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뒷길을 걷다 -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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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뒷길을 걷다>의 부제는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이다. 여행기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일반적인 여행기는 아니다. 혹시 북경사람들의 생활내지 먹거리, 북경생활의 에피소드를 기대한 분이 있다면 '뭐지, 뭐야?'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중국의 상징 '자금성을 중심으로 주요 건축물들에 얽혀 있는 역사적 이야기를 풀어간다. 생활, 먹거리, 에피소드, 거의 없다. 저자의 생생한 체험이 더해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핵심은 중국 근현대사에 맞추어져 있다. 생생함이 묻어 있는 역사서 같다고나 할까.

중국 근현대사의 중심인물인 서태후, 마지막 황제 푸이, 황후 완룽과 관련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약탈당하고 무너져 가는 왕조의 비애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황제에서 일반인으로 전략한 푸이의 고뇌를 그리고 싶었던 걸까?

푸이는 세 살에 황제에 올랐다. '신해혁명에 의해 중화민국이 선포되자 그 이듬해 일곱 살 나이에 퇴위 선언을 하고, 열아홉 살에는 자금성에서 쫒겨 났으며, 만주국 황제가 되기도 한다.'(p.24참조) 험란한 삶의 종점은 포로수용소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으로 송환된 그는 무려 9년간이나 사상개조를 받고 '보통 사람'이 되었다. 말 그대로 드라마같은 삶. 포로가 된 푸이의 궁색한 처지가 잘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수용소에서 연필상자 접는 부역을 시켰는데, 푸이는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그러자 과거의 대신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다.(p.28참조) 한때 그를 쳐다 보지도 못했던 그들이 말이다.

황후 완룽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완룽은 열일곱 살때 푸이와 결혼한다. 국모인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만 푸이와의 결혼은 그리 행복한 선택이 아니었다. 푸이는 성기능을 상실해서 완룽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지 못했다. (풍문일 뿐이지만 제반사정으로 볼 때, 진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임) 또한 이미 퇴위한 명목뿐인 황제와의 생활은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지독한 아편중독자가 되어 무너져 버린 완룽, 그녀에게 아편은 악마의 유혹같은 마지막 도피처였다. 해방군에 끌려다니다 행려병자로 최후를 맞이한 완룽, 황후가 아닌 삶을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중국에서 오랫동안 작품구상을 했던 작가의 첫 작품이 소설이 아닌 것은 조금 의외였다. 소설가 김인숙이란 생각이 뭐낙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소설보다 더 매력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여정이 바탕이 된 역사 이야기의 색다른 매력을 느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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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 애사
이수광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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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애사>에 대해선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을 듯 하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등으로 유명한 이수광 작가의 신작'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요즘 쏟아져 나오는 대중역사서 중 상당수는, 이수광 작가의 성공에 자극 받은 것이다. 설불리 포맷을 차용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떤 것이든 인기를 끌면 아류는 탄생하는 법이니까.

역사의 숨겨진 사건과 일화를 포착해서 쉽고 흥미롭게 소개하는 작가의 능력,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크게 사부(思婦), 애국(愛國), 효행(孝行)등 11부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전 시리즈(일명 '조선을 뒤흔든' 시리즈)가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주로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보다 더 유교적이고 감동적인 소재를 다룬다. 비교적 잘 알려진 위인들-정약용, 성삼문등-의 숨겨진 비극애사를 다루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인상적인 몇 부분을 살펴보자.

[내 꿈에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세요](p.141)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원이 엄마의 눈물겨운 편지 이야기다. 병마에 시달리는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까지 잘라 미투리(짚신)를 삼았지만, 남편은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 원이 엄마는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편지를 관 속에 미투리와 함께 넣는다. 절절한 슬픔이 담긴 편지, 정말 감동이다.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 하는 글을 봤지만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글은 이번에 처음이다.

