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
조유전 이기환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서론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 같아 약간 설레는 바이다. 방학을 맞이하여 후배들과 함께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읽고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면서 자유롭게 토론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자그마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이렇게 첫 번째 책의 서평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매일 발굴현장에서 일하는 필자에게 있어 방학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마당에 강제적으로 공부를 할 만한 어떠한 장치도 없어서 이처럼 책을 읽고 서평을 쓸 만한 여유(?)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스터디를 하게 됨으로써 책도 읽고 서평도 쓰게 됐으니 후배들한테 고맙다고 밥이라도 사야할 것 같다.

오늘 필자가 쓸 서평의 주인공은『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이다. 필자 생각에 이 책만큼 고고학을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설명한 책이 또 있나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잘 쓰인 책이다. 필자 역시 ‘고고학을 공부하겠다.’ 고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이 책을 읽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읽으니 그 역시 느낌이 달랐다. 그때 서평이나 독후감을 남겼으면, 지금 다시 읽어보고 어떻게 다른 느낌이었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 했기에 그저 아쉬움만 남을 따름이다. 아무튼 이제라도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남겨 차후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어떠했었는지 알고자 하는 바이다.  

Ⅰ. 책의 차례와 구성

먼저 이 책의 공저자인 조유전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한국 고고학계의 산 증인이다. 무령왕릉 발굴부터 시작해 안압지, 황룡사지, 감은사지,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초등학교 1학년생들도 다 알만한 너무나 유명한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유적조사연구실장, 국립민속박물관장,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분이다. 그렇기에 그분의 30여년 현장 경험이 이처럼 좋은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공저자 이기환은 현재 경향신문 문화팀장으로서 조유전의 글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각 장마다 부연설명식의 Tip을 정리했는데, 그러한 구성이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 신라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었나 - 신국의 도가 있었던 신라
2. 27만 년 전 구석기인의 세계
3. 1,500년 만에 다시 터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
4. 되찾은 500년 도읍지, 비운의 한성백제를 깨우다
5. 강아지까지 금목걸이를 찼던 황금나라, 신라의 금관
6. 남한산성이 치욕의 성이라는 편견 뒤엎기
7. ‘대박발굴’을 터뜨린 ‘시험용 발굴’
8. 고인돌의 천국 한반도
9. 경애왕은 그때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10. 왜 일본식 무덤이 한반도에 있을까
11. 60대 남성과 15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12. 충도를 하늘에 맹세한 화랑들
13. 왜 ‘일제’ 빨갱이 고분이 경남 고성에 있었나
14. 2,300년 전의 최첨단 산업, 거푸집
15. 백제 말 무왕의 행정수도, 익산
16. 칠지도는 근초고왕의 하사품?
17. 물구덩이에서 건진 걸작 백제금동대향로
18. 신라의 심장부 경주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흔적
19.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부활한 개무덤, 경주 용강동고분
20.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
21. 고등학생이 찾아낸 아라가야의 편린 함안 마갑총
22. 해상왕 장보고의 야망과 좌절이 깃든 청해진 본영
23. 여말선초의 국찰, 또 하나의 궁궐 양주 회암사
24. 영원한 평등세계를 위하여!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궁예
25. “조선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는 고려의 충신이다”
26. 지금은 아파트촌이 된 고구려 최전방 초소
27. 고려 광종의 야망, 어머니 사랑이 담긴 국찰
28. 고구려 남침의 통로, 경기 연천 호로고루성
29. 기원전후 마한인들의 생활공간 신창동유적
30.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다 - 공주 무령왕릉 발굴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총 30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진과 큼직한 글씨로 이뤄져 있어 마치 인터넷 블로그상의 웹진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5년 전에 만들어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으로 이뤄졌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하지만 차례를 보면서 필자가 아쉽게 생각한 것은 구성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분명 저자는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 유적’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유적인 ‘송은 박익의 벽화무덤’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으면서 이를 뒤죽박죽 나열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유적의 발견년도대로 나열한 것도 아니고, 저자가 현장에 참여한 순서대로 나열한 것도 아니라면 그저 저자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혹은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순서대로 나열한 것에 불과할 텐데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또한 책의 제일 뒷부분에 보면 각 장을 쓰면서 봤던 참고문헌들을 정리해 놨는데, 이는 이 책이 학술서적이면서도 대중서적의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을 알려준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추후 다른 고고학 서적들에 대한 서평도 계속 쓰겠지만,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쓴 책들 대부분은 이처럼 개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한 발굴현장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간 대중서적 아니면 자신의 전공분야를 전문적으로 풀어쓴 학술서적 뿐이다. 그 중도(中道)를 지키는 책은 별로 없다. 아니 이 책 말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아직 고고학 혹은 발굴, 유적, 문화재라고 하는 키워드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핫 이슈가 될 만한 문화재(여기서 핫 이슈라 함은 국제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할만한 문화 콘텐츠를 의미한다)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현장에서 발굴조사에 치중하거나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 보니 대중들에게 친밀한 글을 자주 남길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럼 책의 대략적인 구성에 대한 평(評)은 이만큼만 하고 세부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Ⅱ. 각 장에 대한 비평

