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
마르셀라 세라노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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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작은 아씨들>을 읽지 않았기에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는 건 어렵지만, <작은 아씨들>을 읽어야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이 리메이크지 등장인물 설정, 전체적인 느낌을 제외한다면 거의 다른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명확한 코멘트는 <작은 아씨들>을 읽은 다음 하겠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네 자매의 애증과 파란만장한 삶을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라 세라노의 단아한 문장과 내밀한 묘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먼저 네 자매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사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촌관계이며, 고모할머니 카실다와 함께 푸에블로 제재소에서 산다. 첫째 니에베스는 예쁘고 우아했으며 동생들이 잘 따랐다. 현모양처를 꿈꾸며 라울과 결혼해 쌍둥이를 낳는다. 둘째 아다는 활동적, 반항적이며 선머슴 같은 면이 있었다. 사촌오빠 올리베리오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꿈꾼다. 셋째 루스는 착하고 조용한 아이다. 의료봉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간다. 넷째 룰라는 남자들이 줄줄 따를 만큼 매력적인 미모의 소유자로 사교성이 좋아 친구가 많았다. 경제전문가로 크게 성공한다. 

각 장마다 시점이 바뀐다. 1장 '메그'는 니에베스, 2장 '조'는 아다, 3장 '베스'는 루스,  4장 에이미는 룰라의 시점이다. 즉, <작은 아씨들>의 등장인물이 네 자매와 각각 대응된다. (이와 연관되는 서술은 p.235) 이러한 구성은, 한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서로를 바라보는 네 자매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예를 들어, 에우세비오 강간사건(?) 후 집을 나간 아다를 올리베리오가 데리고 오는 장면. 아다 시점인 2장에선 '사흘 후 올리베리오는 아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p.116) 한 문장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루스 시점인 3장에선 루스가 본 많은 것을-올리베리오와 아다의 모습, 카실다 고모할머니의 반응등-이야기(p.168) 한다. 네 자매간 관계를 보는 시각도 약간 다르다. 니에베스는 비슷한 성향끼리 '니에베스, 룰라 / 아다, 루스' 한 편이었다(p.30)고 하고, 루스는 연령대로 '니에베스, 아다 / 루스, 룰라' 한 편이었다(p.148)고 한다.

가장 주목한 것은, 네 자매의 우정과 갈등, 질투, 한마디로 애증관계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성은 애증관계를 드러내는데도 효과적) 특히 아다와 룰라사이는 심각했다. 룰라가 회상하는 에피소드(p.226이하)를 보자. 아다는 성냥갑에 털이 북실한 거미를 넣어 룰라를 놀래킨다. 거미를 정말 무서워했던 룰라는 여름내내 괴로워 한다. 애지중지 키운 들고양이를 문을 열어 도망하게 하거나, 아끼는 털코트를 못쓰게 한 것도 아다였다. 룰라는 복수심으로 그랬는지, 아다 쓴 소설원고를 불태워 버린다. 정말 심각한 건 올리베리오를 둘러싼 관계였다. 둘 다 사촌오빠인 올리베리오를 사랑한 것이다. (물론 아다가 룰라의 마음을 알았는지는 분명치 않기 때문에, 둘 사이 경쟁관계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래전부터 깊은 마음을 주고 받은 아다(p.112이하), 빼어난 미모로 유혹하려는 룰라(p.239).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자매간 경쟁이라니.

이들의 삶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73년 9월 11일에 벌어진 군부쿠데타. 올리베리오는 군인순찰대에게 갑자기 끌려가고(p.121), 아다 역시 군인들을 피해 여기저기 숨어지낸다. (군인들은 '테러리스트 조직의 수장인 위험한 여자를 찾는다'며 아다를 잡으려 하는데, 왜 이들이 올리베리오와 아다를 잡으려 하는지는 에우세비오와 친척 실비아와 관련되어 있다.) 연이어 카실다 고모할머니가 죽고, 엄청난 부채가 드러나 제재소는 몰락하게 된다.

