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 대산세계문학총서 95
알렉산드르 쿠프린 지음, 이기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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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알렉산드르 쿠프린을 설명하기를, “러시아의 국민작가”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은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시대가 저문 이후의 러시아를 말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러시아 국민작가의 우리말 번역서가 겨우 달랑 <결투> 한 권이란 것이 좀 너무한 기분이 든다. 그래 먼저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야 하겠다.
  1870년에 이미 영락해버린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쿠프린. 거기다가 다음 해에 아버지마저 생을 접어 극빈의 생활을 하다가 여섯 살에 들어간 보육원(옛 고아원)에서, 책의 앞날개에는 군인의 꿈을 갖게 되어 1880년 제2 모스크바 군사학교에 입학한다고 적혀 있는데, 열 살 어린아이가 무슨 꿈과 야망이 있었겠는가. 그저 보육원에서 빨리 나갈 수 있어서 그 길을 선택했다는데 만 원 건다. 군사학교를 십 년 만에 졸업하고 보병부대 소위로 임관한 쿠프린은 1894년 8월, 겨우 4년 만에 군인의 꿈을 접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4년의 군 생활을 위해 10년의 군사학교를 견딘 셈. 쿠프린은 애초에 군인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19년에 파리로 망명을 떠난 쿠프린은 생활고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병이 든 몸으로 1937년에 귀국하지만 38년에 식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러니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에서 무려 20년 동안 망명했던 쿠프린을 ‘작가소개’에서처럼 국민작가로 광고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오히려 이 책 <결투>를 읽으며 그의 이력에 눈길이 가는 건, 보육원 출신의 가난뱅이 육군 초급장교 생활 겨우 4년 만에 작파한 일. 19세기 말 당시 20대 초반의 쿠프린의 시각에서 본 러시아 군대의 모습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야겠기 때문이다. 직접체험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을 테니. 
  작품은 모두 스물세 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장은 에필로그. 독자는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아무리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도 에필로그만 말하지 않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르스 윌리스가 유령이란다, 정도의 반전은 기대하지 마시라.
  작품은 18xx년 봄, 소러시아, 그러니까 폴란드,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주둔한 슐코비치 보병연대가 5월에 군단장의 부대 사열을 받기까지와 사열의 후일담, 정확하게 6월 2일까지를 그리고 있다. 편재는 연대장 슐코비치 대령. 주인공이 배속된 대대장은 레흐 중령. 중대장 말더듬이 슬리바 대위, 고참 소대장은 33세쯤 먹은 콧수염 기른 대머리 익살꾼 네트킨 중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안경잡이 게오르기 알렉세예비치 로마쇼프 소위. 로마쇼프는 소위로 부임하고 겨우 2년차라니까 군대생활이 1년 조금 넘는다.
  소위들의 특기는 사실 '실수하기'다. 동서고금이 같다. 로마쇼프 역시 마찬가지라서 늙은 피터슨 대위의 아내 라이사 알렉산드로브나 피터슨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연애도 끝물이다. 여사의 취미가 뭔가 하면, 연대로 부임해오는 신임 장교들에게 수청들라 해놓고 홀딱 단물 빼먹는 것. 피터슨 대위는 질투가 많지만 이제 늙어 오히려 아내의 눈치만 두릿두릿 보는 신세로 전락해 군 내부에서 아내의 어린 애인의 앞날에 온갖 훼방을 놓는 것으로 복수한다. 근데 문제는 여사 역시 남편 못지않은 질투를 자랑한다는 거. 여기서 질투란 어린 애인들이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릴 때 불타오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쇼프 소위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사변적이다. 사실 군인보다 문관 기질이 더 승한데 발을 잘못 디딘 것. 영락없이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원래 로마쇼프의 계획은 임관하고 첫 두 해 동안 기본적인 고전문학을 섭렵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해서 이후 본격적으로 군인 아카데미에 진학, 졸업 후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로 전출을 가는 거였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어디. 로마쇼프는 동료 장교들을 따라 만날 보드카 잔치에다가 피터슨 여사와 불장난에 날 새는 줄 모르니 애초에 계획은 그른 일이었다.
  로마쇼프의 고참 가운데 니콜라예프 중위가 있었는데, 이이가 참모본부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위해 일 년 내내 열공 중이었다. 이미 두 번 연달아 미역국을 자셨고 이번이 세 번째 도전. 니콜라예프도 몰랐고 당연히 로마쇼프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니콜라예프의 아내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이 촌구석에 있는 연대가 너무도 지긋지긋해서 이번에 또 남편이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면 다른 남자 팔짱 끼고 깨끗하게 정리해서 대도시로 떠날 예정임을. 겉으로 보기에 그리도 얌전하고, 정숙하고, 내조 스타일이고, 가사의 여왕이 말이지. 문제는 로마쇼프가 알렉산드라한테 반해 날이면 날마다 이들의 집에 가 밥도 먹고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거. 그걸 피터슨 여사가 듣고는, 자신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가 알렉산드로브나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 피터슨 여사는 사랑에 눈이 멀어 로마쇼프에게 사랑을 청하고, 요구하다가 애걸하더니 드디어 증오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아직은 짙은 호감 이상이 아닌 로마쇼프와 알렉산드로브나의 관계를 과장해서 익명으로 니콜라예프 중위에게 날이면 날마다 편지질을 한다. 근데 이 커플에게만 그랬겠나. 확실히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연대와 군인 부인들 거의 다가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거 같은 분위기다.
  여기에 19세기 러시아 군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 여태까지 에피소드는 주인공을 둘러싼 발화지점을 설명한 거고, 이 소설이 다른 것들과 비교해 눈에 띄는 건 역시 군대 이야기다. 역자 해설을 보면 이이가 군 복무 중에도 여러 편의 중, 단편을 썼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을 듯하다. 게다가 직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사물이나 행위, 행사의 세부 묘사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우리의 로마쇼프 소위가 대열의 제일 앞에서 자기 소대원들을 이끌고 (분열)행진을 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서 대중들의 반응, 군단장과 연대장의 칭찬 등을 상상하는 광경과 실제로 자기 소대가 행진하는 것의 어처구니없는 보색대비 장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이를 통해서만 19세기 러시아 군대의 혹독한 군사훈련, 검열을 위해 가혹하게 병사들을 닦달하는 제식훈련, 장교와 하사관에 의하여 벌어지는 병사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 밤마다 방탕하게 벌어지는 음주와 도박과 성매수 행위, 일부 장교들의 엽기적 취향 등을 압축적으로, 그래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투>가 1905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와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21장에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뛰어나게 ‘현명한 자’인 나잔스키 중위가 크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주인공 로마쇼프 소위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조금 과하게 계몽적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이이의 작품이 꽤 많다. 다른 작품들도 속속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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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3-04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 자신은 물론 <수용소군도>에서도 모진고문이나 핍박, 살해위협에도 고국인 러시아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놀랐어요. 이분도 그랬네요.(혁명이후도 살벌했을텐데) 아마도 귀소본능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마찬가지겠지만 고문당했을땐 좀 이해가 안가요.🤔

