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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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슨, 하면 딱 두 권이 떠오른다.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스티븐슨은 서른한 살 때 <보물섬>을 발표하기 전까지 영국 가정의 연 평균 소득의 반 정도도 벌어오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매사에 주눅이 들어 <바다의 요리사, 또는 보물섬>을 청소년 잡지에 투고하고, 일 년 후에 단행본으로 내고서도 자기가 쓴 허튼 소설이 대박을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느라고 잠을 못 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범국가적 난리가 나서, 저자 스티븐슨이 깜짝 놀라 까무러쳐 이틀 후에 깨어났다는 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 갑자기 해적 관련 소설이 들불처럼 번져 1885년에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솔로몬 왕의 보물>이 등장하기도 한단다. 내가 읽어본 또 다른 해적 소설은 이탈리아 사람 에밀리오 살가리의 1900년 작품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소년 얌보가 열광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년시절에 <보물섬>을 읽었던 거 같다. 집안 폭삭 망해 책장사 하는 친구가 정여사에게 맡겨버린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그거 말고 동네 어두컴컴한 만화가게에서 열다섯 권으로 된 만화로 읽었을까는 기억나지 않는다. 활자로 읽은 기억이 있는 거 보니까 전집 속에 들어있지 않았나 싶다. 전에 에코가 책 속에서 자주 언급하는 <산도칸>을 읽어보니, 해적 소설이 도무지 봐줄 만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같은 장르인 <보물섬>을 무려 새 책으로 사서 읽은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뭐 인생이니까. 어느 책에서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상찬했던 듯싶다.
  <보물섬>, 정말 재미있다. 나는 당연히 그릇이 영국 수상 정도는 아니라서 새벽 두 시까지 <보물섬>을 파지는 못했어도, 와, 정말 한 번 손에 들고 첫 장을 넘기기만 하면, 배가 고프거나 화려한 안주가 있어 술을 부르지 않는 한, 책을 내려놓기 힘들다. 나는 읽기만 하면 저절로 스토리가 떠오를 줄 알았다. 소년시절에 읽은 게 기억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숱하게 본 만화, 영화, 만화영화, 인용문 등을 통해서 말 그대로 저절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 훤하게 그려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 아예 처음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17xx년, ‘벤보우 제독 여관’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늙은 뱃사람이 장기 투숙을 하는 것으로 <보물섬>은 시작한다. 빌리 본즈. 개암색 피부에 타르를 발라 땋은 머리, 낡은 파란 외투, 짙은 칼자국이 뺨을 장식한 남자가 선원용 궤짝을 끌고 들어와 금화 서너 닢을 화자인 나 짐 호킨스의 아버지이자 여관 주인의 프론트에 던져준 험상궂은 늙은이는 아직 소년인 내게 외다리 뱃사람이 오는지 살펴보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대가로 매달 첫 날 4페니 은화를 한 개씩 주고는 했다. 분명히 매달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선장’이라 불리는 이 무법의 선장은 반년이 넘게 여관에 머물렀다고 봐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검둥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두 손가락이 잘린 전직 해적이 선장을 만나러 왔다가 오른쪽 어깨에 칼을 맞고 도망하고, 이어서 무시무시한 완력을 지닌 장님 선원이 또 선장을 찾아와 검은 딱지를 전해주고 간다. 검은 딱지란 해적들 사이에서 용인되어 왔던 딱지를 받는 사람의 지위를 정지하겠다는 표시란다. 이 때는 선장이 날이면 날마다 하도 술을 퍼마셔 거의 죽을똥말똥 할 시기여서 급격하게 흥분한 선장은 해적 잔당들과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만 급성 뇌일혈로 숟가락 놔버린다. 며칠 전 부친상을 당한 짐과 갓 과부가 된 어머니는 드디어 선장의 궤짝을 열어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할 액수만큼의 돈을 취하고자 한다. 궤짝 속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과 각 나라의 금화들이 많이 섞여 있는데, 어머니가 오직 영국의 금화만을 원해 그것을 고르는 사이에 옛 해적들이 들이닥쳐 별로 챙기지도 못하고 도망을 해야 해, 짐은 별 생각 없이 대신 기름먹인 천, 유포로 싼 뭉치 하나를 들고 여관집을 빠져나간다.
  짐 호킨스네 가족이 평소에 존경하며 의지했던 인물이 있었다. 정식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의사이자 지역의 용감한 치안판사인 리브지 선생. 금화 몇 닢과 유포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가니 대지주 트롤리니 씨와 함께 있다. 그들 앞에서 유포 뭉치를 펴보니까, 에그머니, 그게 바로 보물섬의 지도, 어디에 금화와 금괴가 묻혀 있고, 어디에 은괴가, 또 어디에 무기와 화약을 숨겨놓았노라, 라고 x자로 표시를 해놓은 거였다. 대지주는 보물섬의 지도를 그린 해적 플린트를 잘 알고 있었다. 해적은 무슨, 스티븐슨이 소설은 이렇게 썼어도 당시에 국가에서 허락하고 세금을 뜯어간 사략선 쯤 되겠지. 하여튼 플린트라는 해적 선장의 용맹함과 사나움, 거친 언동 같은 걸 자세히 알고 있는지라, 이 지도가 사실일 것이라고 보자마자 믿어버린다. 그리하여 앉은 자리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물을 찾아 떠나기로, 대지주, 의사, 소년 짐 호킨스가 합의를 하게 되는데, 그냥 가서 보물 찾아오면 재미가 없으니 사건을 만들기로 작정한 작가 스티븐슨이 절묘한 한 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바로 대지주 트롤리니 씨의 입이 가볍다, 가볍다를 넘어서 주둥이가 싸다, 하는 점.
  대지주는 당장 브리스톨로 가서 브랜들리 씨의 중개로 잘 빠진 2백 톤 급 범선 히스파니올라 호를 구입하고, 술집 <망원경>의 주인인 키다리 존 실버를 요리사로 고용한다. 이 존 실버로 말할 거 같으면 키다리라니까 당연히 키가 크고, 건장한데다, 희고 평범한 얼굴엔 총명한 기운이 반짝이지만, 왼쪽 다리가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절단된 외다리였다. 사람 좋은 요리사 실버를 통해 항해사와 갑판장 등 여러 명의 선원을 배에 태우고, 대지주가 서면으로 고용한 스몰렛 선장과 함께 드디어 항해를 떠나기에 이르는데, 브리스톨에서 대지주는 자기가 금화와 금괴를 찾으러 보물섬에 간다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지, 닻을 올리기도 전에 모든 선원들이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저 바닷가 외진 여관까지 좇아왔던 해적 무리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이렇게 시작부터 선상폭동과 배반과 배신과 싸움과 폭력을 깔고 스티븐슨은 보물섬을 향해 쌍돛을 펴드니 앞으로 남은 것을 한 마디로 하면 그야말로 우여곡절. 그건 안 알려드림.
  그런데 문제는, 나이 들어 읽을 기회가 되어 이게 문제인지 알지, 소년시절에는 결코 몰랐을 문제점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소설이라는 것. 총과 대포를 극적으로 발전시킨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펼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로 향한다. 이때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없애지 못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사략선 집단. 이건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 해적들은 지중해와 카리브해, 인도양 등에서 해적질을 해가며 이에 상응하는 재화를 국가와 왕실에 세금이란 명목으로 상납을 해 국부에 결코 작지 않은 공헌을 한다. 이들과 군대에 의한 노략질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에서 약탈을 해 온 물품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카리브 해를 배경으로 하는 <보물섬>이나 말레이 반도의 해적 이야기인 <산도칸>이나 기본은 다 똑같다. 이제 식민 또는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도 오래 지났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으로 <보물섬>을 읽는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지만, 그걸 염두에 두기에는 <보물섬>이 너무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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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1 1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의 어린 시절 페이버릿 작품 중 하나! 정말 재밌죠? 어른의 눈으로도 재미나다니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3-01 15:38   좋아요 0 | URL
옙. 진짜 재미납니다.
손에 들지 말아야지, 한 번 들었다 하면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요!

