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깔 있는 개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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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정>을 읽고 단박에 산도르 마라이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마라이의 우리말 번역본 ‘소설’은 전부 품절이나 절판이다. 수필집은 한 권 판다. 그래 기다리기만 하다 어느 날 드디어 헌책방에서 <성깔 있는 개>를 찾았고, 이제 읽었다. 잠깐 검색해봤다. 백과사전 위키피디어가 언제 수정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미국에도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마존에 <성깔 있는 개>의 영어판도 없다.) 마라이가 1900년생이고, 89세에 자기 머리통에 총알을 관통시킴으로 해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죽고 나서야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30세 부터는 자신의 모국어인 헝가리 언어, 전 지구에서 극히 일부분만 해독 가능한 약소국의 언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키피디어에 의하면 가장 빨리 번역한 것이 2001년 <헝가리의 추억>이란 시집이다. (세상에, 시도 썼네.)
 <열정>에서 마라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저 헝가리의 먼 촌구석 자신의 영지에 돌아와 무려 41년 43일을 기다린 끝에 필생의 친구 콘라드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렸다. 75세 동갑나기 친구 콘라드가 먼먼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마치 채무처럼, 자신을 찾아올지 확신하며 나이에 비하면 최고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무려 41년을 기다린 주인공 헨릭. 그들이 이제 생을 정리할 단계에서 인생을 조망하고, 달관하고, 성찰을 거듭한 세월을 끝내고 필생필사의 한 판 승부를 그린 참 멋있는 작품이다.
 32세의 마라이가 쓴 <성깔 있는 개> 역시 헝가리 문자로 쓴 소설이다. 때는 양차 세계대전의 중간쯤. 약 20년 간 유럽은 잠깐 평화의 시기를 지냈으나 동서유럽의 접경지 헝가리의 부다 지역에선 전쟁 동안 거의 모든 산업기반시설이 망가져버려 시민들은 가난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그리해도 세월을 흐르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온다. 이름은 났지만 가난한 문인이자 주인공인 ‘신사’는 백 펭고(당시 헝가리의 화폐단위)를 가지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곤고한 시기였고, 그래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면서도 언제나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 했던 시기. 신사는 시내 중심가를 거닐다가 난데없이 택시를 타고 동물원을 찾아, 그곳에서 개 사육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순종 헝가리 견종 ‘풀리’인줄 알고 낳은 지 4주 된 잡종견 한 마리를 60 펭고에 사 먼지덩이 같은 털 뭉치처럼 보이는 작은 강아지 ‘추토라’를 주머니에 넣어 온다. 사육사가 철석같이 약속한 품종 확인서도 받지 않고서.
 이후 약 10개월에 걸친 개 사육기.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할 내용들. 개도 점차 커가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성격이 형성되며, 고집도 생기고, 넘쳐흐르는 젊음 또는 건강을 과시해야 하고, 사고도 치면서 성장을 하는 법. 애당초 신사가 잘못했다. 개는 마당 있는 집에서 놔길러야 한다는 게 내 생각. 비록 이젠 개를 키우는 것보다 먹는 일을 더 즐기지만, 나도 소싯적엔 마당 넓은 집에서 포인터, 도베르만, 복사 등을 키우는 집에서 자라서 안다. 몸높이 37~44 센티미터의 중형 개 추토라를 1920년대 부다(자꾸 ‘부다’ 그러니까 헛갈리시지? 바로 옆에 강이 흐르는데 강 너머 지역이 ‘페스트.’ 합해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다.)의 좁은 아파트에서 키우는 게 애초에 넌센스였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강아지는 날이 가고 주가 갈수록 점점 커지는데 이에 비해 아파트 면적은 절대 커지지 않는 한계 속에서 개가 받을 스트레스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으니. 여기에 잡종견이 순종보다 훨씬 똑똑하고, 다른 말로 하면, 영악하다는 진실을, 신사와 그의 가족은 알긴 알았으되, 진짜 알게 됐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리하여 신사와 그의 가족은 똑똑한 개 추토라를 국경 너머 먼 목장지대로 보내버리기로 결정을 하고, 말대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를 알아챈 추토라의 반항은 극적으로 작품을 비극으로 끌고 가버린다. 어째 비슷하지? <열정>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대결과 <성깔 있는 개>에서 신사와 추토라의 맞짱.
 <열정>이 두 노인 사이 평생을 기다렸던 필생필사의 대결만 아니라 그것이 포함하는 세월 동안 익고 또 익었던 무상함이 독자의 가슴에 호소를 하듯, 이 책도 강아지를 귀여워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가족같이 여기다가 몇 번의 전환점을 맞아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 ‘뭔가’가 마지막 바로 앞 페이지에 ‘과감하게도’ 분명한 단어로 나오는데,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에 옮길 수 없다.
