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카페 형식의 제과점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몸무게가 눈꼽만큼씩 빠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머나먼 지라 웬만하면 피해가려고 했는데 후텁지근한 오후, 팥빙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영달이를 어르고 계실 엄마 생각도 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향연이었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찹쌀도너츠와 팥빙수만 달랑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 편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새카만 썬글라스를 낀 아줌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문 기다리면서 멍때리는 걸 즐기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홀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아줌마가 거친 음성으로 빵이 부스러졌네 어쩌네 하며 따지고 있었다. 일행인지 단발머리를 한 다른 아줌마도 뭐라뭐라 거드는 중이었다.
나는 왜 당연히 제과점 주인 아저씨는 살짝 뚱뚱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아줌마 곁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그냥 마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환자 수준이었다. 어깨는 뾰죽하게 올라갔고 푹 패인 볼은 주변의 오동통한 빵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줌마들은 뭔가 시원시원하거나 너스레 섞인 응대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창백하고 가냘픈 아저씨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빵 박스에 테입만 부치고 있었다.
썬글라스 아줌마는 소보루빵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빵이 이렇게 큰데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을까, 단발머리 아줌마는 네살이 안되는 애들이 몇이나 되는지 전화해서 물어볼까, 등등 못마땅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 어린이집에라도 보낼 모양인 것 같았다. 아줌마들은 우유도 한 박스 샀는지 아저씨는 우유 박스에도 테입을 붙이고 있었다. 이거 상온에다 보관하면 안되죠? 내일까지 괜찮아야 하는데. 썬글라스 아줌마의 질문.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때 커피와 빵과 책이 있는 가게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 부스러기 안 나오는 소보루빵, 한여름 상온에서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우유를 찾는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더욱이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소보루빵이라니. 나라면 다른 데 가세요, 는 너무 얌전하고 니가 만드세요, 그러지 않았을까.
이번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 예전에 혼수를 했던 가구점을 다시 찾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상가가 들어와 있었다. 연락처를 찾아 연락해보니 가게가 잘 안 되어서 그만두었단다. 엄마는 그 내외 인상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우리야 적정 가격에 혼수 잘해서 좋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능수능란하지 못해서는 장사로 돈 벌기 어렵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기억하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면서 다른 가게를 소개했는데 영악한 엄마는 그 아저씨마냥 참해 보이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다른 가게를 뚫어놓으셨다. 나중에 영달이 가구도 거기서 하라면서.
내가 원래 좀 가냘픈 사람들만 보면 무턱대고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만, 오늘 제과점 아저씨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채소 늘어놓고 파는 쌍둥이 아버지는 하도 말을 잘해서 꼭 오이 사러 갔다가 가지까지 사게 만드는데 이 아저씨는 멀뚱멀뚱 할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이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서 아줌마들 천지다. 밥 안 하고 빵 사먹으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고 아이들 간식빵 사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다. 종방된 시트콤 '태희, 혜교, 지현이'의 태희, 혜교, 지현이고픈 아줌마들이 넘쳐나는 곳이란 이야기다. 이런 동네에서 빵장사를 하려면, 적성에 안 맞아도 여차저차해서 개업을 했다면, 좀 변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살을 좀 찌워 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려나.
비단 오늘 일 뿐만이 아니고 간혹 이런 비슷한 상황을 우연찮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장사나 해볼까, 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가히 소비자 전성시대라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소비자 입장인데도 니가 만드세요,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인간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날은 덥고 불쾌지수 팍팍 솟는 나날들, 나도 이사 준비하느라 거래 중인데 돈이나 지불하면 됐지 스트레스까지 얹어주는 소비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어쨌거나, 팥빙수와 찹쌀도너츠는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