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직업이 있고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다면, 가끔씩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가끔이 아니고 자주일 수 있다.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볼 사람도 없고 직장에서는 위에서 아래에서 당신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 승진은커녕 유부녀인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은 당신이 버는 돈은 좋아하면서, 이익의 대가로서 가사노동이나 시집 동원 행사의 분담이라는 반대급부를 자발적으로 할 마음이 없다. 돈은 벌어도 쌓이는 것은 없고, 남편이 없었더라면 자녀가 없었더라면 내가 직장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불만을 말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하는 당신 또래의 여성들이 눈을 흘길 것이다. 당신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할 일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해라.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pp.140~141)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던 중, 내 나이 서른 하나. 위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같은 서른한 살이라도 얼마간의 개인차야 존재하겠지만 대개는 맞는 말이고 공감했다. 특히 '덫에 걸렸다'는 생각,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라는 부분은 한 마디도 토 달지 않고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가려운 데 살살 긁어주는 것 같더니 불만을 말하지 말란다. 또래 여성들이 눈을 흘길 뿐더러 가진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할 일도 많은 법이라고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더구나 인간으로서 독립을 이룩했으니 네 손으로 네 잔칫상을 차려야 하지 않겠냐며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 일순간 비장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 뿐. 과연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했는가? 자문한 결과 글쎄, 라는 허랑한 대답만 돌아왔다.   
  
  글쓴이 말 맞다나 직업도 있고,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고, 누가 보면 가진 것 많아 보이는데 나와 관련된 소유물이나 인연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역시 나란 인간은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만 되돌아온다면? 자신의 그릇 크기를 모른 채 냅다 남들 하는 건 다 쫓아하려다 보니 뱁새가 가랑이 찢어진 격인가. 욕심은 많으면서 힘든 것은 감당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인가.     

  어느 날 문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넘어서 머리 끝까지 짜증이 엄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재능은 내 꿈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지금도 늦지 않았어, 라고 결의하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싶어 마음을 한겹 두겹 접는다. 더욱이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일평생을 산 엄마를 보고 있으면 그저 입 다물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나 잘하라는, 자조 섞인 자책만 남는다.  
 
  어쩌면 좀더 젊은 날의 나는 매일매일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금의 가시적인 발전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촘촘한 강박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키는 버얼써 멈췄지만 인생의 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진실, 혹은 착각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즐거운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 낳고 생긴 흰머리라든가, 메모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인 몹쓸 기억력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몽땅 털린 듯한 기분이다. 위의 글쓴이는 서른한 살의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데 이 싹쓸이 당한 듯한, 도둑맞은 듯한, 허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영달이가 선물해 주는 나날의 기쁨과는 별개로, -나란 여자는 엄마씩이나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또 별개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조차 참 별스럽지만- 그저 요즘 내 마음의 결이 요모양 요꼴이다. 엄마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어른 취급하려고 난리법석들이지만 서른한 살의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잔칫상을 차리라는 주문이 막막하고 버겁게만 들린다. 마치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빼고 한번 자알 차려봐, 라는 말처럼 답답하고 밍밍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오즈의 마법사, 용기가 필요한 사자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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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카페 형식의 제과점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몸무게가 눈꼽만큼씩 빠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머나먼 지라 웬만하면 피해가려고 했는데 후텁지근한 오후, 팥빙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영달이를 어르고 계실 엄마 생각도 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향연이었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찹쌀도너츠와 팥빙수만 달랑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 편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새카만 썬글라스를 낀 아줌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문 기다리면서 멍때리는 걸 즐기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홀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아줌마가 거친 음성으로 빵이 부스러졌네 어쩌네 하며 따지고 있었다. 일행인지 단발머리를 한 다른 아줌마도 뭐라뭐라 거드는 중이었다.  

  나는 왜 당연히 제과점 주인 아저씨는 살짝 뚱뚱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아줌마 곁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그냥 마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환자 수준이었다. 어깨는 뾰죽하게 올라갔고 푹 패인 볼은 주변의 오동통한 빵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줌마들은 뭔가 시원시원하거나 너스레 섞인 응대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창백하고 가냘픈 아저씨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빵 박스에 테입만 부치고 있었다.   