Falstaff 2021-03-04 10:09   좋아요 3 | URL
심지어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 써서, 노벨문학상 받으러 가고 싶으면 가라, 대신 한 번 가면 다신 못 온다, 라는 말에 깨갱, 하면서 안 갔잖아요. 러시아 사람들이 더 그런 거 같더라고요.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우리의 로스토브 백작도 메트로폴 호텔에서 탈출해 결국 고향으로 가고요. ㅋㅋㅋㅋ
저는 지금도 이민 생각하고 있는 걸요. 쐬주 마시면 짱돌 던져 죽여버리는 이란 회교 민주 공화국으로요. 술 좀 끊어볼까 싶어서.... ㅠㅠ

청아 2021-03-04 10:22   좋아요 2 | URL
반대로 러시아로 이민가시는거 어떨까요?보드카도 워낙 독한데 엄청 마신다니 놀라서 끊게 되실수도 있잖아요ㅋㅋ아무쪼록 살아계시는 편이 팔스타프님 페이퍼 기다리는 저를포함 알라디너들에게 이롭죠.헤헤

Falstaff 2021-03-04 10:34   좋아요 3 | URL
아, 러시아요! 좋은 아이디업니다!
블라디보스톡은 게다가 가깝기도 하잖아요! ㅋㅋㅋ
팔뚝 만한 해삼도 많이 나는 해삼위!!! 근데 좀 추워서 그거 하나가 그렇네요.

잠자냥 2021-03-04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거 읽으셨구나! 저 이거 얼마 전에 중고로 뜬 거 샤샤샥 사놨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재밌다고 하셨으니 더 기대해 봅니다.

Falstaff 2021-03-04 10:32   좋아요 3 | URL
근데 주의할 것이 있으니, 여성들이 그리도 듣기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요. 에효... 읽으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답니다. 헌책이면 싼 맛에... ㅎㅎ

잠자냥 2021-03-04 10:52   좋아요 2 | URL
옛썰! 괜찮습니다. 축구 이야기는 없을 테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

2021-03-04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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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나도 참 성격이 좋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이 이름만 가지고 겁 없이 사서 읽은 책이 <암고양이>와 <여명>. <암고양이>를 읽고 나서 솔직한 감상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성 작가 가운데 20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사람이 콜레트라며. 근데 이게 다야? 싶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면 약간 주저하면서도 사 읽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사실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아우, 이거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첫 번째 콜레트가 <파리의 클로딘>이었다면 다른 책들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품의 각주를 보면, 이 책의 전편 격인 <학교의 클로딘>이란 전작이 있어서, 클로딘의 고향인 몽티니에서의 학창시절을 그린 듯하다. 몽티니 저택에서 연체동물, 특별히 달팽이를 연구하던 아버지가 클로드가 책을 출판하려 하는데 파리의 출판사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거 같아서 제대로 열 받은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 콜레트, 어마어마한 크기의 멜론 닮은 젖가슴 두 짝을 달고 다니는 유모 멜리, 암고양이 팡셰트, 이렇게 세 명과 한 마리가 파리로 이사한 다음에 클로딘에게 생긴 일들을 적어놓았다.