소설 속에는 아다에게 <작은 아씨들>을 리메이크 하라고 권하는 장면(p.304)이 있다. 이를 주목하면 '마르셀라 세라노의 자전적 요소가 아다에게 크게 반영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 권한 사람은 '하이메'이다. 그와의 만남을 역으로 살펴보자. 사귀던 외교관을 떠나 어딘가 향하던 아다는 사고를 당한다. 겨우 올리베리오에게 연락을 취하고, 올리베리오는 의뢰인이었던(올리베리오는 변호사가 되었다.) 하이메를 보내 아다를 간호하게 한다. 정성껏 아다를 간호하는 하이메. 점점 이들은 가까워지고 함께 프랑스로 가기로 한다. 둘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지만 사랑까지는 아니었다. 하이메는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섹스나 감정적인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얼마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 빌어먹을 여자를 사랑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p.272) 저건 아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사랑한 건 오직 올리베리오뿐이므로.

6장 '메그, 조, 에이미'는 늙은 판차의 장례식을 계기로 29년만에 푸에블로로 돌아오는 세 자매의 이야기다. (셋째 루스는 이미 죽었다.) 즐겁게 과거를 회상하고, 변한 푸에블로의 모습에 놀라는 이들. 제재소의 새주인이 에우세비오란 사실에 격분하며(p.335) 방화를 모의하기도 하고, 강간사건의 진실을 듣고 놀라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 제재소가 있던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은 제목의 상징성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은 삶의 진정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만이 감동할 수 있는 품격있는 작품이다.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깊이만큼 감동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내 인생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다. 언제가 다시 읽으면, 지금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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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9-09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끌립니다!!+_+ 저 작은아씨들 굉장히 좋아해서요..^^
쥬베이님 서재에서는 자꾸 사고싶은 책들이 보이네요.-_ㅠ크흑....사놓은 책도 다 못읽고 있는데...흐흑...

쥬베이 2008-09-09 16:16   좋아요 0 | URL
시즈님 이 책은 꼭 사세요!^^
여성분들은 훨신 더 감동하실거에요...
문장도 아름답고, 재미도 있고 참 좋은 작품이에요

보석 2008-09-0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째 조에게 앙심을 품은 에이미가 원고를 태워서 조가 격분하고, 반성한 에이미가 조에게 사과하지만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년 내용이 '작은 아씨들'에 나와요. 결국 조를 쫓아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심한 폐렴을 앓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화해했죠. 사촌인 올리베리오는 옆집 소년 '로리'인가봐요. '작은 아씨들'에서 조는 다른 신문기자와 맺어지고 에이미가 결국 로리와 맺어졌는데 여기선 어떨지 모르겠네요. 무척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_+

쥬베이 2008-09-09 16:20   좋아요 0 | URL
우와 보석님 <작은 아씨들>을 완전 꿰고 계시네요^^
에이미가 원고 태우는 장면이 저기 있구나......
맞아요. 올리베리오는 '로리'하고 대칭돼요. 소설에 <작은 아씨들>의 로리이름도 등장하거든요, 신기하다 신기해ㅋㅋㅋㅋㅋ
보석님 꼭 읽어 보세요^^ <작은 아씨들>을 잘 아시니, 감동도 더 클거에요^^
 
속 깊은 그림책 4
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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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그림책이다. 알라딘에는 '만4세-6세' 유아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메시지는 명확하지만 주제의식이 심오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쟁이 한창인 어느 곳, 두개의 참호가 있다. 참호속 병사는 적이다. 이들이 받은 전쟁 지침서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적은 잔인하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중략) 적은 인간이 아니다.' 전쟁을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상대는 아무 이유도 없이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야수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가 '나'를 죽일 테니까.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는 상대의 참호로 기어간다. 하지만 적의 참호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충격에 빠진다.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전쟁 지침서는 거짓투성이였다. 거짓을 알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적>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 반대, 평화 추구. 전쟁을 벌인 자들에 대한 분노,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에 동원된 젊은이들의 인권재고. 전쟁을 시작한 이들에 대한 분노는 그림자체에 묻어난다. 사악하고 재수없는 표정, 과시욕, 명예욕을 상징하는 치렁치렁한 훈장들, 이들은 왜 전쟁을 시작한 걸까? 정녕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 것인가?