  썬글라스 아줌마는 소보루빵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빵이 이렇게 큰데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을까, 단발머리 아줌마는 네살이 안되는 애들이 몇이나 되는지 전화해서 물어볼까, 등등 못마땅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 어린이집에라도 보낼 모양인 것 같았다. 아줌마들은 우유도 한 박스 샀는지 아저씨는 우유 박스에도 테입을 붙이고 있었다. 이거 상온에다 보관하면 안되죠? 내일까지 괜찮아야 하는데. 썬글라스 아줌마의 질문.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때 커피와 빵과 책이 있는 가게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 부스러기 안 나오는 소보루빵, 한여름 상온에서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우유를 찾는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더욱이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소보루빵이라니. 나라면 다른 데 가세요, 는 너무 얌전하고 니가 만드세요, 그러지 않았을까.  

  이번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 예전에 혼수를 했던 가구점을 다시 찾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상가가 들어와 있었다. 연락처를 찾아 연락해보니 가게가 잘 안 되어서 그만두었단다. 엄마는 그 내외 인상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우리야 적정 가격에 혼수 잘해서 좋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능수능란하지 못해서는 장사로 돈 벌기 어렵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기억하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면서 다른 가게를 소개했는데 영악한 엄마는 그 아저씨마냥 참해 보이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다른 가게를 뚫어놓으셨다. 나중에 영달이 가구도 거기서 하라면서.  

  내가 원래 좀 가냘픈 사람들만 보면 무턱대고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만, 오늘 제과점 아저씨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채소 늘어놓고 파는 쌍둥이 아버지는 하도 말을 잘해서 꼭 오이 사러 갔다가 가지까지 사게 만드는데 이 아저씨는 멀뚱멀뚱 할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이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서 아줌마들 천지다. 밥 안 하고 빵 사먹으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고 아이들 간식빵 사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다. 종방된 시트콤 '태희, 혜교, 지현이'의 태희, 혜교, 지현이고픈 아줌마들이 넘쳐나는 곳이란 이야기다. 이런 동네에서 빵장사를 하려면, 적성에 안 맞아도 여차저차해서 개업을 했다면, 좀 변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살을 좀 찌워 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려나.  

  비단 오늘 일 뿐만이 아니고 간혹 이런 비슷한 상황을 우연찮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장사나 해볼까, 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가히 소비자 전성시대라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소비자 입장인데도 니가 만드세요,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인간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날은 덥고 불쾌지수 팍팍 솟는 나날들, 나도 이사 준비하느라 거래 중인데 돈이나 지불하면 됐지 스트레스까지 얹어주는 소비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어쨌거나, 팥빙수와 찹쌀도너츠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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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희, 혜교, 지현이에 나오는 아줌마들이라니...ㅎㅎ. 적어도 그런 아줌마는 되지 말아야징.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 전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용.

깐따삐야 2010-07-05 13:40   좋아요 0 | URL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제과점 아저씨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몰라요.ㅠ

Mephistopheles 2010-07-0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이런 장사 못할꺼에요. 아마 소보루빵 어쩌고 4살짜리 애들이 먹을 수 있냐 어쩌고 하면...애들 입을 찢으세요 그럼 한 입에 꿀꺽입니다. 이런 말 하고도 남을 성질머리에요.

깐따삐야 2010-07-05 13:41   좋아요 0 | URL
헉!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메피님 무섭...;;

skul23 2010-07-0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세상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듯..아저씨가 너무 안됬어요 ㅠㅠ...근데 팥빙수가 먹고 싶네요 이 시간에 +ㅁ+...크큭..

깐따삐야 2010-07-05 13:42   좋아요 0 | URL
덩치라도 좀 있으셨다면 덜 안되게 보였을텐데. 너무 홀쭉하셔서 안쓰러웠어요. 빵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셨으면 좋겠어요.

도넛공주 2010-07-02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빵집.........남의 일이 아니네요 이거.