 하여간 산도르 마라이는 참 이상한 작가다. 이상한 방법으로 독자의 심금을 저리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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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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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이렇게 늦게 읽은 것은, 아래 첨부한 것과 같이, 지난 세기 말에 내가 (아직도!)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연재했던 칼럼처럼, 같은 제목의 영화의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소피의 선택>을 얼마나 재미있게 보았는지 굳이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어느덧 사보 칼럼을 쓰던 시절도 근 20년이 지나가버려 책을 고를 때마다 윌리엄 스타이런이 쓴 원작, <소피의 선택>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였다.
 두 권 900쪽이 훌쩍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영화에서는 원작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관찰자 스팅고의 사생활 거의 전부를 다루지 않은 건 자연스럽게 보였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소피가 숨기거나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 당연히 그녀의 비밀은 20 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인류사 상 가장 비참했던 시절의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개인의 참혹한 비극, 뿐만 아니라 참혹한 환경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끝 간 데 없이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 이전의 한 생명체로의 본능을 고스란히 밝히는 일. 이 깊은 비밀 혹은 거짓말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작가는 일인칭 관찰자 스팅고에게도, 비밀 또는 거짓말을 갖고 있는 두 주인공, 소피와 네이선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또는 충격을 여러 번 마련해야 했겠다. 이런 과정을 다 밟아야 하니 작품을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출간한 시점이 1979년,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골적 베드씬이 몇 장면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독후감도 그렇고, 영화 감상문도 그렇고, 재미있으면서도 오래 머리에 남을 작품에 관해 쓰면서 작품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내용을 함부로 밝힐 수는 없다. 그래 이런 작품에 관해 쓰기가 대단히 난감하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루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볼 생각이 있으면 꼭 소설부터 읽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원작을 아주 잘 따라간 영화라, 소설의 중요한 부분만 집중해 영상에 담았기 때문에 만일 나처럼 영화부터 봐서, 주인공들의 표정과 성격과 연기가 머리에 박힌 다음에 소설을 읽으면, 소설문학 특성상 사건들의 개연성을 주기 위한 준비단계가 장황하게 느낄 수 있을까봐 그러하다.
 주인공 소피Sophie는 악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을 견디며 생존한 여인이다. 그녀가 아우슈비츠와, 해방 후 소련군 관리 아래에 있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또 몇 년을 지내는 동안 극심한 굶주림과 각기병을 필두로 한 각종 질병에 시달려 이가 모두 빠진 상태로 뉴욕의 브루클린에 도착한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은인이라 할 수 있고, 나중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며, 진정한 천재를 가졌으나 편집증 증세가 있는 제약회사 파이저Pfeizer 연구원으로 알려진 네이선을 만나 전쟁 전의 미모를 되찾는다. 물론 벤베누토 첼리니가 만든 것처럼 기막히게 아름답고 체형에 꼭 맞는 틀니와 함께. 남부 출신 작가지망생이자 이들의 관찰자인 스팅고가 단순히 값이 싸다는 이유로 이 유대인 지역의 분홍 페인트가 잔뜩 칠해진 하숙집으로 들어오면서 셋의 우정이 깊어지고, 문학인생이 보다 풍요로워 지는데, 세상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네이선의 편집증이 광적인 수준까지 도달해 소피와 관찰자 스팅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편집증. 이게 배우자나 애인을 향할 경우에 편집증은 엄청난 질투의 모습을 띠고 사나운 손톱을 세우게 된다.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인 네이선, 그토록 자상하고 배려해주고, 활수한 친절이 넘치던 쾌활한 천재는 편집증이 도질 때마다 소피를 학대하고, 급기야 폭행하고, 스팅고에게조차 가차 없이 독설과 모욕을 퍼붓는다. 세상에 네이선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소피. 그녀는 어떻게 세상천지 홀로 몸이 되었을까.
 그렇다. 책은 폴란드 여자 소피가 어떻게 해서 세상의 의지가지 하나 없이 브루클린에 홀로 남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일찍이 폴란드 유명 법학자를 아버지로, 음악을 가르치는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둔 소피. 그녀도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빈에서 공부를 하려던 잘 나가던 부르주아 계급. 그래, 하나만 일러두자. 소피의 아버지는 평소 독일 제3제국의 의식을 맹종, 아니, 앞서가던 의식의 선구자로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을 말살하고자 주장하던 반유대주의의 선봉장이었으며, 그녀의 남편 또한 아버지의 애제자였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가장 먼저 총살을 당했던 독일 정신 지지자들. 나치에겐 폴란드인들은 그들의 철학이나 정신세계와 관계없이 모두 쓰레기였으니까. 남은 사람은 결핵으로 죽어가는 엄마와 아이들. 혹시 엄마가 고기를 자시면 조금이라도 더 연명을 할 수 있을까, 도시 밖으로 나가 햄 한 덩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중요한 범죄행위’를 벌이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돼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들어간 여인. 책에는 아래와 같은 발언이 두 번 나온다.


