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계속된다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박현주 옮김 / 알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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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중산층 변호사 유대인 아버지 크러스너호르커이 죄르지와 사회보장관리사인 어머니 줄리어 펄린커스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1973년부터 78년까지 두 곳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978년부터 83년까지 학교를 외트뵈스 롤란드 대학으로 옮겨 헝가리어와 문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았다. 졸업 논문은 헝가리 문학의 거장 마라이 산도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두었다는 등의 사생활은 그냥 모른 척하겠다. 2015년까지 영어로 번역 출판한 작품 가운데 ‘작품명과 상관없이’ 작가와 역자에게 만5천 파운드를 주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마지막 순서로 받았고, 2016년부터 ‘특정 작품’의 작가와 역자에게 상을 주었는데 첫 해에 받은 인물과 작품이 한강 <채식주의자>였다.

근데 사생활에서 이이의 특징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중에서 페스트 지역의 필리센틀라슬로의 언덕에서 은둔하고 있기는 한데, 일년의 절반쯤 세계 각지에서 머물면서 글을 쓴다고 한다. 이걸 왜 굳이 말하는가 하면, 《세계는 계속된다》 가운데 특히 두번째 파트에 전세계 많은 곳을 무대로 하는 단편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오래 묵었다. 중국, 몽고, 일본에서만. 한국에 오면 전쟁 나서 죽을까 겁먹었나 보다. 뭐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이이가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죽는 거하고는 얘기가 다르거든.

본문만 470쪽 가까이 되는 책이고, 작가 이름 하나만 보고 책을 고르는 습관이 있기도 해, 유명세를 타게 한 <사탄 탱고>나 <저항의 멜랑콜리>처럼 장편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 읽었는데 아주 짧은 초단편부터 노벨라 정도 분량까지 스물 한 작품을 싣고 있다.

모두 3부로 나누어 각 부의 제목을 “말하다”, “이야기하다” 그리고 “작별을 고하다”로 지었다. ‘말하다’와 ‘이야기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 가를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면 될지 모르겠다.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이다. 또는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이제 세계는 누구도 존재할 수도 없고 남을 가치도 없고 참기 어렵고 차갑고 슬프며 황량하고 치명적인 무게를 지녀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곳이다. 이것을 첫 작품 <서 있는 헤맴>에서 말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가라든지 왼쪽으로 가라든지 같은 말이다. 중요한 건 현재 위치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일 뿐이니까. 왼쪽, 오른쪽 이야기는 평면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니까 2차원적 세계에서 한 지점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라는 건데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앞으로 나가면 “온 세상 젊은이를 다 만나고” 다시 원점으로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 있기는 있는데 절망스럽다. 3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결론이 같다면 남은 것은 아래쪽 또는 위쪽 방향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가는 일. 두번째 장 “이야기하다”에서는 두 경우가 다 등장한다. 대기권을 넘어 저 멀고 먼 암흑의 지구 궤도를 돌아본 첫번째 인류,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을 탐색하는 정신병원 속의 나가 쓴 <저 가가린>. 가가린은 1961년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 위에 뚫린 세 개의 선창을 통해 지구를 보고는 “지평선이 보인다, 아주 아름다운 섬광이 비친다. … 아주 아름답다.”라고 송신한다. 그는 물론 나중에 지상에 착륙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이때 그만 인간은 봐서는 안 될 것, 안 되는 장면, 애초에 볼 수 없게 디자인된 진실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건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것. 나이 들고 정신이 깜박거려 오늘 낼 하는 늙은이들만 모인 정신병원에서 가가린에 몰두한 ‘나’는 6층의 창가에서 가가린처럼 위를 향해 도움닫기를 하지만 결국 땅바닥에 메다 꽂힐 것임을 알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가린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일 뿐이라는 것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1985년에 장편 데뷔작 <사탄 탱고>를, 89년에 두번째 작품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출간했다. 물론 84년에 단편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이 두 장편소설이었다. 이것 말고 《서왕모의 강림》과 《라스트 울프》도 우리말로 번역 출간했으나 아무래도 두 작품만 하지 못했다. 이이의 특기라고하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세계는 계속된다》에서도 지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갖는 음울한 분위기와 집단 최면 또는 집단 우울증적 혼돈만큼 깊이 있는 공감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생각에 동의하실 필요는 없다. 내가 읽기로 그렇다는 얘기에 불과하니까. 대신 단편집 특유의 읽을 거리, 다양한 관점과 이야기의 만찬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하루 이틀 안에 단편집을 후다닥 읽어 치우는 내 책 읽는 습관 때문에 단편집을 읽을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기 위하여”는 진이 빠진다는 등의 것이 있는데, 좋은 작품이 많이 실린 단편집이 장편소설보다 못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한 이야기 한 번 더 하는 듯한 기분은 단편집을 짧은 시간 안에 읽어 치우는 독자에겐 눈이 좀 침침해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단편집을 쓴 작가는 나 때문에 조금 손해를 보고 있는 것도 맞다.

헝가리 작가들 가운데 케르테스 임레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긴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거의 모든 작품들도 무지하게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이의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헝가리 문자로 쓴 건 콤마만 찍으면 얼마든지 문장을 길게 늘일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적이 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의미였는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첫째는 우리말과 일본어는 문장을 마치는 종결어미가 거의 비슷하다. 주로 “이다”, “하다.”의 현재형이나 과거형. 그러나 유럽인의 언어는 다양한 발음으로 문장이 끝나, 비슷한 발음으로 끝나는 구절을 묶은 것 가운데 일부를 흔히 “시”의 라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문장 말고 문장 종결부의 다양함 때문에 쉼표만 찍으면 얼마든지 길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말의 경우에 긴 문장은 절clause과 절을 잇기 위하여 역시 얼마 되지 않는 엇비슷한 접속사를 써야 하고, 이 접속사를 많이 쓰는 건 문장에 조종을 울리는 죽음의 길이라고들 한다. 여태 단 한 번도 긴 문장을 권하는 글이나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이면 백 다 짧은 문장을 쓰라고 권하기만 했지.

두번째는, 길고 길게 문장을 쓰는 행위, 심지어 한 문장이 완전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침표를 쓰지 않고 쉼표를 찍고 다른 문장을 시작하는 일을 작가가 굳이 왜 했을까? 나는 심지어 전 작품을 단 한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이 말이 심하다면, 권하는 독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적어도 마침표가 나올 때까지 한 번에 읽어 달라는 주장. 끊어서 읽으면 작가가 전하고 싶은 글의 의미가 바래거나 전도될 수 있다는 작가적 조바심이 마침표 대신에 수 없이 많은 쉼표를 찍게 만들었을 수 있다. 나는 이 두 번째 의문에 한 표.

결론. 좋은 단편집이 내게 걸려 좀 박하게 평을 받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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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9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3부작이 생각나네요.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
굉장한 통찰 같습니다.
이 사람 작품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표지에서 선택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표지가 꽤 마음에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전 전작주의를 못하겠더라구요.
읽다가 비슷한 패턴이 보이면 좀 시들해지잖아요.
골드님도 이이의 책은 그만 읽으셔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

Falstaff 2023-03-09 21:50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책 읽으시려면 아무쪼록 <사탄 탱고> 부터 시작하시는 걸 권합니다.
근데 애초에 각오를 좀 하시고 읽는 게 좋을 듯하네요. ㅋㅋㅋㅋ
아, 말과 이야기에 관한 거, 좀 근사했습니까? ㅎㅎㅎ 으쓱으쓱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