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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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이렇게 늦게 읽은 것은, 아래 첨부한 것과 같이, 지난 세기 말에 내가 (아직도!)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연재했던 칼럼처럼, 같은 제목의 영화의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소피의 선택>을 얼마나 재미있게 보았는지 굳이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어느덧 사보 칼럼을 쓰던 시절도 근 20년이 지나가버려 책을 고를 때마다 윌리엄 스타이런이 쓴 원작, <소피의 선택>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였다.
 두 권 900쪽이 훌쩍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영화에서는 원작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관찰자 스팅고의 사생활 거의 전부를 다루지 않은 건 자연스럽게 보였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소피가 숨기거나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 당연히 그녀의 비밀은 20 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인류사 상 가장 비참했던 시절의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개인의 참혹한 비극, 뿐만 아니라 참혹한 환경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끝 간 데 없이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 이전의 한 생명체로의 본능을 고스란히 밝히는 일. 이 깊은 비밀 혹은 거짓말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작가는 일인칭 관찰자 스팅고에게도, 비밀 또는 거짓말을 갖고 있는 두 주인공, 소피와 네이선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또는 충격을 여러 번 마련해야 했겠다. 이런 과정을 다 밟아야 하니 작품을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출간한 시점이 1979년,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골적 베드씬이 몇 장면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독후감도 그렇고, 영화 감상문도 그렇고, 재미있으면서도 오래 머리에 남을 작품에 관해 쓰면서 작품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내용을 함부로 밝힐 수는 없다. 그래 이런 작품에 관해 쓰기가 대단히 난감하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루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볼 생각이 있으면 꼭 소설부터 읽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원작을 아주 잘 따라간 영화라, 소설의 중요한 부분만 집중해 영상에 담았기 때문에 만일 나처럼 영화부터 봐서, 주인공들의 표정과 성격과 연기가 머리에 박힌 다음에 소설을 읽으면, 소설문학 특성상 사건들의 개연성을 주기 위한 준비단계가 장황하게 느낄 수 있을까봐 그러하다.
 주인공 소피Sophie는 악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을 견디며 생존한 여인이다. 그녀가 아우슈비츠와, 해방 후 소련군 관리 아래에 있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또 몇 년을 지내는 동안 극심한 굶주림과 각기병을 필두로 한 각종 질병에 시달려 이가 모두 빠진 상태로 뉴욕의 브루클린에 도착한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은인이라 할 수 있고, 나중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며, 진정한 천재를 가졌으나 편집증 증세가 있는 제약회사 파이저Pfeizer 연구원으로 알려진 네이선을 만나 전쟁 전의 미모를 되찾는다. 물론 벤베누토 첼리니가 만든 것처럼 기막히게 아름답고 체형에 꼭 맞는 틀니와 함께. 남부 출신 작가지망생이자 이들의 관찰자인 스팅고가 단순히 값이 싸다는 이유로 이 유대인 지역의 분홍 페인트가 잔뜩 칠해진 하숙집으로 들어오면서 셋의 우정이 깊어지고, 문학인생이 보다 풍요로워 지는데, 세상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네이선의 편집증이 광적인 수준까지 도달해 소피와 관찰자 스팅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편집증. 이게 배우자나 애인을 향할 경우에 편집증은 엄청난 질투의 모습을 띠고 사나운 손톱을 세우게 된다.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인 네이선, 그토록 자상하고 배려해주고, 활수한 친절이 넘치던 쾌활한 천재는 편집증이 도질 때마다 소피를 학대하고, 급기야 폭행하고, 스팅고에게조차 가차 없이 독설과 모욕을 퍼붓는다. 세상에 네이선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소피. 그녀는 어떻게 세상천지 홀로 몸이 되었을까.
 그렇다. 책은 폴란드 여자 소피가 어떻게 해서 세상의 의지가지 하나 없이 브루클린에 홀로 남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일찍이 폴란드 유명 법학자를 아버지로, 음악을 가르치는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둔 소피. 그녀도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빈에서 공부를 하려던 잘 나가던 부르주아 계급. 그래, 하나만 일러두자. 소피의 아버지는 평소 독일 제3제국의 의식을 맹종, 아니, 앞서가던 의식의 선구자로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을 말살하고자 주장하던 반유대주의의 선봉장이었으며, 그녀의 남편 또한 아버지의 애제자였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가장 먼저 총살을 당했던 독일 정신 지지자들. 나치에겐 폴란드인들은 그들의 철학이나 정신세계와 관계없이 모두 쓰레기였으니까. 남은 사람은 결핵으로 죽어가는 엄마와 아이들. 혹시 엄마가 고기를 자시면 조금이라도 더 연명을 할 수 있을까, 도시 밖으로 나가 햄 한 덩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중요한 범죄행위’를 벌이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돼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들어간 여인. 책에는 아래와 같은 발언이 두 번 나온다.


