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옌 대산세계문학총서 177
항타고드 오손보독 지음, 한유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항타고드 오손보독,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다. 이이의 이름을 한자어로 쓰면 “항도덕 오순포도알 杭圖德 烏順包都嘎” 이라고 쓰는데, 항타고드가 성family name인지, 오손보독이 성인지 잘 모르겠고, 오순’포도알’을 ‘오손보독’이라 읽는 것도 재미있다. 마지막 알嘎자는 나도 처음 보는 글자로 ‘새소리’와 ‘깔깔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글자만 보면 “까마귀가 포도알 물고 만족해서 순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이이의 이름이 희한한 이유는 몽골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몽골인데 고비사막 한 가운데, 내몽골 사람이고, 내몽골은 중국 내 자치지역이라 몽골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 활동도 한자어가 아니라 몽골 문자로 하고 있다. 내몽골이라도 전체가 사막지대는 아니라서 농촌지역인 나이만 허쇼의 툴렌탈 솜 세친달라 가차에서 1969년에 임시교사를 하다가 솜에 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농사를 짓는 어머니와의 슬하 삼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저 참고로 알아 두시라는 뜻에서 주소지의 암호를 좀 풀어드리자면 허쇼와 솜, 가차는 각자의 행정단위를 칭하는 것으로 허쇼⊃솜⊃가차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시⊃구⊃동 비슷하게. 날 때부터 문재가 있어서 불과 열네 살에 산문을 지어 자치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발표를 하고 열다섯 살에는 시를 싣기도 한다. 그러나 저 고비사막 근방의 농촌마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따로 할 것이 있을 턱이 있나. 졸업하고 두 해 동안 농사를 짓다가 뜻한 바가 있어 내몽골과 외몽골, 즉 중국과 몽골국의 접경지역에 있는 에리옌 시로 거처를 옮겨 2년 동안 거간꾼 일을 한다.

  아리옌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의 1/3은 한족으로 중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가지고 와 몽골인에게 팔거나 그들의 특산품을 구입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려는 상인이고, 1/3은 외몽골 사람으로 한족과 비슷한 이유로 시에 유입해 들어온 몽골인 상인, 그리고 나머지 1/3이 한족과 외몽골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구전을 받아 돈을 버는 거간꾼이라고 하는데, 항타고드가 바로 이 일을 했다는 거다. 이 거간꾼, 한자어를 섞어 부르면 좀 더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위해 다른 말로 부르자면 중개인들의 가장 큰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중국어와 몽골어를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들은 한족이면 한족, 몽골인이면 몽골인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하고, 필요하면 린치도 가하며, 아주 간혹가다가는 정말로 생명까지 해쳐가며 인간 말종의 삶을 살고 있는데, 사실 알고보면 아직 문명화가 덜 된 것 같은, 또는 현대화가 덜 진행된 원시도시에서 흔하게 벌어지곤 했던 일이다. 여기에 공안으로 대표하는 공권력 역시 중국문화 특유의 ‘꽌시’나 체면 등을 우선하느라 사실과 정의는 다음 순번으로 밀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곳. 어디 가서 전근대적이라고 나대지 말자. 우리나라도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했다. 관리에게 봉투에 (당시 화폐로)돈 십만 원 넣어 슬쩍 밀어주면, 얼마야? 묻고, 열 갠데요? 하면 다시 이쪽으로 밀어주면서, 집에 가다가 애들한테 과자나 사 가지고 들어가, 라고 하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다.

  하여튼 항타고드는 두 해 동안 거간일을 하면서 국경도시 에리옌이라고 불리는 지옥도에서 벌어진 온갖 난장판을 다 구경하고, 그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재를 사용해 원고지를 메꾸기 시작했으니 단편 <에리옌의 남부시장에서>, 중편 <에리옌, 에리옌, 에리옌>, 그리고 장편 <에리옌>이다. 재미있는 건, 에리옌은 국경도시의 고유명사 말고 “잡색의”, “얼룩덜룩한”, “다채로운” 등의 형용사이기도 하다는데, 작중에서도 간혹 등장해 주로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난잡하고 험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국인이지만 몽골족이기도 한 항타고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면서 스스로 아쉬워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몽골 놈이 몽골 놈에게 못되게 굴고, 나무 삽이 진흙을 못 뜬다.”는 몽골 속담이다. 내몽골이나 외몽골이나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 등쳐먹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는 건데, 미국 가면 한국인한테 제일 많이 사기치는 게 한국인이라면서? 다 그런 거지 뭐.


