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직업이 있고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다면, 가끔씩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가끔이 아니고 자주일 수 있다.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볼 사람도 없고 직장에서는 위에서 아래에서 당신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 승진은커녕 유부녀인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은 당신이 버는 돈은 좋아하면서, 이익의 대가로서 가사노동이나 시집 동원 행사의 분담이라는 반대급부를 자발적으로 할 마음이 없다. 돈은 벌어도 쌓이는 것은 없고, 남편이 없었더라면 자녀가 없었더라면 내가 직장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불만을 말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하는 당신 또래의 여성들이 눈을 흘길 것이다. 당신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할 일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해라.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pp.140~141)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던 중, 내 나이 서른 하나. 위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같은 서른한 살이라도 얼마간의 개인차야 존재하겠지만 대개는 맞는 말이고 공감했다. 특히 '덫에 걸렸다'는 생각,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라는 부분은 한 마디도 토 달지 않고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가려운 데 살살 긁어주는 것 같더니 불만을 말하지 말란다. 또래 여성들이 눈을 흘길 뿐더러 가진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할 일도 많은 법이라고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더구나 인간으로서 독립을 이룩했으니 네 손으로 네 잔칫상을 차려야 하지 않겠냐며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 일순간 비장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 뿐. 과연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했는가? 자문한 결과 글쎄, 라는 허랑한 대답만 돌아왔다.   
  
  글쓴이 말 맞다나 직업도 있고,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고, 누가 보면 가진 것 많아 보이는데 나와 관련된 소유물이나 인연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역시 나란 인간은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만 되돌아온다면? 자신의 그릇 크기를 모른 채 냅다 남들 하는 건 다 쫓아하려다 보니 뱁새가 가랑이 찢어진 격인가. 욕심은 많으면서 힘든 것은 감당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인가.     

  어느 날 문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넘어서 머리 끝까지 짜증이 엄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재능은 내 꿈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지금도 늦지 않았어, 라고 결의하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싶어 마음을 한겹 두겹 접는다. 더욱이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일평생을 산 엄마를 보고 있으면 그저 입 다물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나 잘하라는, 자조 섞인 자책만 남는다.  
 
  어쩌면 좀더 젊은 날의 나는 매일매일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금의 가시적인 발전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촘촘한 강박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키는 버얼써 멈췄지만 인생의 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진실, 혹은 착각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즐거운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 낳고 생긴 흰머리라든가, 메모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인 몹쓸 기억력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몽땅 털린 듯한 기분이다. 위의 글쓴이는 서른한 살의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데 이 싹쓸이 당한 듯한, 도둑맞은 듯한, 허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영달이가 선물해 주는 나날의 기쁨과는 별개로, -나란 여자는 엄마씩이나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또 별개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조차 참 별스럽지만- 그저 요즘 내 마음의 결이 요모양 요꼴이다. 엄마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어른 취급하려고 난리법석들이지만 서른한 살의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잔칫상을 차리라는 주문이 막막하고 버겁게만 들린다. 마치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빼고 한번 자알 차려봐, 라는 말처럼 답답하고 밍밍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오즈의 마법사, 용기가 필요한 사자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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