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구판절판


"불경기, 불경기하고 요란을 떨어대지만, 이렇게 오래 지속된다면 그게 이 나라의 표준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시험에서 한 번 만점을 받았어도 그 다음에 계속 50점이라면 그게 아이의 실력인 거지. 옛날에 어쩌다 승승장구했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그러리라고 착각하는 바보들의 나라에는 미래가 없어."-8쪽

"젊은 여자지? 자네처럼 성실한 남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전력을 투구하니까 좀 젊고 발랄한 여자를 보면 그냥 감동해 버리고 마는 거야. 탄광에서 방금 나온 남자가 햇빛을 보고 황홀해 하는 것처럼."-221쪽

사사로운 분노, 개인적인 원한, 뭐라 해도 좋았다. 공적인 이유로 일어나는 전쟁이나 내분에 비하면 훨신 더 건전하다. 개미나 벌은 자신들의 집과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지만, 자신의 원한 때문에 상대를 쓰러뜨리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복수가 훨씬 인간적이라고 도요타는 생각했다.-261쪽

"러시(Lush)는 술주정뱅이라는 뜻인데, 술꾼의 자포자기 인생쯤 되겠지. 자네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그런 새로운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어."-276쪽

"인생에 프로가 있을 리 없어. 가끔 자기가 무슨 인생의 프로라도 되는 양 잘난 척 하는 놈도 있더라만, 실제로는 모두가 아마추어고 신인이야."-276쪽

누군가가 죽었는데, 누군가가 살인이라는 중대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이 세상은 어떤 식이든 조금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을 하나 죽였는데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의미 따위는 없지 않은가.-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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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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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작품을 만나면, 서평쓰기가 부담 된다.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과 재미를 짧은 글로 표현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뒤에 실린 에드가와 란포상 심사위원 '니시가미 신타'의 해설 일부를 인용하겠다. "안 좋은 말을 늘어놓는 해설은 읽는 적이 없으니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봤자 의심스럽다는 삐딱한, 아니 실례, 신중한 분도 계시겠지만, 정말이지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근래에 없는 뛰어난 논스톱 서스펜스 입니다. 만약 중간에 읽다가 멈출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얼굴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진짜 '환불 보장'을 내세워도 좋을 걸작이니까요."(p.404)

'읽다 중간에 멈출 수 있다면 얼굴한번 보고 싶다'는 표현, 마지막장을 넘기고 느꼈던 희열과 감동을 한마디로 표현해냈다. <그레이브 디거>는 흥미진진하다. 처음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을 읽고 느꼈던 충격을 다시한번 느꼈다고나 할까. 작품마다 어김없이 선보이는 탄탄한 구성과 땀을 쥐게하는 스릴, 정말 대단하다. 그럼 줄거리를 살펴보자.

각성제 판매상 '노자키 고헤이'는 거래과정에서 구매자 '곤도 다케시'를 살해하고, 우연히 지나가던 11명의 목격자가 이를 목격한다. 노자키는 체포되지만 강하게 범행을 부인하고, 피해자의 시체는 사라졌다가, '제3종 영구시체'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한명의 악당이 있다. 연예인을 꿈꾸는 소녀들을 사취해 돈을 뜯어내고, 성대모사로 유명인의 돈을 갈취하는, 파렴치한. 그는 어린시절부터 소년원을 들낙날락한 악당이지만, 본성자체가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다른 이를 돕기위해 골수제공자가 된다. 그는 돈을 빌리기 위해 친구 시마나카집으로 갔다가, 정체불명의 이들에게 추격당한다. 

'그레이브 디거'란 과연 무었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야기속 이자와 박사의 말(p.99)을 통해 알아보자. "영어로 '무덤을 파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녀를 박해하는 분위기가 영국에 미칠 무렵에 이단 심문관들이 누군가에세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중략) 그 당시 사람들은 고문당해 죽은 자가 무덤에서 살아나서 자기를 죽인 자들한테 복수한 거라고 수군댔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한 사자를 '그레이브 디거'라 불렀답니다."

