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옌 대산세계문학총서 177
항타고드 오손보독 지음, 한유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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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타고드 오손보독,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다. 이이의 이름을 한자어로 쓰면 “항도덕 오순포도알 杭圖德 烏順包都嘎” 이라고 쓰는데, 항타고드가 성family name인지, 오손보독이 성인지 잘 모르겠고, 오순’포도알’을 ‘오손보독’이라 읽는 것도 재미있다. 마지막 알嘎자는 나도 처음 보는 글자로 ‘새소리’와 ‘깔깔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글자만 보면 “까마귀가 포도알 물고 만족해서 순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이이의 이름이 희한한 이유는 몽골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몽골인데 고비사막 한 가운데, 내몽골 사람이고, 내몽골은 중국 내 자치지역이라 몽골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 활동도 한자어가 아니라 몽골 문자로 하고 있다. 내몽골이라도 전체가 사막지대는 아니라서 농촌지역인 나이만 허쇼의 툴렌탈 솜 세친달라 가차에서 1969년에 임시교사를 하다가 솜에 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농사를 짓는 어머니와의 슬하 삼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저 참고로 알아 두시라는 뜻에서 주소지의 암호를 좀 풀어드리자면 허쇼와 솜, 가차는 각자의 행정단위를 칭하는 것으로 허쇼⊃솜⊃가차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시⊃구⊃동 비슷하게. 날 때부터 문재가 있어서 불과 열네 살에 산문을 지어 자치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발표를 하고 열다섯 살에는 시를 싣기도 한다. 그러나 저 고비사막 근방의 농촌마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따로 할 것이 있을 턱이 있나. 졸업하고 두 해 동안 농사를 짓다가 뜻한 바가 있어 내몽골과 외몽골, 즉 중국과 몽골국의 접경지역에 있는 에리옌 시로 거처를 옮겨 2년 동안 거간꾼 일을 한다.

  아리옌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의 1/3은 한족으로 중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가지고 와 몽골인에게 팔거나 그들의 특산품을 구입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려는 상인이고, 1/3은 외몽골 사람으로 한족과 비슷한 이유로 시에 유입해 들어온 몽골인 상인, 그리고 나머지 1/3이 한족과 외몽골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구전을 받아 돈을 버는 거간꾼이라고 하는데, 항타고드가 바로 이 일을 했다는 거다. 이 거간꾼, 한자어를 섞어 부르면 좀 더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위해 다른 말로 부르자면 중개인들의 가장 큰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중국어와 몽골어를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들은 한족이면 한족, 몽골인이면 몽골인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하고, 필요하면 린치도 가하며, 아주 간혹가다가는 정말로 생명까지 해쳐가며 인간 말종의 삶을 살고 있는데, 사실 알고보면 아직 문명화가 덜 된 것 같은, 또는 현대화가 덜 진행된 원시도시에서 흔하게 벌어지곤 했던 일이다. 여기에 공안으로 대표하는 공권력 역시 중국문화 특유의 ‘꽌시’나 체면 등을 우선하느라 사실과 정의는 다음 순번으로 밀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곳. 어디 가서 전근대적이라고 나대지 말자. 우리나라도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했다. 관리에게 봉투에 (당시 화폐로)돈 십만 원 넣어 슬쩍 밀어주면, 얼마야? 묻고, 열 갠데요? 하면 다시 이쪽으로 밀어주면서, 집에 가다가 애들한테 과자나 사 가지고 들어가, 라고 하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다.

  하여튼 항타고드는 두 해 동안 거간일을 하면서 국경도시 에리옌이라고 불리는 지옥도에서 벌어진 온갖 난장판을 다 구경하고, 그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재를 사용해 원고지를 메꾸기 시작했으니 단편 <에리옌의 남부시장에서>, 중편 <에리옌, 에리옌, 에리옌>, 그리고 장편 <에리옌>이다. 재미있는 건, 에리옌은 국경도시의 고유명사 말고 “잡색의”, “얼룩덜룩한”, “다채로운” 등의 형용사이기도 하다는데, 작중에서도 간혹 등장해 주로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난잡하고 험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국인이지만 몽골족이기도 한 항타고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면서 스스로 아쉬워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몽골 놈이 몽골 놈에게 못되게 굴고, 나무 삽이 진흙을 못 뜬다.”는 몽골 속담이다. 내몽골이나 외몽골이나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 등쳐먹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는 건데, 미국 가면 한국인한테 제일 많이 사기치는 게 한국인이라면서? 다 그런 거지 뭐.


​  <에리옌>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나산달라이와 그의 아우 바양달라이 형제. 나산달라이 가족은 내몽골 시골에서 (항타고드의 부모처럼)병원 원무과에도 다니고 농사도 짓고 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결코 삶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1994년에 에리옌 소재 한템게르 컴퍼니의 사장으로 있는 아우 바양달라이 하나만 보고 무작정 에리옌으로 터를 옮겨왔다. 바양달라이는 하는 일마다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이제 금고 저 아래에 쌓인 백 위안 짜리 지폐가 누렇게 썩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돌 만큼 부자가 되어 남은 평생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여유있게 하고 싶은 거 해가면서 살 수 있는 처지다. 맏아들 고비는 공안의 경찰관이 되어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고, 늘씬한 키와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의 외동딸 아리오나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벌써 시인으로 등단한 내몽골 가난한 농촌 출신 숨베르 씨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 그와 함께 에리옌의 기차역에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막내 아들 테니게르는 친절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전형적인 부잣집 도령으로 세상에 아쉬운 것 없이 자란 티가 벅벅 나서 독자로 하여금 걱정이 들게도 만들지만 다행히 끝까지 무탈하게 배역을 마친다. 이렇게 잘 나가는 바양달라이는 작품이 시작할 때쯤엔 사업 운이 대낮에 뜬 별보다 많지 않아 하는 일마다 본전까지 다 거덜을 내는데다가, 유력인사와 마작에 맛을 들여 날마다 마작 판인데 거기서도 하는 족족 빈털터리가 된다. 그건 그거고 이 정도면 잘 나갔을 때 에리옌으로 처들어온 형네 식구들 좀 건사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조카 둘에게 일자리 하나 알선을 해준 적이 없으니 알 만하시지? 나중에 어떻게 될 팔자인지? 그려, 지금 생각하시는 것이 맞아.

