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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잔잔히 가슴을 울리는 글이 있다. 독자를 휘어잡으려는 현란한 수사도, 현학적인 표현도 없지만, 은은하게 다가와 마침내 가슴을 뒤흔드는 그런 글.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는거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난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알았다. 오사키 요시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걸...그와 난 상당히 통한다는 걸. 건방진 소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교감은 진실하다.
<9월의 4분의 1>은 4편의 단편이 모인 단편집으로, 오사키 요시오의 느낌을 강렬하게 전해주었다.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세계를 조금 더 깊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삿포르 출신으로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던 야마모토와 다케이. 그들은 도쿄의 같은 대학에 나란히 진학하고, 체스를 통해 구미문화를 연구한다는 '체스연구회'에 가입한다. 체스연구회를 이끄는 인물은 나카야마 요리코. 서로 호감을 쌓아가던 이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케이와 요리코사이에 화자인 야마모토가 들러리 서는 관계.
화자인 야마모토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나 자신을 야마모토에 투영해 보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체스연구에 몰두하는 야마모토, 전공공부가 아닌 일반 소설을 열심히 읽는 나.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은 불안함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자네는 체스에 빠져 있다고? 그거 괘나 무의미하군."(p.21)이라는 요리코 아버지의 말. 그에 대한 야마모토의 반발은 곧 내 변명이었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는 노르웨이 작가 얀 울프센의 대표작(p.56)으로 벗거벚은 남성의 청동상이다. 엘리시오는 스칸디나비아의 오랜된 민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오로지 한 가지 일념으로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는 작없을 의미도 없이 평생 반복하다가 죽어간 사람이라 한다.(p.57) 엘리시오는 곧 야마모토이며, 결국 우리모두이다. 요리코가 이 청동상을 그토록 야마모토에게 보여주려고 한 이유는 무었일까? 저자의 추측대로, 결국 인간은 누구나가 의미없는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지?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읽자마자 이건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란 말이 튀어나왔다. '장기세계'란 잡지 편집장으로 오래 일하던 오사키 요시오, 그리고 이야기속 '장기 팬'이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소설속 나. 정말 자전적 소설인지, 소재를 하나 끌어온건지 몰라도,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생각되어지는 글이 상당수다. 나중에 소개하게 될 표제작도 오사키 요시오의 생생한 실제 이야기라고 난 믿는다.
20년가까이 근무했던 '장기 팬'이란 잡지를 그만두는 그는 한 영국인 노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남편에게 인생최대의 즐거움을 안겨준 '장기 팬' 잡지에 대해, 또 이를 만들어준 이에 대한 감사함이 적혀있었다. 영국인 부인의 남편은 영국에 유학을 떠나 스파이로 몰리게 된 일본인. 그리고 저자는 명왕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중있게 서술하는데, 읽어보시길.
[9월의 4분의 1] 소설가를 꿈꾸고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겐지. 하지만 막상 원고지를 앞에 두고 보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는 '글을 쓸 수 없다기 보다는 쓸 것이 없었다'(p.184)고 말한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그는 거리로 나가기로 하는데...그리고 그는 갑작스레 브뤼셀로 가기로 한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겐지는 오사키 요시오 자신인 듯하다. 오랜 편집장생활을 거쳐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 소설을 들여다보면 양자에 상당한 공통점을 찿아낼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겐지의 안타까움. 그 심정은 상당히 공감이 갔다. 지금의 내가 원고지앞에 앉는다면 역시 겐지와 같은 상태가 아닐까?
쭈욱 살펴보면서 사랑이야기는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단편집을 꽤뚫고 있는건 사랑이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에서 요리코와 야마모토의 사랑, 켄싱턴에 바치는 장미에서 미나코와 유이치의 사랑, 슬퍼서 날개가 없어서에서 마미와 마쓰자키의 사랑등. 은은한 가슴울림은 감미로운 사랑묘사 때문일까? 평단의 지지와 독자의 호응을 모두 얻는 작가라는 말...정말 오사키 요시오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깊은 여운을 느껴보시길.
* 9월의 4분의 1은 파리의 지하철 역이름이다. Quatre Septembre 정확한 뜻은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