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정치사연구
최승희 지음 / 지식산업사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과 같이 조선 초기(태조부터 성종까지)를 대상으로 정치사를 살펴본 연구서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한바와 같이 :

“정치사연구의 대상은 국왕과 관료 및 인민의 존재양태, 국정의 제도적 틀인 정치체제, 국정운영의 실제, 정치세력의 동향” 등으로 주로 각 왕대의 정치체제, 국정운영의 실제(의정부서사제 및 6조직계제들의 운영실태등), 그에 따른 왕권의 위상 등을 살피고 있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서 운영된 관서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여 그리 심도 깊게 이해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에 알고 있었던 상식에 대한 의문과 교정정도? 그런 예로 태조에 대한 평가를 들 수 있겠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활약했던 슈퍼스타로 그의 결단력이나 정치력 등은 위화도 회군 같은 중대한 결단을 하는데서도 드러나는 대도 개창 이후의 태조에 대해 평가가 너무 박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태조대의 국정운영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태조 대에 왕권이 약했다는 평가에 반박하면서 그에 대한 예증을 해갔다.

 

 

일단, 공신의 선정에서도 태조 위주로 주도 했다는 점을 든다. 공신의 선정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당시 위세가 누가 강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후 정종이 즉위하고 정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당시 방원이 그에 관여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듯 공신의 선정을 당시 왕권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으므로 공신선정에 누가 관여 했는가를 살펴보면:

   태조 원년 8월 20일에 태조는 개국공신의 위차를 정하고 포상지전을 유사에 거행하라는 구전왕지를 우승지 한 상경을 통하여 도평의사사에 내렸고, 이 왕지를 받은 도평의사사에서는 왕지의 내용을 전재하고 왕지의 뜻을 받으러 시행하라는 출납을 공신도감에 내렸다고 한다. 그 왕지의 내용에는 누구누구를 무엇 무엇한 공으로 이들에게 차례로 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포상지전을 유사에서 거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개국공신을 정만 도평의사사와 의논하여 선정하였다면 왕자들 가운데 가장 역할이 컸던 방원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에 빠진 것은 태조가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나도 동조하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태조의 앞선 선조들도 정치력과 결단력은 비범하였고 태조 또한 그러했는데 왜 유독 그 시대에 왕권이 약했다고 보았던 것일까? 아무리 신하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올랐다 하더라도 결국 태조와 그의 동조자들의 정치적인 기획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에 대한 다소의 오해 같은 것이 일제관학자의 영향이라 하는데... 그것 까지는 글쎄...

 

 

 

이후 왕위는 정종에게 이어졌으나 주지하듯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방원의 연막작전으로 얼떨결에 올라 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종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방원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잘 먹고 잘 산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기존에 정종에 대한 평가도 허수아비 정도였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현실적인 판단이 빨랐다고 보면 될 듯하다. 방원의 정치력을 보자면. 여하튼 방원은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자신의 명분과 정통성이 약했음을 인지하고 왕권강화에 힘썼는데 뭐... 참 잔혹하구나 싶었다. 흔히 썼던 수법이 자신을 상왕으로 물러남을 자주 이야기 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세력(반왕세력)의 반응 떠보고 그를 빌미로 제거하기도 하고...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정치세력등을 다양하게 등용하여 서로 대립, 견제토록 하였다. 조만간 왕위를 이을 것이라 예상된 세자 제에도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에 대한 무리들도 반왕세력으로 인식하여 제거하기도 한 것을 보면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강했다. 세조도 그런 것처럼 명분과 정통성이 결여된 왕위는 항상 불안정했다는 점이 보여진다. 이후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도 자신의 인사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보면 참... 이 인간 참 지독하구나 싶었다. 그런 탓에 태종이 죽은 세종4년대까지는 실질적으로 왕권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자는 세종을 현택한 것만으로도 최대의 업적이라며 평을 내린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상왕인 태종의 죽음이후 국정운영은 의정부와 6조, 대간 등에 핵심기관에서 국사를 상달하게 하고 이를 왕이 이를 재가하여 시행했다. 그리고 의정부와 6조의 중신을 불러 국사를 직접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화하고 의논하여 국정을 운영했는데 이와 같은 운영형태가 세종대의 문화와 정치의 밝음의 원동력이지 않은가 저자는 평가한다. 그리고 세종대의 운영형태를 살펴보면서 의정부서사제를 채택하건, 6조직계제를 채택하건 간에 의정부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6조 직계제에서는 의정부의 역할을 축소되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 중요성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왕권이 강화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종 대를 보자면 알 수 있다. 결국 왕의 자질에 비롯되지 않아 싶다. 이에 대한 이해는 조만간 한충의 교수의 <조선전기 의정부와 정치>를 읽으면서 이해 해보려 한다.

 

 

 

세종 이후 문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일찍 죽어버렸다. 세자시절에도 첨사원에서 국정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기에 다루어도 좋을 것 같은데 이 연구서에는 다루지 않았다. 여튼 문종이 죽고 노산군이 즉위하니 단종이다. 어린나이에 즉위하니 국정운영에 주도권을 가지기가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탓에 의정부 대신들의 위세가 강했는데 그를 명분으로 당시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하는 꼴이 동네 양아치 수준에 다름없다고 보인다. 이러한 행적과 언행에도 유교정치를 표방하는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자신의 호적수였던 안평대군도 죽이고, 즉위하고 나서도 다른 동생을 죽였다. 조카인 단종도 죽이고. 다른 책의 평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게 뭐라고 동기간에도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는 것인지. 14년간이면 업적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고 하며 저자도 평이 박하다.

 

 

 

이후 예종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었고 어린 자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세종대에 시작한 문물의 정비가 이때 와서 일단락되기는 하였지만 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다.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에서부터 폐비 윤씨 사건 등. 성종은 즉위부터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대비와 원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친정이 시작되면서 부터도 상당한 부담을 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계비 윤씨에 대한 폐비와 사사의 논의에서 상당한 취약함을 드러냈다. 유교 정치에서 강조되는 것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면 제가를 못한 국왕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는 의문도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의 자체가 성종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고 그도 제가를 못했던 자신의 잘못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기도 하다. 더욱 별로인 것은 그에 대한 윤씨에 대한 잘못된 점을 늘어놓으며 구구절절 변명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종대 이르러서는 언론활동이 활발해져 갔다. 목숨을 걸고 간쟁하기는 했지만 태종, 세조대의 위험만큼은 아니었나 싶다 성종대의 언론활동에 대해서는 김범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다시 읽어보며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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