 이 이야기 끝에 소피가 친위대 하우프트슈투름퓌러(대위) 프리츠의 환영사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소피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시 옮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나요. 그가 말했죠. ‘너희들은 요양원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에 온 것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나가는 거다.’라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이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철사에 목을 매고 죽어도 좋다. 여기 유대인이 있으면, 너희들은 이 주 동안만 살게 될 것이다.’라고 했죠.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수녀가 있나? 수녀는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살게 된다. 나머지는 모두 석 달이다.’” 소피는 수용소에 도착한 후 이십사 시간이 안 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었고, 프리츠가 독일어로 이를 확인해 준 것일 뿐이었다. (2권 253쪽)


 이것 말고도 혹시 들어보셨나? 나는 처음 알았다. “레벤스보른.”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악마적 행위로 투명한 피부와 금발을 지닌 소년 소녀들을 3제국으로 납치해 독일인으로 양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이런 어린 아이들을 대량 납치한 다음 (폴란드의 한 군郡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어린이가 납치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들을 심사해 선택된 아이들은 독일의 각 가정으로 입양시켜 독일인으로 키우고, 탈락한 아이들은 역시 굴뚝의 흰 연기로 바꿔버리는 행위였단다. 아우슈비츠 안에서 소피는 자기 아들이 그나마 레벤스보른으로 선택을 받으면 앞으로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 한 쪽에서 살 수는 있을 테니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용소장 헤스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건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장면.
 이렇듯 책은 아우슈비츠와 브루클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어져 나간다. 간혹 스물두 살의 숫총각 스팅고의 이루어지지 않고 폭소만 터지게 하는 성적 무용담과, 미국 남부와 북부 지역간 갈등이 곁들여지고. 그러나 역시 소설의 척추는 어디까지나 가장 불행한 운명을 거치는 ‘인간’의 비극과 후유증, 불운한 천재와의 극적인 사랑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별개로, 나는 그냥 보통의 인간, 그가 착하거나 악하거나 별로 구별하지 않고 늘 우리 곁에 있던 그냥 사람이, 나쁜 권력을 쥐게 됐을 때 변할 수 있는 모습에도 관심이 많이 갔다. 스탠퍼드에서 유치장 실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순간의 변심, 왔다 갔다 하는 기분, 대상자의 외모와 노소, 무엇보다 첫인상에 따라 손짓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행동 양식. 이게 내게 대단한 관심을 일으켰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안 가르쳐드리겠다.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틀림없이 나와 다를 의견을 개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함.
 책의 주요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을 이 정도 했으면 그걸로 됐다. 독후감은 여기서 끝난다. 이제 한 가지 궁금한 것. 주인공 소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 이어서 소련 치하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일정 기간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소피의 건강에 치명상을 준 것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전시 치하에 있던 아우슈비츠에서라기보다, 해방 후 소련 관리하의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더 심하게 망가졌다.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읽어보면 소련 치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 소련군이 그저 심심해서 주인공(가운데 한 명)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뜯어 볼 살까지 한꺼번에 얼굴에서 떨어져나가는 장면도 나오고, 그곳에서도 숱한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증언하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누구라도 그자가 프롤레타리아이기만 하면 만국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던 볼셰비키의 후예들의 만행은 왜 아직 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 “도대체 소련 유대 수용소에선 뭐가 있었던 거야?”라고 포스트잇에 적혀 책 속 한 페이지에 붙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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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소피의 선택> - 정처없는 영혼의 종착, 그러나.....
알란 J. 파큘라 감독, 메릴 스트립 주연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막연하고 또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영화를 가리는 척도가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제일 그럴 듯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보고 난 다음에 그 잔영이 눈에 한참 어리고 어려서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그 한 장면을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하던 무아경이 어느새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깊은 사색을 유도하게 하는, 그런 영화라고 하면 그렇게 큰 까탈은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19년 전이던가요, KBS의 명화극장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알란 J 파큘라 감독이 연출을 하고, 그때 벌써 젊어보이지는 않았던 메릴 스트립이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피의 선택>이 그런 영화였지요. 그 후 <소피의 선택>은 가슴 속에 언제나 묵직하게 자리하여 언젠가는 꼭 다시 봐야하는 숙제로 남아있었습니다만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한 기억이 없이 세월이 흐르더군요.
 이 장면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의 소피와 네이단 커플, 그리고 화자로 등장하는 스물 두 살의 작가 지망생 스팅고가 뉴욕의 강을 가르는 긴 다리를 걷습니다. 네이단이 스팅고의 원고를 빼앗아 읽은 다음입니다. 밤입니다. 때마침 다리 위엔 이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차들도 없이 텅 빈 다리..... 중간쯤에 와서 네이단은 술잔을 하나씩 돌리고 샴페인을 따릅니다. 그는 난간위로 올라가 술잔을 들고 말하지요.

