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마이어의 어리석음
조셉 콘래드 지음, 원유경 옮김 / 이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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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프 콘래드의 데뷔작. 콘래드가 1857년생이니까 서른여덟 살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 나이로 39세에 데뷔하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잉글랜드 소설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으니 영국인들이 이이의 작품에 얼마나 존경을 바치는지 알 만하다. 물론 콘래드의 전성기는 1900년을 넘기면서 시작하지만 데뷔작 역시 읽는 재미 만큼은 전성기 시절의 작품과 비교해도 별로 꿇리지 않을 듯하다. 그의 바이오그래피는 다른 작품의 독후감에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어서 곧바로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로 들어가자.

  먼저 지도를 보자.



  보르네오 섬의 중심에서 한시 반 방향에 위대한 판타이강이 바다에 접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당시 지명으로 삼비르이고, 강변에 꽤 큰 규모의 덜 지은 일종의 펜션 건물이 있었으니 당시 식민지배를 하던 네덜란드 군인이 이 건물을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라고 불렀다 한다. 보르네오에서 오른쪽 상단에 있는 큰 섬(지도에선 꼬리밖에 안 보이지만)이 필리핀 민다나오 섬이고 사이에 작은 섬 세개가 있다. 이중에 타원으로 동그라미 친 두번째 섬이 ‘술루’.

  당시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를 오가며 활발하게 향신료나 고무나무 수액, 구타페르카, 진주조개, 식용 새집, 밀랍 등의 무역이 성행했던 반면 치안이 상당히 불안해서 곳곳에 해적들이 출몰했다고 하는데, 작품 속의 ‘3일간의 사건’이 벌어지기 이십여 년 전에 말레이 족으로 구성한 가장 크고 강력한 해적이 바로 이 술루 섬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한다. 말레이 어로 지도자, 즉 큰 지역의 영주부터 한 부족의 족장이나 추장까지 몽땅 ‘라자’라고 했던 것처럼 해적단의 두목 역시 라자라고 부르며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의 딸이. 추장의 딸이 열네 살 때까지, 아버지 라자가 이끄는 해적선에 올라 해적질에 작지 않은 기여를 했으니, 살 껍데기 색깔 하얀 인종들과 싸움이 붙어 죽기 살기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했는데, 이 소녀도 악착같이 백인들을 상대하다가 싸움에 질 것이 확실해지니까, 용감한 동족들처럼 백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느니 피 흘리는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차라리 상어 밥이 되겠다고 몸을 던지지도 못할 정도로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어, 다른 백인도 아니고 일명 라자-라우트, 즉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는 톰 링가드 선장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소녀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에 따르면, 선장이 말레이 족의 배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염과 연기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고 인식했으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미지의 끔찍한 환경에서 시작할 노예 생활 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일찍이 술라 섬은 물론이고 근동 바닷가 섬에서 열네 살, 결혼 적령기의 처녀 가운데 자신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여인은 아무도 없으니 노예라고 해도 바다의 왕, 영웅 중의 영웅인 링가드 선장의 몸종 정도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내 자리면 더 좋고, 이런 심정이었다.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이 바랄 수 있는 남아있는 소망이었을 수도 있다.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반면에 링가드 선장은 열네 살 먹은 소녀가 감히 총칼을 들고 자신들과 싸웠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시체더미에서 발견한 소녀, 자신들의 손에 동족과 가족 모두 몰살당한 불쌍한 아이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수양딸을 삼아 자바 섬의 수라바야에 있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 유럽식 교육을 받게 한다. 이 링가드 선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금과 은이 무한정 쏟아지는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보다도 현금이 많이 흐르던 향신료 지대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을 주도하던 인물로 당시 화폐로 재산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가장 부유한” 운송업자였다. 그리하여 선장은 소녀를 잘 교육시켜 백인과 결혼해 유럽에서 살 수 있게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삶을 다 마친 후에 모든 재산을 소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열네 살 먹은 소녀는 세마랑 수녀원 학교의 폐쇄된 속박을 미리 알았다면 말레이 족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휘어진 환도를 꺼내 스스로의 목을 그어버렸을 거란 걸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교육이고 종교고, 언어는 즉각 익혔지만 나머지는 똑똑한 머리로 그저 흉내만 낼 뿐, 하나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토종 말레이 여자였다는 것을 링가드 선장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수양딸로 정하자마자 함께 지내지 않고 학교로 보내버린 것을.