처음 이 전설이 실재하는 것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레리브 디거 전설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저자의 창작이라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기존의 전설을 차용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과 전설을 창조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악당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야가미 도시히코'. 그가 정체불명이 사내들에게 추격당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함의 절정이다. 범죄로 뼈가 굵은 그와 끈질기게 추격하는 정체불명의 집단. 한편, 시마나카가 살해된 방법과 동일한 방법과 보이지 않는 불을 이용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데,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읽는내내, 고민했던 것이 있다. 과연 진정한 정의는 무었인지? 정말 사회를 좀 먹는 악당은 누구인지? 야가미 도시히코. 그는 악당이자, 파렴치한이고 한마디로 나쁜놈이다. 하지만 그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엔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선량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가해진 학대와 전과자에 대한 차별속에서 선량한 마음은 꺼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의원 '도모토 겐고'를 보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직 경찰관이자 지금은 국회의원인 도모토 겐고. 과연 그가 야가미보다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위해 천인공로한 짓도 서슴치 않는 그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악이자, 진정 뿌리뽑아야 할 원흉이다. 이런 차원에서 난 니시카와의 행동을 이해한다. 비록 상관에게 툴툴대고 불성실해 보이던 그지만, 선을 가장한 악의 커다란 음모를 알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전부 밝힐 수는 없지만, 사건의 진실로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여럿 밝혀진다. <그레이브 디거>, 여름철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 버렸다. 여름철 무더위를 책을 통해 날려버리고 싶다면, 주저하지 마시길...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보증한다.


* 일본 경찰청 내부의 구조와 권력투쟁에 대한 저자의 지식이 놀라웠다. <13계단>에서 선보인 일본 교정행정관련 묘사에 놀란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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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케 2007-07-2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저도 어제 이 책을 읽고 감동해버렸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아주 시원하게 해줄 명작임에 틀림없어요.. 이분 작품인 유령인명구조대도 곧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쥬베이 2007-07-27 21:34   좋아요 0 | URL
유스케님도 흥미롭게 읽으셨군요^^
저 도서관에서 유령인명구조대 빌렸어요~ 기대중이에요~ㅋㅋㅋ
유스케님 자주 뵈요^^
 
이코 - 안개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현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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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가 게임광인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게임에 하도 몰두해 직원들에게 게임 금지령까지 받을 정도라 하니, 그녀의 게임사랑을 짐작할 만 하다. <ICO-안개의 성>은 그런 연장선상에서 탄생했다. 소니의 PS2 명품(?^^)게임 ICO를 소설화한 독특한 소설.

사실 게임을 소설화한다는 것은 해볼만한 시도이다. 게임의 기본설정이나 스토리라인이 소설의(특히 환타지 소설) 그것과 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소설화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게임의 스토리라인 속을 거니는 행복한 상상속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슈퍼마리오, 원더보이, 구니스 같은 게임속 주인공이 되어 악당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내는 상상을 하던…. 

사실 초반부에 이야기 몰입이 어려웠다. '안개의 성'이나 '뿔달린 아이'같은 독특한 설정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데, 이건 ICO란 게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데다, '미야베 미유키=사회파 추리소설'이란 공식을 깨버리는 설정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적응이 됐다.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란 당연한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읽는데 ICO란 게임을 알 필요는 없다. 도리어 알지 못하는게 소설에만 몰입할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 더 유리하다. 