  다시 앞으로. 내게 첫 콜레트가 <암고양이>였다. 그 작품에 당연히 암고양이가 나온다. 얼마나 유혹적이고 팜 파탈적인 제목인가, 암고양이. 근데 제목과 비해 작품의 임팩트가 덜했다. 그래서 재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의 클로딘>을 읽으면 저절로 클로딘, 작품의 일인칭 주인공이니 작가 자신일 수도 있는 등장인물 자신이 여지없는 암고양이 자체인 것을 알게 된다. 생각과 행동, 만일 동물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생각, 행동, 둘 다. 고양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본능에 기반한 충동과 행동. <암고양이>를 이제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어떤 계기가 있어 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사실 의미 있는 책 읽기가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감상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파리로 이사한 클로딘 가족.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티푸스 증상과 비슷한 일종의 뇌척수염에 걸려 몇 달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클로딘. 짧은 머리카락으로 바뀐 건 비록 향수병 비슷하게 고향 몽티니를 그리워하지만 이제 완전히 파리에 정착했다는, 소녀에서 처녀로 변신했다는 의미로 접수해도 무방하다.

  파리에 대단히 부유한 쾨르 고모가 사는 것도 여태 클로딘이 몰랐을 정도로 아버지는 가족까지 모른 척한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건 몽티니에서나 파리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방문하고, 고모의 외손자, 그러니까 클로딘의 오촌 조카뻘 되는 미남자 마르셀을 알게 된다. 클로딘은 마르셀을 보고 첫 눈에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예쁠까! 금발에 영국소녀 같은 파란 눈, 발그레한 얼굴, 어찌나 탐스러운지 그대로 먹어버리고 싶네.”

  또한 아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고 지내는 마르셀의 아버지이자 외신기자이며 홀아비인 르노도 클로딘 가족과 유대를 이어가게 되고.

  아주 여성스러워서 일종의 동성애 분위기가 풍기는 마르셀은 매우 잘생긴 청년 샤를리와 우정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게 열일곱 살 무렵의 폐쇄적 우정인지 정말로 동성애로 발전한 단계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이때 클로딘의 나이 열일곱. 지금의 열일곱, 고등학교 이학년 여학생들 생각하면 오산. 당시엔 결혼 적령기에 근접한 처녀로 어려서 클로딘과 함께 영성체를 받은 친구 클레르는 한 달 뒤에 결혼해서 공장 관리인으로 취직한 남편을 따라 멕시코로 가게 결정이 되었을 정도이며, 학교 친구 뤼스는 삼촌에게 침대 서비스를 해주는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이러니 클로딘도 가장 큰 관심사는 남자와 결혼일 수밖에. 실제로 후반에 접어들면 청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난 앞에서 클로딘 자신이 암고양이라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싶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비비며 가르릉거리는 짐승. 동시에 사나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포유류. 클로딘이 기다리는 건 잘 생긴, 미남의 손길과 입술. 그러나 아무리 미남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여야 하는 법. 클로딘 스스로가 갈망하는 자의 손길과 입술이라면 흔연하게 모든 것을 맡기겠지만, 아닌 자가 손끝이라도 닿아보려 했다가는 사나운 손톱에 남아나지 않을 터이니 조심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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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시리즈인 거 같던데 읽어보니 뒷이야기도 궁금해서 계속 나오길 바라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Falstaff 2021-03-02 12:24   좋아요 0 | URL
이런 거 후딱 번역 좀 하지 말입니다. 쯧쯧쯧....
 