  선장은 자신만만했다. 수양딸이 비록 피부가 까무잡잡한 유색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무한정한 재산이 언젠가는 아이에게 상속될 것을 아는 남자라면 그가 누가 됐든지 간에 결혼을 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니. 그래 좀 괜찮게 생기고, 이왕이면 좀 똑똑한 백인을 물색하고 다니다가 자바 섬의 보고르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로 말레이 지역에서 가장 큰 창고업, 물류업, 그리고 돈장사를 하던 늙은 후디크 사장의 종업원 카스파 올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유럽 본토도 아니고 기껏 자바 섬에 있는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이란 하찮은 처지라도 기꺼이 사위로 선택할 만큼 올마이어의 외모가 출중했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선장은 올마이어를 남아시아 최고의 부자인 자신의 화물 관리인 겸 선장의 서기 겸 비서로 스카우트하고, 며칠 뜸을 들인 다음 자신의 수양딸과의 혼사를 꺼낸다. “지금쯤 다 큰 여인이 되었을 거야.” 그러자 곧바로 올마이어의 머리 속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 네덜란드가 있는 유럽, 이 가운데서도 자기가 살게 될 암스테르담에 지어진 환상 속의 저택이 그려져 잠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올리브 색의 피부를 가진 말레이 족 여성과 결혼할 생각을 하니 순식간에 갑갑해졌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틀림없이 결혼을 한 후에도 행운의 별자리는 자기를 배반하지 않아서 고맙게도 신부가 얼른 죽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말레이 여성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가볍게 극복할 수 있었다. 올마이어는 기꺼이 오케이, 응답했다.

  이리하여 바타비아, 지금 지명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리는데, ① 신부 입장에서 말하자면, 선장의 요구대로 그를 ‘아버지’라고 칭했지만 교육을 받은 후에 그의 노예 아니면 아내이자 조언자이자 안내자가 되리라 짐작을 해왔으나 영웅의 아내가 되는 꿈은 밟힌 쪽박처럼 깨지고 부루퉁한 백인 남자와 혐오스런 유럽풍 신부 옷을 입고 혼인이라는 것을 하게 됐으며 ② 신랑 입장에서 말하자면 혼인 서약을 하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온통, 조만간, 가까운 시일 안에 예쁜 말레이 여자를 어떻게 소리소문 없이 제거할 수 있는지를 궁리하느라 바빴다. 초장부터 이렇게 시작한 혼인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당시엔 조금 더 강한 율법으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렸다는 이유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신랑 올마이어 군의 희망이 이루어지거나 이혼이란 행운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젊은 부부는 플레시 호에다 집을 지을 목재와 가구를 싣고 보르네오 섬의 판타이 강에 집과 커다란 창고 건물을 지어 의붓아버지이자 장인 링가드 선장의 무역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지만 여태까지 읽으신 것처럼, 사랑과 행복은 조금도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다.


​  이들은 2년 후에 딸 니나를 낳는다.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할 건 다 하는 법이라 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어여쁜 딸을 낳긴 했는데, 둘 다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혼혈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딸이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 댓 살 정도 되자 또 링가드 선장이 나타나 이제 수양딸의 신세는 보나마나 끝난 거 같으니 대신 손녀라도 잘 키워 백인과 결혼시켜 유럽에서 살게 해야 하겠다고 니나를 억지로 빼앗다시피 해 싱가포르에 있는, 저 위에서 말한 창고업과 돈장사의 명인 후디크 씨의 관리인인 빈크 씨 댁에 맡겨 가정교육을 부탁한다. 무려 십년 동안.