뿔을 가진채 태어난 이코는 마을전설에 따라, 안개의 성에 제물로 바쳐지기 전까지 촌장내외에 의해 길려진다. 특히 촌장부인 '오네'는 이코를 특별한 애정으로 보살펴 준다. 한편, 이코의 친구인 토토는, 제물로 바쳐질 날만 기다리며 외딴성에 갖혀있는 이코의 처지를 안스러워 한다. 그는 함께 안개의 성으로 가고 싶어, 몰래 마을을 떠나 '금기의 산'으로 향한다. 곧 안개의 성으로 가게 될 이코를 먼저가서 기다리려 했던 것. 토토는 과연 '금기의 산'에서 어떤 경험을 할까? 이코는 결국 안개의 성으로 길을 떠나고, 갖혀있던 '요르다'란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소설이 다양한 간접체험을 하게 해준다면 측면에서, 이코-안개의 성은 일단 긍정적이다. 읽는동안 어린시절 꿈꿔왔던 게임속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독특한 환타지적 설정도 괜찮았다. 하지만, 너무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주인공과 여주인공이 힘을 합쳐 악을 물리치고 많은 이들을 구한다는-은 이야기 막판으로 갈수록 흥미를 반감시켰다.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왜냐 원작게임이 있는 상황에서 미야베 미유키가 게임 ICO의 기본설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저런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 '어? 이런 얘기가 아니었는데'라고, ICO제작자 분들을 난감하게 하지 않는 소설만 되게 하자며 열심히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결과는 어떨지 긴장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중)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코-안개의 성은 날 어린시절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게임주인공이 되어 상상속에서나마 멋진 활약을 펼쳤던 잠깐 동안의 행복. 그 하나만으로도 <이코-안개의 성>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몇몇 아쉬움은 게임의 소설화라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결과라고 본다. 어린시절 게임속 주인공을 꿈꿨던 분들, 미야베 미유키의 색다른 소설을 접해 보고 싶으신 분들, <이코-안개의 성>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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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lizabeth Gilbert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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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이 책을 보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3개국을 여행한 그냥 여행기려니 했다. 하지만 '들어가는 말' 부터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저자의 인생철학, 절절한 경험이 바탕이 된 멋진 인생지침서,행복지침서이다. 500페이지 가까운 이 책을 읽는내내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그녀...그것도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책을 읽으며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다.

저자는 이 책의 구성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108개의 염주알로 이루어져 있는 자파 말라(일종의 염주?)처럼 이야기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 전체의 내용 또한 인생의 균형을 찿으려는 내 노략에 관한 것이기에 책을 자파 말라처럼 구성하기로 결심하고, 내 사연을 108개의 염주알에 해당하는 108개 이야기로 나누었다. (중략) 각 나라마다 36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셈인데, 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사실이 마음에 든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 현재가 내 인생의 서른 여섯번째 해이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중)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자.

욕실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한 여인. 그녀는 6년간의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더 이상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음을, 둘사이 아이를 원하지 않음을 안 그녀는 결심을 한다. 모든걸 버리고 여행을 떠나기로...

[이탈리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나라마다 36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풍물이 가득한 일반적인 여행기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처음 등장하는건 지오반니란 이탈리아 남자. 그는 바바리니 광장 게시판에 함께 공부를 할 영어원어민을 구한다는 전단을 붙였고, 저자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금욕적 삶을 갈구하던 그녀를 흔들리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지오반니. 그녀는 과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런지.

그 후로 그녀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느낀다. 인상적인 부분은 루카 스파게티의 생일파티 이야기(p.166)였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그의 생일.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이들이 섞여 3개국어가 혼합된 감사기도. 이들은 알 수 없는 동질감에 감동한다.

[인도] 종교적 색채가 가득한 이 나라는 인생을 되돌아 보려는 그녀에겐 딱 어울리는 나라일지 모른다. 그녀는 명상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만히 앉아있기도 힘들다. (p.209) 그런 그녀는 서점위치를 설명하는 자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인 여성에게 화를 내고 부끄러워 한다.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자신에 대한 반성. 명상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데, 여러직업을 전전하다 택사스에서 온 리처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명상을 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그녀와 함께 하는 그.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는 오스틴으로 떠나고 한가지 결심을 한다.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 (p.287) 그녀는 결국 명상의 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런지.

[인도네시아] 그녀는 인도네시아 여행을 이렇게 말한다. '내 대책 없는 여행 역사상 최고봉"(p.322)이라고. 그녀는 환율은 어떤지, 어디로 가야할지, 체류기간 같은 기본적인 정보없이 인도네시아땅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새롭게 친해진 유데이 같은 친구와 함께 씩씩한 여행을 계속한다.

특별히 여행기라 생각하지 않으면 전혀 여행기란 생각이 안 들정도로 이국의 풍물이나, 자연환경등은 부각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저자가 만난 이들과 경험들이 잔잔하게 서술된다. 난 이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괜한 감상에 휩슬려 저자가 받은 인상만을 답습하지 않고, 오히려 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환상적이고 색다른 여행기...색다른 인생지침서를 읽고 싶다면 주저말고 선택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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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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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가슴을 울리는 글이 있다. 독자를 휘어잡으려는 현란한 수사도, 현학적인 표현도 없지만, 은은하게 다가와 마침내 가슴을 뒤흔드는 그런 글.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는거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난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알았다. 오사키 요시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걸...그와 난 상당히 통한다는 걸. 건방진 소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교감은 진실하다.