깐따삐야 2010-07-05 13:45   좋아요 0 | URL
아, 도넛공주님도 빵 굽는 일을 하시죠? ^^ 근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저렇게 유별나지 않을 것 같아요. 대개는 조용히 빵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많이 파세요, 하고 나가주지 않을까요?

조선인 2010-07-0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벌써 팥빙수를 드셔도 되나요? 조심하세요. 전 큰 애 낳고 부주의해서 이가 여러 군데 깨져나갔어요. 잉잉

깐따삐야 2010-07-05 13:4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출산하고 얼마 안되서 반팔 입고 한의원 갔다가 의사샘한테 혼났죠.ㅠ 낼모레면 백일인데 저는 백일 전에 먹어서는 안될 찬음식들을 이미 잔뜩 먹어버렸답니다. 나중에 고생하면 어쩌죠.

마늘빵 2010-07-0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사는 정말 함부로 할 게 못된다눈... 온갖 일들을 다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여기 둥글 저기 둥글하는 성격도 필요하고. 내 성격엔 이런 장사는 못하겠다. -_- 그래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변할지도 몰라요.

깐따삐야 2010-07-05 13:5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방송에 나오는 대박집들 보면 정말 온갖 일들을 다 치르고도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을 거듭하여 결국 성공했더라구요. 장사나 해볼까,로 시작했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라는. 저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일단 거절하진 않겠지만.ㅋㅋ

보석 2010-07-0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소비자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좀;;;

깐따삐야 2010-07-05 13:52   좋아요 0 | URL
우리 동네에 저런 아줌마들이 우글우글한다는 게,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볼썽사납게 보일지 모른다는 게, 여러가지로 짜증납니다.

레와 2010-07-0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절묘한 제목! ^^:

깐따삐야 2010-07-05 13:55   좋아요 0 | URL
본인들 귀찮으니까 사먹이는 거면서 엄청 따지더라구요. 하긴, 저런 아줌마들이 더 따져요.

비로그인 2010-07-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장사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

그런데 원래 살이 안찌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의 계속 그 체중을, 무슨 짓을 해도 도돌이표처럼 찍는 사람. 그 아저씨도 그런 분일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들 등쌀에 어찌 하루를 보내셨을꼬...

깐따삐야 2010-07-05 14:0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장사하면 망하겠구나, 하는 자각.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 불만일텐데 불어난 체중 때문에 우울한 저는 딴나라 얘기 듣는 듯 부럽네요. Jude님은 원래 체중으로 다 돌아오셨죠? 아, 저는 처음에 확 빠진 후 계속 제자리 걸음이에요. 그나저나 저런 손님 왔다가면 하루 종일 재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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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이 이야기들을 임신 중에 썼다 했다. 혹자는 어떻게 아기를 가진 몸으로, 한껏 좋은 생각, 고운 생각만 해도 모자랄 시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썼느냐고, 아니 쓸 수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책을 끝까지 읽고나서 오히려 임신 중이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들이구나, 하고 바꾸어 생각하게 되었다.  