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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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슨, 하면 딱 두 권이 떠오른다.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스티븐슨은 서른한 살 때 <보물섬>을 발표하기 전까지 영국 가정의 연 평균 소득의 반 정도도 벌어오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매사에 주눅이 들어 <바다의 요리사, 또는 보물섬>을 청소년 잡지에 투고하고, 일 년 후에 단행본으로 내고서도 자기가 쓴 허튼 소설이 대박을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느라고 잠을 못 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범국가적 난리가 나서, 저자 스티븐슨이 깜짝 놀라 까무러쳐 이틀 후에 깨어났다는 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 갑자기 해적 관련 소설이 들불처럼 번져 1885년에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솔로몬 왕의 보물>이 등장하기도 한단다. 내가 읽어본 또 다른 해적 소설은 이탈리아 사람 에밀리오 살가리의 1900년 작품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소년 얌보가 열광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년시절에 <보물섬>을 읽었던 거 같다. 집안 폭삭 망해 책장사 하는 친구가 정여사에게 맡겨버린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그거 말고 동네 어두컴컴한 만화가게에서 열다섯 권으로 된 만화로 읽었을까는 기억나지 않는다. 활자로 읽은 기억이 있는 거 보니까 전집 속에 들어있지 않았나 싶다. 전에 에코가 책 속에서 자주 언급하는 <산도칸>을 읽어보니, 해적 소설이 도무지 봐줄 만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같은 장르인 <보물섬>을 무려 새 책으로 사서 읽은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뭐 인생이니까. 어느 책에서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상찬했던 듯싶다.
  <보물섬>, 정말 재미있다. 나는 당연히 그릇이 영국 수상 정도는 아니라서 새벽 두 시까지 <보물섬>을 파지는 못했어도, 와, 정말 한 번 손에 들고 첫 장을 넘기기만 하면, 배가 고프거나 화려한 안주가 있어 술을 부르지 않는 한, 책을 내려놓기 힘들다. 나는 읽기만 하면 저절로 스토리가 떠오를 줄 알았다. 소년시절에 읽은 게 기억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숱하게 본 만화, 영화, 만화영화, 인용문 등을 통해서 말 그대로 저절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 훤하게 그려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 아예 처음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17xx년, ‘벤보우 제독 여관’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늙은 뱃사람이 장기 투숙을 하는 것으로 <보물섬>은 시작한다. 빌리 본즈. 개암색 피부에 타르를 발라 땋은 머리, 낡은 파란 외투, 짙은 칼자국이 뺨을 장식한 남자가 선원용 궤짝을 끌고 들어와 금화 서너 닢을 화자인 나 짐 호킨스의 아버지이자 여관 주인의 프론트에 던져준 험상궂은 늙은이는 아직 소년인 내게 외다리 뱃사람이 오는지 살펴보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대가로 매달 첫 날 4페니 은화를 한 개씩 주고는 했다. 분명히 매달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선장’이라 불리는 이 무법의 선장은 반년이 넘게 여관에 머물렀다고 봐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검둥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두 손가락이 잘린 전직 해적이 선장을 만나러 왔다가 오른쪽 어깨에 칼을 맞고 도망하고, 이어서 무시무시한 완력을 지닌 장님 선원이 또 선장을 찾아와 검은 딱지를 전해주고 간다. 검은 딱지란 해적들 사이에서 용인되어 왔던 딱지를 받는 사람의 지위를 정지하겠다는 표시란다. 이 때는 선장이 날이면 날마다 하도 술을 퍼마셔 거의 죽을똥말똥 할 시기여서 급격하게 흥분한 선장은 해적 잔당들과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만 급성 뇌일혈로 숟가락 놔버린다. 며칠 전 부친상을 당한 짐과 갓 과부가 된 어머니는 드디어 선장의 궤짝을 열어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할 액수만큼의 돈을 취하고자 한다. 궤짝 속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과 각 나라의 금화들이 많이 섞여 있는데, 어머니가 오직 영국의 금화만을 원해 그것을 고르는 사이에 옛 해적들이 들이닥쳐 별로 챙기지도 못하고 도망을 해야 해, 짐은 별 생각 없이 대신 기름먹인 천, 유포로 싼 뭉치 하나를 들고 여관집을 빠져나간다.
  짐 호킨스네 가족이 평소에 존경하며 의지했던 인물이 있었다. 정식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의사이자 지역의 용감한 치안판사인 리브지 선생. 금화 몇 닢과 유포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가니 대지주 트롤리니 씨와 함께 있다. 그들 앞에서 유포 뭉치를 펴보니까, 에그머니, 그게 바로 보물섬의 지도, 어디에 금화와 금괴가 묻혀 있고, 어디에 은괴가, 또 어디에 무기와 화약을 숨겨놓았노라, 라고 x자로 표시를 해놓은 거였다. 대지주는 보물섬의 지도를 그린 해적 플린트를 잘 알고 있었다. 해적은 무슨, 스티븐슨이 소설은 이렇게 썼어도 당시에 국가에서 허락하고 세금을 뜯어간 사략선 쯤 되겠지. 하여튼 플린트라는 해적 선장의 용맹함과 사나움, 거친 언동 같은 걸 자세히 알고 있는지라, 이 지도가 사실일 것이라고 보자마자 믿어버린다. 그리하여 앉은 자리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물을 찾아 떠나기로, 대지주, 의사, 소년 짐 호킨스가 합의를 하게 되는데, 그냥 가서 보물 찾아오면 재미가 없으니 사건을 만들기로 작정한 작가 스티븐슨이 절묘한 한 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바로 대지주 트롤리니 씨의 입이 가볍다, 가볍다를 넘어서 주둥이가 싸다, 하는 점.
  대지주는 당장 브리스톨로 가서 브랜들리 씨의 중개로 잘 빠진 2백 톤 급 범선 히스파니올라 호를 구입하고, 술집 <망원경>의 주인인 키다리 존 실버를 요리사로 고용한다. 이 존 실버로 말할 거 같으면 키다리라니까 당연히 키가 크고, 건장한데다, 희고 평범한 얼굴엔 총명한 기운이 반짝이지만, 왼쪽 다리가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절단된 외다리였다. 사람 좋은 요리사 실버를 통해 항해사와 갑판장 등 여러 명의 선원을 배에 태우고, 대지주가 서면으로 고용한 스몰렛 선장과 함께 드디어 항해를 떠나기에 이르는데, 브리스톨에서 대지주는 자기가 금화와 금괴를 찾으러 보물섬에 간다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지, 닻을 올리기도 전에 모든 선원들이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저 바닷가 외진 여관까지 좇아왔던 해적 무리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이렇게 시작부터 선상폭동과 배반과 배신과 싸움과 폭력을 깔고 스티븐슨은 보물섬을 향해 쌍돛을 펴드니 앞으로 남은 것을 한 마디로 하면 그야말로 우여곡절. 그건 안 알려드림.
  그런데 문제는, 나이 들어 읽을 기회가 되어 이게 문제인지 알지, 소년시절에는 결코 몰랐을 문제점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소설이라는 것. 총과 대포를 극적으로 발전시킨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펼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로 향한다. 이때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없애지 못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사략선 집단. 이건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 해적들은 지중해와 카리브해, 인도양 등에서 해적질을 해가며 이에 상응하는 재화를 국가와 왕실에 세금이란 명목으로 상납을 해 국부에 결코 작지 않은 공헌을 한다. 이들과 군대에 의한 노략질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에서 약탈을 해 온 물품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카리브 해를 배경으로 하는 <보물섬>이나 말레이 반도의 해적 이야기인 <산도칸>이나 기본은 다 똑같다. 이제 식민 또는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도 오래 지났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으로 <보물섬>을 읽는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지만, 그걸 염두에 두기에는 <보물섬>이 너무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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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1 1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의 어린 시절 페이버릿 작품 중 하나! 정말 재밌죠? 어른의 눈으로도 재미나다니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3-01 15:38   좋아요 0 | URL
옙. 진짜 재미납니다.
손에 들지 말아야지, 한 번 들었다 하면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요!

