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석기용 옮김 / 이마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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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전쟁이라는 극히 폭력적인, 그러면서도 비인간적인 행위가 순수과학자들과 어떻게 연계되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대 전장에서 가공할 전투력을 보여줬던 전차(戰車)부터 현대전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줬던 핵무기까지 수천년간 인간이 사용해온 무기들은 모두 다 그 시대 과학자들의 발명품이었고, 순수과학을 주도해야 했던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인명 살상과 문명 파괴에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주저없이 말한다. "결정적 무기의 추구가 과학을 발전시켰다." 고 말이다. 실제 저자는 각 시대마다 전장에서 선보였던 획기적인 군사무기들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렇다고 그가 주장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전쟁에서의 기술결정론은 아니다. 다만, 그는 어느 시기에나 선진적인 군사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집단이 있었음을 밝히고 그러한 군사문화는 곧 주변으로 확산 · 전파되면서 또 다른 군사문화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전쟁에 얼만큼 동조했는지를 말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마사다의 열심당원을 공격하는 로마군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앞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할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 마사다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불렸다. 사방이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대 평원에 자리잡은 마사다는 고대 중동의 축성법이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만큼 완벽을 자랑하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마사다의 수조와 군량 저장소는 적군과의 장기전을 가능케 했고, 두꺼운 돌벽을 6m 높이로 쌓아서 만든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성벽 곳곳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수 km 밖의 적군의 움직임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 농성을 하던 960명의 열심당원은 이제 곧 마사다 요새로 쳐들어올 로마 제10군단 병력 5,000여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흔히 벌어졌던 중동에서의 공성전을 상기하며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군은 전혀 요새로 진격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군에 배속된 수학자들은 로마군 사령관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에게 절벽의 한쪽 면에다 마사다의 1차 방어벽에 곧장 닿을 수 있는 높이 30m, 길이 80m의 흙으로 만들 경사로에 대해 보고를 했다. 그리고 경사로를 만드는데 정확히 얼만큼의 흙이 필요한지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수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설계도를 따라 포로로 잡힌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동원되어 경사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백명의 로마 공병들은 거대한 크기의 공성용 기계인 충차(衝車)를 조립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발리스타(ballista)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궁 모양의 원거리 공격기계를 조립하였다. 그 옆에서는 발리스타로 발사하기 좋도록 큰 바위들을 동그랗게 깎는 로마의 장인들도 보였으며 그렇게 6개월동안 로마군은 기묘한 전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된 전투 결과, 마사다 요새는 함락되었고 로마군은 거의 전력 손실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로마군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수백년간 로마는 주변 민족들을 압도하면서 대제국을 이룩했었다.

그렇게 저자는 전차와 합성궁, 강력한 철제무기, 고대 그리스 과학자들의 열정, 영국의 장궁과 석궁, 대포와 대포를 방어하기 위해 진흙으로 보강한 성벽 등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무기와 그 무기를 방어하기 위한 또 다른 무기, 그보다 앞서가기 위해 더욱더 발전된 무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관되었다. 즉, "과학자는 언제나 자신의 지식을 국가를 위해 사용했고 그것은 전쟁에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순수과학 분야의 발전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군사 외적인 부분에서도 발전을 이뤘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동원된 각종 과학기술이 전혀 다른 효과를 얻어냈던 것을 들 수 있다. 전국을 병참기지화하는 과정에서 운하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으며, 전투에서 활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지도는 이후 지질학, 천문학, 수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전함을 만들기 위해 닥치는데로 나무를 베다보니 조림학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쟁을 위해서 동원된 과학기술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문명의 발달이라는 또 다른 부수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순수과학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전쟁에 이용될 줄 모르고 계속적으로 연구를 해왔던 것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장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인슈타인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전쟁에 대해 저자는 이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부분을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었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동양의 전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어 그 점이 아쉽기는 했다. 동 · 서양이 분명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상호간의 문명 교류를 이뤄왔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각은 이슬람 문명 이동으로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언급된 이슬람과 중국은 종교와 이념 때문에 과학문화가 뒤쳐진 문명으로 소개될 뿐이었다. 어쨌든, 서양의 시각으로만 바라본 과학과 전쟁의 야합이라는 측면만큼은 훌륭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로 가게 되면서 저자는 보다 적나라하게 과학과 전쟁의 야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물론 책 전반부에서 견지했던 입장은 그대로 고수한채 말이다. 자신의 과학기술이 전쟁에 이용될 줄 모르고 연구에 전념한 과학자, 전쟁을 통해 발달한 과학이 일상 생활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 2가지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국가주의 속에서 정치력과 결탁한 과학자들의 양심과 애국심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르키메데스도 과학을 경멸하면서 그리스를 전쟁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동원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그러한 면은 더욱더 부각되기에 이른다. 현대산업의 발달과 제1 ·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과학자는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저자는 거침없이 말한다. 과학은 정치의 시녀가 되었다고 말이다.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충격적인 생체실험과 그로부터 얻은 정보들이 동원된 끔찍한 전쟁, 그리고 전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놓치기 아까운 미국의 야욕이 적나라하게 책에 소개되었다. 거기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이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자국 내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엄청난 내용까지 소개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정말 주인장도 몰랐던 부분인데 읽으면서 섬뜩할 정도였다.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본 흔치 않는 책이기 때문에 더욱더 전쟁과 과학의 치부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장은 고대 동양에서도 이와 같은 식의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 전쟁사 관련 서적을 봐도 서양 위주의 서술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헌이나 고고자료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들은 분명 특정 시기, 특정 국가에 대한 내용이지만 얼마든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용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분명 그 당시 인류가 생각하고 있던 가장 끔찍한 폭력행위이자 최고의 과학기술이 집약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때 이 책은 주인장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떠안겨준 책이기도 하다.

2004년도 대학민국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책이라고 한다. 괜히 선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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