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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큰 기대를 했던 책이 별볼일 없는 경우도 있고, 부담없이 읽어나간 책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다양한 매력이 가득한 책이다. 조금씩 읽어가며 저자의 여정에 완전히 몰입했다. 같은 장소를 보고, 저자가 풀어내는 한문장 한문장 공감했다. 읽으며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기행에세이를 읽으며 이처럼 행복한게 있을까?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p.5)을 답사한 기행에세이다. 박제상 부인ㆍ선덕여왕 같은 삼국시대 여인부터, 나혜석ㆍ고정희 같은 근대 여인의 흔적까지, 저자는 흥미롭게, 때론 날카롭게 풀어간다. 인상적인 것은, 여정의 흥미로움과 고증의 치밀함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역사적 사건(정황)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박제상 부인의 흔적을 살피면서, 박제상 부인의 삶을 돌아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차를 분석(p.28이하)한다. 삼국사기가 박제상 부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김부식과 당시 고려의 시대상과 연결하여 설명하는데, 상당히 공감이 갔다. 또한 선덕여왕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 삼국의 정세등을 분석한다. 역사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 작품의 주요한 특징중 하나는, 저자 김현아님과 사진작가 '류'(유순미님)의 생생한 문답(p.58이하,118이하. p.217이하는 작가와 '봉소'란 인물의 문답이다. 동일인물인가?)이 중간중간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기행문의 생생함을 한층 부각시켜 여정속으로 몰입하게 한다. 은근슬쩍 오가는 문답속에 끼어들기도 하고, 오가는 문답이 저자와 '나'(독자인 나)의 문답이라고 믿기도 하면서, 마치 저자와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만끽했다. "선덕여왕이 당시 사람들한테 대단한 인기였나 봐. 이뻤나?" / "아무리 이뻐도 여왕이 됐을 당시는 이미 할머니였는 걸." / "선덕여왕이 할머니였다구?" / "할머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중년의 여성이었다는 거지. (후략)"(p.58) 어떤가? 대화속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은가?
또한 일련의 페미니즘적 시각(p.63,95,127)역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신라시대 근친혼을 이야기하면서, 진성여왕만을 음란하다며 비난하는 것을 꼬집는다. 즉, 진성여왕이 삼촌이 각간 위홍과 관계했다고 비난하면서 손녀딸뻘인 조카와 결혼한 김유신은 왜 비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요즘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근친혼내지 성윤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 비난, 그것도 여자임금에 국한된 비난은 분명 문제가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이는 '진성여왕의 황음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여성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한 야유를 유포시키고 있는 셈'(p.63)이라고.
난설헌의 시('연밥 따는 노래')를 '음란하다'며 비난하는 남성비평가들 역시 저자에겐 '쪼잔하고 비겁'(p.127)하게 보일뿐이다. 다른 것은 트집잡을 것 없이 훌륭해서 음란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저자는 말한다. "난설헌의 시는 때로 나른하고 때로 망설임 없이 에로틱하다.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의 시대에 그녀의 시는 음란(?)해서 사랑스럽다."(p127)라고. (시적인 문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난설헌교를 지나 펼쳐진 경포호를 묘사하는 부분p.124을 주목해 보시길)
기생이자 빼어난 시인인 '매창'을 만나기 위해 전라도 부안으로 향한다.(p.173이하) 이 부분은 '부안풍경1…부안풍경2…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기행문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 봤다. 다른 인물에 비해 매창에 관한 사료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부안의 풍취가 빼어나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 뭐 아무튼) 숫자를 매겨 가며 풀어내는 여정은 자체만으로 인상적이었으며, 풍부한 사진과 인용된 매창의 시와 더불어 한층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간 흥미진진한 기행에세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 보시길.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