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코프 중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성건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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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아파시예비치 불가코프는, 당연히, 평론가들이 20세기가 낳은 명작으로 평가하는 <거장과 마르게리타>를 제일 먼저 읽게 되고, 백 명 가운데 아흔 두 명은 이 책으로 단박에 불가코프 빠, 이름하여 ‘불빠’의 일원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다른 작품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가 쓴 다른 작품들을 수색해 읽어가며, 처음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후광 덕택에 실제 자신이 느낀 감정보다 조금 과장된 찬사를 보내다가 아.마.도. 세번째 불가코프 부터는, 아흐, 이거 참 기대 이하인데, 라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가, 그럼에도 그놈의 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 족족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거 같다. 나만 그러는 건가? 이번엔 그의 중단편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백수가 말이지 정가 20,800원, 판매가 2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기엔 위험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다 사달라고 졸라 책 들어왔다는 문자 받자마자 득달같이 데려와 읽어버렸다. 본문만 337 페이지인데 아침 여덟 시부터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시간 30분 빼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다 읽는다. 지만지 답지 않게 편집이 널럴한 편이라서.

  중편 하나와 열두 편의 단편을 실었다.

  죽기 전까지 출판하지 못한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빼고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레닌과 스탈린,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문학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워낙 강력한 검열과 출판금지 딱지를 붙이니 글을 써야 먹고 사는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손 놓고 지낸 의사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가구, 책, 옷, 기타등등 온갖 것을 다 팔아먹은 다음에도 며칠씩이나 배를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남의 집 담벼락을 넘겠는가, 체제가 바라는 대로 원고지를 채워주겠는가? 사는 게 그렇지 뭐. 간혹 자신이 진짜 마음먹고 쓴 작품도 있을 수 있겠고, 그건 또 검열을 무사통과하기 힘들 것은 당연할 터인데, 그런 건 그냥 가지고 있다가 망실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으면 나중에, 좋은 세상이 온 후에 출판해 처자식한테 ‘거꾸로 효도’ 한 번 할 수도 있는 거. 사는 게 별거냐, 다 거기서 거기지.

  이 양반이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이다. 1891년생이니까, 러시아 제국 키예프 주, 키이우 태생이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으니 한 번도 우크라이나 국적을 가져본 적은 없다. <고요한 돈강>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하고 비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숄로호프는 스탈린한테 극한의 귀여움을 받은 것과 달리 불가코프는 고생만 열나게 하다 겨우 마흔아홉 살에 숟가락 놨다.


  책을 읽으면 저절로, 지금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스물두 살 때인 1913년에 불가코프는 키이우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고, 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선에서 의료활동을 해야 했다. 16년 졸업생일 당시 모스크바에 소환되어 스몰렌스크 지역으로 배치, 니콜스코예, 뱌지마 등지에서 군의관으로 지내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맞는다. 여기서 보시라. 16년의 모스크바는 니콜라이 황제가 다스렸으니 황제군에 징집을 당했던 것이고, 17년이면 볼셰비키가 집권했던 것이어서 불가코프는 대단히 애매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어쨌든 끊임없이 징집해제를 요구해 18년에 제대를 하고 키이우에서 성병 전문의로 밥을 먹고 살다가, 이제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발발해 백군의 주요 진영인 키이우 의사였던 불가코프 역시 백군 군의관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자신이 백군 군의관이었기는 하지만 스탈린 통치하에 다시 백군 만세,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칠 수는 없어서 책의 첫 두 편에서는 주인공인 백군 군의관이 백군의 잔혹한 린치에 질려 자비로운 볼셰비키 군이 하루빨리 키이우 근방의 중요한 도시 슬로봇카를 접수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년의 황제군이 정말로 잔혹했던 건 사실이지만, 적군이라고 특별히 자비로웠던 건 아니다. 심지어 스탈린이 귀여워했던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읽어봐도 그렇다. 사람의 목숨이 사과 한 알보다 가치가 없던 20세기 초의 내전에서 백군의 전통적 터전에 들어온 적군 입장이라면 주민 누가 간첩이나 암살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불가코프 식 백군은 루시퍼, 적군은 가브리엘의 방정식이 생긴다.