  바양달라이의 형 나산달라이는 에리옌에 와서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그게 쉽나, 이때 아우가 형네 식구를 위해 해준 단 하나의 일이 형 나산달라이를 작은 호텔의 수위로 취직시켜준 거였다. 큰아들 만라이는 나이만 먹고 몸이 약해서 따로 하는 일 없이 늙은 아버지와 팔팔한 동생이 벌어온 돈으로 허위허식하면서 그래도 꼴에 배꼽 아래 꼬다리 달린 거 있다고 목하 열애중인데, 상대는 같은 나이만 허쇼 출신의 경박하고, 배운 거 없고, 사납고, 몸 헤프고, 놀기 좋아하고, 노인 공경하기는커녕 즐거이 쌍욕하는 걸 취미생활로 알고, 범죄에 관한 개념이 없어서 도저히 선량한 나산달라이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올라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연애는 급격하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건 여기서 못 알려드리지. 둘째 철멍은 작품에 제일 먼저 소개되는 인물로 180cm가 넘는 장신이 신체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공부도 잘 해 중학교까지 졸업한 다음에 에리옌으로 왔는데 꿈이 있으니 돈을 벌어 그걸로 검정고시를 패스해 대학을 졸업한 다음 마이클 조던 같은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야말로 꿈 같은 꿈이었다. 매사 반듯한 청년이지만 사람이 반듯하다고 앞길까지 반듯해지면 그건 사람 사는 일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지구상에 반듯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도 없게?

  철멍은 작은 아버지가 취직자리도 하나 알아봐주지 않아 삼륜거, 바퀴 세 개 달린 자전거 운송수단을 운전하는 일을 한다. 철멍은 도시에서 이것 말고 다른 돈벌이를 도무지 구할 수가 없던 거였다. 하고 싶은 거야 자기도 거간꾼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것도 맨손 하나 가지고는 뛰어들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용 하나를 보고 동업을 제의할 만큼 호락호락한 시장도 아니었고. 철멍이 기차역에서 도착 열차를 기다리다가 때마침 열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에리옌에 도착한 사촌 여동생 아리오나, 그리고 그의 약혼자, 창백한 지식인이자 시인인 숨베르를 발견하며 이 황금, 황금도 아니고 그냥 금전만능주의의 복마전 에리옌에서의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  몽골족이 쓴 작품이라 특별한 관심이 있어 예의 주시한 책이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 우리는 이미 채만식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탁류>가 있지 않은가. 채만식의 반, 아니다, 반의 반에라도 미치기만 했으면 즐겁게 읽었다고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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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몽골 소설이군요. 이름, 지명이 어색한 거 빼곤 역시나 사람 사는 이야기네요 ㅎ 포도알 이름이 넘 귀엽습니다 ㅎㅎ
근데 큰 재미를 못 느끼신 거 같은데 별4개를 주셨네요.

Falstaff 2023-03-16 14:09   좋아요 2 | URL
옙. 분명히 네 개는 많고, 그렇다고 세 개를 주자니 좀 박한 거 같고, 하다가, 요즘에 너무 늦게 익힌 처세술, 좋은 게 좋다고 걍 네 개 주고 말았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세 개 반도 좀 후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몽골 소설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ㅎㅎㅎ

잠자냥 2023-03-16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 이 책 출간 당시 몽골 작품이라 관심이 갔는데 어디선가 계몽적이다, 우리나라 1920년대 농촌소설 보는 거 같다는 평을 읽고 일단 보류했거든요. 골드문트 님 리뷰 읽으니 역시 그냥 넘기기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3-16 14:13   좋아요 2 | URL
아휴, 저도 기대가 컸답니다. 게다가 작년 8월 초하루, 백수가 무려 내돈내산 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누아르 경향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만 1920년대는 아니고요, 조금 더 써서 70년대, 그니깐 유신 시절 대중소설 정도로 보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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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읽은 옌롄커는 <풍아송 風雅頌>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번역 소개한 작품은 2008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단다. 이 책으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옌롄커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작가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소설의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금한다는 5금禁의 영광을 안았으니 이 아니 아이러니인가. <인민을….>이 5금을 당한 2005년 8월, 그의 서재에서는 또 한 편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의 초고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리고 11월에 책의 초판본에 실릴 “작가의 말”을 쓰지만 이 작품 역시 당국에 의하여 5금의 계관을 쓰게 된다. 판매뿐만 아니라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까지 작품에 대한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대하여 “5금의 영광”이니 “5금의 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금지를 결정한 단체, 옌롄커의 경우엔 정부일 텐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신이나 5공화국 정부같이 지독한 규제와 감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집체적, 전체적 집단일 경우라면, 어떠한 형태가 됐든지 간에 현재 자행되고 있는 통제와 금지의 영역에 한 발을 걸쳐놓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이나 5공, 그리고 현재 또는 최근의 중국 정부는, 작가는 별 생각 없이 문학적 함의로 풍요로운 글을 쓴 것을, 담당하는 감독관이 읽어보고 괜히 자기 또는 자기들의 발이 저리거나, 자라 보고 놀란 눈알에 솥뚜껑이 보였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로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급하게 금지의 딱지, 라고 생각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독자로 하여금 금지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는 일이 많았다는 거다. <딩씨 마을의 꿈>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 작품을 읽고 깜짝 놀라 5금을 때린 감독관은 두 해 전에 옌롄커가 쓴 <즐거움受活>, 우리나라엔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을 틀림없이 읽어보지 않은, 비전문가이거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알아서 긴 속물 잡놈이었을 확률이 높다.