  무지한 남성들은 배부른 여성의 몸이 가장 아름답다고 찬탄하기 바쁘지만 과연 그뿐인가. 기쁨과 놀라움도 잠시,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변해가는 심신에 적응 불가의 상태를 지속하면서 온갖 기괴한 악몽과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불길한 상상에 시달려야 했다. 더불어 아기를 가진 여인들에 대한 절절한 동류 의식, 악조건 속에서 아기를 낳아 길러야만 하는 여인들에 대한 연민, 아기를 가진 여성으로서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 전반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울분 등, 많은 복잡한 감정을 겪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 자신과 아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래적 본능으로 짐승처럼 예민해졌다. 나도 딸이 있고, 작가도 두 딸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험상궂은 사회에서 딸의 어미는 사방에 눈 달린 수호신이 되어도 모자랄 판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여자들은 얼핏 <감자>의 복녀, <테스>의 테스, 김기덕 영화의 히로인을 떠올리게 했다. 위선적 지식인에게 희롱당하는 노숙자 소녀, 아버지의 빚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대리모를 자청하는 여대생, 성폭행한 남자를 아빠라 부르며 트럭 생활을 하는 소녀, 부인병을 대물림하는 모녀, 남편의 형과 함께 살며 이웃이 버리고 간 여자아이를 돌보는 여인, 극단에서 일하며 알바로 몸을 파는 여배우 등, 평소에 관심조차 없고 대충 모른 척 했던,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아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에 실린 <하루>의 '나'처럼 교양있어 뵈는 중산층 여성의 삶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여자들은, 특히 자의식이라 명명되는 자신만의 사고와 언어를 갖지 못한 여자들은, 그들을 그저 하나의 물적 대상으로 여기는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이 굳건히 축조해놓은 사회적 폭력에 의해 이처럼 끊임없이 희롱당한다. 더욱이 사방이 벽인 막막한 경제적 난관 앞에서 자의식이라든가 자기성찰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뿐인가. 겉으로는 한껏 사람 좋은 눈빛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나와 너는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긋는 뭇 여성들의 이중잣대는 여자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하지만 이 전망 없고 갓길 없어 보이는 어둡고 가파른 작품들 속에 간간히 빛이 보인다. 비록 거래로 만났지만 대리모와 여인 사이에 이해와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고, 똑같은 병에 걸린 모녀는 서로의 고통을 위로한다. 바닥까지 치닿은 상황에서도 여인은 이웃의 딸과 이마를 맞대고 미역국을 마시고, 여배우는 집 나간 엄마의 딸인 소녀에게 우동을 사먹인다. 가혹한 운명, 또는 인연이지만 딱히 누구의 잘못이랄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러한 몇몇 장면에서 모종의 끈끈한 연대감을 느꼈다.   

  <손>은 독특한 작품이었다. 처음으로 남성 화자가 등장했고 우유를 밀어넣는 배달부의 손에 셔터를 눌러대는 모양새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진화한 히키고모리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이러한 작품을 보면 작가의 다음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한 가지 색깔에 멈추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작가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독자들이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은 사서 읽는다고 말하지만 대중적 호기심과 판매전략에 의해서도 책은 얼마든지 팔릴 수 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렇게 말한다니 좀 어이가 없다. 왜 공지영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그녀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너와 나는 다르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자기안위의 연민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식모였던 <봉순이 언니>를 그렇게 그려놨고, 미모의 중산층 여성이 하잘것 없는 사형수를 사랑하게 되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설정 자체도 좀 오버다. 연민을 위한 연민은 겉돌고, 속이고, 급기야 짜증이 엄습한다.   

  반면에 작가 김이설은 그녀의 인물들에게 희망 따윈 없다고 잘라 말하는 듯 하지만 그 거칠고, 독하고, 어두운 목소리 이면에 괜찮다, 당신들 탓이 아니다, 계속 살아라, 그 또한 삶이다, 하는 존중과 다독임의 목소리가 면면히 들려온다. 그녀는 식모를 천사로 미화시키지도 않고 안락한 생활을 지켜내려는 중산층 여성과 사형수를 억지로 엮어주지도 않는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유리구두를 찾아 방황하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맨발로 진흙탕을 뒹굴며 쌍시옷을 날리는 생 한복판의 여자들이다. 이 작가는 듬직하게도 언어를 다룰 줄 아는 본인의 재능을 그들을 위해 바치고 있다.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건강과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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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소재를 다루었지만 진솔함이 농축되어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극히 사실적인 현실의 소재와 주인공들을 독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주목해 봅니다.

깐따삐야 2010-07-01 10:28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도 읽으셨군요. 모처럼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집을 읽었습니다.^^

레와 2010-06-2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을게요! ^^

깐따삐야 2010-07-01 10:28   좋아요 0 | URL
네네.^^

2010-06-30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kul23 2010-06-3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빨리 구입해서 읽고 싶어요 ..

