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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왜 이제야 <분신>을 읽었을까. 만시지탄! 완전히 내 스타일의 책. 언필칭 대박. 그동안 이 책을 미룬 이유는 제목을 한글로만 써놓아서였을 확률이 높다. 난 여태 이 책이 스스로 불에 타 죽는 분신焚身 행위를 말하는 줄 알았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범죄 아닌가. 당연히 야만적인 살인이나 자살의 장면을 연상했는데, 헛다리짚었다. 분신分身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데뷔작으로 큰 성가를 누렸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처음으로 혹독한 비평을 감수하게 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인 석영중도 해설에서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문체 감각이나 구성 및 인물 묘사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단점들을 고루고루 갖추고” 있으며, “놀랄 만큼 지루한 전개 방식, 단조로운 인물 구조,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반복적인 서술 등이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상식적인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일 것이다.”라고 했다.
석영중의 설명이 이 작품을 발표한 1846년의 독자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자신의 번역본이 출간된 2000년의 독자 입장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전개 방식이 지루하기는커녕 매우 흥미로워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궁금해 했으며, 심지어 읽는 내내 집중했다. 문체나 반복적인 서술에 대해서도 석영중의 우리말 번역이 효율적으로 단점을 가려주었는지 별로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거장의 초기 작품이니 나중에 이이가 보여줄 거대한, 넘사벽의 산맥과 직접 비교하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 뻬쩨르부르끄 셰스찌라보츠나야 거리의 크고 웅장한 건물 4층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흐리멍덩한 눈과 벗겨진 머리통. 볼품없는 꼬락서니의 남자, 라고 초장에 도스토옙스키는 콱 박아버리고 출발한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 좀 읽은 독자들은 단박에 알아차린다. 골랴드낀 씨가 품성이 선량한 오늘의 주인공임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멀쑥하게 잘 생기고 여자들에게 인기 좀 끌겠다 싶은 남자는 언제나, 아니, 거의 언제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9등 문관 골랴드낀 씨가 저리 볼품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작품의 앞줄에 나서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이이가 주인공이다. 꽤 오래 전에 석영중이 말했다. 이런 경향은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못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반작용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아, 밝히지 말고 계속 잘난 척하는 데 써먹어야 했다!)
작품은 섬망증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골랴드낀의 나흘이다. 이것도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트레이드 마크. 나는 ‘섬망증’이란 단어 자체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치고 시도 때도 없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초조해 하는 섬망증 환자, 양보해서 가벼운 수준의 조현병 환자가 등장하지 않는 게 없다. 게다가 말 그대로 분신other-self는 이후 그의 작품에 숱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나는 그저 딱 떠오른 것이 라스콜니코프와 스비드가일로프만을 연상했다. 석선생은 <백치>에서 미쉬낀과 로고진, <악령>의 스따브로긴과 베르호벤스끼까지 언급한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을 보자.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고 웅장한 건물 4층에 자기 집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9등 문관이란 공직에서 근무하며, 자기 눈엔 별로 처지지 않는 외모에, 지갑엔 9급 문관치고 엄청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는 7백5십 루블이 들었으니, 이 정도면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가끔 극장에 가서 연극과 오페라를 즐기고, 낮에는 근무하고 저녁때는 대부분 집에 머무른다. 아무 문제가 없는 생활인.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일 뿐이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상류사회의 소음보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약삭빠른 처세술을 배우지 못했다. 비록 외관상 드러나는 광채가 없지만 남몰래 무슨 일을 꾸미는 일 같은 것도 없고, 꾀부리는 일 없이 툭 터놓고 행동하는 편이다. 절대 모사꾼이 될 수 없는 선한 남자.
이이가 하루 동안 마차를 전세 냈다. 오늘은 올수피 이바노비치 베렌제예프의 고명딸 끌라라 올수피예브나의 생일잔치가 있는 날이다. 골랴드낀은 외과와 내과 의사를 겸하는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에게 들러, 언제나 밝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하며, 친구나 아는 사람들 방문도 자주 하는 건 물론 술도 가끔 마시라는 처방을 받은 다음,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으로 향한다. 그러나 입구에서 시종장 예멜리얀 게라시모비치에 의하여 저지를 받고, 베렌제예프 각하가 직접 파티에 그를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며 발길을 돌리게 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래 일단 다시 돌아와 초라한 선술집에서 저녁을 주문하긴 했는데, 다음 순간 그가 있는 곳은 저택의 창고. 파티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그러다 결국 무도회가 벌어지는 홀에 들어가 끌라라 올스피예브나에게 춤을 청하는데 까지는 성공하지만 순간 발이 걸려 뒤로 넘어지고 끌라라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다시 쫓겨나게 된다. 이게 첫날.
두 번째 날엔 사무실 자기 맞은편에 새로운 책상이 놓여지고, 새로운 9등 문관이 배치되어 자신의 업무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를 받는다. 근데 이 새 문관의 이름이 우연하게도 골랴드낀. 이 신참내기는 생긴 것도 마치 선임 골랴드낀의 도플갱어인 것처럼 거의 똑같이 생긴데다가, 이름 또한 야꼬프 뻬뜨로비치로 같으니 우리의 주인공은 미칠 지경이다. 독자는 안다. 신참 골랴드낀이 주인공 골랴드낀의 분신임을.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죽은 세묜 이바노비치의 후임으로 사무실에 들어온 신참 골랴드낀은 상사에게 능수능란하게 자리를 부탁했고, 계속 요구를 해 결국은 세묜 이바노비치의 후임으로 정해지게 되는 성취를 이룬 작자다. 심지어 고위 인사의 추천장까지 가져왔으며, 주인공이 적으로 생각하는 안드레이 필립뽀비치와 웃으며 환담하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혹시 악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밉상이다.
그러나 업무가 끝난 다음에 신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됐고, 그러자 하인인 뻬뜨로쉬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태도로 신참을 맞이하였으며, 신기하게도, 그리도 능수능란하던 신참이 갑자기 당황하고 겁을 내, 지금까지 멸시와 시달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며 지낸 사람처럼 보였던 거다. 그래 주인공은 신참과 허물없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연거푸 독한 펀치를 들이켜며 자신의 모든 약점을 발설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건, 강적 안드레이 필립뽀비치와의 악연과 어제 쫓겨난 파티의 주인공 끌라라 올스피예브나에 관한 것이었고, 둘이 적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계략을 세우자고 약속한다.
셋째 날 느지막하게 일어나니 신참 골랴드낀은 벌써 나갔다. 나가긴 나갔는데 사무실에서 벌써 주인공 골랴드낀이 자기한테 말한 내용을 다 퍼뜨려 우리의 주인공은 더욱 더 진퇴양난의 골짜기로 몰려있게 된다. 신참 골랴드낀은 주인공 골랴드낀이 가지고 있지 못한 모사, 이간, 편법, 요구 등의 악덕을 충분한 것보다 더 충분하게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던 것을 우리의 주인공은 몰랐다.
사실 진짜 골랴드낀은 주인공과 신참을 합친 인격인지 모른다. 세상에 주인공 골랴드낀 같이 선한, 혹은 적어도 악한 기질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가 가지고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밖으로 보여주지 않는 기질만 가진 것이 신참 골랴드낀이겠지. 그리하여 신참 골랴드낀을 도스토옙스키는 분신이라고 칭한 것. 나는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책방 독자평을 읽어보면 나하고 궁합, 즉 스타일이 맞는 작품이라서 그랬지 않나 싶다. 그래서 추천하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의 독후감은 읽어보고 싶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고. 나도 모르겠다. 이 말을 내가 했는지, 내 분신이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