[절조가 어찌도 그리 매서웠는가](p.222)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박문랑'이란 처녀의 이야기다. 사건은 이렇다. 고을현감 박경여는 조부가 죽자 시골선비 박수하의 선산에 몰래 묘를 조성한다. 이에 분개한 박수하가 산송을 걸지만 도리어 곤장을 맞아 죽는다. 아비의 죽음에 분노한 딸 문랑은 분연히 외친다. "다행히 원수 놈의 할아버지 무덤이 우리 선산에 있다. 내가 그 무덤을 파헤쳐 불을 지르면 원수 놈이 놀라서 달려올 것이다. 그때 내가 필히 그 배에 칼을 꽂아 죽이리라"(p.224) 한편, 조부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박경여 역시 분기탱천해 문랑의 마을로 달려온다. 일파만파 커져가는 사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애사>의 품격을 한차원 높혀 준 것은, 올컬러로 실린 수백점의 그림이다. 실려 있는 김정희, 정선, 김홍도등 조선 최고 화가의 작품은 이야기의 맛을 배가 시킨다. 예를 들어, 김정희의 '세한도'(p.78)를 통해서는 백두산 야생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던 모녀(毛女)의 슬픔을 떠올린다. (저 여인은 폭설을 피해 식량을 찾아나선 무리에서 낙오해, 백두산 야생에서 야생화 된 것임. 동양판 '늑대소녀') 뿐만 아니라, 표지와 삽화도 아주 근사하다. 음영처럼 표시된 조선여인과 특별코팅이 되어 있는 꽃이 대비되면서 색감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 멋지다.

소개된 21가지 이야기는 역사 속에 잠든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이 땅에 살아간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역사 속에서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애사>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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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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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접하곤 상당히 떨떠름 했다. '뭐지? 그래서?' 소설은 보편적인 플롯이 존재하기에 문화적 차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독일인의 일상, 시사, 정치, 문화가 버무러진 에세이 성격의 글이다. 문화적 차가 크게 다가 온다. 무엇보다 독일식 유머코드에 적응을 못했다. 그러나 불만은 잠시 뒤로 하자. 저자가 쏟아내는 위트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면 금새 매력에 빠져든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몰아 읽고, 후에는 조금씩 음미해 가면서 읽으시길 권한다.

저자는 자신이 쓴 텍스트를 소재로 소극장에서 정기 낭독무대 열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지!>는 바로 정기 낭독무대 발표를 위해 쓴 작품을 모은 작품집이다. 목차는 월요일, 화요일등 요일별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시간순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의 구성은 시간순이 아니다. 각각이 독립적인 작품들임에도 그 사이에는 알게모르게 어떤 질서 같은 것이 존재했으므로 그 내재적인 질서에 따라 나는 차례를 꾸몄다.'(p.8) 기본적으로 유머코드를 담은,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남은 라이브 쇼의 연속이야](p.92) 5층에 사는 노신사 예나첵씨는 에버스를 찾는다. 아침준비로 난장판을 벌였던 에버스는 예나첵에게 약간은 충격적인 부탁을 받는다. '인터넷으로 여자를 사귀었으며, 나이차 때문에 에버스 행세를 했으니, 내일 오후에 대신 만나달라'는 것. 그리하여 에버스는 마리아란 여자를 대신 만나게 된다. 의외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에버스와 마리아의 운명적 만남은 어떤 결말을 맞을지? 읽어 보시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눈물로 끝난 여행](p.165) 친구 프레데릭은 철도회사를 성토하며 열차요금 아끼는 법을 자랑스레 떠벌린다. "베를린에서 하노버까지 간다고 치자. 그럼 나는 볼프스부르크까지만 표를 사거든. (중략) 검표원이 나타나면 화들짝 놀라 잠을 깨는 척하면서 이렇게 소리쳐. '어떡해! 벌써 볼프스부르크 지났어요? 큰일 났네.' 그러면 검표원들은 대개 나를 진정시키며, 한번 봐줄 테니 계속 하노버까지 간 다음 거기서 되돌아 오라고 말하거든."(p.166) 우리의 호프 에버스가 누구던가, 옳다구나! 그대로 따라한다^^ 그러나, 그러나, 에버스를 좌절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어찌나 웃기던지 엄청 웃었다. 뭘까?