  실제로 백군이 내전에 패하면서 저 위대한 거짓말쟁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를 비롯한 백군 장성들과 장교들은, 가능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아니면 홀몸으로라도 서유럽으로 망명을 감행한다. 이때 불가코프는? 마찬가지로 망명을 결심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지만, 사주에 역마살이 끼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이는 때를 맞춰 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국경을 넘는 것보다 생사의 경계를 더 빨리 넘을 뻔했다. 그래 결국 망명을 포기해야 했던 불가코프는 이후 지긋지긋한 의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전업작가/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굳히면서 수도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정착과 동시에 본격적인 굶주림의 시절이 찬란하게 열리는데, 이때의 경험을 이 책에 단 한 편 실린 중편소설 <소맷동에 쓴 수기>에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즉, 티푸스 발병으로 41도가 넘는 열에 들끓으며 헛것을 본 이야기부터 온갖 궁상맞은 가난의 모습을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을 들먹이면서까지 가감없이 토로한다. 만일 망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훨씬 풍요로운 불가코프를 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한다. 작가생활을 전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 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시대가 엄혹하면 문학도 얼어붙는다. 굳이 우리나라의 70년대 문학을 들먹일 필요 없다. 북한 문학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당연한 거니까. 불가코프는 작가로서 참으로 재수없게 하필이면 그런 시절을 살아야 했고, 그리하여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조차도 문학적 성과, 성가와 관계없이 작가가 죽고 26년이나 흐른 다음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한 작품 말고는 뛰어나지 않은 작품만 쓴 작가라고 여기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판이 깔리지 않은 불행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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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1-08 0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하필 그 중요한 때에 티푸스에 걸려 망명을 못하다니 정말 운도 지지리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2-11-08 07:27   좋아요 1 | URL
옙. 그때부터 고생만 겁나게 하다 갔으니, 불가코프 개인으로 봐서는 그냥 의사로만 사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레삭매냐 2022-11-0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가 키이우 출신이라면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

불가코프의 파란만장한 생을
골드문트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네요 :>

저도 꼴랑 마르가리타만 읽은지라.

Falstaff 2022-11-08 15:09   좋아요 1 | URL
옙.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우크라가 요즘 침공을 받아 동정을 사서 그렇지 뭐 바람직한 지역은 아닙지요. 그 동네 사람들 만큼 험한 인종도 별로 없습니다. 폭력 영화에서도 그러잖아요. 우크라이나 인간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요. ㅎㅎ 근데 카자크 사람들은, <고요한 돈 강> 읽어보면,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 보고 ˝약골˝이라고 하더군요.

stella.K 2022-11-08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사람 정말 불행이 말도 못하겠더군요. 말도 못한 핍박을 받고도 끝까지 작가로서의 펜을 꺽지 않았던.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책을 하루만에 종주하셨군요. 아, 저도 좀 그런 자세가 필요한데 꼴랑 한두 시간 붙들고 나가 떨어지니 저는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것습니다.ㅠ

Falstaff 2022-11-08 15:13   좋아요 1 | URL
불쌍한 인간입지요. 그냥 편하게 의사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요즘도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 수입 5백 파운드가 필요한데 내전 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 극작과 소설을 써서 밥을 먹고자 했으니, 그것도 판판히 얻어 터지면서 말입니다.
스텔라 님도 이 책 잡으시면 후딱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

바람돌이 2022-11-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불가코프의 삶이 이랬군요. 골드문트님 글속에서 작가들의 삶을 알 수 있어서 항상 좋아요. ^^

