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풍아송風雅頌>이란 아름다운 제목 딱 하나만 보고 읽었다가 똥 밟은 책의 저자 옌롄커. 다시는 옌롄커가 쓴 책을 읽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었는데, 문학 전반에 걸쳐 현대 중국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옌롄커, 이미 쓰레기통에 버린 작가의 이름이 꼭 한 두 번은 나오더라는 말씀.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는구먼. 놀랠 '노'자여!) 그래 한 권을 더 읽어보고 결론을 내리려 마음을 바꿨고, 이 작자가 일 년에 장편 한 권씩은 써 낼만큼 다작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지 조금 헤매고 있을 때, 이 책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무지하게 야하다”는 평을 읽고,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게다가 헌책방에서 싼 값에 팔고 있기도 했으니 더 말 해 무엇 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약 250쪽의 길지 않은 장편인데,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소설이 한 권 있었으니,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명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아, 고정하시라. 그 책이 생각났다는 것이지 감히 채털리 여사, 뚝심 있는 여성이 삶의 질곡을 걷어 차버리고 혼자 우뚝 서는 결단에까지 감히 비비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왜 로렌스가 생각이 났느냐 하면, 이 책에서는 비록 현역이지만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와중에서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 많은 남편과 사는 젊은 아내가 서방질하는 장면을 책의 핵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 ‘우다왕’은 시골 출신의 사병으로, 장인과 아내의 평생소원인 도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입대해 만 5년을 충직하게 복무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민출신 군인들 역시 거의 모두 충실하게 복무하는 바람에 간부로 진급하지 못하고, 따라서 처자식을 도시로 옮겨주지도 못한 채 빌빌대던 중, 운이 따랐는지 사단장의 관사 당번병으로 들어가, 중국 군대의 당번병도 80년대 초반 한국 군대의 당번병과 마찬가지로 사단장(뿐만 아니라 작은 독립부대장까지) 가족의 삼시 세끼와 (심지어 사모님의 똥인지 뭔지 하여간 뭔가가 묻은 빤쓰를 포함해 무진장한)빨래와, 집안 청소와, 하이고 애새끼들 가정교사까지 몽땅 해야 했나보다. 설마? 하, 내가 거짓말을 할까. 80년대 초에 군역을 치룬 남자들 아무한테나 물어봐라. 내 말이 구란지 아닌지. 다행히 이 책의 사단장은 생식불능으로 아이들은 없었으니 고생은 좀 덜 했을 거다. 대신 사단장 사모님은 늙은 남편이 이미 ‘기쁨을 아는 몸’에 제공해줄 수 없는 기쁨까지 요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쉬운 얘기로 불륜인데, 그게 앞 문단에서 말했듯 서로 ‘기쁨을 아는 몸’(2015년 여름부터 '기쁨을 아는 몸'을 이렇게 거의 일반명사 비슷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경숙아, 고맙다!)을 위로해줄 잠깐씩의 엔조이라면 문제는 덜하겠지만, 어디 몸이란 게 그런가, 불행하게도 우다왕과 사단장 사모님 류렌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단장이 전국에 고위 군인들 모이는 회의인지 뭔지에 3개월 예정으로 출장을 떠나는 동안 사건은 벌어진다. 작년에 알베르 꼬엔이 쓴 소설 <주군의 여인> 독후감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해버리는 주인공 남녀. 