  <레닌의 키스>는 버러우 산맥의 품 속에 있는 작은 서우훠 마을이라는 유토피아 적 장소를 기초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 말 그대로 서우훠, 受活, 즐거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네의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장애인이다. 장애 대신 각기 특별한 재주 한 가지씩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딩씨 마을의 꿈>에서도 얼토당토않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딩씨촌, 한자어로 쓰면 정장(丁莊)으로 고무래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 딩씨촌에 있는 딩좡 초등학교가 바로 유토피아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이스라엘 삼국지 가운데 창세기. 형제들에게 밉보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곳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술과 떡을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 관원장이 출소해 뒤숭숭해 하는 파라오의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해몽하게 만들어주는데, 옌롄커는 그들의 꾼 꿈의 네 번의 꿈의 내용으로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제1권을 구성했다. 책의 본문을 다 읽은 후에 다시 1권을 꿈 네 편을 읽으면, 45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장편소설이 이 네 편의 꿈 이야기와 해몽처럼 풀어져 나갔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해몽인지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어봐야 한다. <딩씨…> 읽기 전에 될 수 있으면 창세기를, 그것도 귀찮으면 요셉의 이야기만 발췌되어 있는 위키피디아라도 검색한 후에 읽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초장부터 사방이 피투성이다. 잔혹하다고? 그건 아니고, 딩씨 마을로 가는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마을 사람들이 피를 팔아 닦은 시멘트 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관리들이 딩씨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닦은 길로 생각했건만, 알고 보면 <허삼관 매혈기>처럼 주민들이 각자 피를 팔아서, 어려운 말로 하자면 매혈賣血을 해 번 돈 가운데 조금씩 갹출해서 도로를 닦았다는 뜻이다. 중국의 행정단위가 촌-향-현-성 뭐 이런 식으로 되는데, 전작 <레닌의 키스>에선 해방 조국이 국민들에게 쇠, 철물을 만들어 바치라는 강력한 요구를 자행한 바 있는 반면에 <딩씨…>에선 국민들의 진짜 피를, 약하지 않은 가격으로 사겠으니, 어려운 얘기로 매혈買血 하겠으니 피 파는(賣血) 일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관리들을 닦달했던 모양이다. 혹은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완고한 딩씨 마을 사람들이 어딜 생명 같은 피를 팔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현의 교육국장은 딩씨 마을을 세 번째 방문한 자리에서 촌장 리싼런을 해고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대표적 빈농들의 마을 샹양촌 견학을 시킨다.

  딩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궁상벽지의 가난한 동네 샹양촌에 들어서보니 집마다 희디 흰 타일로 벽을 해 붙인 붉은 벽돌의 이층집에, 번드르르한 마을의 포장도로에다, 입성까지 자신들과 달리 쪽 빼 입은 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됐느냐고 물어보니, 아줌마나 아저씨나 하시는 말씀이 피를 팔아서 그렇다고, 옷소매를 쓱 걷어 깨알 같이 주사바늘 자국이 난 팔뚝을 보여주는 거였다. 이 다음날부터 딩씨 마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만 16세 이상 50세까지 신체 건강한 남녀들이 홰나무 아래 임시로 친 텐트 안이나 밖에 누워 피를 뽑기 시작했고, 집마다 살림살이에 윤택이 나고, 너도나도 맛난 돼지고기 가브리살을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쪄서 먹기 시작했던 거였다. 한 번 이리 여유 있는 생활을 맛보자 이젠 그만둘 수 없어 마을사람 팔뚝마다 샹양촌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깨 꽃이 피었지만 이젠 관에 의한 매혈소는 철수해 다른 고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딱 이럴 때, 글 깨나 읽어 식자 연하지만 신식공부를 한 건 아니어서 학교에서 종치는 일을 하던 딩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큰아들 딩후이(이름이 빛날 휘輝)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하더니 현으로 달려가 보나마나 누가 쓴 적 있는 중고 주삿바늘과 주사기, 알코올 솜, 피 담는 병 등을 사와 사설 “딩가 채혈소”를 차려 비닐봉지 하나 5백씨씨에 시세보다 높은 80위안으로 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딩후이가 바보는 아니라서 80위안은 분명 좋은 값이기는 한데, 봉지를 살살 돌려가며 피를 채우면 7백씨씨도, 악착같이 채우면 8백씨씨도 무난히 들어간다는 걸 당연히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뭐든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싸게 팔거나, 싸게 사거나, 원가를 낮추는 거다. 세 번째 것을 위해 딩후이는 세 명을 찌른 다음에야 주삿바늘을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닦았는데, 문제는 아뿔싸, 이게 위에서 얘기했듯 (하지만 책에선 기척도 나지 않는다만) 시내 병원에서 이미 사용한 내력이 있는 주사기요 주삿바늘이었다는 것. 어쨌거나 딩후이는 이 일로 해서 많은 돈을 벌어 어여쁜 아가씨를 골라 장가 들어 아들 샤오창(小强)과 딸 잉즈(英子)를 낳았다. 이럭저럭 흐른 세월이 십 년. 딩씨 마을엔 한 명 두 명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이게 딩씨촌만 그런 것도 아니라 향 내 거의 모든 촌도 마찬가지, 현 내 거의 모든 현도 마찬가지, 성 내 모든 현도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성도, 현도, 향도의 시내에 거주하는 도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별로 없었던 바, 어느덧 이 열병의 정식 명칭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이며 짧게 “에이즈”라고 부르는 병인 것을 알았다. 걸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천형. 어쩌면 인류가 이 병으로 해서 멸종을 당할 수도 있다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그리하여 누군가 딩후이의 집에 독물인지 독약인지 아니면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는 방귀를 뀌었는지, 집에서 기르는 닭이 죽어나가고, 개가 죽어나가고, 돼지가 죽어나가더니, 급기야 현명하고 선한 딩씨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유일한 혈손 딩샤오창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거품을 물고 죽어버린다. 누군가가 복수를 했다고 짐작만 할 뿐. 그래서 학교 담장 아래 묻힌 딩샤오창, 이 아이의 유령이 작품의 화자가 된다.