'그'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생각한다. '적도 저 별을 바라보고 있을까? 별을 바라본다면 그 역시 아무 소용없는 이 전쟁 따위는 어서 끝내야 한다고 깨달을지 모른다'고. 우리 모두 별을 한번 바라봐야지 않을까, 전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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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은행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19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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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은행>은 중량감이 떨어진다. 그리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호시 신이치는 1000여편 이상의 작품을 썼으니, 모든 작품이 완벽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때론 이런 작품도 있어야 인간적이지.

가장 아쉬운 것은, 결말이 힘이 없는데다 황당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인생](p.149)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저자는 정신병원에서 막 퇴원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어 왜 남자가 정신병원에 들어왔고 나가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직장과 집으로 돌아왔지만, 직장에선 해고당했고, 아내는 이혼수속을 하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아내의 음모를 떠올리게 되는데, 저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결말을 내린다. '남자가 발명한 특허, 특허절차를 밟아준 원장, 행복한 삶,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로 이어지는데,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가 특허까지 받을 장치를 계발했다는 점, 때마침 원장에서 건네 줬다는 점, 원장이 착하게 특허신청을 해서 남자의 권리를 확보했다는 점, 모두 탐탁지 않다. 그리고 남자의 정신상태는 정상인가? 아닌가? 아무리 아내를 사랑했다지만, 아내 한마디에 정신병원에 순순히 들어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괜찮았던 작품은 [맛의 비밀](p.63), [고풍스런 사랑](p.161), [조난](p.172)이다. [맛의 비밀] 미식가인 사장은 맛있는 집이 있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바로 찾아간다. '마스코트'란 이름의 가게는 작고 볼품없었지만, 음식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놀란 사장은 주인에게 조리법을 묻고, 주인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아는 사람에게 산 마스코트에 요리의 요정이 붙어 있어 일반 조리법으로 요리해도 최고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사장은 요리의 요정이 붙어 있다는 마스코트를 사기로 하는데…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고풍스런 사랑]의 경우,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설정이 우리의 정서와는 어긋난다는 것이 아쉽다. (츠즈키 미치오는 이 작품을 최고라고 꼽았다.) 젊고 아름다운 아키코, 연극배우인 남자, 둘은 사랑에 빠진다.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아키코의 아버지는 결사반대한다. 사랑의 도피를 하고자 하나 이상하게 남자는 이를 꺼린다. 결국 정사情死하기로 하는 두 사람. 마지막에 뜻밖의 반전이 있다. (좀 더 말하자면, 이 반전도 그리 공감할 수 없다. 아키코는 자신의 몸 상태를 몰랐을까? 아버지의 논리대로 저것이 딸에 대한 사랑일까? 생각해 볼 문제.)

[조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우주를 비행하다 조난당한 남자는 급히 근처 행성에 착륙한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고 남자는 점점 지쳐간다. 어찌나 지루했던지 연료에서 알코올을 추출해 술로 마시기까지 한 남자. 결국 우주선을 나와 행성을 산책하기로 한다.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3미터 정도 높이의 노란색의 건조물, 과연 저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제 막 호시 신이치를 접한 사람이라면, <망상은행>은 뒤로 밀어 두시길. 매력적인 다른 작품을 접한 다음, 천천히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 뒤에 실린 츠즈키 미치오의 해설은 기묘하다. 곳곳에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소설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도 구체성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묘사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 묘사가 부족하면 역시 의심이 생깁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그 자체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맛을 자제한 마시멜로처럼 입에 맞게, 위장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소화되어 버린다면 아무리 쇼트 쇼트라도 이래서는 너무 가볍지 않을까요." 작품에 실리는 해설치고는 파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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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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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은 <다다미 넉장반 세계여행>을 먼저 읽었고, 이 작품이 두 번째다. 국내에 막 소개되는 작가라 이름도 통일되지 않았지만(토미히코/도미히코), 두 작품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확실하게 어필했다. 이 책을 이야기함에,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작, <다빈치>선정 '올해의 책' 1위 따위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읽다보면 그냥 알게 된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얼마나 기발한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A)와 <다다미 넉장반 세계여행>(이하 B)은 상호보완되는 작품이다. 시리즈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한 점도 대비되는 점도 많다. 첫째, A가 '여성화자'(여자후배) 중심이라면, B는 '남성화자'(아카시의 남자선배) 중심이다. 둘째, 연작이란 점은 유사하지만, A는 각 장의 내용이 시간흐름대로 이어지고(1장->2장->3장->4장), B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며 설정과 사건이 조금씩 뒤틀려 있다.(1장 /2장 /3장 /4장) 셋째, B에서도 저자는 개입하지만 A의 개입은 좀 더 직접적이다. 넷째, 치위생사 하누키와 정체불명의 히구치는 모두 등장하지만, 비중은 A (하누키 > 히구치), B (하누키 < 히구치)이다. 이 외에도 양자에는 수많은 접점이 존재한다.