이들이 3개월이란 한정된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과 사랑의 확인으로서의 몸의 유희. 그리하여 둘은 점점 더 자극적인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날이 갈수록 충격적인 모멘트를 만들려 애를 쓰고, 더 지독한 애무의 기법에 탐닉하다가 까무러치기도 하고, 마오저뚱의 석고상을 깨뜨려버리고, 성서보다 세 배는 더 엄정한 마오 선집을 찢어버리기도 하는 등의 일탈을 저질러버린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내가 아무리 야한 이야기를 좋아하더라도, 이게 장황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인종이다. 곧바로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위에서 비비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과 극적인 갈림길에서 안타깝게도 저편으로 가버리고 마는 건, 과도한 분량을 ‘사랑이라는 감옥 속에서의 탐닉’에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확실하게 느꼈다. 얼마 만큼이냐 하면, 오직 둘 뿐인 절망스러운 사랑의 감옥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직 절정에도 오지 않았는데, 아이 씨, 그만 읽기를 때려치울까, 싶었을 정도로. 이렇게 낮이나 밤이나 해대는데, 굳은 살 안 박였을까? 별 걱정이 다 들더라.
 그래, 그래. 13쪽에서 제1장을 시작해 251쪽에서 에필로그를 끝날 때까지 작지 않은 활자로 널럴하게 편집한 짧은 장편임에도 우다왕과 류렌이 서로 엮이고, 만나고, 함께 침상에 오르고, 불타는 몸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20쪽부터 191쪽까지 할애했으니, 내가 책을 읽으며 지루해 했던 것이 잘못이냐? 물론 주인공들이 침상에서 기쁨을 찾으며 양념으로 당대 중국의 농민, 소시민, 중간층, 고위층 등 각 계급들의 희망사항과 상위 편입 욕망, 연줄 넣기 같은 중국문화에 대해서도 거론을 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이라고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우다왕도,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렌도, ‘놀랄만한 선물’(이게 뭔지 밝힐 수 없다)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받게 된 사단장도, 행위의 결과물이나, 행위라는 전환기를 거쳐 새로 변모한 모습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한 번 찌질이는 영원히 찌질이고, 한 번 바람난 여자는 잠깐의 바람기였을 뿐, 저 남쪽 종교의 경전에서처럼 코뿔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바라지도 못함. 여기서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채털리 여사와 비빌 수 없는 차이가 생기며, 옌롄커도 로렌스에 감히 비빌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는 것.
 이 책은 오직 하나, 사랑 혹은 몸의 즐거움이라는 감옥을 구경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이 몸의 감옥, 또는 사랑의 감옥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라, 왜 스스로를 유폐해야 했는지, 그리하여 유폐를 통해 어떤 전망이 생겼는지가 책의 초점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이리 주장을 한 번 해보는 거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1-1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란 제목이 이중적인 의미인 듯 싶어요~진짜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연인>이 생각나네요 ㅎㅎ팔스타프님께서 나보코프 리뷰 쓰긴 힘들다고 하셨죠? ㅎㅎ

