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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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읽은 옌롄커는 <풍아송 風雅頌>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번역 소개한 작품은 2008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단다. 이 책으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옌롄커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작가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소설의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금한다는 5금禁의 영광을 안았으니 이 아니 아이러니인가. <인민을….>이 5금을 당한 2005년 8월, 그의 서재에서는 또 한 편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의 초고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리고 11월에 책의 초판본에 실릴 “작가의 말”을 쓰지만 이 작품 역시 당국에 의하여 5금의 계관을 쓰게 된다. 판매뿐만 아니라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까지 작품에 대한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대하여 “5금의 영광”이니 “5금의 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금지를 결정한 단체, 옌롄커의 경우엔 정부일 텐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신이나 5공화국 정부같이 지독한 규제와 감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집체적, 전체적 집단일 경우라면, 어떠한 형태가 됐든지 간에 현재 자행되고 있는 통제와 금지의 영역에 한 발을 걸쳐놓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이나 5공, 그리고 현재 또는 최근의 중국 정부는, 작가는 별 생각 없이 문학적 함의로 풍요로운 글을 쓴 것을, 담당하는 감독관이 읽어보고 괜히 자기 또는 자기들의 발이 저리거나, 자라 보고 놀란 눈알에 솥뚜껑이 보였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로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급하게 금지의 딱지, 라고 생각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독자로 하여금 금지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는 일이 많았다는 거다. <딩씨 마을의 꿈>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 작품을 읽고 깜짝 놀라 5금을 때린 감독관은 두 해 전에 옌롄커가 쓴 <즐거움受活>, 우리나라엔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을 틀림없이 읽어보지 않은, 비전문가이거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알아서 긴 속물 잡놈이었을 확률이 높다.

  <레닌의 키스>는 버러우 산맥의 품 속에 있는 작은 서우훠 마을이라는 유토피아 적 장소를 기초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 말 그대로 서우훠, 受活, 즐거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네의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장애인이다. 장애 대신 각기 특별한 재주 한 가지씩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딩씨 마을의 꿈>에서도 얼토당토않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딩씨촌, 한자어로 쓰면 정장(丁莊)으로 고무래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 딩씨촌에 있는 딩좡 초등학교가 바로 유토피아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이스라엘 삼국지 가운데 창세기. 형제들에게 밉보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곳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술과 떡을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 관원장이 출소해 뒤숭숭해 하는 파라오의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해몽하게 만들어주는데, 옌롄커는 그들의 꾼 꿈의 네 번의 꿈의 내용으로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제1권을 구성했다. 책의 본문을 다 읽은 후에 다시 1권을 꿈 네 편을 읽으면, 45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장편소설이 이 네 편의 꿈 이야기와 해몽처럼 풀어져 나갔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해몽인지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어봐야 한다. <딩씨…> 읽기 전에 될 수 있으면 창세기를, 그것도 귀찮으면 요셉의 이야기만 발췌되어 있는 위키피디아라도 검색한 후에 읽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초장부터 사방이 피투성이다. 잔혹하다고? 그건 아니고, 딩씨 마을로 가는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마을 사람들이 피를 팔아 닦은 시멘트 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관리들이 딩씨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닦은 길로 생각했건만, 알고 보면 <허삼관 매혈기>처럼 주민들이 각자 피를 팔아서, 어려운 말로 하자면 매혈賣血을 해 번 돈 가운데 조금씩 갹출해서 도로를 닦았다는 뜻이다. 중국의 행정단위가 촌-향-현-성 뭐 이런 식으로 되는데, 전작 <레닌의 키스>에선 해방 조국이 국민들에게 쇠, 철물을 만들어 바치라는 강력한 요구를 자행한 바 있는 반면에 <딩씨…>에선 국민들의 진짜 피를, 약하지 않은 가격으로 사겠으니, 어려운 얘기로 매혈買血 하겠으니 피 파는(賣血) 일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관리들을 닦달했던 모양이다. 혹은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완고한 딩씨 마을 사람들이 어딜 생명 같은 피를 팔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현의 교육국장은 딩씨 마을을 세 번째 방문한 자리에서 촌장 리싼런을 해고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대표적 빈농들의 마을 샹양촌 견학을 시킨다.