Falstaff 2022-11-09 05: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트인 데로 가는 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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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1862년 5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왕국이 될 오스트리아 제국 수도 빈의 레오폴드슈타트, 프라터 가 16번지에서 저명한 후두학(또는 이비인후과) 전문의 요한과 루이제 슈니츨러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이 당시 빈에서도 요즘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의사 가문끼리 혼인하는 것이 유행이라 루이제 역시 의사 가문 출신이었으니, 이들의 맏아들인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물론이고 세 살 아래 동생 율리우스마저 의학공부를 해 의사가 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근데 문제는 글, 이 가운데서도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건, 일종의 딴따라 성향과 비슷해서 누군가가 악착같이 말리지 않으면 저절로 그짝 패를 따라 가거나 그짝 물살에 휩쓸려버리기가 일쑤다.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넘치는 끼 때문에 가문이고 지랄이고 간에 다 때려치우고 광대패나 사당패를 따라 나선 자제들 이야기를 가끔 들었던 것과 한 가지로.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경도는 아버지 노老슈니츨러가 효과적으로 방파제 역할을 했다. 1885년, 약관 스물세 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르투어는 아버지가 재직하고 있는 빈 시립병원에 들어가고, 87년엔 아버지가 간행하는 의학잡지를 위해 일하다가 급기야 88년엔 아버지의 조수 의사로 일하게 됐으니 참 갑갑하긴 했을 거 같다.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끔 작품을 발표하던 슈니츨러는 90년부터 후고 폰 호프만스탈, 펠릭시 잘텐,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등과 교유하는데, 유념하시라, 이들 모두 유대인이고,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반유대주의가 노골적으로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여튼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1893년, 하릴없이 서른한 살이 된 슈니츨러에게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오게 마련인 기회가 온다. 아버지 노슈니츨러가 세상을 등진 것. 슈니츨러는 이제 마음 편하게 시립병원에서 나와 개업의가 되는 동시에 거의 완전히 자유롭게 창작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아직 혼인 경험이 없던 슈니츨러는 서른다섯 살 되던 1897년에 마리 라인하르트가 “세간의 눈을 피해” 사생아를 낳고, 2년 뒤에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충격을 당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십년 후인 1909년, 슈니츨러는 <트인 길로 가는 길>을 써 발표하고, 발표한지 110년이 지나 2019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해 나로 하여금 읽게 만들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백년 먼저 번역, 출간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으로는 남녀 여러 명이 두 줄로 서서 서로 체인징 파트너 하면서 춤을 추는 군무의 일종을 제목으로 딴 <라이겐>을 읽어보았다. 그리 특징적인 작품이 아니라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파격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했더랬다. 그러다 요새 갑자기 이이의 희곡작품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검색해보니 <테레제>와 함께 딱 두 권뿐인 장편소설 <트인 데로 가는 길>이 눈에 띄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책값 비싸게 찍으려면 맘대로 해라, 난 도서관에서 빌려 읽겠다!


  주인공 게오르크 폰 베르겐틴 남작의 27세부터 28세까지 약 일년 간의, 시대소설이라기보다 연애소설이다. 주인공 소개를 해보자. 지난 4월에 미국으로 영구 귀국을 앞둔 연인 그레이스와 시칠리아에서 애수 어리고 다소 지루한 이별여행을 마치고 귀국했고, 늦봄엔 블레트 호숫가의 빌라에서 마지막으로 음악에 관해 대화를 하고는 평화롭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아버지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청년이다. 슈니츨러의 전작 <라이겐>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지만 일단 작품 전체에서 다양한 음악 이야기가 나온다. 게오르크의 직업이 작곡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슈니츨러가 서양에서도 음악이라고 하면 전세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일단 좀 꿇리고 들어가는 빈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하겠다. 즉 음악이 마치 공기처럼 이들의 일상에 충만하다는 것. 게오르크의 아버지 노老베르겐틴 남작도 작은 체구의 성악가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에까지 골인해 맏아들 펠리치안을 낳고, 다음해 게오르크까지 낳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 때문에, 아마 폐결핵 아니었을까 싶지만, 지중해 지역으로 아이들과 함께 요양생활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한다. 이때 형제는 시칠리아, 로마, 튀니스, 케르키라, 아테네, 몰타, 메라노, 리비에라, 피렌체 등등에서 살게 되며, 넘쳐 넘쳐 흐르던 노베르겐틴 남작의 재산까지 완전히 폭삭 망하게 하진 않았지만 거의 거덜을 내버리고는 어머니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9년 전이고 게오르크가 열여덟 살.