읽으며 의아했던 것은 각주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단어에 각주처리가 되어 있는 것이라. '뭐지, 왜 각주처리가 되어 있는 걸까?'했다. 그러나, 저것이야 말로 호어스트 에버스표 유머의 결정체다. 기발한 의미 풀이로 촌철살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란 단어에 각주처리를 해두고, 끝부분에 '설명할 방법이 없음'이라고 뜻풀이 한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지!>, 굉장히 유쾌한 책이다. 문화적 차에서 오는 잠깐의 이질감만 극복하면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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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 빠진 수법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6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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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 빠진 수법>은 플라시보 시리즈의 여섯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는 계속되지만 호시 신이치의 상상력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곤 한다. 한편, 뒤에 실린 해설과 저자의 말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호시 신이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즐거움이라고 할까. 베일에 쌓여 있는 미지의 세계를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듯한 느낌. <흔해 빠진 수법>뒤엔 해설은 없고 저자의 말이 실려 있다. <도둑회사>에 실린 저자의 말이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인간 호시 신이치 이야기'였다면, 이건 '소설가 호시 신이치가 들려주는 창작론' 정도가 되겠다. 특히 아이디어에 중점을 둔.

전체적인 특징을 개관한다면,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적 작품의 감소, 공포 미스터리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의 증가'라고 말할 수 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공포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 아주 반가웠다. [산길](p.72), [이단](p.142), [사이드 비지니스](p.150), [뒤돌아 본 얼굴](p.179)등등. 또한 [돌기둥](p.35),[길흉](p.50)같은 경우, 공포는 아니지만 스토리전개가 미스터리하다.

[이단]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말한다. "나, 귀신 봤어요." 하지만 엄마는 비웃으며 아이를 바보취급한다. 그러나 아이는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맨션내에서 유령을 봤다는 사람은 눈 깜짝 할 새에 늘어나 한 사람만을 빼고 맨션 거주자 대부분이 유령을 보게 된다.'(p.146) 유령을 보지 않았다는 유일한 남자, 그는 누구인가? 국내 어떤 영화(영화 이름을 밝히면 스포일러가 된다)를 연상시키는 설정이 섬찟했던 작품.

[사이드 비지니스] 회사에서 돌아와 사이드 비지니스를 하는 청년, 그의 비지니스는 의뢰를 받아 가해자를 찾거나 피해자의 사적복수를 감행하는 것. 범인도 동기도 불분명한 죽음을 당한 아들의 원수를 갚아달라며 한 남자가 의뢰한다. 남태평양 섬에서 전해내려 오는 방법으로 가해자 인형을 만들어 해결에 나선 청년, 과연 남자는 복수할 수 있을까? 청년의 방법은 효과가 있을까?

[뒤돌아 본 얼굴]은 독특하게 액자식 구성이다. 쇼트-쇼트라 깊이있는 구성이 쉽지는 않을텐데 아무튼 인상적이다. 폐인만들기 업체 담당자와 의뢰인이 대화중이고, 대화속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떤 마을에 간 남자가 민얼굴의 여인, 눈4 코와 입2인 사내등 괴상한 얼굴의 사람들을 연이어 만나 폐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이는 어릴 적 괴담집에서 읽은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 떠도는 괴담을 그 괴담집에서 실은 것인지, 호시 신이치의 작품을 차용한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산길] 역시 구성이 입체적이다. 휴가를 맞아 후배인 청년과 작은 마을로 내려간 '나'. 청년은 유령이 나오는 무시무시한 꿈 이야기를 하며,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이어 '나'의 꿈 이야기가 이어지며, 숨겨진 진실은 밝혀진다. 과연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흔해 빠진 수법>엔 여름철에 걸맞는 오싹한 이야기 하나 가득이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뿐만 아니라 공포스런 분위기까지 느끼고 싶다면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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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7-3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렀습니다^^*/쥬베이님 신이치 작품에 흠뻑 빠지셨군요? 우선 한권 정도 읽어보고 싶은데... 시리즈 중 어느 것이 좋을까요? 추천 좀 해주세요. 그나마 좀 덜 SF적인 걸루요^^;;