2021-03-01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3-01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물섬을 어릴 적에 무슨 전집에서 읽고 티비에서 보여준 만화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안나네요. 이렇게 재미있다니 저도 도전해봐야겠어요. 일전에 잠자냥 님이 왕자와 거지도 언급하셔서 그것도 사뒀는데 허허 이것참 큰일이네요? 🙄

Falstaff 2021-03-01 15:43   좋아요 2 | URL
큰일은요 뭘. 보물섬이 명작이란 말은 아니고요, 킬링 타임 비슷하게 재미로만 읽으시면 대빵입니다. 왕자와 거지는 안 읽어봤는데 암만해도 잠자냥 님 낚시 같아요. 5월 쯤에 올리버 트위스트 읽고 그거 재미나면 왕자와 거지 미끼를 함 물어보려 합니다.

얄라알라 2021-03-0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로빈슨 크루소,‘ ‘80일~‘ ‘소공녀....‘ 어렸을 때 넋놓고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읽고 했던 책들도 식민주의.. 그렇네요. 보물섬은 만화로 봤을 때, 주인공이 너무 멋지게 그려졌는데 소설로 읽으면 삽화마다 편차가 커서 그냥 멋진 왕자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Falstaff 2021-03-01 15:50   좋아요 0 | URL
아, 보물섬은 벌써 읽어보셨군요! 전형적인 선인과 악인이 등장하지만 존 실버는 매력적인 캘릭터였습니다. 악당은 악당인데 하여튼 읽어봐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
제국주의적 성향 운운은 좀 미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유감이지만 또 그걸 까탈잡을 만하지도 않으니까요.

hnine 2021-03-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잡지도 있었어요. 위의 책과 전혀 상관없는 어린이 월간 만화 잡지였지요 ^^
인생의 분기별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때 읽었어도 어른이 되어, 그것도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는 책들이요.

Falstaff 2021-03-01 15:54   좋아요 0 | URL
옙. 보물섬이란 잡지, 기억납니다. 저는 소년중앙 창간호 세대라서 보물섬을 사 읽지는 못했지만 조카들은 확실히 읽었습니다.
좋은 어린이용 책은 심지어 아주 나중에 읽어도 재미 있더군요. 전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같은 알렉상드르 뒤마 작품을 어금니 빠지고 읽었는데 정말 재미나더군요.
헤세는 10대 후반이 적령기 같았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1-03-0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줄 알면서도 <보물섬> 은 어린이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어른인 제가 읽기엔 유치할거라 생각했는데 ‘대빵‘ 재밌다니 적어둡니다~~

Falstaff 2021-03-01 17: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얩,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않나 싶어요. ^^
 
