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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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이 이야기들을 임신 중에 썼다 했다. 혹자는 어떻게 아기를 가진 몸으로, 한껏 좋은 생각, 고운 생각만 해도 모자랄 시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썼느냐고, 아니 쓸 수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책을 끝까지 읽고나서 오히려 임신 중이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들이구나, 하고 바꾸어 생각하게 되었다.  

  무지한 남성들은 배부른 여성의 몸이 가장 아름답다고 찬탄하기 바쁘지만 과연 그뿐인가. 기쁨과 놀라움도 잠시,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변해가는 심신에 적응 불가의 상태를 지속하면서 온갖 기괴한 악몽과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불길한 상상에 시달려야 했다. 더불어 아기를 가진 여인들에 대한 절절한 동류 의식, 악조건 속에서 아기를 낳아 길러야만 하는 여인들에 대한 연민, 아기를 가진 여성으로서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 전반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울분 등, 많은 복잡한 감정을 겪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 자신과 아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래적 본능으로 짐승처럼 예민해졌다. 나도 딸이 있고, 작가도 두 딸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험상궂은 사회에서 딸의 어미는 사방에 눈 달린 수호신이 되어도 모자랄 판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여자들은 얼핏 <감자>의 복녀, <테스>의 테스, 김기덕 영화의 히로인을 떠올리게 했다. 위선적 지식인에게 희롱당하는 노숙자 소녀, 아버지의 빚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대리모를 자청하는 여대생, 성폭행한 남자를 아빠라 부르며 트럭 생활을 하는 소녀, 부인병을 대물림하는 모녀, 남편의 형과 함께 살며 이웃이 버리고 간 여자아이를 돌보는 여인, 극단에서 일하며 알바로 몸을 파는 여배우 등, 평소에 관심조차 없고 대충 모른 척 했던,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아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에 실린 <하루>의 '나'처럼 교양있어 뵈는 중산층 여성의 삶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여자들은, 특히 자의식이라 명명되는 자신만의 사고와 언어를 갖지 못한 여자들은, 그들을 그저 하나의 물적 대상으로 여기는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이 굳건히 축조해놓은 사회적 폭력에 의해 이처럼 끊임없이 희롱당한다. 더욱이 사방이 벽인 막막한 경제적 난관 앞에서 자의식이라든가 자기성찰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뿐인가. 겉으로는 한껏 사람 좋은 눈빛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나와 너는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긋는 뭇 여성들의 이중잣대는 여자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하지만 이 전망 없고 갓길 없어 보이는 어둡고 가파른 작품들 속에 간간히 빛이 보인다. 비록 거래로 만났지만 대리모와 여인 사이에 이해와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고, 똑같은 병에 걸린 모녀는 서로의 고통을 위로한다. 바닥까지 치닿은 상황에서도 여인은 이웃의 딸과 이마를 맞대고 미역국을 마시고, 여배우는 집 나간 엄마의 딸인 소녀에게 우동을 사먹인다. 가혹한 운명, 또는 인연이지만 딱히 누구의 잘못이랄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러한 몇몇 장면에서 모종의 끈끈한 연대감을 느꼈다.   

  <손>은 독특한 작품이었다. 처음으로 남성 화자가 등장했고 우유를 밀어넣는 배달부의 손에 셔터를 눌러대는 모양새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진화한 히키고모리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이러한 작품을 보면 작가의 다음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한 가지 색깔에 멈추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작가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독자들이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은 사서 읽는다고 말하지만 대중적 호기심과 판매전략에 의해서도 책은 얼마든지 팔릴 수 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렇게 말한다니 좀 어이가 없다. 왜 공지영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그녀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너와 나는 다르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자기안위의 연민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식모였던 <봉순이 언니>를 그렇게 그려놨고, 미모의 중산층 여성이 하잘것 없는 사형수를 사랑하게 되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설정 자체도 좀 오버다. 연민을 위한 연민은 겉돌고, 속이고, 급기야 짜증이 엄습한다.   

  반면에 작가 김이설은 그녀의 인물들에게 희망 따윈 없다고 잘라 말하는 듯 하지만 그 거칠고, 독하고, 어두운 목소리 이면에 괜찮다, 당신들 탓이 아니다, 계속 살아라, 그 또한 삶이다, 하는 존중과 다독임의 목소리가 면면히 들려온다. 그녀는 식모를 천사로 미화시키지도 않고 안락한 생활을 지켜내려는 중산층 여성과 사형수를 억지로 엮어주지도 않는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유리구두를 찾아 방황하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맨발로 진흙탕을 뒹굴며 쌍시옷을 날리는 생 한복판의 여자들이다. 이 작가는 듬직하게도 언어를 다룰 줄 아는 본인의 재능을 그들을 위해 바치고 있다.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건강과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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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소재를 다루었지만 진솔함이 농축되어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극히 사실적인 현실의 소재와 주인공들을 독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주목해 봅니다.

깐따삐야 2010-07-01 10:28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도 읽으셨군요. 모처럼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집을 읽었습니다.^^

레와 2010-06-2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을게요! ^^

깐따삐야 2010-07-01 10:28   좋아요 0 | URL
네네.^^

2010-06-30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kul23 2010-06-3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빨리 구입해서 읽고 싶어요 ..

깐따삐야 2010-07-01 10:41   좋아요 0 | URL
뽐뿌질이 심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