1. 역사적 · 사회적인 의미가 큰 유적 소개

저자는 실제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유적들을 많이 발굴했고, 그와 관련된 경험담을 책에 풀어쓰고 있는데 그러한 유적들이 저자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 혹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저자는 세계 고고학계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린 ‘전곡리 유적’부터, 수많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풍납토성’,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고 있는 ‘신라 금관과 여러 고분들’, 한-일 양국 간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칠지도’,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한 ‘백제금동대향로’ 등 대중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그냥 박물관에 가서 볼 수 있는 유물들, 책에서 볼 수 있는 유적들에 대한 단편적인 암기용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발견됐고, 어떤 연구 및 조사를 받아서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신뢰도 100%)을 토대로 재미있게 풀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독자는 절로 흥미를 느끼고, 저자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고고학계의 대부(大父)라고도 할 수 있는 김원룡 선생님과 김영배 선생님이 무령왕릉 입구에서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癸’라는 2줄의 명문을 발견하고 가슴이 덜컹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 역시 저런 삼국시대 명문을 발견하면 기분이 어떨까~싶었다. 이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그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유적, 유물들에 대해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  

2. 대중적이지 않은 유적 소개

그와 더불어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대중적인 문화재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문화재 역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송학동고분이나 완주 갈동유적, 감은사 금당터의 지하공간, 밀양 송은 박익의 벽화무덤, 예성동호회의 활약으로 확인된 충주 숭선사와 밀봉된 장군 등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봤던 내용들이었다. 문헌사학과 달리 고고학은 매일매일 새로운 고고자료가 현장조사를 통해 밝혀짐에 따라 사료가 무한정 늘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분야와 관련된 자료만 따져도 매일매일 업데이트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비전공분야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문헌사료가 한정된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적들은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필자와 같은 고고학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필자는 고분 내부가 전부 빨갛게 채색되어 있는 송학동 제1호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이건 일본계 고분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안에는 가야, 신라, 백제, 왜계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마치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를 중심으로 가야, 왜 등이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한 듯 했다. 무덤이라는 것이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적 요소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그렇기에 무령왕릉은 한국사에 있어 아주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식 장식고분이 한반도에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가야-왜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당시 가야와 영산강 세력을 두고 삼국시대가 아닌 오국시대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있을 만큼 가야는 백제, 신라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룬 국가였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히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3. 한국 고고학계의 발전상을 잘 소개

한국 고고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 넘어와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경주에 존재하는 수십 여기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잘 소개하고 있었다. 금관 혹은 금동관이라고 하는 돈 되는 보물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 의해 벌어진 가짜 금관 도난 사건이나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의 현장 참관 때문에 이름 붙여진 서봉총에 대한 얘기는 씁쓸하게 들렸다. 하지만 해방 이후 천마총을 성공적으로 발굴한 이야기나 저습지 발굴을 하기 위해 2년간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저습지 발굴기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조현종의 사례 등은 그간 한국 고고학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발전해왔음을 알려주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한국 고고학은 기존의 문헌사학이 해낼 수 없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진위 논란이 뜨거웠던『화랑세기』에 묘사된 신라의 지극히 개방적이었던 성문화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남근과 성적 행위를 묘사한 토우에서 입증이 되었으며, 자세한 성격을 알 수 없었던 풍납토성이 백제의 한성임을 증명하기도 했으며, 제천 황석리 고인돌의 인골을 통해서 청동기시대 인적 자원의 교류에 대해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밖에 문헌에서는 알 수 없던 화랑들의 약속이 담긴 ‘임신서기석’이나 고대 백제와 왜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 ‘칠지도’는 물론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호우총’과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한강 일대의 ‘고구려 보루’들까지 고고학이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냈는데 이 모든 것이 선학들이 어렵게 쌓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풍납토성에 대한 글을 읽으면 문화재와 땅값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2가지 현안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문화재 신고에 따른 보상이 적다고 남대문을 홀랑 태워먹은 사건이나 큰 빚을 갚기 위해 바다 속에서 잠든 고려청자를 몰래 숨겨놨다가 들킨 잠수부의 사건 등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풍납토성만큼 큰 문제가 있었던 유적은 없었으며, 앞으로 풍납토성 내부가 사적지 등으로 보존되기까지는 해결해야만 부분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오늘날 한국 고고학계가 떠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 앞으로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도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생생한 현장 사진과 진실한 저자의 독백