분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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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제야 <분신>을 읽었을까. 만시지탄! 완전히 내 스타일의 책. 언필칭 대박. 그동안 이 책을 미룬 이유는 제목을 한글로만 써놓아서였을 확률이 높다. 난 여태 이 책이 스스로 불에 타 죽는 분신焚身 행위를 말하는 줄 알았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범죄 아닌가. 당연히 야만적인 살인이나 자살의 장면을 연상했는데, 헛다리짚었다. 분신分身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데뷔작으로 큰 성가를 누렸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처음으로 혹독한 비평을 감수하게 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인 석영중도 해설에서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문체 감각이나 구성 및 인물 묘사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단점들을 고루고루 갖추고” 있으며, “놀랄 만큼 지루한 전개 방식, 단조로운 인물 구조,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반복적인 서술 등이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상식적인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일 것이다.”라고 했다.
  석영중의 설명이 이 작품을 발표한 1846년의 독자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자신의 번역본이 출간된 2000년의 독자 입장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전개 방식이 지루하기는커녕 매우 흥미로워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궁금해 했으며, 심지어 읽는 내내 집중했다. 문체나 반복적인 서술에 대해서도 석영중의 우리말 번역이 효율적으로 단점을 가려주었는지 별로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거장의 초기 작품이니 나중에 이이가 보여줄 거대한, 넘사벽의 산맥과 직접 비교하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 뻬쩨르부르끄 셰스찌라보츠나야 거리의 크고 웅장한 건물 4층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흐리멍덩한 눈과 벗겨진 머리통. 볼품없는 꼬락서니의 남자, 라고 초장에 도스토옙스키는 콱 박아버리고 출발한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 좀 읽은 독자들은 단박에 알아차린다. 골랴드낀 씨가 품성이 선량한 오늘의 주인공임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멀쑥하게 잘 생기고 여자들에게 인기 좀 끌겠다 싶은 남자는 언제나, 아니, 거의 언제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9등 문관 골랴드낀 씨가 저리 볼품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작품의 앞줄에 나서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이이가 주인공이다. 꽤 오래 전에 석영중이 말했다. 이런 경향은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못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반작용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아, 밝히지 말고 계속 잘난 척하는 데 써먹어야 했다!)
  작품은 섬망증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골랴드낀의 나흘이다. 이것도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트레이드 마크. 나는 ‘섬망증’이란 단어 자체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치고 시도 때도 없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초조해 하는 섬망증 환자, 양보해서 가벼운 수준의 조현병 환자가 등장하지 않는 게 없다. 게다가 말 그대로 분신other-self는 이후 그의 작품에 숱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나는 그저 딱 떠오른 것이 라스콜니코프와 스비드가일로프만을 연상했다. 석선생은 <백치>에서 미쉬낀과 로고진, <악령>의 스따브로긴과 베르호벤스끼까지 언급한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을 보자.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고 웅장한 건물 4층에 자기 집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9등 문관이란 공직에서 근무하며, 자기 눈엔 별로 처지지 않는 외모에, 지갑엔 9급 문관치고 엄청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는 7백5십 루블이 들었으니, 이 정도면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가끔 극장에 가서 연극과 오페라를 즐기고, 낮에는 근무하고 저녁때는 대부분 집에 머무른다. 아무 문제가 없는 생활인.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일 뿐이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상류사회의 소음보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약삭빠른 처세술을 배우지 못했다. 비록 외관상 드러나는 광채가 없지만 남몰래 무슨 일을 꾸미는 일 같은 것도 없고, 꾀부리는 일 없이 툭 터놓고 행동하는 편이다. 절대 모사꾼이 될 수 없는 선한 남자.
  이이가 하루 동안 마차를 전세 냈다. 오늘은 올수피 이바노비치 베렌제예프의 고명딸 끌라라 올수피예브나의 생일잔치가 있는 날이다. 골랴드낀은 외과와 내과 의사를 겸하는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에게 들러, 언제나 밝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하며, 친구나 아는 사람들 방문도 자주 하는 건 물론 술도 가끔 마시라는 처방을 받은 다음,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으로 향한다. 그러나 입구에서 시종장 예멜리얀 게라시모비치에 의하여 저지를 받고, 베렌제예프 각하가 직접 파티에 그를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며 발길을 돌리게 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래 일단 다시 돌아와 초라한 선술집에서 저녁을 주문하긴 했는데, 다음 순간 그가 있는 곳은 저택의 창고. 파티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그러다 결국 무도회가 벌어지는 홀에 들어가 끌라라 올스피예브나에게 춤을 청하는데 까지는 성공하지만 순간 발이 걸려 뒤로 넘어지고 끌라라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다시 쫓겨나게 된다. 이게 첫날.
  두 번째 날엔 사무실 자기 맞은편에 새로운 책상이 놓여지고, 새로운 9등 문관이 배치되어 자신의 업무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를 받는다. 근데 이 새 문관의 이름이 우연하게도 골랴드낀. 이 신참내기는 생긴 것도 마치 선임 골랴드낀의 도플갱어인 것처럼 거의 똑같이 생긴데다가, 이름 또한 야꼬프 뻬뜨로비치로 같으니 우리의 주인공은 미칠 지경이다. 독자는 안다. 신참 골랴드낀이 주인공 골랴드낀의 분신임을.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죽은 세묜 이바노비치의 후임으로 사무실에 들어온 신참 골랴드낀은 상사에게 능수능란하게 자리를 부탁했고, 계속 요구를 해 결국은 세묜 이바노비치의 후임으로 정해지게 되는 성취를 이룬 작자다. 심지어 고위 인사의 추천장까지 가져왔으며, 주인공이 적으로 생각하는 안드레이 필립뽀비치와 웃으며 환담하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혹시 악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밉상이다.
  그러나 업무가 끝난 다음에 신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됐고, 그러자 하인인 뻬뜨로쉬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태도로 신참을 맞이하였으며, 신기하게도, 그리도 능수능란하던 신참이 갑자기 당황하고 겁을 내, 지금까지 멸시와 시달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며 지낸 사람처럼 보였던 거다. 그래 주인공은 신참과 허물없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연거푸 독한 펀치를 들이켜며 자신의 모든 약점을 발설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건, 강적 안드레이 필립뽀비치와의 악연과 어제 쫓겨난 파티의 주인공 끌라라 올스피예브나에 관한 것이었고, 둘이 적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계략을 세우자고 약속한다.
  셋째 날 느지막하게 일어나니 신참 골랴드낀은 벌써 나갔다. 나가긴 나갔는데 사무실에서 벌써 주인공 골랴드낀이 자기한테 말한 내용을 다 퍼뜨려 우리의 주인공은 더욱 더 진퇴양난의 골짜기로 몰려있게 된다. 신참 골랴드낀은 주인공 골랴드낀이 가지고 있지 못한 모사, 이간, 편법, 요구 등의 악덕을 충분한 것보다 더 충분하게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던 것을 우리의 주인공은 몰랐다.
  사실 진짜 골랴드낀은 주인공과 신참을 합친 인격인지 모른다. 세상에 주인공 골랴드낀 같이 선한, 혹은 적어도 악한 기질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가 가지고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밖으로 보여주지 않는 기질만 가진 것이 신참 골랴드낀이겠지. 그리하여 신참 골랴드낀을 도스토옙스키는 분신이라고 칭한 것. 나는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책방 독자평을 읽어보면 나하고 궁합, 즉 스타일이 맞는 작품이라서 그랬지 않나 싶다. 그래서 추천하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의 독후감은 읽어보고 싶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고. 나도 모르겠다. 이 말을 내가 했는지, 내 분신이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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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2-26 09: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울먹이며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분신은 또 다른 느낌일듯해요. 도선생님 외모가 준수하다고 생각했던1인!
읽고싶던 사람도 더 빨리 읽고싶게 하는 리뷰네용ㅋㅋ👍