Falstaff 2019-01-18 10:31   좋아요 1 | URL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이더군요. 그런데 하여간 옌롄커는 안 읽으려 작정을... --;;
옙. 나보코프 읽고 독후감 쓰는 건 정말 고역이예요. 대부분 책을 읽고 PC 화면을 앞에다 두면 그저 막막하더라고요. 저야 뭐 그냥 아마추어니까 그렇지만, 카알벨루치 님의 평은 근사하던 걸요. ^^

카알벨루치 2019-01-18 10:33   좋아요 1 | URL
저도 허접한 아마츄어인데 이런 칭찬하시면 아니아니되옵니다 감사해요~팔스타프님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
 
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줄리언 반스가 1946년 생. 올해 일흔셋. 역자 신재실 선생이 1941년 생. 일흔여덟.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벌써 반스를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도 줄리언 반스와 존 파울즈의 책은 눈에 띄는 대로 구해 읽으려 하는 편이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의 상당수가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나왔고, 또 상당한 수가 추정하건데 계약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중판을 찍지 못하고 그냥 묵혀두고 있다는 점. 애석한 일이다. 이 책 <내 말 좀 들어봐>도 마찬가지. 제목이 예전 대통령 후보였던 허x영 씨의 노래 제목 같아서 그랬나? 하여튼 웬만하면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 1/2 장으로 쓴 세계 역사>처럼 세계문학전집으로 찍어도 좋으련만, 앞으로는 모르겠고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도 이 책은 인터넷 헌책방에서 발견해 사서 읽었다. 헌책의 등급을 ‘최상’으로 해놓았으나 상태는 개떡이었지만 즐겁게, 재미나게 잘 읽었다. 반스가 쓴 여섯 번 째 소설이라고 해설에 나와 있다.
 무대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시골 포도농장 근처 작은 촌락. 주요 출연진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죽마고우 스튜어트 휴스와 나이젤 O. 러셀. 나이젤은 학교 다닐 때까지 이 이름을 쓰다가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는 갑자기 정체도 모를 가운데 이름 “O”를 써서 ‘올리버 러셀’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더니, 정말로 은행 예금 통장에도 올리버란 이름으로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는 전형적인 완고한 잉글랜드인. 별로 유머 감각도 없고, 나이에 걸맞게 인생에 대한 뜬 구름 같은 선망이나 몽환 또는 개똥철학도 없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지내며 튼튼한 대영제국의 허리를 이룰 중산층의 일원이 될 소지가 무척 많은 학생이었다. 자기 머리가 그리 특출하지 않음을 일찌감치 스스로 알아 대학진학 대신 은행에 입사해 하루하루 정해진 일과를 똑같이 답습하면서도 별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재미없지만 확실한 인간. 이에 반해 올리버는 일찌감치 말썽쟁이 면허증을 취득하고, 온갖 화려한 수사로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남발하며, 프랑스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외래어를 섞어 풍부한 독서와 음악 감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현학적 재담을 가진 수재 형 낭만주의자이지만 이런 종류의 집단들이 가끔 그렇듯 대책 없이 인생을 소비하는 반쯤 건달. 감이 딱 잡히시지? 이건 내가 설명을 잘 해서다. 흠흠.
 우리의 바른생활 총각 스튜어트라고 어찌 리비도의 용출이 없을 수 있으랴. 그리하여 25 파운드를 내면 금요일마다 최대 네 번의 소개팅, 아니, 집단 미팅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가입해서 돈을 지불하고 나간 첫 번째 모임, 그곳에 필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여인을 찾아냈으니, 바로 쥘리언(프랑스 식), 아니 질리언 와이엇. 질리언은 미술 복원사로 기름, 그을음, 먼지, 때, 파리똥 등으로 오염돼 시꺼멓게 변한 고미술품을 각종 화학약품과 면봉에 묻힌 인간 여성의 침으로 싹싹 긁어낸 다음 다시 채색을 해 복원시키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다. 그렇게 잘 살다가 그녀 나이 열다섯 살 때 학교 교사이던 아버지가 열일곱 살 먹은 여학생하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특이한 집안내력이 있다. 하여간 나중에 둘이, 자신들이 이런 패자부활전에 돈까지 내고 참여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이야기하지 말자고 약속하는데, 그럴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얘기고, 급기야 우리 그냥 결혼이나 해버릴까, 이 단계까지 급진전한다.
 그래 이 두 선남선녀는 시청 등기사무소에서 결혼에 이르는데, 문제는 재능 있는 반건달 올리버. 교회에서 혼인을 했다면 들러리가 되겠지만 등기소에서 했기 때문에 증인으로 참석한 올리버, 이 대책 없는 말썽쟁이 영어학원 선생이 그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질리언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이었다. 이거 말 돼? 말이 되지 왜 안 돼? 근데 말은 되도, 대부분, 모든 인간의 98% 정도는 그냥 가슴만 앓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약인 법, 달력이 넘어감에 따라 그냥 흐지부지 잊게 되는 거 아닌가? 당신 속에서도 아직까지 생각날 때마다 심쿵한 첫사랑이 있으나, 역시 시간의 힘에 의해 그저 잔잔하게 쓰림 정도로 간직하는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 없다고? 그럼 당신은 좀 불행하네. 그래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소설의 주인공이 못 되는 거다. 세상 두 번 사니? 오직 나 하나를 위해 남의 아내가 됐든, 남편이 됐든, 애인이 됐든, 일단 시도는 해보고 죽는 철없는 인간들. 이런 철없는, 진실하게 못된 인간들이 세계문학사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들이다. 이해하시겠지?
