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학창시절 수첩에 시를 옮겨 적고 틈틈이 음미하던 문학소년(ㅋㅋ)이었지만, 시집은 참 오래만이다. 시집을 리뷰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일단 소설을 읽는 것처럼 쭈욱 읽어 나갔다. 그다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한음절 한음절 다시 읽었다. 조금 낮설기도 했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 좋았다.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다시 발견한 느낌.

첫 작품부터 놀랐다. '윤제림 시인과 뭔가 인연이 있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하면, 시속에 내 이름이 나온 것이다. [제춘이 엄마](p.13)엔 이런 대목이 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정신이 바싹 들었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재춘아, 공부 잘해라!" 다시 한번 정신이 바싹 들었다. 아무래도 윤제림 시인과 뭔가 인연이 있는 듯하다. 이 시엔 자식이름을 따 가게이름을 짓는 어머니의 모성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시인은 말한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생각나는 이름이 저것밖에 없어서 저런 이름을 정하는게 아니라고. 그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끝없는 사랑인 것이다.

이어지는 [공군소령 김진평](p.14)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 진평이가 몬다"라고. 이런 것이다. 군에서 사고가 생기면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 같은, 우산장수 아들을 둔 부모가 날씨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런 '모성애'는 '가족애'적 관점으로 확대된다. [가족](p.16)엔 자기 옷을 입은 아버지, 자기 옷을 입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옷이란 매게물을 통해 가족 3대가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작품도 있다. [친구의 집을 지나며](p.24)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마을을 찾은 화자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친구네 마당에 남은 녹슨 경운기, 학교에 덩그러니 남은 이승복 어린이 동상, 하지만 쓸쓸함과 상실감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친구가 없는 마을을 심심한 마을이라 칭한다. [외할머니는 슬며시](p.40)도 비슷한 느낌이다. 대상이 친구가 아닌 외할머니란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목련에게](p.77)는 뭔가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꽃이 지니 몰라보겠다" / "용서해라" / 蓮 이게 전부이다. 시간의 흐름과 관계변화 양상에 주목한 듯한데, '용서해라'에선 약간은 담담한 태도가 보여지기도 한다. 마지막 蓮은 어떤 의미일까? [윤제림 괄호 열고 1959 물결표 괄호 닫고](p.104)도 인상적이다. "물결처럼, 바람처럼, 황포돛배처럼, (후략)" 이어지는 서술은 시인이 살아온 삶을, 시인이 지향하는 삶을 의미한다. "윤제림(1959~) / 몰년미상(沒年未詳)"란 마지막 부분은 삶을 관조하는 초월적 의지가 느껴지는 동시에, 삶에 대한 순수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걸어서 온다>를 통해 윤제림 시인을 처음 만났다. 오랜만에 접하는 시집, 처음 접하는 시인, 솔직히 걱정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행복하다. 멋진 작품과 시인을 새롭게 알게 되었기에. 읽는동안 마음이 차분해 졌다. 진지하게 한문장 한문장 생각하고 돌아보는 여유를 가졌다. 부담스런 난해함이 아닌, 삶과 일상의 추구. 편안함. 이것이 윤제림 시인의 최대 매력이다. <그는 걸어서 온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소중한 시집이다. 자신 있게 권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azydevil 2008-04-2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군요! 이 말 밖에...^^

쥬베이 2008-04-26 15:05   좋아요 0 | URL
좋아요 좋아^^ 시집도 좋더라고요

칼리 2008-04-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역시 어려워요. 의미를 짚어내려 애쓰다 보면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함축적인 문장에는 도통 익숙해지기가 어려워요. 쥬베이님 리뷰를 따라가다 보면 한번 도전하고픈 생각도 드네요. 그나저나...갑수,병섭,상규, 병호,제춘...과연 어느게 정답일까...아리송합니다.^^

쥬베이 2008-04-28 18:15   좋아요 0 | URL
시가 어려운건 사실이에요. 때론 '이게 시야? 나도 쓰겠다' 이러기도 하는데ㅋㅋㅋ 시에 담긴 의미를 공감하는 순간, 느끼는 쾌감이 좋더라고요^^
아...제 이름은 세번째 상규 입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