 

 “이 다리에서 / 많은 작가들이 미국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냈고 / 저 변두리의 휘트먼이 미국대륙 전체의 정감을 노래했노라. / 일찍이 토마스 울프와 마크 트웨인이 섰던 이곳에서 / 스팅고를 환영하노라 / 그 역시 빛나는 별들 중 하나가 되리라. // 스팅고를 위하여” 


 어떤 재주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건배 제의를 받을 수 있겠으며, 또 어느 빛나는 입술을 가진 천재가 있어 이렇게 건배를 제의할 수 있겠습니까. 영상을 앞의 정황을 묘사하지 않고 이렇게 단면만 소개하면 전혀 감흥이 오지 않지만, 19년 전 2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위 따옴표 속의 수사(修辭), 그리고 이어서 가로등 위에까지 기어 올라간 네이단이 한 젊은 예비 소설가의 앞날을 예견, 그리고 축복하면서 강물을 향해 빈 술잔을 던지는 모습은 정말로 깊은, 그러나 조금쯤은 사치스런 갈망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이런 정황, 작가의 성공담하고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슬프지요. 위에서 인용한 스팅고는 그저 영화의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이야기한다면 나치즘으로 대표하는 전체주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20세기 중반의 유대인 학살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선 너무 많은 저술들과 영상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쉽게 언급하기가 힘이 들지요. 대중들에게 친숙한 필름에서도 우린 아주 쉽게 스필버그가 연출을 한 <쉰들러 리스트>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여지껏 매체들이 다루어온 것은 나치즘의 광기와 유대인의 희생의 장면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꼬집을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작가나 제작자들이 쉽게 대중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실적인 학살의 장면이나 그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학살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육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유증에 대해서. 그들의 대뇌에 박혀있을 너무 깊숙한 고통의 기억과 상실과 공포가 어떻게 영혼을 갉아 먹는지에 관해서는 그것이 유럽대륙이건, 헐리웃이건 간에 제대로 숙고된 적은, 아닙니다, 고민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둔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영혼이 황폐화돼가는 모습을 그린 <디어 헌터>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것은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의 시각을 너무나도 감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쉽게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하기 결코 힘들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피의 선택>은 참으로 대단한 영화이지요.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인종청소를 이론적으로 지지한 교수 아버지를 둔 소피는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남편이 집단 사형을 당한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갑니다. 수용소에서 두 아이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혼자 살아남은 소피가 미국에 도착해서 유태인 네이단과 동거를 합니다.
 네이단은 넘쳐나는 예술적 기질과 기상천외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는 기행을 곧잘 하고 다니는 천재이지만, 불행히도 망상증 환자입니다. 천재성이 도가 넘은 것이지요.
 모든 것을 다 잃은 소피에게 네이단은 오직 하나, 가진 것, 기댈 수 있는 곳,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천재이자 망상증 환자인 네이단 또한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서로의 사랑일 뿐이지요.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은 슬픕니다. 미친 듯이 서로에게 몰두하다가, 네이단이 비정상 상태가 되면 물어뜯듯이 소피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또다시 뜨겁게  화해하고......
 이들의 사랑과 죽음이 영화의 척추입니다만,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보는 사람의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영혼이 황폐되어 이젠 남길 것이 그들의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 두 사람, 두 영혼의 피 흘림이 전편에 걸쳐 묘사되고 있답니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하나는 네이단의 광기어린 천재성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소피의 고갈된 영혼이 정처를 찾아 떠도는 모습.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예고편을 보시고 정작 가슴저린 영화를 안보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영화가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왜 소피의 선택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랑으로 마감되어야 하는지, 이것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야 예의이겠습니다.
 소피와 네이단이 침대 위에 나란히 옆으로 누워 죽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팅고는 에밀리 디킨스의 시선집을 집어 듭니다. 디킨스의 시, 그것이 이들의 죽음이 종결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단초가 되겠기에 여기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돌아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히 두어
아침 햇살 외 그 어떤 것도
감히 훼방치 못하게 하라




 


  * 네이단이 다리 난간에 올라 스팅고를 향해 찬사를 퍼붓는 장면은 소설엔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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