​  <에리옌>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나산달라이와 그의 아우 바양달라이 형제. 나산달라이 가족은 내몽골 시골에서 (항타고드의 부모처럼)병원 원무과에도 다니고 농사도 짓고 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결코 삶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1994년에 에리옌 소재 한템게르 컴퍼니의 사장으로 있는 아우 바양달라이 하나만 보고 무작정 에리옌으로 터를 옮겨왔다. 바양달라이는 하는 일마다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이제 금고 저 아래에 쌓인 백 위안 짜리 지폐가 누렇게 썩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돌 만큼 부자가 되어 남은 평생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여유있게 하고 싶은 거 해가면서 살 수 있는 처지다. 맏아들 고비는 공안의 경찰관이 되어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고, 늘씬한 키와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의 외동딸 아리오나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벌써 시인으로 등단한 내몽골 가난한 농촌 출신 숨베르 씨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 그와 함께 에리옌의 기차역에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막내 아들 테니게르는 친절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전형적인 부잣집 도령으로 세상에 아쉬운 것 없이 자란 티가 벅벅 나서 독자로 하여금 걱정이 들게도 만들지만 다행히 끝까지 무탈하게 배역을 마친다. 이렇게 잘 나가는 바양달라이는 작품이 시작할 때쯤엔 사업 운이 대낮에 뜬 별보다 많지 않아 하는 일마다 본전까지 다 거덜을 내는데다가, 유력인사와 마작에 맛을 들여 날마다 마작 판인데 거기서도 하는 족족 빈털터리가 된다. 그건 그거고 이 정도면 잘 나갔을 때 에리옌으로 처들어온 형네 식구들 좀 건사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조카 둘에게 일자리 하나 알선을 해준 적이 없으니 알 만하시지? 나중에 어떻게 될 팔자인지? 그려, 지금 생각하시는 것이 맞아.

  바양달라이의 형 나산달라이는 에리옌에 와서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그게 쉽나, 이때 아우가 형네 식구를 위해 해준 단 하나의 일이 형 나산달라이를 작은 호텔의 수위로 취직시켜준 거였다. 큰아들 만라이는 나이만 먹고 몸이 약해서 따로 하는 일 없이 늙은 아버지와 팔팔한 동생이 벌어온 돈으로 허위허식하면서 그래도 꼴에 배꼽 아래 꼬다리 달린 거 있다고 목하 열애중인데, 상대는 같은 나이만 허쇼 출신의 경박하고, 배운 거 없고, 사납고, 몸 헤프고, 놀기 좋아하고, 노인 공경하기는커녕 즐거이 쌍욕하는 걸 취미생활로 알고, 범죄에 관한 개념이 없어서 도저히 선량한 나산달라이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올라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연애는 급격하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건 여기서 못 알려드리지. 둘째 철멍은 작품에 제일 먼저 소개되는 인물로 180cm가 넘는 장신이 신체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공부도 잘 해 중학교까지 졸업한 다음에 에리옌으로 왔는데 꿈이 있으니 돈을 벌어 그걸로 검정고시를 패스해 대학을 졸업한 다음 마이클 조던 같은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야말로 꿈 같은 꿈이었다. 매사 반듯한 청년이지만 사람이 반듯하다고 앞길까지 반듯해지면 그건 사람 사는 일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지구상에 반듯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도 없게?

  철멍은 작은 아버지가 취직자리도 하나 알아봐주지 않아 삼륜거, 바퀴 세 개 달린 자전거 운송수단을 운전하는 일을 한다. 철멍은 도시에서 이것 말고 다른 돈벌이를 도무지 구할 수가 없던 거였다. 하고 싶은 거야 자기도 거간꾼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것도 맨손 하나 가지고는 뛰어들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용 하나를 보고 동업을 제의할 만큼 호락호락한 시장도 아니었고. 철멍이 기차역에서 도착 열차를 기다리다가 때마침 열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에리옌에 도착한 사촌 여동생 아리오나, 그리고 그의 약혼자, 창백한 지식인이자 시인인 숨베르를 발견하며 이 황금, 황금도 아니고 그냥 금전만능주의의 복마전 에리옌에서의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  몽골족이 쓴 작품이라 특별한 관심이 있어 예의 주시한 책이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 우리는 이미 채만식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탁류>가 있지 않은가. 채만식의 반, 아니다, 반의 반에라도 미치기만 했으면 즐겁게 읽었다고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아쉽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3-03-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몽골 소설이군요. 이름, 지명이 어색한 거 빼곤 역시나 사람 사는 이야기네요 ㅎ 포도알 이름이 넘 귀엽습니다 ㅎㅎ
근데 큰 재미를 못 느끼신 거 같은데 별4개를 주셨네요.

Falstaff 2023-03-16 14:09   좋아요 2 | URL
옙. 분명히 네 개는 많고, 그렇다고 세 개를 주자니 좀 박한 거 같고, 하다가, 요즘에 너무 늦게 익힌 처세술, 좋은 게 좋다고 걍 네 개 주고 말았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세 개 반도 좀 후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몽골 소설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ㅎㅎㅎ

잠자냥 2023-03-16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 이 책 출간 당시 몽골 작품이라 관심이 갔는데 어디선가 계몽적이다, 우리나라 1920년대 농촌소설 보는 거 같다는 평을 읽고 일단 보류했거든요. 골드문트 님 리뷰 읽으니 역시 그냥 넘기기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3-16 14:13   좋아요 2 | URL
아휴, 저도 기대가 컸답니다. 게다가 작년 8월 초하루, 백수가 무려 내돈내산 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누아르 경향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만 1920년대는 아니고요, 조금 더 써서 70년대, 그니깐 유신 시절 대중소설 정도로 보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