  집집마다 에이즈 환자가 있으니 전염확률도 높고 주민들의 불안감도 높아져 가고, 길가엔 개새끼 한 마리,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을뿐더러 한 시절 피 파는 걸 거부하다가 촌장 자리에서 쫓겨난 리싼런까지 열병에 감염되어버리자, 딩수이양은 이 병을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아들 딩후이의 잘못을 보충할 겸하여, 에이즈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교사들이 모두 도망가 빈 학교가 된 딩좡초등학교로 에이즈 환자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레닌의 키스>에서 나오는 바러우 산맥의 서우훠 마을처럼, <풍아송>에서 양커가 찾던 곳처럼 유토피아가 열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저 먼 시절, 3천년 전 애굽의 파라오가 꾼 꿈의 첫 번째 장면, “강에서 올라온 아름답고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갈대밭에서 풀을 뜯는 모습”이 피를 팔아 이룬 함포고복의 시절이었다면 이제 독자의 눈에는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가 이 살진 암소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장면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이 기근의 시절, 순간의 유토피아, 그게 얼마나, 어떻게 갈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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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14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 ㅎㅎ 내내 못읽은 책 리뷰만 보다가 읽은 책 리뷰를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요. ㅎㅎ

Falstaff 2023-03-14 18:42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습니까!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저도 읽은 책 나오면 더 반갑고 그래요!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첫 옌렌커도 이 책이었는데 옌렌커는 디스토피아 전문가 같아요… 그렇지만 저의 최애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최강 막장 마을스토리는 작렬지…(제가 시아버지 복상사…를 독후감에 써서인지 블로그 유입 검색어에 자꾸 시아버지의 육욕…이 연관되고 있습니다…)레닌의 키스도 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3-14 21: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저도 최고 검색어가 ˝형수 시동생 브래지어˝랍니다. ㅋㅋㅋㅋㅋ 웃지만 웃는 게 아니죠?
옌롄커가 괘씸한 건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시침 뚝 떼고 한 가운데에 유토피아를 슬쩍 흘린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래 못 가기는 하지만 말입죠. <레닌의 키스>가 딱 그짝입니다. 전 이이의 스토리가 과하게 드세서 읽을 때마다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럼에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1: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저 그래서 저 검색어 쳐봤게요 안 쳐봤게요? ㅋㅋㅋ네이버 갔다 여기 아니네 하고 다음에 가서 아, 알라딘 망할까 봐 피난처 두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하고 알라딘 망하면 여기서 리뷰봐아지 하고 이웃추가 하고 왔어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이고, 못 말리는 열반인 님. 그렇다고 정말 검색을 해보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렇고 알라딘이 암만해도 책방이라서 서재가 종종 위태위태 하잖아요. 예전에 올린 글이 한 순간에 싹 날라가버린 적도 있고 해서 보험을 들어놓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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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여선의 <레가토>는 생각지도 않게, 나를 쓸쓸하게 했다. 그리고 33년 동안 틈만 나면 도리질을 하게했던 그것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채근했다. 주인공 조준환의 말대로 그 "개 같고, 씨발 좆같아"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의 골방을. 그렇구나. 그때 그들처럼 나도 청춘이었구나. 눈부시기는커녕 누군가가 세차게 오줌을 갈긴 개골창에 빠져 흠뻑 젖어있었던 불멸의 황금시대. 어느 때보다도 엿같았던 황금시대 말이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어느 종교에 의해 파문당한 듯한 고립감. 그것보다 더 크게 심장을 저미는 무감각의 통증. 나보다 먼저 화장장의 화염으로 불태워버리고 만 33년 전의 수치스러움. 결코 추억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인공 박인하가 눈에 밟혀서.
 그들은 세월이 흘러 야당 국회의원이었다가 물을 갈아타 빛나는 여당의 중견 의원이 됐고, 피라미드 업체의 더블 다이아몬드가 됐으며 조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임원으로 휴일마다 라운딩을 했고, 대학에서 학과장 쯤의 타이틀을 후광처럼 둘렀는데, 삼십 여년 전의 원죄를 홀로 뒤집어 쓴 것 같은 나는 아직까지 그들을 즐거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임에 좀 나오라는 권유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콧방귀를 뿜어댄다. 다시 조준환의 말대로 "개같고 씨발 좆같은" 눈부셨던 때의 좌표를 조금씩 망각해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고집은 나를 외롭게 한다. 볼셰비키는 무너졌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선 인민들이 굻어죽어간다. 좌표는 바뀌는 것이지 버리는 게 아니다, 개새끼들아. <레가토>의 주둥이만 산 등장인물 새끼들아. 작가 권여선, 너를 포함해서.
 