Falstaff 2021-02-26 09:35   좋아요 3 | URL
어, 이 책이 독자 평점은 별로지만, 아유, 전 대박이었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2-26 09: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 폴스타프 님이 <분신>을 여태 안 읽으셨다는 게 놀라워요. ㅎㅎ 전 이 작품으로 도 선생 세계에 본격 진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Falstaff 2021-02-26 09:35   좋아요 5 | URL
글쎄 자기 몸 태워 죽는 이야긴줄 알았다니까요. 분신자살하는.... 흑흑흑....

coolcat329 2021-02-26 09: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기 몸에 불붙이는 그건 줄 알았는데 아니였군요. 석영중은 놀랄만큼 지루한 전개라 하고 폴스타프님은 전개방식이 흥미로워 다음 장면 궁금하시니...저는 어느 쪽일지 궁금하네요~1권짜리라 다행입니다. 😅

Falstaff 2021-02-26 09:45   좋아요 4 | URL
ㅋㅋㅋ 읽어보셔요. 게다가 짧기까지 합니다. 석영중은 심지어 단편이라고 평해놓았어요. 하긴 도스토옙스키 기준으로 보면 단편일 수도 있긴 하겠네요. ㅋㅋㅋ

잠자냥 2021-02-26 09:46   좋아요 3 | URL
아니에요. 이거 절대 지루하지 않아요. 전 폴스타프 님 쪽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도 선생 작품 중 드물게(?) 1권인 데다가 그것도 꽤 얇은 편이니까 한번 도전해보세요.

coolcat329 2021-02-26 21:54   좋아요 3 | URL
네~~두 분 밑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한 권이니 참 좋네요~^^

새파랑 2021-02-26 09: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 악령 읽고 있는데 ˝완전한 내 스타일˝이라고 하시니 다음번엔 이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Falstaff 2021-02-26 09:48   좋아요 4 | URL
와... 악령, 정말 대박아녜요?
그건 읽으면서도 내가 지금 대박 치고 있는 거야, 알 정도였는데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1-02-26 0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작 상권밖에 안읽지만..대박 맞는거 같아요 ㅋ 악령 상권, 중권, 하권인데 모르고 하권을 사버려서 중권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ㅜㅜ

Falstaff 2021-02-26 10:05   좋아요 4 | URL
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로쟈 2021-02-26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편이 아니고 러시아 장르구분으로는 중편입니다.

Falstaff 2021-02-26 10:35   좋아요 3 | URL
헉, 그분께서.... 직접.....
(긴장, 긴장)
뭐 도스토옙스키한테 중편, 단편 구분이 필요하겠습니까만, 평론가들이 중편이라면 중편이겠지요.
댓글주셔서 고맙습니다. 영광이기도 하고요!!

붕붕툐툐 2021-02-27 00:08   좋아요 0 | URL
대박!!! 찐 전문가 등장!!! 폴스타프님 계타심~^^

비연 2021-02-26 10: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분신>을 얼핏 보고 <붕신>으로 읽고는, 책제목 중에 그런 게 있어? 하며 놀라서 들어왔나이다. 정말... 챙피합니다.. 생각한대로 보이는 것일까요. ㅜㅜㅜㅜㅜㅜ
이 책도 보관함 푱. 도스토예프스키는... 두말하면 잔소리인 작가이고 <악령>은 최애 작품. Falstaff님이 가끔 올려주시는 도스트예프스키 책 얘기 좋아요!

Falstaff 2021-02-26 10:44   좋아요 3 | URL
유쾌하신 비연님. 저번에 제가 페이퍼 쓰기도 했잖습니까.
천안시장 애인가족 지원센터. ㅋㅋㅋㅋ 잘못 읽을 수도 있지요 ㅎㅎㅎ
<악령> 정말 재미나요!

2021-02-26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2-27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 대박 책을 안 읽은 제가 부러우시겠어요~ 훗~ 나에겐 아직 읽을 도선생 책이 많다! 하하하하하하하~~(미친걸까요?😝)

Falstaff 2021-02-27 09:0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미치기는요! 차근차근 읽으셔요!!
 