  링가드 선장. 이 늙은이가 문제다. 딸을 결혼시키자마자 사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위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스스로 찾아낸 숨은 강을 따라 섬의 내륙으로 올라가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더 큰 부자가 되려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재산을 투자할 수 밖에 없으니, 독자가 보기에도 그건 투자가 아닌 명백한 투기 행위이고, 내가 알기로 인도네시아 근방에 다이아몬드가 대규모로 묻혀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많던 재산을 홀랑 말아먹고 애먼 올마니어 씨만 애먼 여인,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으로 열네 살에 직접 무기를 들고 백인들과 맞서 싸웠던 여인이 뒤집어 엎고, 깽판치고, 가구들 뽀개 난방용으로 불사르고, 영어도 할 줄 알지만 말레이 어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걸 보고 살게 된 거다.

  자신 스스로가 벌어둔 모든 재산은 영국의 보르네오 주식회사 설립 소식을 듣자마자 앞으로 영국인들이 보르네오 섬에 많이 출장올 것으로 확신해 링가드 앤드 컴퍼니 제방 근처에 당시 근동에서 가장 큰 펜션을 짓는데 다 쏟아 부어, 건물을 짓는 중에 영국이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도 포기, 짓기도 전에 폐가가 되어버려 나중엔 결국 “올마이어의 어리석음”이란 옥호를 단 거고.

  이 때가, 링가드 씨에 의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진 니나가 10년 세월을 치욕과 따돌림 속에서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이 지나 이젠 완전히 여인이 된 상태다. 우리의 올마이어 씨의 소망 역시, 자기는 쥐뿔도 없으면서 섬의 내륙에 황금과 다이아몬드가 넘친다는 링가드 선장이면서 장인이기도 한 모험가의 장담을 믿고 마지막 도전을 하기 위해 자바 섬 옆의 발리에 터전을 잡은 왕가의 계승자 다인과, 삼비르의 족장 다캄바, 이렇게 두 명의 말레이 인과 힘을 합해 겁도 없이 불법적인 일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생전 처음 하게 되는데, 어떤 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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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1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저 잠깐만요 골드문트폴스타프님. 여기서 끝 아니죠?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안 알랴줌 하고 그 뒤에 아무 말도 없다니….. 🥲

Falstaff 2023-03-11 07:32   좋아요 0 | URL
아, 그럼요. 이제 니나가 하이틴, 당시 시각으로 꽉찬 결혼 적령기의 아름다운 아가씨인데 어떻게 로맨스가 없겠습니까. 비록 반 유색인 반 백인의 혼혈이지만요. 그럼 누구하고 연애를 하게 될까.... 이것도 안 알려드림.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11 07:34   좋아요 0 | URL
책 말고요 골드문트님 글도 뭔가 총평이라던가 더 있을거 같은데.. @.@

Falstaff 2023-03-11 07:38   좋아요 3 | URL
아녀요, 없습니다.
ㅎㅎㅎ 라임이 말이죠, ˝안 알려줌.˝ 하고 끝날 경우엔 뒤에 뭐가 첨가되면 재미 없거든요. ^^

Falstaff 2023-03-11 07:40   좋아요 2 | URL
굳이 보탠다면.... 조지프 콘래드가 아니었다면 별 다섯인데, 콘래드라서 다섯 개를 주지 못했다, 정도. 표지가 넘 하이틴 소설 같다. 그래서 관심을 좀 덜 받을 거 같다, 이 수준입니다.

건수하 2023-03-11 07: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다시 올라가보니 표지가…독특(?)하네요 :)

그레이스 2023-03-11 08:55   좋아요 1 | URL
오늘은 두분 대화가 더 재밌어요^^
안 알려줌 시리즈군요 ㅋㅋ
미리 위에서 예고하시면 안될까요?

Falstaff 2023-03-11 11: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안 알려줌, 이거 미리 알려드리면 별 재미 없답니다. ^^

coolcat329 2023-03-11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중고가 엄청 많이 나와있어서 아직 여유부리며 사진 않고 있지만, 조만간 사야겠습니다. 초기작이지만 역시 훌륭하군요. 저는 안 알려줌! 이 말 나오면 더 기대하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Falstaff 2023-03-11 14:56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제나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콘래드는 처음부터 콘래드였더군요. 한 번 읽어볼 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