 자기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내와 밀월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스튜어트와 질리언이 뜨거운 밤을 보냈을 거라는 고통 속을 헤매다, 그걸 참지 못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올리버. 급기야 스튜어트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에 방을 얻어, 파란색과 흰색의 꽃으로만 한 아름을 들고, 스튜어트가 출근해 질리언 혼자 있는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꽃을 건네준 다음 큰 목소리로 한 마디 꽝.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후 오후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집 앞 길에 퇴근하는 스튜어트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스튜어트의 집에 전화를 해, 질리언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 또 선언을 하기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엔 장난으로 생각한 질리언은 어떻게 대답할 수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수화기를 놓고 마는데, 수화기를 놓는 순간 현관문을 여는 열쇠소리가 들리고 신혼의 남편 스튜어트가 들어선다. 아,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그냥 다 말을 해버릴까? 아니, 장난인지도 모르잖아.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니. 이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어느새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전화벨이 울리면 득달같이 전화기를 받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질리언의 몸에는 성적 흥분에 반응하는 각종 변화가 지극히 높은 단계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뻔한 스토리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은 철저한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는데, 누구의 시점인가 하면,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 미시즈 와이엇, 스튜어트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 주인 노파 다이어 부인, 툴루즈 근방에 별 구경거리 없는 농촌마을의 호텔 주인 리브 부인 등,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이다. 그래 각 문단이 시작할 때마다 굵은 글씨로, 이번 문단은 누구의 시점인지 밝히고 있다. 이리하여 내가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이 다른 사람이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과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독자는 즉각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어때? 재미나겠지? 그렇다.
 좋다. 이 책이 지금 품절 또는 절판 상태니까 스토리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전화벨 소리만으로 모든 성적 반응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상태가 됐으니 어쩌겠나.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이혼에 성공한다. 당연히 둘은,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론 돌이킬 수 없는 웬수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튜어트는 집 값의 절반을 질리언에게 지불해 런던에서 자기들이 살던 주택의 보유자로 남고, 질리언은 올리버와 재혼해 이번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근데 스튜어트가 생각하기를, 내 결혼식에 올리버가 왔으니, 올리버가 결혼할 때 나도 가야하는 거 아냐? 말은 맞는데 어째 좀 그렇다. 그리하여 평생을 갈 이 세 명의 난장판이 시작된다. 이후 셋은 각자 영국을 떠난다. 스튜어트는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버는 은행가로 성장했으며, 질리언이 툴루즈의 박물관에 복원해야 할 미술품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는 김에 올리버 역시 동네 학교에서 영어 회화와 작문을 가르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세 명의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 하나. 이 책이 아무리 지금 품절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다시 팔 거 같지 않지만, 어떻게 이 재미난 마의 트라이앵글이 해소되는지는, 다시 한 번 목에 핏대를 올리고 외치노니, 안 알려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스물여덟 살에 쓴 아체베가 연이어 힘을 줘 서른 살에 <더 이상 평안은 없다>를 쓰더니 서른네 살에 <신의 화살>로 이른바 아프리카 삼부작을 완성한다. 이 세 권의 책 전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이후 아체베는 피 식민을 경험한 제3세계 출신 대표선수로 전 지구의 문학 판에 식민, 반식민 논쟁의 불을 붙인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나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관심을 두었다고 여겨지고 있던 조지프 콘래드조차 아체베의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벼른 붓 끝에 의해 거덜이 나고 만다. <암흑의 핵심>, <로드 짐> 같은 것들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식민의식을 기반으로 한 인종차별적 작품이라고 일갈을 해버렸으니.