 이 이야기 끝에 소피가 친위대 하우프트슈투름퓌러(대위) 프리츠의 환영사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소피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시 옮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나요. 그가 말했죠. ‘너희들은 요양원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에 온 것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나가는 거다.’라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이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철사에 목을 매고 죽어도 좋다. 여기 유대인이 있으면, 너희들은 이 주 동안만 살게 될 것이다.’라고 했죠.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수녀가 있나? 수녀는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살게 된다. 나머지는 모두 석 달이다.’” 소피는 수용소에 도착한 후 이십사 시간이 안 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었고, 프리츠가 독일어로 이를 확인해 준 것일 뿐이었다. (2권 253쪽)


 이것 말고도 혹시 들어보셨나? 나는 처음 알았다. “레벤스보른.”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악마적 행위로 투명한 피부와 금발을 지닌 소년 소녀들을 3제국으로 납치해 독일인으로 양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이런 어린 아이들을 대량 납치한 다음 (폴란드의 한 군郡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어린이가 납치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들을 심사해 선택된 아이들은 독일의 각 가정으로 입양시켜 독일인으로 키우고, 탈락한 아이들은 역시 굴뚝의 흰 연기로 바꿔버리는 행위였단다. 아우슈비츠 안에서 소피는 자기 아들이 그나마 레벤스보른으로 선택을 받으면 앞으로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 한 쪽에서 살 수는 있을 테니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용소장 헤스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건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장면.
 이렇듯 책은 아우슈비츠와 브루클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어져 나간다. 간혹 스물두 살의 숫총각 스팅고의 이루어지지 않고 폭소만 터지게 하는 성적 무용담과, 미국 남부와 북부 지역간 갈등이 곁들여지고. 그러나 역시 소설의 척추는 어디까지나 가장 불행한 운명을 거치는 ‘인간’의 비극과 후유증, 불운한 천재와의 극적인 사랑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별개로, 나는 그냥 보통의 인간, 그가 착하거나 악하거나 별로 구별하지 않고 늘 우리 곁에 있던 그냥 사람이, 나쁜 권력을 쥐게 됐을 때 변할 수 있는 모습에도 관심이 많이 갔다. 스탠퍼드에서 유치장 실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순간의 변심, 왔다 갔다 하는 기분, 대상자의 외모와 노소, 무엇보다 첫인상에 따라 손짓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행동 양식. 이게 내게 대단한 관심을 일으켰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안 가르쳐드리겠다.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틀림없이 나와 다를 의견을 개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함.
 책의 주요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을 이 정도 했으면 그걸로 됐다. 독후감은 여기서 끝난다. 이제 한 가지 궁금한 것. 주인공 소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 이어서 소련 치하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일정 기간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소피의 건강에 치명상을 준 것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전시 치하에 있던 아우슈비츠에서라기보다, 해방 후 소련 관리하의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더 심하게 망가졌다.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읽어보면 소련 치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 소련군이 그저 심심해서 주인공(가운데 한 명)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뜯어 볼 살까지 한꺼번에 얼굴에서 떨어져나가는 장면도 나오고, 그곳에서도 숱한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증언하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누구라도 그자가 프롤레타리아이기만 하면 만국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던 볼셰비키의 후예들의 만행은 왜 아직 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 “도대체 소련 유대 수용소에선 뭐가 있었던 거야?”라고 포스트잇에 적혀 책 속 한 페이지에 붙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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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소피의 선택> - 정처없는 영혼의 종착, 그러나.....
알란 J. 파큘라 감독, 메릴 스트립 주연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막연하고 또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영화를 가리는 척도가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제일 그럴 듯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보고 난 다음에 그 잔영이 눈에 한참 어리고 어려서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그 한 장면을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하던 무아경이 어느새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깊은 사색을 유도하게 하는, 그런 영화라고 하면 그렇게 큰 까탈은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19년 전이던가요, KBS의 명화극장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알란 J 파큘라 감독이 연출을 하고, 그때 벌써 젊어보이지는 않았던 메릴 스트립이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피의 선택>이 그런 영화였지요. 그 후 <소피의 선택>은 가슴 속에 언제나 묵직하게 자리하여 언젠가는 꼭 다시 봐야하는 숙제로 남아있었습니다만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한 기억이 없이 세월이 흐르더군요.
 이 장면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의 소피와 네이단 커플, 그리고 화자로 등장하는 스물 두 살의 작가 지망생 스팅고가 뉴욕의 강을 가르는 긴 다리를 걷습니다. 네이단이 스팅고의 원고를 빼앗아 읽은 다음입니다. 밤입니다. 때마침 다리 위엔 이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차들도 없이 텅 빈 다리..... 중간쯤에 와서 네이단은 술잔을 하나씩 돌리고 샴페인을 따릅니다. 그는 난간위로 올라가 술잔을 들고 말하지요.

