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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95
알렉산드르 쿠프린 지음, 이기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평점 :
작가 알렉산드르 쿠프린을 설명하기를, “러시아의 국민작가”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은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시대가 저문 이후의 러시아를 말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러시아 국민작가의 우리말 번역서가 겨우 달랑 <결투> 한 권이란 것이 좀 너무한 기분이 든다. 그래 먼저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야 하겠다.
1870년에 이미 영락해버린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쿠프린. 거기다가 다음 해에 아버지마저 생을 접어 극빈의 생활을 하다가 여섯 살에 들어간 보육원(옛 고아원)에서, 책의 앞날개에는 군인의 꿈을 갖게 되어 1880년 제2 모스크바 군사학교에 입학한다고 적혀 있는데, 열 살 어린아이가 무슨 꿈과 야망이 있었겠는가. 그저 보육원에서 빨리 나갈 수 있어서 그 길을 선택했다는데 만 원 건다. 군사학교를 십 년 만에 졸업하고 보병부대 소위로 임관한 쿠프린은 1894년 8월, 겨우 4년 만에 군인의 꿈을 접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4년의 군 생활을 위해 10년의 군사학교를 견딘 셈. 쿠프린은 애초에 군인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19년에 파리로 망명을 떠난 쿠프린은 생활고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병이 든 몸으로 1937년에 귀국하지만 38년에 식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러니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에서 무려 20년 동안 망명했던 쿠프린을 ‘작가소개’에서처럼 국민작가로 광고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오히려 이 책 <결투>를 읽으며 그의 이력에 눈길이 가는 건, 보육원 출신의 가난뱅이 육군 초급장교 생활 겨우 4년 만에 작파한 일. 19세기 말 당시 20대 초반의 쿠프린의 시각에서 본 러시아 군대의 모습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야겠기 때문이다. 직접체험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을 테니.
작품은 모두 스물세 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장은 에필로그. 독자는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아무리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도 에필로그만 말하지 않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르스 윌리스가 유령이란다, 정도의 반전은 기대하지 마시라.
작품은 18xx년 봄, 소러시아, 그러니까 폴란드,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주둔한 슐코비치 보병연대가 5월에 군단장의 부대 사열을 받기까지와 사열의 후일담, 정확하게 6월 2일까지를 그리고 있다. 편재는 연대장 슐코비치 대령. 주인공이 배속된 대대장은 레흐 중령. 중대장 말더듬이 슬리바 대위, 고참 소대장은 33세쯤 먹은 콧수염 기른 대머리 익살꾼 네트킨 중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안경잡이 게오르기 알렉세예비치 로마쇼프 소위. 로마쇼프는 소위로 부임하고 겨우 2년차라니까 군대생활이 1년 조금 넘는다.
소위들의 특기는 사실 '실수하기'다. 동서고금이 같다. 로마쇼프 역시 마찬가지라서 늙은 피터슨 대위의 아내 라이사 알렉산드로브나 피터슨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연애도 끝물이다. 여사의 취미가 뭔가 하면, 연대로 부임해오는 신임 장교들에게 수청들라 해놓고 홀딱 단물 빼먹는 것. 피터슨 대위는 질투가 많지만 이제 늙어 오히려 아내의 눈치만 두릿두릿 보는 신세로 전락해 군 내부에서 아내의 어린 애인의 앞날에 온갖 훼방을 놓는 것으로 복수한다. 근데 문제는 여사 역시 남편 못지않은 질투를 자랑한다는 거. 여기서 질투란 어린 애인들이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릴 때 불타오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쇼프 소위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사변적이다. 사실 군인보다 문관 기질이 더 승한데 발을 잘못 디딘 것. 영락없이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원래 로마쇼프의 계획은 임관하고 첫 두 해 동안 기본적인 고전문학을 섭렵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해서 이후 본격적으로 군인 아카데미에 진학, 졸업 후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로 전출을 가는 거였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어디. 로마쇼프는 동료 장교들을 따라 만날 보드카 잔치에다가 피터슨 여사와 불장난에 날 새는 줄 모르니 애초에 계획은 그른 일이었다.
로마쇼프의 고참 가운데 니콜라예프 중위가 있었는데, 이이가 참모본부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위해 일 년 내내 열공 중이었다. 이미 두 번 연달아 미역국을 자셨고 이번이 세 번째 도전. 니콜라예프도 몰랐고 당연히 로마쇼프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니콜라예프의 아내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이 촌구석에 있는 연대가 너무도 지긋지긋해서 이번에 또 남편이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면 다른 남자 팔짱 끼고 깨끗하게 정리해서 대도시로 떠날 예정임을. 겉으로 보기에 그리도 얌전하고, 정숙하고, 내조 스타일이고, 가사의 여왕이 말이지. 문제는 로마쇼프가 알렉산드라한테 반해 날이면 날마다 이들의 집에 가 밥도 먹고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거. 그걸 피터슨 여사가 듣고는, 자신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가 알렉산드로브나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 피터슨 여사는 사랑에 눈이 멀어 로마쇼프에게 사랑을 청하고, 요구하다가 애걸하더니 드디어 증오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아직은 짙은 호감 이상이 아닌 로마쇼프와 알렉산드로브나의 관계를 과장해서 익명으로 니콜라예프 중위에게 날이면 날마다 편지질을 한다. 근데 이 커플에게만 그랬겠나. 확실히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연대와 군인 부인들 거의 다가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거 같은 분위기다.
여기에 19세기 러시아 군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 여태까지 에피소드는 주인공을 둘러싼 발화지점을 설명한 거고, 이 소설이 다른 것들과 비교해 눈에 띄는 건 역시 군대 이야기다. 역자 해설을 보면 이이가 군 복무 중에도 여러 편의 중, 단편을 썼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을 듯하다. 게다가 직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사물이나 행위, 행사의 세부 묘사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우리의 로마쇼프 소위가 대열의 제일 앞에서 자기 소대원들을 이끌고 (분열)행진을 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서 대중들의 반응, 군단장과 연대장의 칭찬 등을 상상하는 광경과 실제로 자기 소대가 행진하는 것의 어처구니없는 보색대비 장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이를 통해서만 19세기 러시아 군대의 혹독한 군사훈련, 검열을 위해 가혹하게 병사들을 닦달하는 제식훈련, 장교와 하사관에 의하여 벌어지는 병사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 밤마다 방탕하게 벌어지는 음주와 도박과 성매수 행위, 일부 장교들의 엽기적 취향 등을 압축적으로, 그래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투>가 1905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와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21장에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뛰어나게 ‘현명한 자’인 나잔스키 중위가 크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주인공 로마쇼프 소위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조금 과하게 계몽적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이이의 작품이 꽤 많다. 다른 작품들도 속속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