 다시 책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고난 다음 숙고해본다.
 이거? 속이 빤하게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삶을 걸어간다기 보다, 작가의 구성에 따라 이미 정해진 길을 따르는 게 눈에 훤하다. 읽는 동안은 몰랐다. 내 시절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날 몰두하게 해 그들이 또각또각 발자국을 찍어가는 포장도로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 내 또래의 독자들은 재미나게 읽을 수 있으리라.
 후배들은 이것들로 인해 천하에 못나고 기만적인 선배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 넣고 환상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난..... 더 이상 이런 글은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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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2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십 년 전에 이 소설이 골드문트님의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 시절을 떠오르게 했나보네요. 글에서 분노와 절망이 느껴집니다.😥

Falstaff 2023-03-12 18:18   좋아요 2 | URL
아오, 아오.... 이러면 안 되는데... 십 년 전에 쓴, 뭐 독후감이랄 것도 없고 그냥 책을 읽고 끼적인 건데요, 왜 오늘 올렸을꼬... 아휴 쐬주 두 병 까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지금 읽어보니까. 이걸 왜 올렸을꼬.... 왜 올렸을꼬.... 아 씨... 뭐 그렇습니다. ㅠㅠ

stella.K 2023-03-12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주인공 땜에 잠을 못 주무시다닛!
글은 이리 쓰셔도 골드님의 소설 사랑이 느껴집니다.^^

Falstaff 2023-03-12 21:35   좋아요 0 | URL
에이, 그 때, 그러니까 한 십 년 전 쯤에 그랬다는 거지요 뭐. ㅋㅋ

다락방 2023-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하는 작가에 권여선을 올리진 않는데요, 그런데 권여선 소설 읽으면 특히 더 소주 땡기지 않나요? 아마 골드문트 님 그래서 이 리뷰 올리신 거 아닐까요? 소주 두 병 때문에…..

Falstaff 2023-03-12 21:36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제 불행의 8할은 알코올 의존 때문인 거 같습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23-03-12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술을 좋아하는 작가 그래서 인지 안녕 주정뱅이는 읽을만 했었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생각도 안나는데 씁쓸한 내용이었군요! 술 하니 생각이 나네요!

Falstaff 2023-03-12 21:37   좋아요 2 | URL
권여선이 술을 즐기는 지는 몰랐는데 정말 그렇답니까? ㅋㅋㅋㅋ 은근히 반가운 걸요!

coolcat329 2023-03-12 22: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권여선 작가 술 세더라구요. <안녕 주정뱅이> 저도 좋았어요.

Falstaff 2023-03-12 22:14   좋아요 1 | URL
으앗, 별 걸 다 아시네요. ㅋㅋㅋㅋ
한 번 초대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술값이 만만치 않아서리 ㅋㅋㅋㅋ
자리 한 번 마련해볼까요? ㅋㅋㅋㅋ 농담입니다. ㅋㅋㅋㅋㅋ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조셉 콘래드 지음, 원유경 옮김 / 이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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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프 콘래드의 데뷔작. 콘래드가 1857년생이니까 서른여덟 살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 나이로 39세에 데뷔하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잉글랜드 소설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으니 영국인들이 이이의 작품에 얼마나 존경을 바치는지 알 만하다. 물론 콘래드의 전성기는 1900년을 넘기면서 시작하지만 데뷔작 역시 읽는 재미 만큼은 전성기 시절의 작품과 비교해도 별로 꿇리지 않을 듯하다. 그의 바이오그래피는 다른 작품의 독후감에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어서 곧바로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로 들어가자.

  먼저 지도를 보자.



  보르네오 섬의 중심에서 한시 반 방향에 위대한 판타이강이 바다에 접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당시 지명으로 삼비르이고, 강변에 꽤 큰 규모의 덜 지은 일종의 펜션 건물이 있었으니 당시 식민지배를 하던 네덜란드 군인이 이 건물을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라고 불렀다 한다. 보르네오에서 오른쪽 상단에 있는 큰 섬(지도에선 꼬리밖에 안 보이지만)이 필리핀 민다나오 섬이고 사이에 작은 섬 세개가 있다. 이중에 타원으로 동그라미 친 두번째 섬이 ‘술루’.

