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코프 중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성건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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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아파시예비치 불가코프는, 당연히, 평론가들이 20세기가 낳은 명작으로 평가하는 <거장과 마르게리타>를 제일 먼저 읽게 되고, 백 명 가운데 아흔 두 명은 이 책으로 단박에 불가코프 빠, 이름하여 ‘불빠’의 일원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다른 작품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가 쓴 다른 작품들을 수색해 읽어가며, 처음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후광 덕택에 실제 자신이 느낀 감정보다 조금 과장된 찬사를 보내다가 아.마.도. 세번째 불가코프 부터는, 아흐, 이거 참 기대 이하인데, 라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가, 그럼에도 그놈의 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 족족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거 같다. 나만 그러는 건가? 이번엔 그의 중단편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백수가 말이지 정가 20,800원, 판매가 2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기엔 위험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다 사달라고 졸라 책 들어왔다는 문자 받자마자 득달같이 데려와 읽어버렸다. 본문만 337 페이지인데 아침 여덟 시부터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시간 30분 빼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다 읽는다. 지만지 답지 않게 편집이 널럴한 편이라서.

  중편 하나와 열두 편의 단편을 실었다.

  죽기 전까지 출판하지 못한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빼고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레닌과 스탈린,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문학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워낙 강력한 검열과 출판금지 딱지를 붙이니 글을 써야 먹고 사는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손 놓고 지낸 의사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가구, 책, 옷, 기타등등 온갖 것을 다 팔아먹은 다음에도 며칠씩이나 배를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남의 집 담벼락을 넘겠는가, 체제가 바라는 대로 원고지를 채워주겠는가? 사는 게 그렇지 뭐. 간혹 자신이 진짜 마음먹고 쓴 작품도 있을 수 있겠고, 그건 또 검열을 무사통과하기 힘들 것은 당연할 터인데, 그런 건 그냥 가지고 있다가 망실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으면 나중에, 좋은 세상이 온 후에 출판해 처자식한테 ‘거꾸로 효도’ 한 번 할 수도 있는 거. 사는 게 별거냐, 다 거기서 거기지.

  이 양반이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이다. 1891년생이니까, 러시아 제국 키예프 주, 키이우 태생이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으니 한 번도 우크라이나 국적을 가져본 적은 없다. <고요한 돈강>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하고 비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숄로호프는 스탈린한테 극한의 귀여움을 받은 것과 달리 불가코프는 고생만 열나게 하다 겨우 마흔아홉 살에 숟가락 놨다.


  책을 읽으면 저절로, 지금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스물두 살 때인 1913년에 불가코프는 키이우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고, 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선에서 의료활동을 해야 했다. 16년 졸업생일 당시 모스크바에 소환되어 스몰렌스크 지역으로 배치, 니콜스코예, 뱌지마 등지에서 군의관으로 지내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맞는다. 여기서 보시라. 16년의 모스크바는 니콜라이 황제가 다스렸으니 황제군에 징집을 당했던 것이고, 17년이면 볼셰비키가 집권했던 것이어서 불가코프는 대단히 애매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어쨌든 끊임없이 징집해제를 요구해 18년에 제대를 하고 키이우에서 성병 전문의로 밥을 먹고 살다가, 이제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발발해 백군의 주요 진영인 키이우 의사였던 불가코프 역시 백군 군의관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자신이 백군 군의관이었기는 하지만 스탈린 통치하에 다시 백군 만세,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칠 수는 없어서 책의 첫 두 편에서는 주인공인 백군 군의관이 백군의 잔혹한 린치에 질려 자비로운 볼셰비키 군이 하루빨리 키이우 근방의 중요한 도시 슬로봇카를 접수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년의 황제군이 정말로 잔혹했던 건 사실이지만, 적군이라고 특별히 자비로웠던 건 아니다. 심지어 스탈린이 귀여워했던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읽어봐도 그렇다. 사람의 목숨이 사과 한 알보다 가치가 없던 20세기 초의 내전에서 백군의 전통적 터전에 들어온 적군 입장이라면 주민 누가 간첩이나 암살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불가코프 식 백군은 루시퍼, 적군은 가브리엘의 방정식이 생긴다.


  실제로 백군이 내전에 패하면서 저 위대한 거짓말쟁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를 비롯한 백군 장성들과 장교들은, 가능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아니면 홀몸으로라도 서유럽으로 망명을 감행한다. 이때 불가코프는? 마찬가지로 망명을 결심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지만, 사주에 역마살이 끼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이는 때를 맞춰 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국경을 넘는 것보다 생사의 경계를 더 빨리 넘을 뻔했다. 그래 결국 망명을 포기해야 했던 불가코프는 이후 지긋지긋한 의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전업작가/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굳히면서 수도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정착과 동시에 본격적인 굶주림의 시절이 찬란하게 열리는데, 이때의 경험을 이 책에 단 한 편 실린 중편소설 <소맷동에 쓴 수기>에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즉, 티푸스 발병으로 41도가 넘는 열에 들끓으며 헛것을 본 이야기부터 온갖 궁상맞은 가난의 모습을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을 들먹이면서까지 가감없이 토로한다. 만일 망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훨씬 풍요로운 불가코프를 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한다. 작가생활을 전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 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시대가 엄혹하면 문학도 얼어붙는다. 굳이 우리나라의 70년대 문학을 들먹일 필요 없다. 북한 문학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당연한 거니까. 불가코프는 작가로서 참으로 재수없게 하필이면 그런 시절을 살아야 했고, 그리하여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조차도 문학적 성과, 성가와 관계없이 작가가 죽고 26년이나 흐른 다음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한 작품 말고는 뛰어나지 않은 작품만 쓴 작가라고 여기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판이 깔리지 않은 불행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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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1-08 0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하필 그 중요한 때에 티푸스에 걸려 망명을 못하다니 정말 운도 지지리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2-11-08 07:27   좋아요 1 | URL
옙. 그때부터 고생만 겁나게 하다 갔으니, 불가코프 개인으로 봐서는 그냥 의사로만 사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레삭매냐 2022-11-0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가 키이우 출신이라면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

불가코프의 파란만장한 생을
골드문트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네요 :>

저도 꼴랑 마르가리타만 읽은지라.

Falstaff 2022-11-08 15:09   좋아요 1 | URL
옙.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우크라가 요즘 침공을 받아 동정을 사서 그렇지 뭐 바람직한 지역은 아닙지요. 그 동네 사람들 만큼 험한 인종도 별로 없습니다. 폭력 영화에서도 그러잖아요. 우크라이나 인간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요. ㅎㅎ 근데 카자크 사람들은, <고요한 돈 강> 읽어보면,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 보고 ˝약골˝이라고 하더군요.

stella.K 2022-11-08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사람 정말 불행이 말도 못하겠더군요. 말도 못한 핍박을 받고도 끝까지 작가로서의 펜을 꺽지 않았던.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책을 하루만에 종주하셨군요. 아, 저도 좀 그런 자세가 필요한데 꼴랑 한두 시간 붙들고 나가 떨어지니 저는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것습니다.ㅠ

Falstaff 2022-11-08 15:13   좋아요 1 | URL
불쌍한 인간입지요. 그냥 편하게 의사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요즘도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 수입 5백 파운드가 필요한데 내전 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 극작과 소설을 써서 밥을 먹고자 했으니, 그것도 판판히 얻어 터지면서 말입니다.
스텔라 님도 이 책 잡으시면 후딱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

바람돌이 2022-11-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불가코프의 삶이 이랬군요. 골드문트님 글속에서 작가들의 삶을 알 수 있어서 항상 좋아요. ^^

Falstaff 2022-11-09 05: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