 

 “이 다리에서 / 많은 작가들이 미국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냈고 / 저 변두리의 휘트먼이 미국대륙 전체의 정감을 노래했노라. / 일찍이 토마스 울프와 마크 트웨인이 섰던 이곳에서 / 스팅고를 환영하노라 / 그 역시 빛나는 별들 중 하나가 되리라. // 스팅고를 위하여” 


 어떤 재주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건배 제의를 받을 수 있겠으며, 또 어느 빛나는 입술을 가진 천재가 있어 이렇게 건배를 제의할 수 있겠습니까. 영상을 앞의 정황을 묘사하지 않고 이렇게 단면만 소개하면 전혀 감흥이 오지 않지만, 19년 전 2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위 따옴표 속의 수사(修辭), 그리고 이어서 가로등 위에까지 기어 올라간 네이단이 한 젊은 예비 소설가의 앞날을 예견, 그리고 축복하면서 강물을 향해 빈 술잔을 던지는 모습은 정말로 깊은, 그러나 조금쯤은 사치스런 갈망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이런 정황, 작가의 성공담하고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슬프지요. 위에서 인용한 스팅고는 그저 영화의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이야기한다면 나치즘으로 대표하는 전체주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20세기 중반의 유대인 학살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선 너무 많은 저술들과 영상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쉽게 언급하기가 힘이 들지요. 대중들에게 친숙한 필름에서도 우린 아주 쉽게 스필버그가 연출을 한 <쉰들러 리스트>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여지껏 매체들이 다루어온 것은 나치즘의 광기와 유대인의 희생의 장면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꼬집을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작가나 제작자들이 쉽게 대중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실적인 학살의 장면이나 그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학살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육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유증에 대해서. 그들의 대뇌에 박혀있을 너무 깊숙한 고통의 기억과 상실과 공포가 어떻게 영혼을 갉아 먹는지에 관해서는 그것이 유럽대륙이건, 헐리웃이건 간에 제대로 숙고된 적은, 아닙니다, 고민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둔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영혼이 황폐화돼가는 모습을 그린 <디어 헌터>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것은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의 시각을 너무나도 감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쉽게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하기 결코 힘들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피의 선택>은 참으로 대단한 영화이지요.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인종청소를 이론적으로 지지한 교수 아버지를 둔 소피는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남편이 집단 사형을 당한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갑니다. 수용소에서 두 아이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혼자 살아남은 소피가 미국에 도착해서 유태인 네이단과 동거를 합니다.
 네이단은 넘쳐나는 예술적 기질과 기상천외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는 기행을 곧잘 하고 다니는 천재이지만, 불행히도 망상증 환자입니다. 천재성이 도가 넘은 것이지요.
 모든 것을 다 잃은 소피에게 네이단은 오직 하나, 가진 것, 기댈 수 있는 곳,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천재이자 망상증 환자인 네이단 또한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서로의 사랑일 뿐이지요.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은 슬픕니다. 미친 듯이 서로에게 몰두하다가, 네이단이 비정상 상태가 되면 물어뜯듯이 소피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또다시 뜨겁게  화해하고......
 이들의 사랑과 죽음이 영화의 척추입니다만,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보는 사람의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영혼이 황폐되어 이젠 남길 것이 그들의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 두 사람, 두 영혼의 피 흘림이 전편에 걸쳐 묘사되고 있답니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하나는 네이단의 광기어린 천재성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소피의 고갈된 영혼이 정처를 찾아 떠도는 모습.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예고편을 보시고 정작 가슴저린 영화를 안보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영화가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왜 소피의 선택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랑으로 마감되어야 하는지, 이것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야 예의이겠습니다.
 소피와 네이단이 침대 위에 나란히 옆으로 누워 죽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팅고는 에밀리 디킨스의 시선집을 집어 듭니다. 디킨스의 시, 그것이 이들의 죽음이 종결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단초가 되겠기에 여기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돌아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히 두어
아침 햇살 외 그 어떤 것도
감히 훼방치 못하게 하라




 