  당시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를 오가며 활발하게 향신료나 고무나무 수액, 구타페르카, 진주조개, 식용 새집, 밀랍 등의 무역이 성행했던 반면 치안이 상당히 불안해서 곳곳에 해적들이 출몰했다고 하는데, 작품 속의 ‘3일간의 사건’이 벌어지기 이십여 년 전에 말레이 족으로 구성한 가장 크고 강력한 해적이 바로 이 술루 섬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한다. 말레이 어로 지도자, 즉 큰 지역의 영주부터 한 부족의 족장이나 추장까지 몽땅 ‘라자’라고 했던 것처럼 해적단의 두목 역시 라자라고 부르며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의 딸이. 추장의 딸이 열네 살 때까지, 아버지 라자가 이끄는 해적선에 올라 해적질에 작지 않은 기여를 했으니, 살 껍데기 색깔 하얀 인종들과 싸움이 붙어 죽기 살기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했는데, 이 소녀도 악착같이 백인들을 상대하다가 싸움에 질 것이 확실해지니까, 용감한 동족들처럼 백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느니 피 흘리는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차라리 상어 밥이 되겠다고 몸을 던지지도 못할 정도로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어, 다른 백인도 아니고 일명 라자-라우트, 즉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는 톰 링가드 선장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소녀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에 따르면, 선장이 말레이 족의 배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염과 연기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고 인식했으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미지의 끔찍한 환경에서 시작할 노예 생활 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일찍이 술라 섬은 물론이고 근동 바닷가 섬에서 열네 살, 결혼 적령기의 처녀 가운데 자신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여인은 아무도 없으니 노예라고 해도 바다의 왕, 영웅 중의 영웅인 링가드 선장의 몸종 정도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내 자리면 더 좋고, 이런 심정이었다.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이 바랄 수 있는 남아있는 소망이었을 수도 있다.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반면에 링가드 선장은 열네 살 먹은 소녀가 감히 총칼을 들고 자신들과 싸웠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시체더미에서 발견한 소녀, 자신들의 손에 동족과 가족 모두 몰살당한 불쌍한 아이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수양딸을 삼아 자바 섬의 수라바야에 있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 유럽식 교육을 받게 한다. 이 링가드 선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금과 은이 무한정 쏟아지는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보다도 현금이 많이 흐르던 향신료 지대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을 주도하던 인물로 당시 화폐로 재산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가장 부유한” 운송업자였다. 그리하여 선장은 소녀를 잘 교육시켜 백인과 결혼해 유럽에서 살 수 있게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삶을 다 마친 후에 모든 재산을 소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열네 살 먹은 소녀는 세마랑 수녀원 학교의 폐쇄된 속박을 미리 알았다면 말레이 족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휘어진 환도를 꺼내 스스로의 목을 그어버렸을 거란 걸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교육이고 종교고, 언어는 즉각 익혔지만 나머지는 똑똑한 머리로 그저 흉내만 낼 뿐, 하나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토종 말레이 여자였다는 것을 링가드 선장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수양딸로 정하자마자 함께 지내지 않고 학교로 보내버린 것을.

  선장은 자신만만했다. 수양딸이 비록 피부가 까무잡잡한 유색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무한정한 재산이 언젠가는 아이에게 상속될 것을 아는 남자라면 그가 누가 됐든지 간에 결혼을 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니. 그래 좀 괜찮게 생기고, 이왕이면 좀 똑똑한 백인을 물색하고 다니다가 자바 섬의 보고르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로 말레이 지역에서 가장 큰 창고업, 물류업, 그리고 돈장사를 하던 늙은 후디크 사장의 종업원 카스파 올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유럽 본토도 아니고 기껏 자바 섬에 있는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이란 하찮은 처지라도 기꺼이 사위로 선택할 만큼 올마이어의 외모가 출중했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선장은 올마이어를 남아시아 최고의 부자인 자신의 화물 관리인 겸 선장의 서기 겸 비서로 스카우트하고, 며칠 뜸을 들인 다음 자신의 수양딸과의 혼사를 꺼낸다. “지금쯤 다 큰 여인이 되었을 거야.” 그러자 곧바로 올마이어의 머리 속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 네덜란드가 있는 유럽, 이 가운데서도 자기가 살게 될 암스테르담에 지어진 환상 속의 저택이 그려져 잠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올리브 색의 피부를 가진 말레이 족 여성과 결혼할 생각을 하니 순식간에 갑갑해졌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틀림없이 결혼을 한 후에도 행운의 별자리는 자기를 배반하지 않아서 고맙게도 신부가 얼른 죽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말레이 여성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가볍게 극복할 수 있었다. 올마이어는 기꺼이 오케이, 응답했다.

  이리하여 바타비아, 지금 지명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리는데, ① 신부 입장에서 말하자면, 선장의 요구대로 그를 ‘아버지’라고 칭했지만 교육을 받은 후에 그의 노예 아니면 아내이자 조언자이자 안내자가 되리라 짐작을 해왔으나 영웅의 아내가 되는 꿈은 밟힌 쪽박처럼 깨지고 부루퉁한 백인 남자와 혐오스런 유럽풍 신부 옷을 입고 혼인이라는 것을 하게 됐으며 ② 신랑 입장에서 말하자면 혼인 서약을 하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온통, 조만간, 가까운 시일 안에 예쁜 말레이 여자를 어떻게 소리소문 없이 제거할 수 있는지를 궁리하느라 바빴다. 초장부터 이렇게 시작한 혼인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당시엔 조금 더 강한 율법으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렸다는 이유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신랑 올마이어 군의 희망이 이루어지거나 이혼이란 행운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젊은 부부는 플레시 호에다 집을 지을 목재와 가구를 싣고 보르네오 섬의 판타이 강에 집과 커다란 창고 건물을 지어 의붓아버지이자 장인 링가드 선장의 무역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지만 여태까지 읽으신 것처럼, 사랑과 행복은 조금도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다.


​  이들은 2년 후에 딸 니나를 낳는다.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할 건 다 하는 법이라 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어여쁜 딸을 낳긴 했는데, 둘 다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혼혈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딸이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 댓 살 정도 되자 또 링가드 선장이 나타나 이제 수양딸의 신세는 보나마나 끝난 거 같으니 대신 손녀라도 잘 키워 백인과 결혼시켜 유럽에서 살게 해야 하겠다고 니나를 억지로 빼앗다시피 해 싱가포르에 있는, 저 위에서 말한 창고업과 돈장사의 명인 후디크 씨의 관리인인 빈크 씨 댁에 맡겨 가정교육을 부탁한다. 무려 십년 동안.

  링가드 선장. 이 늙은이가 문제다. 딸을 결혼시키자마자 사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위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스스로 찾아낸 숨은 강을 따라 섬의 내륙으로 올라가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더 큰 부자가 되려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재산을 투자할 수 밖에 없으니, 독자가 보기에도 그건 투자가 아닌 명백한 투기 행위이고, 내가 알기로 인도네시아 근방에 다이아몬드가 대규모로 묻혀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많던 재산을 홀랑 말아먹고 애먼 올마니어 씨만 애먼 여인,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으로 열네 살에 직접 무기를 들고 백인들과 맞서 싸웠던 여인이 뒤집어 엎고, 깽판치고, 가구들 뽀개 난방용으로 불사르고, 영어도 할 줄 알지만 말레이 어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걸 보고 살게 된 거다.