  딩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궁상벽지의 가난한 동네 샹양촌에 들어서보니 집마다 희디 흰 타일로 벽을 해 붙인 붉은 벽돌의 이층집에, 번드르르한 마을의 포장도로에다, 입성까지 자신들과 달리 쪽 빼 입은 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됐느냐고 물어보니, 아줌마나 아저씨나 하시는 말씀이 피를 팔아서 그렇다고, 옷소매를 쓱 걷어 깨알 같이 주사바늘 자국이 난 팔뚝을 보여주는 거였다. 이 다음날부터 딩씨 마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만 16세 이상 50세까지 신체 건강한 남녀들이 홰나무 아래 임시로 친 텐트 안이나 밖에 누워 피를 뽑기 시작했고, 집마다 살림살이에 윤택이 나고, 너도나도 맛난 돼지고기 가브리살을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쪄서 먹기 시작했던 거였다. 한 번 이리 여유 있는 생활을 맛보자 이젠 그만둘 수 없어 마을사람 팔뚝마다 샹양촌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깨 꽃이 피었지만 이젠 관에 의한 매혈소는 철수해 다른 고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딱 이럴 때, 글 깨나 읽어 식자 연하지만 신식공부를 한 건 아니어서 학교에서 종치는 일을 하던 딩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큰아들 딩후이(이름이 빛날 휘輝)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하더니 현으로 달려가 보나마나 누가 쓴 적 있는 중고 주삿바늘과 주사기, 알코올 솜, 피 담는 병 등을 사와 사설 “딩가 채혈소”를 차려 비닐봉지 하나 5백씨씨에 시세보다 높은 80위안으로 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딩후이가 바보는 아니라서 80위안은 분명 좋은 값이기는 한데, 봉지를 살살 돌려가며 피를 채우면 7백씨씨도, 악착같이 채우면 8백씨씨도 무난히 들어간다는 걸 당연히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뭐든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싸게 팔거나, 싸게 사거나, 원가를 낮추는 거다. 세 번째 것을 위해 딩후이는 세 명을 찌른 다음에야 주삿바늘을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닦았는데, 문제는 아뿔싸, 이게 위에서 얘기했듯 (하지만 책에선 기척도 나지 않는다만) 시내 병원에서 이미 사용한 내력이 있는 주사기요 주삿바늘이었다는 것. 어쨌거나 딩후이는 이 일로 해서 많은 돈을 벌어 어여쁜 아가씨를 골라 장가 들어 아들 샤오창(小强)과 딸 잉즈(英子)를 낳았다. 이럭저럭 흐른 세월이 십 년. 딩씨 마을엔 한 명 두 명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이게 딩씨촌만 그런 것도 아니라 향 내 거의 모든 촌도 마찬가지, 현 내 거의 모든 현도 마찬가지, 성 내 모든 현도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성도, 현도, 향도의 시내에 거주하는 도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별로 없었던 바, 어느덧 이 열병의 정식 명칭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이며 짧게 “에이즈”라고 부르는 병인 것을 알았다. 걸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천형. 어쩌면 인류가 이 병으로 해서 멸종을 당할 수도 있다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그리하여 누군가 딩후이의 집에 독물인지 독약인지 아니면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는 방귀를 뀌었는지, 집에서 기르는 닭이 죽어나가고, 개가 죽어나가고, 돼지가 죽어나가더니, 급기야 현명하고 선한 딩씨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유일한 혈손 딩샤오창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거품을 물고 죽어버린다. 누군가가 복수를 했다고 짐작만 할 뿐. 그래서 학교 담장 아래 묻힌 딩샤오창, 이 아이의 유령이 작품의 화자가 된다.

  집집마다 에이즈 환자가 있으니 전염확률도 높고 주민들의 불안감도 높아져 가고, 길가엔 개새끼 한 마리,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을뿐더러 한 시절 피 파는 걸 거부하다가 촌장 자리에서 쫓겨난 리싼런까지 열병에 감염되어버리자, 딩수이양은 이 병을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아들 딩후이의 잘못을 보충할 겸하여, 에이즈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교사들이 모두 도망가 빈 학교가 된 딩좡초등학교로 에이즈 환자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레닌의 키스>에서 나오는 바러우 산맥의 서우훠 마을처럼, <풍아송>에서 양커가 찾던 곳처럼 유토피아가 열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저 먼 시절, 3천년 전 애굽의 파라오가 꾼 꿈의 첫 번째 장면, “강에서 올라온 아름답고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갈대밭에서 풀을 뜯는 모습”이 피를 팔아 이룬 함포고복의 시절이었다면 이제 독자의 눈에는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가 이 살진 암소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장면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이 기근의 시절, 순간의 유토피아, 그게 얼마나, 어떻게 갈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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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14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 ㅎㅎ 내내 못읽은 책 리뷰만 보다가 읽은 책 리뷰를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요. ㅎㅎ

Falstaff 2023-03-14 18:42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습니까!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저도 읽은 책 나오면 더 반갑고 그래요!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첫 옌렌커도 이 책이었는데 옌렌커는 디스토피아 전문가 같아요… 그렇지만 저의 최애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최강 막장 마을스토리는 작렬지…(제가 시아버지 복상사…를 독후감에 써서인지 블로그 유입 검색어에 자꾸 시아버지의 육욕…이 연관되고 있습니다…)레닌의 키스도 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3-14 21: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저도 최고 검색어가 ˝형수 시동생 브래지어˝랍니다. ㅋㅋㅋㅋㅋ 웃지만 웃는 게 아니죠?
옌롄커가 괘씸한 건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시침 뚝 떼고 한 가운데에 유토피아를 슬쩍 흘린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래 못 가기는 하지만 말입죠. <레닌의 키스>가 딱 그짝입니다. 전 이이의 스토리가 과하게 드세서 읽을 때마다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럼에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1: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저 그래서 저 검색어 쳐봤게요 안 쳐봤게요? ㅋㅋㅋ네이버 갔다 여기 아니네 하고 다음에 가서 아, 알라딘 망할까 봐 피난처 두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하고 알라딘 망하면 여기서 리뷰봐아지 하고 이웃추가 하고 왔어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이고, 못 말리는 열반인 님. 그렇다고 정말 검색을 해보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렇고 알라딘이 암만해도 책방이라서 서재가 종종 위태위태 하잖아요. 예전에 올린 글이 한 순간에 싹 날라가버린 적도 있고 해서 보험을 들어놓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