세번째와 네번째를 자세히 보자. 저자는 시점이 여자후배에서 선배로 바뀔 때, 개입한다. '독자 제현, 잘 있었는가.'(p.68)식으로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 이는 도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문체와 결합하며 독특한 매력의 한 요인이 된다. 하누키와 히구치는 매력적인 조연이지만, 비중이 그리 큰 건 아니다. A에서는 히구치, B에서는 하누키의 비중이 아쉬운데, 이 아쉬움은 각각 다른 작품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하누키의 경우, 치위생사란 게 일찍 밝혀져 동일인물임을 짐작 할 수 있지만, 히구치는 마지막에야 동일인 임을 확인할 수 있다. 히구치는 이 작품에서도 B의 주무대인 '시모가모 유스이 장'에서 살고 있던 것(p.359)이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도도, 하누키와 여자후배의 만남 / 여자후배와 이백씨의 술마시기 대회. [심해어들]은 선배와 여자후배의 헌책방 탐방기 / 이백씨 주최 경매. [편리주의자 가라사대]는 빤스총반장의 '괴팍왕'공연 등 대학축제를 둘러싼 포복절도 사건이 중심이다. [나쁜 감기 사랑 감기]는 감기에 시달리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마지막 대단원. 모든 장이 재미있지만, 3장은 특히 인상적이다. '괴팍왕'공연의 희곡이 이야기와 어울리며 진행되는 구성은, 유머감각 넘치는 천재가 아니라면, 절대 쓸 수 없는 부분이다.

'여자후배'는 천진난만하고 발랄하며 때론 엉뚱하기까지 하다. 보호해 주고 싶고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랑스런 그녀. A, B의 관계상, '혹시 여자후배가 B에 등장하는 아카시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성격이 너무 다르다. 아카시는 아닌 것 같다. '여자후배'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을 보자. '월면보행'이란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그녀, 도도란 중년 사내가 말을 건다. 누가 봐도 변태 중년이 '들이대는' 상황이지만 그녀는 순수하다.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가슴을 만지는 도도를 보고도 '심성이 깨끗한 사람이니까 파렴치한 행동을 할 리 없다. 격려하려고 팔을 올린 게 방향이 어긋난 것이다'(p.28참조)라며 이해하려고 한다. 여장부 하누키가 때마침 등장하지 않았다면 도도의 추행은 계속 되었을 것.

또한, 그녀는 대학축제의 공기총 오락장 '너의 하트를 노려라!'에서 정중앙을 맞춰 대형 비단잉어인형을 받게 되는데, 들고 갈 방법이 없자 업고 가기로 한다^^ "그럼 끈 하나만 주시겠어요? 업고 가게요."(p.199) 하하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이렇게 그녀는 대학축제내내 잉어인형을 업고 돌아다닌다. (이 점에서 표지그림은 아쉽다. 잉어인형이 너무 작다. 핸드백 정도가 아니라, 사람키에 맞먹는 크기인데 말이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기발한 매력이 톡톡 튀는 책이다. 왜 일본의 독자,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격찬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타무라 가오루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공허해진다.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맞는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머지않아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될 것이다. 그런 작가의 시작을 함께하고 싶지 않은가?



* 제목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본문에서 두 번 나온다. 모두 이백 씨가 '여자후배'에게 건네는 말인데, 한번은 술 마시기 대결 도중(p.82), 다른 한번은 그녀가 병문안 왔을 때.(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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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9-0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읽을일이 없을 것 같은 책인데, 이상하게 신간목록에서 보았을 때부터 자꾸 머릿속에 제목이 맴돈다지요...^^ 나도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슬프기도 하고..