  * 네이단이 다리 난간에 올라 스팅고를 향해 찬사를 퍼붓는 장면은 소설엔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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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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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로 칼비노. 가장 먼저 읽은 이이의 책은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107번째 작품이었다. 쥐의 간 요리를 좋아하는 누나가 만들어준 달팽이를 먹지 않겠다고 나무에 올라간 남작이 평생 나무 위에서 사는 동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한 엽기 발랄한 작품이어서 호기심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당장 <우주만화>를 골랐다가, 아이고, 지금 생각해봐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제목에 ‘만화’가 들어가서 가벼운 읽을거리로 생각한 것이 잘못. 지금 기억나는 건 하여간 <우주만화>를 끝까지 다 읽긴 했다는 거 하나. 저 먼 기억의 음각화로만, 내용은 전혀 아니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미지만 지금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그때 얼마나 칼비노한테 데었는지 한 동안 그이의 작품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반 쪼가리 자작>, <힘겨운 사랑>을 차례로 읽기에 이른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거기서 말았다. 근데 작년에 김희선이 쓴 <무한의 책>에 책의 상당부분이 미국의 ‘트루데’라는 가상의 도시를 무대로 한다. 책의 후기에서 도시 이름 ‘트루데’는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따왔으며, ‘초원을 유목민처럼 유동하며 세상은 끝도 없는 트루데란 보이지 않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차용했다고 밝혔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다음에 읽을, 그리고 칼비노가 쓴 작품 가운데 마지막으로 읽을 책으로 선택했고, 이제 읽었다. 그 도시가 8부, 네 번째로 소개된다.
 내게 누군가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Invisible City of Kitezh,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쯔>를 떠올리면서 대번에 “키테쯔”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나더러 그럼 키테쯔란 도시를 칼비노가 책에 쓴 55개의 도시처럼 키테쯔의 특징을 강조하여 묘사해보라, 라고 했다면, 차라리 똥을 싸고 말겠다고 답했을 거 같다. 음악 하나 듣고 특징을 강조해서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서술을 한다니 그게 말이나 돼? 된다. 적어도 칼비노한테는.
 책은 13세기 중엽, 젊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한汗Khan의 제국 일부이자, 몽고인이 지배하는 지금의 중국 땅을 방문해 쿠빌라이 칸을 만나 자기가 구경한 세상의 쉰다섯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의 손자로 원元나라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작자 치하에서 몽고의 고려 식민지개척을 완성했다는 건 그냥 참고. 몽고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만든 황제 앞에서 젊은 이탈리아 장사꾼은 자신이 정말 머물렀던 경험이 아니라, 자기 뇌 활동의 결과에다가 고향 베네치아의 곳곳의 흔적을 묻혀 (쉽게 읽기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시의 광경을 묘사해놓았다. 내가 읽은 칼비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 물론 역자 이현경의 빼어난 한국어 실력이 뒷받침했겠지만 서정적이고, 사색적이고, 다양하게 상징적인 매력적인 한국말 책으로 만들었다. 총 9부. 1부와 9부는 열 개의 도시, 나머지는 각 다섯 개의 도시, 합해서 쉰다섯 개의 도시에 관한 짧고 아름다운 설명이며, 각 부는 앞뒤에 쿠빌라이와 폴로의 대담으로 구성한다. 칼비노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해도 맞고, 그런 따위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해도 맞다. 그냥 독자가 읽으면서 생각하는 게 정답인 소설.
 어떤 작품인지 도시 ‘디오미라’를 설명하는 1부의 첫 도시를 통째로 가져오는 것으로, 책의 맛을 보여드림과 동시에 독후감을 끝낸다.





도시와 기억 1



 그곳에서 출발해 사흘 동안 동쪽으로 간 여행자는 육십 개의 은빛 돔과 온갖 청동 신상들, 주석으로 포장한 거리, 수정의 극장이 있고, 황금 닭이 매일 아침 탑 위에서 노래하는 도시 디오미라에 도착합니다. 여행자는 다른 도시에서도 이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이미 이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특징은, 해가 점점 짧아지고 음식점 문 위에 달린 색색깔의 등들이 동시에 켜지고 테라스에서 어느 여인이 “오!”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9월의 어느 날 저녁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 이미 이와 똑같은 저녁을 경험했고 이제는 그때가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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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한 해, 저를 책 읽기의 짜릿한 엑스터시로 끌고 갔던 것들만 골랐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2018년엔 권 수로 219권, 편 수로는 192편을 읽었습니다. 가장 긴 책은 홍성원의 <남과 북> 여섯 권 짜리고, 다음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네 권 짜리였습니다. 이 가운데 먼저 약 50편을 골랐습니다. 내역은 글 아래에 따로 첨부했습니다. 선별한 책 중에서 또 골라 열 권을 선택했고,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오늘까지 바뀌지 않았고요. 소개는 읽은 날짜 순서로 하겠습니다. 이 열 권과 특별한 한 권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1.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불>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만엔 원년, 그의 전작 <익사>에서 보다시피 1860년의 농민 반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 당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였던 종조부를 둔 한 청년이 68세대로 성장, 반미운동의 전초적 투쟁을 벌이다가, 갑자기 변절, 이후 의식의 혼란을 초래한다. 미국에서의 실종을 거쳐 만엔 원년에 종조부가 투쟁을 벌였던 고향으로 돌아온 다카시. 그가 지역 실권자 조선인 백승기와 벌이는 한 판 풋볼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하우스 키핑>을 선택했으나 사실 같은 이유로 <홈>도 추천한다. 가족 구성원이 떠나가고, 상처받고, 돌아오고, 기다리고, 다시 떠나는 일, 그 쓸쓸함. 기관차를 전속력으로 몰다가 선로를 이탈해 깊은 호수에 빠져 시신도 못찾은 남편. 친구 차를 빌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고는 역시 전속력으로 호수를 향해 돌진해 실종돼버린 딸. 이제 남은 가족들은 그들이 죽었음을 알지만, 어느 날 문득, 남편이나 딸이 슬며시 웃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여는 날이 있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기다림. 서늘한 아픔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고등학교 생물교사가 이런 책을 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통의 프랑스 시민들은 복종과 순응으로 시간을 버텨냈을 뿐이지만, 타국에 의한 피통치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가 독일 군인들에게 당한 고통보다 백 배 이상 더 악랄한 살상과 살육을 벌였다는 지적. 프랑스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결코 피부색을 달리하는 왜소한 아시아 인들을 향하지 않고 오직 갈리아 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을, 생물교사 알렉시 제니는 정식으로 드러낸다.