  지금은 아버지마저 작고했으니 상중이다. 시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반유대주의 선동시절이며, 굳이 연대로 따지자면 1904년 정도가 아니겠는가 싶다. 역자는 1900년 전후라고 각주를 달았다. 아무리 상중이라도 젊은 남자가 하루 종일 집밖 출입을 삼가며 애도만 할 수는 없잖은가. 시묘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하여 게오르크도 친구들에 이끌려 사교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본문만 670 페이지가 넘는 연애소설을 시작하는 거다.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문학 공부를 할 때, 호프만스탈, 잘텐, 베어-호프만 등 유대인 작가들과 교류를 맺었다는 건 위에서 얘기했다.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트인 데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 게오르크 폰 베르겐틴 남작도 주로 유대인과 좋은 유대를 맺는다. 로스너 가족, 에렌베르크 가족, 작가 하인리히 베어만, 나이가 좀 더 된 작가 에드문트 뉘른베르거, 뷔너 부인과 뷔너 양, 예비역 장교 데메터 슈탄치데스, 골로프스키 가족, 독설 전문가인 나이 든 오버베르거 부인, 궁정고문관 빌트 씨, 슈타우버 씨와 아들 박사 등등.

  참. 이거 먼저 얘기하자. 이 책 재미있다. 근데 진짜로 읽어보실 분께 미리 한 말씀 드리자면, 등장인물이 무수하게 많다. 읽다보면 막 헷갈릴 정도다. 예를 들어 에렌베르크 가족, 이렇게 썼지만, 에렌베르크씨와 에렌베르크 부인, 아들 오스카어, 딸 엘제가 다 완전히 다르게 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네 명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저것 다 합하면 수십 명의 이름과 성격을 몽땅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니까 그건 미리 각오를 하시라. 위 문단에 거론한 건 오직 유대인들뿐이다. 여기에 드문 빈도이기는 하지만 친유대 성향의 선량한 랠프 스켈튼, 쇤슈타인 백작도, 반유대 성향의 골통들도 몇 명 포함된다.

  게오르크는 전에 『서동시집』에서 시 두 편을 골라 곡을 붙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메조)소프라노 아나 로스너 양에게 악보를 전해준 적이 있다. 작곡을 했으면 자신의 노래를 성악가가 직접 부르는 걸 들어봐야 할 터이니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루는 그게 생각나 주로 유대인이 많이 사는 파울리너가세의 허름한 건물을 방문한다. 늘 어렵게 생활비를 벌어오느라 뼛골이 빠진 로스너 씨는 그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누추한 곳을 남작님께서 직접 방문해주시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바치고, 아들 요제프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남작과 함께 조금 시간을 죽이다가, 그가 누이와 함께 문이 열린 방에 들어 노래를 하고 반주를 하는 동안 불쌍한 엄마를 졸라 돈을 타내 반유대성향을 감추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러 나간다. 이때까지는 게오르크와 아나 양 사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워낙 유대인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게오르크는 돈냄새와 음악에 관한 조예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탁월한 유대인들 역시 극진하게 생각해주는 대상이라서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에렌베르크 씨 가족이 베르겐틴 형제를 위해 만찬을 베풀고, 이 장소에 빈에서 방귀 깨나 뀌는 유대인들이 모두 모이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소박하지만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아나 로스너 양이 등장한다. 더구나 놀랍게도 에렌베르크 여사는 로스너 양이 등장하는 순간, 게오르크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아나 로스너 양은 당신을 위해 초대했어요.”란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내주고 함께 반주하고, 노래하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가, 당신을 위해 초대했다는 말로 갑자기 파르르, 저 신경줄기가 떨리기 시작하는 거. 이리하여 이들은 연애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창 밖으로 교회당의 오르간 소리가 들리는, 공동주택으로 개조한 옛 대저택의 궁륭천장으로 된 나지막한 방을 얻어 자신들의 연애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망해도 남작 집안의 자제이니 이 정도야 뭐. 나 연애하던 시절 생각하니 솔직히 부러워 죽겠다. 방을 얻었으면 어쩌겠나. 결국 덜커덕 걸려버렸다.