쥬베이 2008-07-31 07:46   좋아요 0 | URL
와...lazy devil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바로 이 작품 읽어보세요^^ SF적인거 싫어하시면 이게 제일 잘 맞을겁니다.
아니면, 대표작이라고 유명한 플라시보 시리즈 20권 <붓코짱>을
읽어 보시는 것도 좋고요^^
 
도둑회사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5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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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회사>는 호시 신이치의 다양한 매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회사원이 주인공인 회사중심의 이야기, 범죄와 관련된 이야기,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적 이야기, 전래동화를 패러디한 이야기등등 한가지 특징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플라시보 시리즈의 이전 작품이 보통 20~25편 가량의 작품이 수록되었던데 반해, 이 작품은 무려 41편이나 실려 있다. 이는 다양성을 만끽할 수 있게한 또하나의 요인인 것이다.

[도둑회사](p.42) 100여명의 사원들이 각자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회의중인 사람들, 자료를 분석하는 사람들 모두 열심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보석상을 습격하는 것은 어떨까요?', '롤스로이드를 훔쳐 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p.43) 이들은 도둑질을 업으로 하는 도둑 주식회사의 직원이었던 것이다. 100여명의 직원이 총동원 돼 벌이는 범죄행각, 읽어 보시길. 이건 이미 현실화 된 이야기 아닌가? 집단 자해공갈단. 호시 신이치의 상상력이 새삼 놀랍다.

[살인청부업자](p.47) 공개석상에서 N씨에게 폭언을 퍼붓는 '나', 결국 N씨는 참지 못하고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외친다. '나'가 저런 행동을 한 이유는? N씨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이 이야기는 형법교과서에 나오는 '도발된 정당방위의 제한'사례와 유사하다. '나'의 행위는 N의 도발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고, N은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다.

전래동화를 패러디한 [시간의 사람](p.122), [요술 방망이](p.149)도 인상적이다. [시간의 사람]에 등장하는 '우라시마 타로', 이름마저 일본 전래동화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용궁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인가? 젊음을 가져간 선물상자 속 연기보다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요술 방망이]는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다. 깊은 산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요술 방망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읽어 보시길.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적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특이한 것은 기본 설정이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재고처리](p.27)와 [번영의 꽃](p.202)이 바로 그것이다. 두 작품의 기본설정은 이렇다.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에 유해한 뭔가를 유포한다. 그런 다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비싸게 팔아치운다. 소설적 설정으론 무척 흥미롭지만 뭔가 찝찝하다.

심각한 얘기를 해야겠다. 호시 신이치의 사상에 대한 것이다. 한 부분을 보자. "그쪽에서 먼저 공격해올 리도 없고, 나중엔 이쪽이 먼저 쳐들어가 점령할 수도 있고, 안심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상대는 바로 그런 별이다."(p.202) '먼저 쳐들어가 점령한다'라…저건 단지 한 단편의 한 부분이 아니다. 호시 신이치의 SF적인 작품 대다수가 기본적으로 저런 사상을 깔고 있다. 상대방 행성을 식민지 삼고, 노예로 부린다는 설정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호시 신이치의 작품에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냈지만, 그의 사상은 재검토가 필요할 듯 하다. 소설은 소설로만 보라고 말할 것인가?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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