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깔 있는 개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열정>을 읽고 단박에 산도르 마라이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마라이의 우리말 번역본 ‘소설’은 전부 품절이나 절판이다. 수필집은 한 권 판다. 그래 기다리기만 하다 어느 날 드디어 헌책방에서 <성깔 있는 개>를 찾았고, 이제 읽었다. 잠깐 검색해봤다. 백과사전 위키피디어가 언제 수정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미국에도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마존에 <성깔 있는 개>의 영어판도 없다.) 마라이가 1900년생이고, 89세에 자기 머리통에 총알을 관통시킴으로 해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죽고 나서야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30세 부터는 자신의 모국어인 헝가리 언어, 전 지구에서 극히 일부분만 해독 가능한 약소국의 언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키피디어에 의하면 가장 빨리 번역한 것이 2001년 <헝가리의 추억>이란 시집이다. (세상에, 시도 썼네.)
 <열정>에서 마라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저 헝가리의 먼 촌구석 자신의 영지에 돌아와 무려 41년 43일을 기다린 끝에 필생의 친구 콘라드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렸다. 75세 동갑나기 친구 콘라드가 먼먼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마치 채무처럼, 자신을 찾아올지 확신하며 나이에 비하면 최고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무려 41년을 기다린 주인공 헨릭. 그들이 이제 생을 정리할 단계에서 인생을 조망하고, 달관하고, 성찰을 거듭한 세월을 끝내고 필생필사의 한 판 승부를 그린 참 멋있는 작품이다.
 32세의 마라이가 쓴 <성깔 있는 개> 역시 헝가리 문자로 쓴 소설이다. 때는 양차 세계대전의 중간쯤. 약 20년 간 유럽은 잠깐 평화의 시기를 지냈으나 동서유럽의 접경지 헝가리의 부다 지역에선 전쟁 동안 거의 모든 산업기반시설이 망가져버려 시민들은 가난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그리해도 세월을 흐르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온다. 이름은 났지만 가난한 문인이자 주인공인 ‘신사’는 백 펭고(당시 헝가리의 화폐단위)를 가지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곤고한 시기였고, 그래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면서도 언제나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 했던 시기. 신사는 시내 중심가를 거닐다가 난데없이 택시를 타고 동물원을 찾아, 그곳에서 개 사육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순종 헝가리 견종 ‘풀리’인줄 알고 낳은 지 4주 된 잡종견 한 마리를 60 펭고에 사 먼지덩이 같은 털 뭉치처럼 보이는 작은 강아지 ‘추토라’를 주머니에 넣어 온다. 사육사가 철석같이 약속한 품종 확인서도 받지 않고서.
 이후 약 10개월에 걸친 개 사육기.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할 내용들. 개도 점차 커가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성격이 형성되며, 고집도 생기고, 넘쳐흐르는 젊음 또는 건강을 과시해야 하고, 사고도 치면서 성장을 하는 법. 애당초 신사가 잘못했다. 개는 마당 있는 집에서 놔길러야 한다는 게 내 생각. 비록 이젠 개를 키우는 것보다 먹는 일을 더 즐기지만, 나도 소싯적엔 마당 넓은 집에서 포인터, 도베르만, 복사 등을 키우는 집에서 자라서 안다. 몸높이 37~44 센티미터의 중형 개 추토라를 1920년대 부다(자꾸 ‘부다’ 그러니까 헛갈리시지? 바로 옆에 강이 흐르는데 강 너머 지역이 ‘페스트.’ 합해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다.)의 좁은 아파트에서 키우는 게 애초에 넌센스였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강아지는 날이 가고 주가 갈수록 점점 커지는데 이에 비해 아파트 면적은 절대 커지지 않는 한계 속에서 개가 받을 스트레스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으니. 여기에 잡종견이 순종보다 훨씬 똑똑하고, 다른 말로 하면, 영악하다는 진실을, 신사와 그의 가족은 알긴 알았으되, 진짜 알게 됐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리하여 신사와 그의 가족은 똑똑한 개 추토라를 국경 너머 먼 목장지대로 보내버리기로 결정을 하고, 말대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를 알아챈 추토라의 반항은 극적으로 작품을 비극으로 끌고 가버린다. 어째 비슷하지? <열정>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대결과 <성깔 있는 개>에서 신사와 추토라의 맞짱.
 <열정>이 두 노인 사이 평생을 기다렸던 필생필사의 대결만 아니라 그것이 포함하는 세월 동안 익고 또 익었던 무상함이 독자의 가슴에 호소를 하듯, 이 책도 강아지를 귀여워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가족같이 여기다가 몇 번의 전환점을 맞아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 ‘뭔가’가 마지막 바로 앞 페이지에 ‘과감하게도’ 분명한 단어로 나오는데,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에 옮길 수 없다.
 하여간 산도르 마라이는 참 이상한 작가다. 이상한 방법으로 독자의 심금을 저리게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