깐따삐야 2010-07-01 10:41   좋아요 0 | URL
뽐뿌질이 심했나요? ^^
 
특별한 선물
이서인 지음 / 화남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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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에 나온 책인데 그때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을까. 왜 이 책을 지나쳤을까. 아마 홍보 탓일 것이다. 웬 뒷북인지 요즘은 좀 되는 소설들에 관심이 간다. 최근 소설들은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모두 읽지는 못하였으나- 낭비라는 느낌을 준다. 치열함이 없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횟집을 겸한 민박집에 장기투숙을 하게 된 하유정이라는 작가와, 그곳 주방장인 한수라는 남자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스토리 또는 불륜이라고 쓰려다가 그냥 만남이라고 쓴다. 하유정은 한수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러브스토리가 아니며 불륜이라고 하기에는 한수의 순정이 저급해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하유정이라는 여자에 대해 계속 분노하게 된다. 남편과 딸이 있는 그녀는 작가란 모름지기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는 구실로 남성 편력을 즐긴다. 물론 천재적인 남성들로부터 영감과 잠재력을 이끌어내던 루 살로메 같은 여인은 아니다. 그녀에게 남자란, 그리고 연애란 심심풀이 육포 같은 것이다.  

  복잡한 가정의 묵묵한 맏이로, 식당의 근면성실한 일꾼으로 아무런 갈망 없이 살아왔던 한수에게 완전한 낯섦으로 다가온 하유정은 지식인, 먹물 특유의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순수덩어리인 한수를 알아본다. 그리고는 아무 어려움 없이 한수를 자기 남자로 만들어 버린다. 한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 매우 고급하고 세련된 세계에서 왕림한 듯한 하유정에게 스스로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하 작가님은 정말 모든 사람에게 배려가 깊어요. 하기야 작가라면 마땅히 인간을 연민할 줄 알아야지요. 그런 면에서 하 작가님은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갖추신 분이에요." 다시 김 선생의 말, "오히려 제가 저들에게 배우죠." 그녀의 말. 한수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돌아왔다(p.254). 오히려 제가 저들에게 배우죠. 이 대목에서는 토할 것 같았다. 그리고 뜨끔했다.    

  헌신하다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한수에게 그러나 이 연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바, 이렇게 묻고 있다. 저 여자는 자기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p.277) 작가는 독자들이 하유정에게 분노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으면 한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읽는 평범한 독자들보다는 권해줄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않은가. 지식권력으로 분류되는, 소설책이라고는 전혀 사볼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봤으면 싶다. 물론 튼튼한 자기애와 자기합리화를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한권의 소설로 개선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런저런 상상해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하유정이라는 작가와 오버랩되는 여류작가 한명을 떠올렸다. 물론 나는 그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자꾸 그 여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하유정의 친구로 잠깐 등장하는 또 다른 여류작가가 이 책을 쓴 '이서인'의 반영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너는 그래도 나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오만일 것이고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가 다 그런 것처럼 결정지워버리는 것은 편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오만과 편견이 독자에게 뭔가 매섭고 찌릿한 일깨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무기력하거나 자폐적인 목소리만 넘쳐나는 요즘 소설을 읽다가 간만에 참 강단있는 소설을 만나니 모처럼 뭐 하나 제대로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작가 이서인은 알고보니 소설가 임영태와 함께 사는 여인이었다. 표지에 실린 사진이 아름다웠다. 작가의 첫 장편인 <숲속의 연어>는 절판되었단다.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 가지고 계신 분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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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7시 반쯤 마트에 갔는데 줄선 사람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들 축구 보면서 먹을 야식거리들을 사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길, 빨간 티셔츠 입은 학생들이 두런두런 줄지어 지나가고 거리는 또 다시 한적해졌다.  

  8시가 넘자 축구가 시작되고 초저녁부터 잠이 든 영달이가 이렇게 고마울 데가! 요즘 영달이는 친정엄마가 데리고 주무신다. 엄마는 아르헨티나면 우승 후보 아니냐며 4대 0으로 안 지면 다행이라고 썩소를 날리신 후 영달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흥이 좋으니 이변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 천장이 들썩들썩. 박주영이 자책골을 넣으면서 윗층에서 난리가 났다. 원래 지난 그리스전 때부터 온 아파트 단지가 요동을 쳤지만 어제는 더욱 심하더라는. 특히 윗층 아저씨의 함성 소리가 엄청났다. 요즘 날이 더워서 다들 창문을 열어놓고 살다보니 더 생생하게 들렸다. 