  4개월 동안의 이탈리아 커플 여행을 포함한 9개월이 지나고 아나 로스너 양은 정말 잘생긴 아들을 낳는다. 아이를 낳으면 대개 작은 노인처럼 쪼글쪼글한 주름투성이인데, 형의 이름을 따서 펠리치안이라고 이름 지은 아이는 환한 얼굴에 파란 눈동자를 지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다만 게오르크는 예술가 사이에서 드물지 않은 빈도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라서 결혼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이라고 했다. 연애소설의 8할은 사실 이별 소설이다. 커플이 연애를 하고, 방을 얻어 몸을 섞고 잉태를 한 후, 4개월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혼인을 안 해? 더구나 아이를 다른 부부에게 맡기고 애 아비는 독일로 가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하고 이후 벌어질 일은 차차 생각해본다고? 이러니 작품의 중간부터 이 연애소설도 결국 이별로 끝을 맺겠다고 짐작하는 건 타당하지만, 과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과거 경험처럼 아이 낳은 후 2년 만에 여자가 죽을까? 그렇게 비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진짜? 안 알려줌.



  그러나, 현대의 여성주의 시각으로 보면 게오르크의 행각이 불쾌할 수도 있으니 감안하실 것. 스토리의 중요한 전환이 작품의 중간 부분에 발생을 하는 관계로 내용 서술에 애를 먹었고, 당연히 소개한 스토리는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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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04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만 670 페이지가 넘는 연애소설‘, ‘연애소설의 8할은 사실 이별 소설‘ 이라니 너무 흥미로울것 같아요! 저는 이 작가의 <라이겐>을 사두고 아직 읽진 않았습니다.

잠자냥 2022-11-04 08:34   좋아요 0 | URL
구스톨 소위 언제 만나요?

다락방 2022-11-04 08:42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구스톨 소위 만나고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요. 좀 기다리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11-04 15:11   좋아요 0 | URL
근데 다락방 님 보시면 <라이겐>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좀 빡치지는 않겠어요?
 
제르미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6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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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축하합니다, 민음사!!!!! 4백 번이 넘어서 처음으로 에밀 졸라가 나왔습니다! 전 세계 문학전집 가운데 최초 기록일 겁니다. 4백 넘어서 ‘첫‘ 졸라! 우러러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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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1-02 1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드디어 민음사에서도 나왔군요. 오 반갑네요!

Falstaff 2022-11-02 19:5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민음사의 졸라. 졸라를 전집에 포함한 게 기적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얘네들, 별 짓을 다 해요.

coolcat329 2022-11-02 20:4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 이게 왜 이렇게 웃기죠?

alummii 2022-11-02 20: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그러고보니 4백번 넘어서 나오다니 ...졸라는 졸라 문학동네껀데...!! ㅋㅋㅋㅋ

Falstaff 2022-11-02 21:43   좋아요 4 | URL
ㅋㅋㅋ 그게 어딨어요. 번역 잘 해서 좋은 책 내면 대빵이지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2 20: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백자평에 오늘의 촌철살인상을 수여합니다.
아 졸라!!! 좋아요. ^^

Falstaff 2022-11-02 21:44   좋아요 2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바람님 눈매가 매워요!! ^^

새파랑 2022-11-02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밀졸라하면 문학동네인데 드디어 민음사에서도 나왔군요 ㅋ 번역비교하는 재미도 있을거 같아요~!!

Falstaff 2022-11-03 06:56   좋아요 6 | URL
궁금한게, 이게 새 번역인지, 아니면 절판된 책을 사온 건지 모르겠단 겁니다.
요즘 하는 짓 보면 구번역을 사 온 거 같고, 만일 새 번역이라면,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루공-마카르 총서가 열 작품이나 되는데 왜 하필이면 제르미날을 번역했는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거고요.
하여간 이런 세계문학전집 내는 민음사는 미스테리오조 자체입니다.

그레이스 2022-11-03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다릴걸 그랬나요^^;;

Falstaff 2022-11-03 15:44   좋아요 1 | URL
오, 벌써 사셨나봅니다. ^^

그레이스 2022-11-03 15:46   좋아요 1 | URL

저는 문학동네로 사놓았어요
골드문트님 평을 보고 다시 살지 결정해야겠네요 ㅋ

Falstaff 2022-11-04 15:12   좋아요 1 | URL
뭐 두 종을 다 사실 필요가.... 있을까요. ^^;;
 