  자신 스스로가 벌어둔 모든 재산은 영국의 보르네오 주식회사 설립 소식을 듣자마자 앞으로 영국인들이 보르네오 섬에 많이 출장올 것으로 확신해 링가드 앤드 컴퍼니 제방 근처에 당시 근동에서 가장 큰 펜션을 짓는데 다 쏟아 부어, 건물을 짓는 중에 영국이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도 포기, 짓기도 전에 폐가가 되어버려 나중엔 결국 “올마이어의 어리석음”이란 옥호를 단 거고.

  이 때가, 링가드 씨에 의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진 니나가 10년 세월을 치욕과 따돌림 속에서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이 지나 이젠 완전히 여인이 된 상태다. 우리의 올마이어 씨의 소망 역시, 자기는 쥐뿔도 없으면서 섬의 내륙에 황금과 다이아몬드가 넘친다는 링가드 선장이면서 장인이기도 한 모험가의 장담을 믿고 마지막 도전을 하기 위해 자바 섬 옆의 발리에 터전을 잡은 왕가의 계승자 다인과, 삼비르의 족장 다캄바, 이렇게 두 명의 말레이 인과 힘을 합해 겁도 없이 불법적인 일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생전 처음 하게 되는데, 어떤 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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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1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저 잠깐만요 골드문트폴스타프님. 여기서 끝 아니죠?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안 알랴줌 하고 그 뒤에 아무 말도 없다니….. 🥲

Falstaff 2023-03-11 07:32   좋아요 0 | URL
아, 그럼요. 이제 니나가 하이틴, 당시 시각으로 꽉찬 결혼 적령기의 아름다운 아가씨인데 어떻게 로맨스가 없겠습니까. 비록 반 유색인 반 백인의 혼혈이지만요. 그럼 누구하고 연애를 하게 될까.... 이것도 안 알려드림.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11 07:34   좋아요 0 | URL
책 말고요 골드문트님 글도 뭔가 총평이라던가 더 있을거 같은데.. @.@

Falstaff 2023-03-11 07:38   좋아요 3 | URL
아녀요, 없습니다.
ㅎㅎㅎ 라임이 말이죠, ˝안 알려줌.˝ 하고 끝날 경우엔 뒤에 뭐가 첨가되면 재미 없거든요. ^^

Falstaff 2023-03-11 07:40   좋아요 2 | URL
굳이 보탠다면.... 조지프 콘래드가 아니었다면 별 다섯인데, 콘래드라서 다섯 개를 주지 못했다, 정도. 표지가 넘 하이틴 소설 같다. 그래서 관심을 좀 덜 받을 거 같다, 이 수준입니다.

건수하 2023-03-11 07: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다시 올라가보니 표지가…독특(?)하네요 :)

그레이스 2023-03-11 08:55   좋아요 1 | URL
오늘은 두분 대화가 더 재밌어요^^
안 알려줌 시리즈군요 ㅋㅋ
미리 위에서 예고하시면 안될까요?

Falstaff 2023-03-11 11: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안 알려줌, 이거 미리 알려드리면 별 재미 없답니다. ^^

coolcat329 2023-03-11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중고가 엄청 많이 나와있어서 아직 여유부리며 사진 않고 있지만, 조만간 사야겠습니다. 초기작이지만 역시 훌륭하군요. 저는 안 알려줌! 이 말 나오면 더 기대하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Falstaff 2023-03-11 14:56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제나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콘래드는 처음부터 콘래드였더군요. 한 번 읽어볼 만합니다. ^^
 
세계는 계속된다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박현주 옮김 / 알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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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중산층 변호사 유대인 아버지 크러스너호르커이 죄르지와 사회보장관리사인 어머니 줄리어 펄린커스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1973년부터 78년까지 두 곳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978년부터 83년까지 학교를 외트뵈스 롤란드 대학으로 옮겨 헝가리어와 문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았다. 졸업 논문은 헝가리 문학의 거장 마라이 산도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두었다는 등의 사생활은 그냥 모른 척하겠다. 2015년까지 영어로 번역 출판한 작품 가운데 ‘작품명과 상관없이’ 작가와 역자에게 만5천 파운드를 주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마지막 순서로 받았고, 2016년부터 ‘특정 작품’의 작가와 역자에게 상을 주었는데 첫 해에 받은 인물과 작품이 한강 <채식주의자>였다.

근데 사생활에서 이이의 특징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중에서 페스트 지역의 필리센틀라슬로의 언덕에서 은둔하고 있기는 한데, 일년의 절반쯤 세계 각지에서 머물면서 글을 쓴다고 한다. 이걸 왜 굳이 말하는가 하면, 《세계는 계속된다》 가운데 특히 두번째 파트에 전세계 많은 곳을 무대로 하는 단편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오래 묵었다. 중국, 몽고, 일본에서만. 한국에 오면 전쟁 나서 죽을까 겁먹었나 보다. 뭐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이이가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죽는 거하고는 얘기가 다르거든.

본문만 470쪽 가까이 되는 책이고, 작가 이름 하나만 보고 책을 고르는 습관이 있기도 해, 유명세를 타게 한 <사탄 탱고>나 <저항의 멜랑콜리>처럼 장편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 읽었는데 아주 짧은 초단편부터 노벨라 정도 분량까지 스물 한 작품을 싣고 있다.

