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참 고되었다. 상상 그 이상의 변화. 연수를 받는 와중에 나보다 주변 언니들이 먼저 알았다. 항상 활기찼던 내가 어느 날 오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는 것. 열무김치가 마구 당겼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어질어질했다. 처음엔 연수 받느라 무리해서 그런 거겠지, 하고 그 몸으로 연극도 하고, 게임도 하고, 수업발표도 했다.
연수 종반 무렵 임신 사실을 알았다. 하루에 두 세잔씩 마시던 커피가 갑자기 소화불량을 일으켰고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동료들은 1정 연수중에 생겼으니 태명을 일정이니, 연수라고 지어야 한다면서 축하해 주었지만 나는 그날부터 걱정이 앞섰다. 방학 동안 쉬지 못해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무리하신 모양이라며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던 의사의 말소리가 붕붕거렸다. 신기하게도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입덧이 시작되었고 남은 연수는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개학하자마자 바로 병가를 내고 쉬는 중이다. 2학기에는 학교 행사도 많고 내가 맡은 업무는 아웃라인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기 심장 소리를 듣고 난 후로는 오직 나와 내 아기 밖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마냥 좋아했지만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쉬운 일. 불안과 염려는 나와 친정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입맛을 놓치면 안 된다고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을 조금씩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예전에 먹던 음식을 하나, 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고등어조림, 부추장떡, 김치말이국수 등등. 덕분에 벌써 체중이 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면 당연한 수순인데도 기분이 이상하다. 마냥 기뻐해야 할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다. 뱃속 아기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 순전한 행복보다 그런 부담이 훨씬 더 크다. 남편과 나를 보면 나이만 먹었지 아직 부모 노릇을 하기엔 한없이 부족해 보이기만 하는데 무조건 좋아라 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요즘 신종플루다 뭐다 해서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활도 무척 답답하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냄새. 반찬 냄새는 물론이고 머리 감을 때 샴푸향이나 양치할 때 치약 냄새까지도 너무 싫다. 처음엔 이것저것 생각나더니 지금은 특별히 당기는 음식도 없다. 안 먹혀도 먹어야 한다면서 엄마는 대구탕, 바지락 된장국, 배추겉절이 등 그때그때 메뉴를 바꿔가며 음식을 해주신다. 지금은 팔팔 끓인 누룽지에 된장찌개가 생각난다. 가리는 음식 없이 뭐든 잘 먹던 나였는데 요새는 뭐를 먹어도 맛있다, 는 느낌을 모르겠다. 입맛이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상전이 따로 없다. 새벽에는 남편이 코를 냅다 골아대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면서 아침부터 바가지를 긁었다. 그는 딱 10개월만 참기로 마음먹었는지 나의 반복되는 신경질에 별로 노여움을 타지 않는다. 아기를 가지면 남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던데 나는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싫은 건 싫은 거고. 감정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남들 다 겪는 일인데 너무 유난 떠는 건 아닌가 싶어 자중하려고 하면서도 입덧에는 장사 없지 싶다.
결혼하고 적당한 시기에 아기가 생겼고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에 태어나게 되었다. 분명 축복일 텐데 애가 애를 낳게 되었으니 이래저래 준비가 안 된 나로서는 모든 것이 불안하다. 그 불안이 어쩌면 입덧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 후로 아이가 없는 삶도 생각해 보았고 아이가 있는 삶도 상상해 보았었다. 어떤 삶이든 나 스스로 만족하고 부끄럽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있는 삶은 그것으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홀로 자족하기만 해서도 안 되고 단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도 탐탁찮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중에 너랑 똑같은 딸 낳아서 한 번 키워보라던 엄마 말씀이 어른거린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바라건대 아이는, 내가 가진 쓸모없는 잔재주들 보다는 남편의 무한한 낙천성을 닮아야 한다. 살아보니 그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