제르미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6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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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제르미날> 번역은 서울사대 불문과 출신 비슷한 연배들끼리의 리그를 향하는 건가요? 지켜보는 독자는 재밌네요. 다른 회사 책만 읽어서, 별점은 졸라의 제르미날 itself에 관한 거고요, 이거 사서 문장 대 문장을 한 번 비교해볼까, 하는데, 재밌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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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11-02 18: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문장 대 문장 비교, 기대됩니다^^

Falstaff 2022-11-02 19:20   좋아요 3 | URL
ㅋㅋㅋ 말만 그렇지 두 뛰어난 역자들에게 누가 될 거 같아서 말입죠. ^^;;;

coolcat329 2022-11-02 1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미 문동으로 갖고 있지만요. 골드문트님 비교 아흑 벌써부터 재미납니다!

Falstaff 2022-11-02 21:45   좋아요 1 | URL
아이고, 비교 안 합니다. 두 양반이 나름대로 열쒸미 했을 텐데 그걸 우짜 아마추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2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이건 기대충만상입니다.
오늘 골드문트님 백자평 모두 상장 수여!!

Falstaff 2022-11-02 21:55   좋아요 1 | URL
비교 안 한다니까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같은 선생을 사사하고 같은 책을 번역한 게 재미나서 한 번 얘기해본 겁니다.
ㅋㅋㅋ 그러면서 언제 슬쩍 해보는 거 아니냐고요? ㅋㅋㅋ 그건 제 맘이고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2-11-03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의 평가 기다리겠습니다^^

Falstaff 2022-11-03 15:45   좋아요 1 | URL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전 어떤 분이 관계된 책에 대해선 입도 벙끗하지 않을 것이라고 작정을 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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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서보! 내일까지 읽을 생각이었다가,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오후 일정 깨고 오늘 다 읽어버림. 점심도 안 먹어 이제야 밥푸리 김밥 한 줄 먹으면서 백자평 쓰고 있는 중. 다만 한 가지, 책값이 비싼데, 그건 알아서들 해결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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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02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비.. 비싸네요? 😱

Falstaff 2022-11-02 17:44   좋아요 1 | URL
ㅎㅎ 그래도 2013년 초판 당시 정가 2만8천 원에 비교하면 나름대로 애 쓴 겁니다.

잠자냥 2022-11-02 21:50   좋아요 1 | URL
ㅎ 전 그래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시청해서 읽다가 다 못 읽고 일단 반납한 전력이 있습죠…;

alummii 2022-11-02 2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저도 밥푸리 김밥과 함께 꼭 읽어보겠습니다 ^^ 😀일단 밥 굶게 하는 책은 제가 믿고 봅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2-11-02 21:47   좋아요 3 | URL
옙. 재미납니다. 저는 처음엔 버릇대로 메모를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곧바로 노트와 펜을 집어 던졌습니다. 읽기만 해도 바빠 죽겄는데 뭔 메모를....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2 2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출판사는 왜 책값을 이렇게 비싸게 책정할까요? 점심도 안먹고 읽을정도라니 급관심 가는데말입니다. ^^

Falstaff 2022-11-02 21:51   좋아요 3 | URL
오, 이 책이 2013년인가 나왔던 지만지의 개정판이거든요. 근데 정가가 아주 조금이나마 떨어졌습니다. 세월과 세월에 따른 인플레 생각하면 나름대로 가격 인하를 한 것이지요. 그래도 비싸요, 비싸. ㅎㅎㅎㅎ
지만지, 이 출판사 작품이 앞으로 계속 나올 겁니다. 목록은요,
<트인 데로 가는 길>, <불가코프 중단편집>, <엽란을 날려라>, <프레스코>, <머릿속의 새들> 이렇게 다섯 권이 대기 중입니다.

테레사 2022-11-04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어를 읽었는데,.흡인력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씩 읽었는데,....이 책은..어떨까..ㅎㅎ궁금해 죽겠네요.

Falstaff 2022-11-04 15:13   좋아요 1 | URL
오, 도어가 그냥 그러셨으면 짐작컨데 서보 머그더와 테레사 님이 합이 덜 맞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짐작이 맞다면 이 책도 재미있게 읽으시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천생 도서관 이용하시는 쪽을 택하시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ㅎ

테레사 2022-11-04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