쥬베이 2010-07-15 19:20   좋아요 0 | URL
헉! 시즈님이다!!!^^
문체가 기발하다 못해 괴상하기까지 해요ㅋ 하여간 독특한 작품인데
상당히 재미있어요. 음...시즈님은 싫어하실지도 모르겠다ㅎㅎㅎ
천진난만한 여대생이 주인공이에요...톡톡 튀는 캐릭터라 시즈님도 좋아하실거 같은데.....아무튼 반가워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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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의 가장 큰 특징은 기발하다 못해 괴상하기까지 한 문체이다. 이를 즐길 수 있다면 모리미 도미히코에 빠져들 것이고, 아니라면 실망할 것이다. 사실, 초반부는 '실망'쪽에 가까웠다. '이건 뭐야? 이따위 문체는 도대체 뭥미?ㅋㅋㅋ'이랬다. 그러나 2장, 3장을 읽으며 어느새 적응이 됐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괴상함.

등장인물을 보자. 화자인 '나'와 친구 '오즈'가 역시 중심인물. [나] '시모가모 유스이 장'에서 하숙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며 공부, 연애, 아르바이트 같은 변변한 일은 하지 않고, 오즈와 함께 괴상망측한 일을 벌인다. [오즈] '나'와 같은 학년이며 공부나 성적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오즈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자. '야채를 싫어하고 즉석 식품만 먹기 때문에 안색이 어쩐지 달의 이면에서 온 사람 같아 심히 소름끼친다. 밤길에 마주치면 열 중 여덞이 요괴로 착각한다. 나머지 둘은 요괴다. 약자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강자에게 알랑거리고, 제멋대로고, 오만하고, 태만하고, 청개구리 같고, 공부도 하지 않고, 자존심은 터럭만큼도 없고, 타인의 불행을 반찬으로 밥을 세 공기 먹을 수 있다.'(p.13) 왠지 만화캐릭터 같지 않은가?

[아카시] '나'와 오즈보다 한 학년 후배이다. 냉랭하고 이지적인 미모의 소유자지만, 말도 거침없이 하고 선배에게도 대드는 당찬 면이 있다.(p.61참조) 유일하게 무서워 하는 건 나방뿐. [조가사키 선배] 1장에선 영화동아리 '계'에서의 지위를 이용, 후배 여학생을 농락하는 재수없는 인물로, 2,3장에선 히구치 스승과 대결을 벌이는 맞수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나', 오즈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 [히구치 스승] '시모가모 유스이 장'에 살고 있다. 그것도 바로 '나'의 위층에. 오즈와 '나'의 괴상한 삶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다. 영화 '색즉시공'의 최성국씨와 비슷한 캐릭터.

각 장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과 기본설정은 유사하지만, 이야기전개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히구치 스승의 2층 방에서 물이 샌 시점에, 화자는 1장에선 제자가 아니었지만 2장에선 이미 제자다. 2장에서 미수에 그쳤던 '조가사키의 그녀(?) 가오리씨 납치'가 3장에선 성공해 있다. 또한 '나'와 오즈가 속했던 동아리가, 1장에선 '계'란 영화 동아리지만, 3장에선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이다. 이런 미묘한 차이는 등장인물의 개성을 한층 뚜렷하게 부각시키며, 독특한 구성의 묘까지 만끽할 수 있다. (줄거리를 소개하기 보다, 등장인물 위주로 살펴본 것은 이런 구성상의 독특함 때문이다)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는 소장가치 있는 작품이다. 뭐니뭐니해도 재미있고, 독특한 문체와 구성력은 충격적이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읽으며, 이 작품의 가치를 확실히 이해했다. 왜 일본의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모리미 도미히코에 열광하는가? 그 해답이 여기 있다.

 


* 후기를 읽으며 '권영주님이 이런 분이 아닌데…뭘 잘못 드셨나'했다. (항상 후기를 먼저 읽는다.) 시건방진 말투,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감, 역겨웠다. 특히 "독자 제씨가 알고 있는 표현과 명백히 다르게 쓰인 표현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고 역자가 무식하거나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주지하기 바란다."(p.406) 이 부분에선 정말 책 싸들고 찾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ㅋㅋㅋ반전이 있는 후기라니^^ 권영주님 잠시나마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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