  윗층 응원단들은 끊임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러대고 이청용이 한 골을 만회하자 저쪽 동네에서는 팡팡, 축포가 터진다. 전후반 사이의 짬에는 하늘에서 오색찬란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멀리서 빠방빵 빵빵, 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린다. 한 마디로 아주 난리가 났다.  

  결국 쌕쌕 잠이 들었던 영달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소리 날까봐 문도 못 열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엄마가 영달이를 안고 어르고 계셨다. 윗층 아저씨, 왜이렇게 열정적이냐. 그러게나 말여요.  

  후반전이 시작되고 염기훈의 왼발 슛이 골대를 비껴나가는 순간, 여기저기서 아효~ 아이쿠~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윗층 응원단은 거의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러가며 난리법석이었다. 나도 이 시점은 무진장 아쉬웠다. 그래도 영달이가 다시 깰까봐 크게 소리도 못 내고 마냥 투덜투덜.  

  연이어 골을 내주면서 동네는 조용해지고 윗층 아저씨 및 응원단도 잠잠해졌다. 나도 괜히 다른 채널 돌려보면서 체념 모드. 메시가 대단한 선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고 해외 무대에서 뛰어본 경험이 없는 국내파 선수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더욱이 상대는 아르헨티나였으니.   

  그나저나 월드컵은 흥미진진한데 영달이가 잠을 못 자서 걱정이다. 낮부터 동네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면 낌새를 아는지 심란해한다. 특히 윗층 아저씨, 조금만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 여기도 합동 응원하는 곳 많은데 왜 늘 안방에서 응원하시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열정과 목청이면 카메라에도 잡히실 것 같던데. 우리 영달이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기 키우는 집들은 우리나라 경기 있을 때마다 좀 곤란할 것 같다.  

  그래도 16강을 갔으면 좋겠다. 나이지리아도 아마 죽기 살기로 나올텐데 화이팅이다. 다음주 수요일엔 윗층 응원단이 야외로 나가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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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이 들썩거리니 산에 있는 짐승들은 무슨 일인가 할 꺼에요. ㅎㅎ
이것들이 다 미쳤나 하겠죠?
아기들은 엄마아빠의 때아닌 소리에 놀라 울고.....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경끼해도 좋으니 대한민국을 모두 미치게 만들어 줬음 좋겠어요.
대한민국 홧팅입니다. ^*^

깐따삐야 2010-06-18 11:01   좋아요 0 | URL
산짐승들까지 붉은 악마 티셔츠 입고 응원하는 상상을 해보니 웃음이 나네요.ㅋㅋ
노노, 그래도 경끼는 안됩니다.-_- 근데 이길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0-06-1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년엔 주니어가 마님 뱃속에 있을 때였는데..한국팀이 이탈리가 꺽을 때 그 부른배를 잡고 마님이 날라올랐죠.

비연 2010-06-18 23:47   좋아요 0 | URL
우하하하! 주니어는 뱃속부터 축구태교를..!!

깐따삐야 2010-06-21 10:02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전 하니까 공격수 비에리가 떠오르네요. 우람한 덩치로 우리 선수들을 툭툭 치고 나가던, 그러면 호리호리한 우리의 수비수들, 거의 악으로 깡으로 막아내고. 갑자기 눈물이 앞을...;; 날아오를만한 경기였어요.^^

무스탕 2010-06-1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우리나라 경기 끝나고 나이지리아랑 그리스 경기도 끝까지 봤다죠 ^^;
2승이었으면 크게 신경을 안썼을텐데 어제 그렇게 됐으니 다른 나라들이 어찌하는지 무지 신경 쓰인다는..

깐따삐야 2010-06-21 10:0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따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실력은 언제쯤일까요.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정말 명성값 하더군요. 아르헨티나나 스페인, 두 나라 중 하나가 우승할 것 같아요.

레와 2010-06-1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층에 사는데요, 불현듯 1층 분들이 걱정되고...으흐흐흐 ;;



깐따삐야 2010-06-21 10:05   좋아요 0 | URL
레와님도 그 시끄럽다는 윗층 응원단이시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