4,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폐퀴셰>

 플로베르의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우울한 명상형 은둔자 플로베르가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쓴 것 같은 작품. 세상을 살고 이제 갈 때가 되어 돌아보니 별 거 없이 사는 거 자체가 한 판의 코미디. 그리하여 플로베르는, 위대한 작가가 가끔 그러하듯, 마지막 작품으로 희극을 선택한다. 희극의 진정성은 희극 자체에 진정한 비극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 두 필경사 부바르와 폐퀴셰가 뜻과 돈을 모아 쓴 사과 브랜디와 이름이 같은 칼바도스로 낙향,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맛보는 장면을 읽으며, 그래 인생 자체가 칼바도스 맛이야, 희극 속의 쓴 비극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



5.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본 영화 때문에 이 책을 멀리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읽게 된 <쿠오 바디스>는, 영화가 원작의 재미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 깜짝 놀랐다. 폴란드의 자랑 시엔키에비츠의 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재기발랄하기도 하고, 심지어 깊은 사색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TV 때문에 직접 독서의 매력을 놓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것 다 빼고, 책 표지에 나신의 여성이 부여잡고 키스를 퍼붓는 대리석상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의 현명한 언행을 감상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작품은 명작이다.



6.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칼루스와 루카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두 쌍동이 형제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형제는 절대로 울지 않고, 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잔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며, 한 편으로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을 그치지 않는다. 착한 악마들. 완전하게 건조한 문장으로 블랙 유머와 엽기적 내용을 서슴없이 서술하는 크리스토프. 이 쌍동이 형제가 정말 쌍동이일까? 의식의 분리, 선악, 호오, 이런 두 양식이 상호 교차되는 것의 상징 코드 아닐까? 그건 독자 마음이다.



7. 홍성원, <남과 북>

 

 전쟁을 치룬 나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보다 전쟁 전반을 조망하는 문학작품이 없는 국가도 없다. 무승부로 끝난 전쟁 이후 남쪽과 북쪽 모두 전쟁의 위험을 강조하며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남쪽은 국방군이, 북쪽은 인민군이 절대 선이었어야 했을 것이리라. <남과 북>은 70년대에 발표했다가, 박정희가 죽자마자 곧바로 개작을 해서 전쟁 발발 바로 전부터 종전 바로 후까지 전선과 후방에서 각각 전쟁의 비참함을 당한 모든 국민의 모습을 담은 역작. 진정한 전쟁문학이 없던 우리나라에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



8.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처럼 기본적으로 가치, 즉 품질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사고와, 나아가 모든 물질과 재화의 가치, 품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등 뒤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여행을 하며, 한 편으로 여정에서 생긴 조그마한 일과 특히 모터사이클을 매개로 가치, 질에 관한 탐구로 사고를 확장하게 된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학문을 통섭한 수재로 철학, 수사학, 수학과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기계공학 등에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 그리하여 사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을 타도하기 위해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모터사이클의 뒷자리에 앉은 아들 크리스는 여행 도중 아빠 등짝 밖에 보지 못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9. 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이토록 장려하고, 화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독후감을 썼다. 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는 내내 화려한 문장의 매력 때문에 행복했다. 서로가 숨막히게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두 연인을 질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 나는 그걸 안다.



10.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1918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서둘러 서유럽으로 망명한 것과 달리 혁명과 동시에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조모를 망명시키고 자신은 러시아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혁명 정부에 의하여 현재 자신이 묵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의 유폐형을 선고받고, 스위트룸에서 지붕밑 <라 보엠>의 미미가 살던 꼭대기 방으로 옮기게 된다. 귀족으로 태어나 인간 자체가 신사인 백작은 책상다리 안쪽 비밀 책상 속에 든 예카테리나 금화로 일 하지 않고도 고급호텔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특별하게 관계를 맺는 몇 명의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게 된다. 나는 쉽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이건, 명작이다.




2018년 최고의 한 권.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는 삶이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한 보편성 역시 확보해야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아랫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 남은 삶을 보내야 했던 김태정. 가난하고 병마에 고통을 받지만 결코 궁상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는 단단한 중심의 시인. 인생의 곤고함을 이 시인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에 관해서는 말을 길게 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법. 나 역시 조심스럽게 이 책의 일독을 모든 분께 권한다.




* 참 아쉽게 위의 열한 편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책을 꼽는다.




2018년에 읽은 매력적인 작품 목록.