이 점을 필자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데, 여느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보면 도면이나 도판이 많이 실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실측도면, 수습한 후 복원이 끝나 완벽한 형태로 찍힌 사진들보다는 당시 현장을 어떻게 발굴했고, 어떤 이들이 그 안에서 꿈을 키웠고,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 등 ‘있는 그대로의 고고학’을 소개한 것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발굴현장이나 지도위원회 전경을 찍은 사진이나 유물이 출토된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은 고고학에 대한 상상(인디애나 존스 같은)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유희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밖에 김원룡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구석기 고고학을 전공한 배기동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것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실제 고고학을 전공하면서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부부의 연을 맺은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사실적인, 그러면서도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고고학자들 중에는 인디애나 존스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려주니 말이다. 또한 무령왕릉 발굴에 대한 저자의 독백과 후회를 보고 있노라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유적, 유물을 대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유적 발굴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던 당시 고고학계의 가슴 아픈 현실이 이해되기도 했다.

결론

대략 전술한 점들 때문에 이 책은 중도를 잘 지킨 최고의 고고학 개설서라고 필자는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고고학 관련된 책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책들을 읽어본 결과, 이 책과 같은 책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 책이 나온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 수준의 책은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고고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딱딱한 학술서적보다는 이 책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곤 하다. 굳이 고고학이라고 선을 그을 필요도 없겠다. 단순히 어떤 책에 무슨 기록이 있고,『삼국사기』가 어쩌고 『삼국유사』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이 책의 생생한 기록들을 읽는 것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사람이 쓴 것이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수많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라 이 책이 장점만 가진 책은 아니라는 말도 해 두고 싶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고고학계의 대원로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지만 필자가 보기에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필자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어 여기에 간단하게 소개하고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저자는 고구려에서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신좌(申坐) 위에 두고 제사를 지냈다고 했는데(p.18), 이는 나름 고구려사를 공부한 필자가 보기에 잘못된 해석임에 분명했다.『위서(魏書)』와『북사(北史)』열전에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나라의 큰 모임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구당서(舊唐書)』열전을 보면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수신(襚神)이라고 하는 큰 굴이라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그밖에『주서(周書)』열전을 보면 나라에 신을 모신 곳이 2곳 있는데, 하나는 나무를 새겨 부여신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시조신 혹은 등고신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삼국사기』잡지에는 이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아마 2곳의 신묘에 마련된 나무로 만든 부여신, 고등신 등을 남근으로 해석하는 듯 했지만『삼국사기』에 분명히 적고 있듯이 그것 중 하나는 부인의 형상을 한 부여신, 즉 하백의 딸 유화이며 나머지 하나는 국가시조인 주몽의 모습을 한 고등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구의동보루에 대한 내용 중에서는 구의동보루가 백제군의 기습에 의해 손 쓸 겨를도 없이 불에 타 전멸했다고 하면서, 아차산 보루 고구려부대는 구의동의 비보를 접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p.361). 과연 그럴까? 양자는 2시간 정도 거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약 구의동보루가 적의 기습에 의해 전멸한 것이라면, 아차산보루에서는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무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2시간 만에 100~150여명이 주둔하는 군사시설이 토기 약간을 제외하고 전부 소개되는 것도 무리가 있고 말이다. 필자는 구의동보루에서 1천점이 넘는 철촉이 발견된 점, 내부에서 찰갑편 하나 발견되지 않은 점, 아차산보루의 단계적 철수가 가능한 점을 근거로 구의동보루의 주둔 병력이 전멸하지 않고 오히려 보루를 버린 채 전략적 후퇴를 했다고 생각한다. 뭐 이 부분은 연구자마다 개인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 밖에 최신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매일매일 신 자료가 나오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미 은퇴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추후 2005년 이후의 고고자료를 이처럼 정리해서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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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08-27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분명히 읽은 것 같은데 별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대충 봤었나 봐요. 열정적인 리뷰를 읽으니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麗輝 2009-08-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열정적인 리뷰라. 암튼 시간나면 한번 다시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