<9월의 4분의 1>은 4편의 단편이 모인 단편집으로, 오사키 요시오의 느낌을 강렬하게 전해주었다.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세계를 조금 더 깊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삿포르 출신으로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던 야마모토와 다케이. 그들은 도쿄의 같은 대학에 나란히 진학하고, 체스를 통해 구미문화를 연구한다는 '체스연구회'에 가입한다. 체스연구회를 이끄는 인물은 나카야마 요리코. 서로 호감을 쌓아가던 이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케이와 요리코사이에 화자인 야마모토가 들러리 서는 관계.

화자인 야마모토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나 자신을 야마모토에 투영해 보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체스연구에 몰두하는 야마모토, 전공공부가 아닌 일반 소설을 열심히 읽는 나.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은 불안함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자네는 체스에 빠져 있다고? 그거 괘나 무의미하군."(p.21)이라는 요리코 아버지의 말. 그에 대한 야마모토의 반발은 곧 내 변명이었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는 노르웨이 작가 얀 울프센의 대표작(p.56)으로 벗거벚은 남성의 청동상이다. 엘리시오는 스칸디나비아의 오랜된 민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오로지 한 가지 일념으로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는 작없을 의미도 없이 평생 반복하다가 죽어간 사람이라 한다.(p.57) 엘리시오는 곧 야마모토이며, 결국 우리모두이다. 요리코가 이 청동상을 그토록 야마모토에게 보여주려고 한 이유는 무었일까? 저자의 추측대로, 결국 인간은 누구나가 의미없는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지?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읽자마자 이건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란 말이 튀어나왔다. '장기세계'란 잡지 편집장으로 오래 일하던 오사키 요시오, 그리고 이야기속 '장기 팬'이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소설속 나. 정말 자전적 소설인지, 소재를 하나 끌어온건지 몰라도,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생각되어지는 글이 상당수다. 나중에 소개하게 될 표제작도 오사키 요시오의 생생한 실제 이야기라고 난 믿는다.

20년가까이 근무했던 '장기 팬'이란 잡지를 그만두는 그는 한 영국인 노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남편에게 인생최대의 즐거움을 안겨준 '장기 팬' 잡지에 대해, 또 이를 만들어준 이에 대한 감사함이 적혀있었다. 영국인 부인의 남편은 영국에 유학을 떠나 스파이로 몰리게 된 일본인. 그리고 저자는 명왕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중있게 서술하는데, 읽어보시길.

[9월의 4분의 1] 소설가를 꿈꾸고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겐지. 하지만 막상 원고지를 앞에 두고 보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는 '글을 쓸 수 없다기 보다는 쓸 것이 없었다'(p.184)고 말한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그는 거리로 나가기로 하는데...그리고 그는 갑작스레 브뤼셀로 가기로 한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겐지는 오사키 요시오 자신인 듯하다. 오랜 편집장생활을 거쳐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 소설을 들여다보면 양자에 상당한 공통점을 찿아낼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겐지의 안타까움. 그 심정은 상당히 공감이 갔다. 지금의 내가 원고지앞에 앉는다면  역시 겐지와 같은 상태가 아닐까?

쭈욱 살펴보면서 사랑이야기는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단편집을 꽤뚫고 있는건 사랑이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에서 요리코와 야마모토의 사랑, 켄싱턴에 바치는 장미에서 미나코와 유이치의 사랑, 슬퍼서 날개가 없어서에서 마미와 마쓰자키의 사랑등. 은은한 가슴울림은 감미로운 사랑묘사 때문일까? 평단의 지지와 독자의 호응을 모두 얻는 작가라는 말...정말 오사키 요시오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깊은 여운을 느껴보시길.

* 9월의 4분의 1은 파리의 지하철 역이름이다. Quatre Septembre 정확한 뜻은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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