2021-03-01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3-01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물섬을 어릴 적에 무슨 전집에서 읽고 티비에서 보여준 만화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안나네요. 이렇게 재미있다니 저도 도전해봐야겠어요. 일전에 잠자냥 님이 왕자와 거지도 언급하셔서 그것도 사뒀는데 허허 이것참 큰일이네요? 🙄

Falstaff 2021-03-01 15:43   좋아요 2 | URL
큰일은요 뭘. 보물섬이 명작이란 말은 아니고요, 킬링 타임 비슷하게 재미로만 읽으시면 대빵입니다. 왕자와 거지는 안 읽어봤는데 암만해도 잠자냥 님 낚시 같아요. 5월 쯤에 올리버 트위스트 읽고 그거 재미나면 왕자와 거지 미끼를 함 물어보려 합니다.

얄라알라 2021-03-0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로빈슨 크루소,‘ ‘80일~‘ ‘소공녀....‘ 어렸을 때 넋놓고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읽고 했던 책들도 식민주의.. 그렇네요. 보물섬은 만화로 봤을 때, 주인공이 너무 멋지게 그려졌는데 소설로 읽으면 삽화마다 편차가 커서 그냥 멋진 왕자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Falstaff 2021-03-01 15:50   좋아요 0 | URL
아, 보물섬은 벌써 읽어보셨군요! 전형적인 선인과 악인이 등장하지만 존 실버는 매력적인 캘릭터였습니다. 악당은 악당인데 하여튼 읽어봐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
제국주의적 성향 운운은 좀 미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유감이지만 또 그걸 까탈잡을 만하지도 않으니까요.

hnine 2021-03-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잡지도 있었어요. 위의 책과 전혀 상관없는 어린이 월간 만화 잡지였지요 ^^
인생의 분기별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때 읽었어도 어른이 되어, 그것도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는 책들이요.

Falstaff 2021-03-01 15:54   좋아요 0 | URL
옙. 보물섬이란 잡지, 기억납니다. 저는 소년중앙 창간호 세대라서 보물섬을 사 읽지는 못했지만 조카들은 확실히 읽었습니다.
좋은 어린이용 책은 심지어 아주 나중에 읽어도 재미 있더군요. 전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같은 알렉상드르 뒤마 작품을 어금니 빠지고 읽었는데 정말 재미나더군요.
헤세는 10대 후반이 적령기 같았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1-03-0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줄 알면서도 <보물섬> 은 어린이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어른인 제가 읽기엔 유치할거라 생각했는데 ‘대빵‘ 재밌다니 적어둡니다~~

Falstaff 2021-03-01 17: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얩,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않나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