 없이 훌륭해서 음란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저자는 말한다. "난설헌의 시는 때로 나른하고 때로 망설임 없이 에로틱하다.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의 시대에 그녀의 시는 음란(?)해서 사랑스럽다."(p127)라고. (시적인 문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난설헌교를 지나 펼쳐진 경포호를 묘사하는 부분p.124을 주목해 보시길)

기생이자 빼어난 시인인 '매창'을 만나기 위해 전라도 부안으로 향한다.(p.173이하) 이 부분은 '부안풍경1…부안풍경2…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기행문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 봤다. 다른 인물에 비해 매창에 관한 사료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부안의 풍취가 빼어나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 뭐 아무튼) 숫자를 매겨 가며 풀어내는 여정은 자체만으로 인상적이었으며, 풍부한 사진과 인용된 매창의 시와 더불어 한층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간 흥미진진한 기행에세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 보시길.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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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4-2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생한 문답이 일반사람들이 궁금해하고 그럴듯한 문답으로 채워져 있네요. 여자라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쥬베이 2008-04-28 18:13   좋아요 0 | URL
네^^ 여성들의 흔적을 여성이 이야기하는 책이라, 여성분들이 읽으면 더 공감하실거에요^^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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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수첩에 시를 옮겨 적고 틈틈이 음미하던 문학소년(ㅋㅋ)이었지만, 시집은 참 오래만이다. 시집을 리뷰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일단 소설을 읽는 것처럼 쭈욱 읽어 나갔다. 그다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한음절 한음절 다시 읽었다. 조금 낮설기도 했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 좋았다.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다시 발견한 느낌.

첫 작품부터 놀랐다. '윤제림 시인과 뭔가 인연이 있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하면, 시속에 내 이름이 나온 것이다. [제춘이 엄마](p.13)엔 이런 대목이 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정신이 바싹 들었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재춘아, 공부 잘해라!" 다시 한번 정신이 바싹 들었다. 아무래도 윤제림 시인과 뭔가 인연이 있는 듯하다. 이 시엔 자식이름을 따 가게이름을 짓는 어머니의 모성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시인은 말한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생각나는 이름이 저것밖에 없어서 저런 이름을 정하는게 아니라고. 그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끝없는 사랑인 것이다.

이어지는 [공군소령 김진평](p.14)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 진평이가 몬다"라고. 이런 것이다. 군에서 사고가 생기면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 같은, 우산장수 아들을 둔 부모가 날씨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런 '모성애'는 '가족애'적 관점으로 확대된다. [가족](p.16)엔 자기 옷을 입은 아버지, 자기 옷을 입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옷이란 매게물을 통해 가족 3대가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작품도 있다. [친구의 집을 지나며](p.24)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마을을 찾은 화자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친구네 마당에 남은 녹슨 경운기, 학교에 덩그러니 남은 이승복 어린이 동상, 하지만 쓸쓸함과 상실감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친구가 없는 마을을 심심한 마을이라 칭한다. [외할머니는 슬며시](p.40)도 비슷한 느낌이다. 대상이 친구가 아닌 외할머니란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목련에게](p.77)는 뭔가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꽃이 지니 몰라보겠다" / "용서해라" / 蓮 이게 전부이다. 시간의 흐름과 관계변화 양상에 주목한 듯한데, '용서해라'에선 약간은 담담한 태도가 보여지기도 한다. 마지막 蓮은 어떤 의미일까? [윤제림 괄호 열고 1959 물결표 괄호 닫고](p.104)도 인상적이다. "물결처럼, 바람처럼, 황포돛배처럼, (후략)" 이어지는 서술은 시인이 살아온 삶을, 시인이 지향하는 삶을 의미한다. "윤제림(1959~) / 몰년미상(沒年未詳)"란 마지막 부분은 삶을 관조하는 초월적 의지가 느껴지는 동시에, 삶에 대한 순수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걸어서 온다>를 통해 윤제림 시인을 처음 만났다. 오랜만에 접하는 시집, 처음 접하는 시인, 솔직히 걱정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행복하다. 멋진 작품과 시인을 새롭게 알게 되었기에. 읽는동안 마음이 차분해 졌다. 진지하게 한문장 한문장 생각하고 돌아보는 여유를 가졌다. 부담스런 난해함이 아닌, 삶과 일상의 추구. 편안함. 이것이 윤제림 시인의 최대 매력이다. <그는 걸어서 온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소중한 시집이다. 자신 있게 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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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4-2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군요! 이 말 밖에...^^