도서명출판사/제작사저 자,  역 자
사서 빠뜨재미마주즈느비에브 빠뜨, 최내경
화이트 노이즈창비돈 드릴로, 강미숙
루시 골트 이야기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문학동네이반 부닌, 이항재 
호르두발지만지카렐 차페크, 권재일
운명민음사임레 케르테스, 유진일
더 컬러 퍼플한빛문화사앨리스 워커, 안정효
플라톤의 반란자작나무(송학)피터 애크로이드, 한기찬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줄리언 반스, 송은주
마농의 샘펭귄클래식마르셀 파뇰 | 조은경
싱글 맨창비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조동섭
만엔 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오에 겐자부로 | 박유하
의식동아시아레슬리 마몬 실코, 강자모
하우스키핑마로니에북스메릴린 로빈슨 | 유향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민음사모신 하미드, 왕은철
여름의 끝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민은영
프랑스식 전쟁술문학과지성사알렉시 제니, 유치정
부바르와 페퀴셰책세상귀스타브 플로베르, 진인혜
쿠오 바디스민음사헨릭 시엔키에비츠 | 최성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민음사제임스 M. 케인, 이만식
절망문학동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최종술
노변의 피크닉현대문학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보석
미국은 섹스를 한다자작나무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까치아고타 크리스토프 | 용경식
칠레의 밤열린책들로베르토 볼라뇨, 우석균, 
천국은 다른 곳에새물결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김현철
고슴도치의 우아함아르테뮈리엘 바르베리, 김관오
아메리카나민음사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황가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김태정 지음
그랜드 호텔문학과지성사비키 바움, 박광자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학고재사바하틴 알리, 이난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리온 포이히트방거, 문광훈
남과 북문학과지성사홍성원
비 온 뒤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 정영목
윌리엄 트레버현대문학윌리엄 트레버, 이선혜
아무도 없어요최측의농간박서원 지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조너선 사프란 포어, 송은주
랜덤하우스코리아메릴린 로빈슨, 유향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칠드런 액트한겨레출판이언 매큐언 | 민은영
달콤한 노래arte(아르테)레일라 슬리마니, 방미경
사촌 퐁스을유문화사오노레 드 발자크, 정예영
우리 시대의 아이문예출판사외된 폰 호르바트, 조경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서커스조르지 아마두, 안정효
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연극과인간김성희 지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문학과지성사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장경렬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민음사에벌린 워, 백지민
주군의 여인창비알베르 코엔, 윤진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에이모 토울스, 서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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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2-31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주군의 여인>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폴스타프 님 새해에도 소주와 책과 함께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