모두 3부로 나누어 각 부의 제목을 “말하다”, “이야기하다” 그리고 “작별을 고하다”로 지었다. ‘말하다’와 ‘이야기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 가를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면 될지 모르겠다.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이다. 또는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이제 세계는 누구도 존재할 수도 없고 남을 가치도 없고 참기 어렵고 차갑고 슬프며 황량하고 치명적인 무게를 지녀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곳이다. 이것을 첫 작품 <서 있는 헤맴>에서 말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가라든지 왼쪽으로 가라든지 같은 말이다. 중요한 건 현재 위치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일 뿐이니까. 왼쪽, 오른쪽 이야기는 평면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니까 2차원적 세계에서 한 지점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라는 건데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앞으로 나가면 “온 세상 젊은이를 다 만나고” 다시 원점으로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 있기는 있는데 절망스럽다. 3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결론이 같다면 남은 것은 아래쪽 또는 위쪽 방향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가는 일. 두번째 장 “이야기하다”에서는 두 경우가 다 등장한다. 대기권을 넘어 저 멀고 먼 암흑의 지구 궤도를 돌아본 첫번째 인류,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을 탐색하는 정신병원 속의 나가 쓴 <저 가가린>. 가가린은 1961년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 위에 뚫린 세 개의 선창을 통해 지구를 보고는 “지평선이 보인다, 아주 아름다운 섬광이 비친다. … 아주 아름답다.”라고 송신한다. 그는 물론 나중에 지상에 착륙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이때 그만 인간은 봐서는 안 될 것, 안 되는 장면, 애초에 볼 수 없게 디자인된 진실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건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것. 나이 들고 정신이 깜박거려 오늘 낼 하는 늙은이들만 모인 정신병원에서 가가린에 몰두한 ‘나’는 6층의 창가에서 가가린처럼 위를 향해 도움닫기를 하지만 결국 땅바닥에 메다 꽂힐 것임을 알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가린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일 뿐이라는 것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1985년에 장편 데뷔작 <사탄 탱고>를, 89년에 두번째 작품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출간했다. 물론 84년에 단편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이 두 장편소설이었다. 이것 말고 《서왕모의 강림》과 《라스트 울프》도 우리말로 번역 출간했으나 아무래도 두 작품만 하지 못했다. 이이의 특기라고하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세계는 계속된다》에서도 지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갖는 음울한 분위기와 집단 최면 또는 집단 우울증적 혼돈만큼 깊이 있는 공감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생각에 동의하실 필요는 없다. 내가 읽기로 그렇다는 얘기에 불과하니까. 대신 단편집 특유의 읽을 거리, 다양한 관점과 이야기의 만찬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하루 이틀 안에 단편집을 후다닥 읽어 치우는 내 책 읽는 습관 때문에 단편집을 읽을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기 위하여”는 진이 빠진다는 등의 것이 있는데, 좋은 작품이 많이 실린 단편집이 장편소설보다 못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한 이야기 한 번 더 하는 듯한 기분은 단편집을 짧은 시간 안에 읽어 치우는 독자에겐 눈이 좀 침침해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단편집을 쓴 작가는 나 때문에 조금 손해를 보고 있는 것도 맞다.

헝가리 작가들 가운데 케르테스 임레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긴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거의 모든 작품들도 무지하게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이의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헝가리 문자로 쓴 건 콤마만 찍으면 얼마든지 문장을 길게 늘일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적이 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의미였는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첫째는 우리말과 일본어는 문장을 마치는 종결어미가 거의 비슷하다. 주로 “이다”, “하다.”의 현재형이나 과거형. 그러나 유럽인의 언어는 다양한 발음으로 문장이 끝나, 비슷한 발음으로 끝나는 구절을 묶은 것 가운데 일부를 흔히 “시”의 라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문장 말고 문장 종결부의 다양함 때문에 쉼표만 찍으면 얼마든지 길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말의 경우에 긴 문장은 절clause과 절을 잇기 위하여 역시 얼마 되지 않는 엇비슷한 접속사를 써야 하고, 이 접속사를 많이 쓰는 건 문장에 조종을 울리는 죽음의 길이라고들 한다. 여태 단 한 번도 긴 문장을 권하는 글이나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이면 백 다 짧은 문장을 쓰라고 권하기만 했지.

두번째는, 길고 길게 문장을 쓰는 행위, 심지어 한 문장이 완전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침표를 쓰지 않고 쉼표를 찍고 다른 문장을 시작하는 일을 작가가 굳이 왜 했을까? 나는 심지어 전 작품을 단 한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이 말이 심하다면, 권하는 독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적어도 마침표가 나올 때까지 한 번에 읽어 달라는 주장. 끊어서 읽으면 작가가 전하고 싶은 글의 의미가 바래거나 전도될 수 있다는 작가적 조바심이 마침표 대신에 수 없이 많은 쉼표를 찍게 만들었을 수 있다. 나는 이 두 번째 의문에 한 표.

결론. 좋은 단편집이 내게 걸려 좀 박하게 평을 받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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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9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3부작이 생각나네요.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
굉장한 통찰 같습니다.
이 사람 작품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표지에서 선택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표지가 꽤 마음에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전 전작주의를 못하겠더라구요.
읽다가 비슷한 패턴이 보이면 좀 시들해지잖아요.
골드님도 이이의 책은 그만 읽으셔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

Falstaff 2023-03-09 21:50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책 읽으시려면 아무쪼록 <사탄 탱고> 부터 시작하시는 걸 권합니다.
근데 애초에 각오를 좀 하시고 읽는 게 좋을 듯하네요. ㅋㅋㅋㅋ
아, 말과 이야기에 관한 거, 좀 근사했습니까? ㅎㅎㅎ 으쓱으쓱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