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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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반테스의 초기와 후기 희곡 하나씩을 담고 있는 책. 그러니까 19세기, 18세기도 아니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쓰인 작품. <누만시아>는 초기 비극이고 <사기꾼 페드로>는 후기 희극이다. <사기꾼 페드로>는 세르반테스 이후에도 몇 작품을 통해 당시의 유사한 희극 분위기를 겪었던바 그리 새로울 것이 없어, 독후감은 <누만시아>에 한해서 쓰겠다. 사실 그렇다. 고전 희극엔 당연히 타협하지 못할 악당이 존재하고, 꾀 많은 선한 주인공이 등장해 악당을 골탕 먹여 개과천선하게 한다든가 파멸에 이르는 과정 아니겠는가.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로마를 열었던 영웅 가운데 한 명인 아이네이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은 채 트로이의 패잔병들을 배에 태워 지중해를 떠돌 당시, 카르타고에 도착해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신의 계시를 좇아 다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할 때, 디도 여왕은 자신의 후손이 이탈리아 땅에 큰 환란을 가져오리라, 유언하며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정말로 몇 백 년 후 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이 시작되고, 1차전 로마 승리에 이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용사 한니발이 이베리아 땅을 거쳐 코끼리를 끌고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 로마 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스키피오의 양 할아버지다. 그래 이이가 대 스키피오, 작품의 주인공은 소 스키피오. 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물론이고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어떠한 전쟁도 일으킬 수 없는 처지에 빠지는데, 이때의 카르타고를 그린 작품이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살람보>다
  카르타고, 라면 한니발에 하도 뜨거운 맛을 봐서, 자다가도 소스라쳐 벌떡 깨고는 하던 로마. 이제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완전한 잿더미로 만들고 백성들은 모두 도륙을 하든지 노예로 만들어버리는데, 이 3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 바로 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 그러나 카르타고를 폐허로 만들어도 만족하지 못한 로마는, 카르타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로마에게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용맹한 지역인 누만시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래 자료마다 조금 다르지만 11년, 또는 13년 동안 누만시아 3천여 시민들은 로마의 8만 대군(자료에 따라 3만 대군)에게 절대 함락당하지 않고 콧대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던 것. 로마는 다시 한 번 스키피오를 누만시아에 보내게 된다. 여기서 작품은 시작한다.
  로마 입장에 이런 작은 동네가 감히 로마한테 바득바득 기어오르는 것이 마땅하지도 않거니와 기타 작은 부족들에게도 모범이 되지 않았지만, 워낙 사납게 반항을 하는지라, 용감하거니와 지략에도 출중한 스키피오가 결정하기를, 공성전을 하면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로마군도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하니, 누만시아 읍성 사방 9킬로미터의 방책을 치고 방책 넘어 깊은 해자를 파서 완전하게 고립시켜버리고 만다.
  특색 있는 것은, 다양한 등장인물들 가운데 누구를 특정하여 주인공이라 할 수 없을 만큼 각자 로마군과 누만시아의 군인, 노인, 여자, 아이들이 모두 독립된 이야기를 갖는다는 점. 역자 김선욱은 해설에서 이를 ‘집단 주인공’이라 하는데 수긍할 만하다.
  이후 드라마의 줄거리는 오직 하나, 누만시아 사람들이 8개월(자료에 따라 일년여)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다, 먼저 로마인 포로들을 잡아먹고, 이후 차례로 굶어 죽다가, 한 명도 남김없이 자살을 감행해, 로마가 누만시아에 입성해보니 산 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로마가 이기긴 했으나, 스키피오는 ‘너희들은 죽었지만 나를 이겼구나!’하고 한탄했다는 역사의 한 페이지.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대표작인 <사피엔스>를 통해서, 이 내용은 로마의 승자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기록한 것에서 비롯한 것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야만인의 이야기를 애호하는 로마인의 입맛에 맞게 각색되었단다. 로마가 너무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사실 8만 명이 3천 명을 상대로 완전 몰살시킨 것이 자랑이 아니라서, 패자들의 기억마저 자기들 식으로 편집했다는 취지. 매우 그럴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 몽고군 침략 당시 지금의 춘천 시내에 오똑하니 솟은 봉의산에서 토성을 쌓고 몽고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을 당했던 것. 봉의산에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버텼는지 몽고는 결국 성 밖으로 이중목책을 치고 한 길이 넘는 구덩이를 파서 고립시켜 버렸다고 한다. 식량은커녕 물도 없는 토성에 갇힌 사람들이 거의 초주검이 되었을 때, 몽고인들이 쳐들어와 완전히 몰살을 시킬 수 있었다고. 몽고인들은 로마와 달라서 그들의 완벽한 승리를 감추기 위해 고려인들의 투쟁을 미화시키는 아량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희곡 <누만시아>를 단지 한 생각,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왜 전부 몰살을 당해야 하는가.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이네이스를 살려 나라 밖으로 도망시킴으로써 동족의 영원성을 이어간 트로이 사람들처럼 일부를 피신시키는 등의 방안을 마련했어야지, 죽음, 그것도 자신들의 모든 재화를 불사르고 집단 자살을 감행하는 행위를, 죽으면 죽었지 항복하지 않겠다는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미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제1차, 제2차, 제3차 포에니 전투라는 명칭이 의미하듯, 지금 항복한다고 그게 영원하다는 의미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물론 이건 21세기식 사고방식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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