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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알고 보면 나도 참 성격이 좋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이 이름만 가지고 겁 없이 사서 읽은 책이 <암고양이>와 <여명>. <암고양이>를 읽고 나서 솔직한 감상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성 작가 가운데 20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사람이 콜레트라며. 근데 이게 다야? 싶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면 약간 주저하면서도 사 읽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사실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아우, 이거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첫 번째 콜레트가 <파리의 클로딘>이었다면 다른 책들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품의 각주를 보면, 이 책의 전편 격인 <학교의 클로딘>이란 전작이 있어서, 클로딘의 고향인 몽티니에서의 학창시절을 그린 듯하다. 몽티니 저택에서 연체동물, 특별히 달팽이를 연구하던 아버지가 클로드가 책을 출판하려 하는데 파리의 출판사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거 같아서 제대로 열 받은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 콜레트, 어마어마한 크기의 멜론 닮은 젖가슴 두 짝을 달고 다니는 유모 멜리, 암고양이 팡셰트, 이렇게 세 명과 한 마리가 파리로 이사한 다음에 클로딘에게 생긴 일들을 적어놓았다.
다시 앞으로. 내게 첫 콜레트가 <암고양이>였다. 그 작품에 당연히 암고양이가 나온다. 얼마나 유혹적이고 팜 파탈적인 제목인가, 암고양이. 근데 제목과 비해 작품의 임팩트가 덜했다. 그래서 재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의 클로딘>을 읽으면 저절로 클로딘, 작품의 일인칭 주인공이니 작가 자신일 수도 있는 등장인물 자신이 여지없는 암고양이 자체인 것을 알게 된다. 생각과 행동, 만일 동물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생각, 행동, 둘 다. 고양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본능에 기반한 충동과 행동. <암고양이>를 이제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어떤 계기가 있어 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사실 의미 있는 책 읽기가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감상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파리로 이사한 클로딘 가족.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티푸스 증상과 비슷한 일종의 뇌척수염에 걸려 몇 달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클로딘. 짧은 머리카락으로 바뀐 건 비록 향수병 비슷하게 고향 몽티니를 그리워하지만 이제 완전히 파리에 정착했다는, 소녀에서 처녀로 변신했다는 의미로 접수해도 무방하다.
파리에 대단히 부유한 쾨르 고모가 사는 것도 여태 클로딘이 몰랐을 정도로 아버지는 가족까지 모른 척한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건 몽티니에서나 파리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방문하고, 고모의 외손자, 그러니까 클로딘의 오촌 조카뻘 되는 미남자 마르셀을 알게 된다. 클로딘은 마르셀을 보고 첫 눈에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예쁠까! 금발에 영국소녀 같은 파란 눈, 발그레한 얼굴, 어찌나 탐스러운지 그대로 먹어버리고 싶네.”
또한 아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고 지내는 마르셀의 아버지이자 외신기자이며 홀아비인 르노도 클로딘 가족과 유대를 이어가게 되고.
아주 여성스러워서 일종의 동성애 분위기가 풍기는 마르셀은 매우 잘생긴 청년 샤를리와 우정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게 열일곱 살 무렵의 폐쇄적 우정인지 정말로 동성애로 발전한 단계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이때 클로딘의 나이 열일곱. 지금의 열일곱, 고등학교 이학년 여학생들 생각하면 오산. 당시엔 결혼 적령기에 근접한 처녀로 어려서 클로딘과 함께 영성체를 받은 친구 클레르는 한 달 뒤에 결혼해서 공장 관리인으로 취직한 남편을 따라 멕시코로 가게 결정이 되었을 정도이며, 학교 친구 뤼스는 삼촌에게 침대 서비스를 해주는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이러니 클로딘도 가장 큰 관심사는 남자와 결혼일 수밖에. 실제로 후반에 접어들면 청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난 앞에서 클로딘 자신이 암고양이라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싶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비비며 가르릉거리는 짐승. 동시에 사나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포유류. 클로딘이 기다리는 건 잘 생긴, 미남의 손길과 입술. 그러나 아무리 미남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여야 하는 법. 클로딘 스스로가 갈망하는 자의 손길과 입술이라면 흔연하게 모든 것을 맡기겠지만, 아닌 자가 손끝이라도 닿아보려 했다가는 사나운 손톱에 남아나지 않을 터이니 조심해야 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