쥬베이 2008-04-26 15:05   좋아요 0 | URL
좋아요 좋아^^ 시집도 좋더라고요

칼리 2008-04-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역시 어려워요. 의미를 짚어내려 애쓰다 보면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함축적인 문장에는 도통 익숙해지기가 어려워요. 쥬베이님 리뷰를 따라가다 보면 한번 도전하고픈 생각도 드네요. 그나저나...갑수,병섭,상규, 병호,제춘...과연 어느게 정답일까...아리송합니다.^^

쥬베이 2008-04-28 18:15   좋아요 0 | URL
시가 어려운건 사실이에요. 때론 '이게 시야? 나도 쓰겠다' 이러기도 하는데ㅋㅋㅋ 시에 담긴 의미를 공감하는 순간, 느끼는 쾌감이 좋더라고요^^
아...제 이름은 세번째 상규 입니다ㅋㅋㅋ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
박종인 외 지음 / 시공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읽는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14살 소녀 '몽', 하루종일 돌을 깨야 하는'루빠', 반군에게 끌려가 환각제를 먹고 끔찍한 짓을 강요받은 '조지'…세상의 가난, 좌절, 슬픔만 모아둔 듯한 이야기에 착찹하기만 했다. 내가 저 나이때 무엇을 했던가? 저들에 비하면 천국과 같은 생활, 하지만 불평불만에 짜증만 가득하지 않았던가?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있다. "잘한 여행 한 번은 4년제 대학 한 학기 다닌 것보다 낫다"(p.12)는. 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듣고, 함께 숨쉬었다면, 뭔가 더 커다란 울림이 있었으리라.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리라.

한가지 의문. 그렇다면 이 책은 슬픔만 가득한 착찹한 책인가? 아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괴롭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끔찍한 가부장적 문화속에서 여섯명의 남자에게 윤간당한 '무크타르 마이'(p.206이하), 집안의 명예와 사회적 악습 아래 여성의 정조는 없었다. 하지만 무르타크는 가족을 설득해 이들을 고소하고, 학교를 세운다. 글을 배우고 공부해야만 악습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압박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네팔로 향하는 티베트 아이들, 그들은 끔찍한 추위, 동상, 중국국경 수비대란 겹겹의 어려움을 감내하고 히말라야를 넘는다. 티벳의 말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환한 웃음에 가슴이 짠해진 건, 우리의 예전 모습이 떠올라기 때문은 아닐까?

취재팀의 여정이 방송이며 신문에 알려진 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고 한다. 네팔 소녀 루빠에겐 무려 1만 8천여명의 후원자가 생겼으며,(p.229) 후원금덕에 다른 아이들도 더이상 돌이 깨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또한 가족의 빚때문에 성냥공장에서 일하다, 일이 지겨워 자살을 시도했던 문니스와리. 문니스와리를 공장이 아닌 학교로 보내기 위해 취재팀은 이들 가족의 빚을 조금씩 값아 주기로 했단다. 한국인이란게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는 조선일보의 '아워 아시아'란 이름으로 기획된 여행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이 약간 실려있지만 취재팀이 보고 느꼈던 것을 모두 담아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거의 1년 가까이 되는 여정이었으니…. 좀 더 자세한 자료와 동영상은 해당 신문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봐야 겠다.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 묵직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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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4-2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세상에는 정말 너무나 절망스럽고 부조리한 삶이 많은것 같네요...

쥬베이 2008-04-28 18:1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ㅠ.ㅠ 부조리가 넘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