Falstaff 2018-12-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내년엔 책은 그만두고, 돈 왕창 버시고요, 하시고 싶은 거 맘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데 세계일주 같은 거요.
<주군의 여인>이 좀, 아니 많이 장황합니다. 읽다가 자빠질 수도 있는 책이라서 선뜻 권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뭐 그런 거 다 팔자니까, 알아서 하시기를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3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의 책들은 우직 묵직 견고합니다 무게가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Falstaff 2018-12-31 23:06   좋아요 1 | URL
내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께 늘 좋은 일만 생기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동리 문학전집 1 : 사반의 십자가 - 탄생 100주년 기념 김동리 문학전집 1
김동리기념사업회 / 계간문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나와 비슷한 시절을 지닌 사람들은 <사반의 십자가>를 꼭 읽어봐야 하는 교양도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사반’이란 것이 사람의 이름이며, 심지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의 왼쪽에서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강도’ 또는 ‘도적’인줄 몰랐을 것이다. 지금 예수와 함께 죽은 강도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니까, 성경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그 중 한명이 죽어 예수와 함께 낙원으로 갔고, 다른 한명은 예수더러, 임자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임자와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답글을 올린 엄숙한 기독교인은 심지어 알지도 못하면서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는 건 ‘성서를 오염시키는 행위’란다. 그러니 이 같은 진실에 입각해 발언하자면, 이미 죽은 김동리는 왼쪽 강도에게 ‘사반’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 위에서도 일어나게, 죽음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더러 마치 에굽의 모든 장자들한테 같은 날 죽음을 선사해주어 집집마다 같은 날에 제사지내게 만든 모세처럼 기적을 일으켜주길 끝까지 기대했다는 취지로 작품을 썼으니, 지금 김동리는 23년 동안(벌써! 세월 빠르다) 지옥의 유황불에 지글지글 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들한테 제일 큰 백그라운드는, 야훼. 선택받은 민족으로 모세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기타 등등의 판관들의 자손인 이들의 역사는 탈 에굽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 땅에서 언제나 잘 먹고 잘 살았던 건 아니어서, 이들이 주로 타국의 신부와 결혼하면서 유입된 이국의 신들에게 경배할 때마다 질투의 야훼가 불칼로 다스려 온갖 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하고야 만다. 이때마다 혜성같이 거의 메시아 급의 인물이 등장해 유대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곤 했으니, 서기 30년 조금 넘은 시절,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또다시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우리한테도 비슷한 야담野談이 전승해 내려온다. 주로 백기완, 심지어 이청준 등의 글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소년장사 이야기. 주로 양반 지배계급이나 왜나라 사람들이 소년장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혈맥이 지나가는 산맥에 쇠못을 박아댄 이야기, 기억하시지? 하여간 AD 30년경에 일곱 명이 팔뚝에 날 선 비수를 쓱 그어 피를 뚝뚝 흘려 받은 다음 야만스럽게 그걸 섞어서 서로 마심으로 ‘혈맹의 단’ 즉 혈맹단血盟團을 결성해, 각 단원은 수하로 또 다른 일곱 명의 이차 세포를, 또 일곱 명의 삼차 세포를 등등으로 구성한 대규모 독립투쟁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여기서 대장, 즉 단장을 먹는 인물의 이름이 바로 ‘사반’이다. 사반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의 군대에 대항을 해봤자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하던 중 예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세금 걷는 공무원, 세리를 걷어찬 거 빼고 여하한 폭력에도 절대 반대를 외치던 예수가 로마 군대와의 전쟁을 수긍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죽은 다음 하느님 우편에 앉을 생각만 잔뜩 하고 있던 예수께서.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리는 지점이다. 서로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 그러니 이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었겠지. 근데 신기하다. 책의 시간 배경에서 한 세대에서 한 30년쯤 지나면,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이 한 패가 되어 거세게 로마에 대항하는 무장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정말로 세계최강의 군대인 로마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바, 결론은 유대민족이 거덜이 나고, 이때 눈부신 활약을 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공적으로 두 부자가 차례대로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다. 티투스가 2년밖에 황제를 못해 그게 혹시 야훼가 불침을 놓은 건지는 몰라도.
 조금 지루했다. 420쪽 가까이 되는 장편소설. 분량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은 벌써 19세기에 휘두른 니체의 망치에 맞아 절명한 상태라 나로 하여금 도무지 흥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원래 “현대문학”지에 연재했던 것에다가 삼사백 매 정도를 보충해 1958년에 상재하고, 그걸 다시 개작을 해 1982년에 재상재한 책. 그래서 그랬나?
 김동리는 황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순수문학을 평생 고집했던 작가. 황순원 선생은 일제가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평양 근처 시골로 내려가 골방에서 우리말로 소설을 썼고, 김동리 선생은 붓을 아예 꺾어버렸다. 이거 쉬운 일 아니었을 걸?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악당 염석진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출석해 무죄를 받은 다음, 안옥윤(전지현)한테 총 맞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하잖나.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김, 황 양씨도 언제 해방이 돼 조선어로 작품을 쓰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전히 조선어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붓을 꺾었던 거다. 작가가 작품을 못 쓰는 상황이란 우리 같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않았을까. 이때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를 구상했단다.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조선. 그러나 목숨이 먼저니 감히 쓰지는 못하고 머릿속에서 자꾸 가지만 치다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서 고통 속에 숨어 살고, 나중에 부산에 내려가 소위 ‘밀다원 시대’를 만나고, 다시 수복해 서라벌예대 문창과 교수를 하면서 드디어 20년을 구상한 <사반의 십자가>를 원고지 위에 옮기게 된다. 비록 이이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격렬한 리얼리즘 또는 참여문학 종사자들로부터 수없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에 이런 꼰대도 분명히 훌륭한 존재의 이유를 갖는 법이다. 숨 막히던 시절, 고집스레 순수문학의 길을 가는 작가들도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소설판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을 테니까.



 독후감 다 썼다. 이제 잡담 시간.
 1. 자신이 생각하기에 천주교든 개신교든 하여간 환자 수준의 기독교 신자/신도라면 책을 읽기 전에 지금 읽을 책이 전문 거짓말쟁이가 쓴 소설이란 점을 충분히 인식하시라. 이걸 읽고, 읽으면서 감히 성서에 나온 진리를 왜곡했다느니 하시려면 애초부터 손에 잡지 마시라.
 2. 김동리가 1913년생. 그의 예수는 우리가 이발소 거울 위에 달려 있어 보곤 했던 바로 그 초상화의 예수. “예수의 그 호수같이 맑고 푸른 두 눈이 하늘의 끝없음을 머금은 채 사반의 핏발 선 굵은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114쪽), “예수는 그 백랍같이 희고 긴 손(왼손)을 들어 보였다. 순간, 사반은 ‘그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이라고 하던 도마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만큼 그의 희고 긴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어쩌면 곧장 무지개가 비낄 듯한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115쪽) 푸른 눈과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과 길고 얇은 손가락의 가진 ‘목수carpenter’가 말이 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짧고 두꺼운 손가락과 억센 손톱을 지닌 건장한 체격. 이게 내가 생각하는 중동 아시아인 목수였던 예수의 모습이다.
 3. 이걸 읽자마자, 어떤 종류의 안도감이 흐른다. 드디어 오랜 숙제를 해결한 거 같은 느낌. 원래 <을화>를 고르려 했는데 작년 이맘때든가, 아, 벌써 3년 전이다, <무녀도>를 읽은 바 있고, <을화>가 단편 <무녀도>를 개작한 것이란 점이 <사반의 십자가>로 선회하게 했다. 하긴, <을화>하면 난 영화배우 김지미가 먼저 떠오르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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