 

 

 

 물론 전적으로 이런 영향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이 나오고 약 10여년이 지난 후에 백낙청이 그의 명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피 식민 문학으로 아체베를 소개하고 있다.

 

 

(이젠 몇 번의 중판을 거쳐 오른 쪽 그림의 두 권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게 내가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치누아 아체베라는 작가에 관해 처음으로 들은 정보였다. 78년에 나온 백낙청의 저서가 지금도 여전히 책꽂이에 꽂혀 있지만 그거 꺼내 확인하려면 푸닥거리를 한 번 해야 할 만큼 깊숙이 묻혀있어 위에서 한 발언이 정확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서른여섯 살, 1966년에 또 다른 장편 <민중의 사람>을 쓴 후에는 단편소설과, 시, 아동문학만 집필하다가 1987년에 ‘마지막 장편소설’로 발간한 책이 바로 <사바나의 개미 언덕>이란다.
 아프리카 삼부작에서는 피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식민모국인 백인들에 의해 와해되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삶과, 영혼의 피폐를 원주민의 삶의 모습과 함께 잘 그려냈다면, <사바나의 개미 언덕>에선 식민 상태가 끝나고 식민모국이 임의대로 그어놓은 경계선에 따라 복잡하게 구성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서 벌어지는 식민 후유증, 끊임없이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와 장기집권, 독재, 부정부패, 경찰국가화 경향에 대해, 그리고 결론으로 아프리카가 나가야 할 화해의 궁극적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읽어본 한계 안에서 말하자면 그의 역작 아프리카 삼부작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얘기해 우리나라 역시 경험한 식민통치 후 반식민(半植民) 상태의 제3세계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생한 독재와 군사 쿠데타 속 지식인들의 양심적 저항의 모습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 식민 시대의 반식민(反植民) 주제가 식민 후의 반식민(半植民)으로 넘어가는 건 전 지구적으로 자연스럽다는 뜻. 유사한 작품으로 응구기와 티옹오의 <피의 꽃잎들>과 <십자가 위의 악마>, 에스키아 음파렐레의 <2번가에서>,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일련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예를 들려면 수도 없이 많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70년대 호스티스 소설 이후 무더기로 쏟아진 작품들도 비슷하니까.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흐르는 걸 막기 위해 다시 언급을 하자면, 식민에 반대하는 반(反)식민 문학을 거친 아체베가 독립 후 절반쯤 식민 상태인 반(半)식민을 넘어 진정한 아프리카의 독립을 모색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후 나이지리아에는 특히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가 한 명 혜성같이 등장하는데, 바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출간한 흥미진진한 <아메리카나>의 해설에서,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이란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이이의 비빌 언덕은, 이미 대영제국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간 다음이다. 21세기로 넘어온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이제는 피부색과 빈부의 격차,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 차별에서의 해방을 외치고 있다. 이들 제3 세계로의 아프리카 문학은 앞으로도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알라 알와스아니를 필두로 하는 사하라 이북 지역의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떻게 쓰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나는 민음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인간이다. 우연히 그 회사 책을 많이 인용하게 됐다.)


 어떻게 쓰다 보니 건방지게 아는 척을 너무 많이 한 거 같다. 여태까지 쓴 거 그냥 이것저것 읽으면서 저절로 품게 된 ‘개똥철학’, 아니, '개똥문학' 범주를 넘지 않는 수준이라 괜히 기억하실 필요 없다. 이제 책의 스토리로 넘어가보자.
 해방 후 독립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 쿠데타로 집권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샘'이란 작자가 이웃국가들의 절대 독재자들, 아민, 보카사, 무가베 등한테 배운 바가 있어 자기도 평생 대통령을 해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국민투표를 하게 됐는데, 남부 열대우림 지역은 별 거 없는데, 북쪽 건조한 사바나 지역이 조금 문제라, 투표를 앞두고 우물 파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네마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지금 우두머리가 영원히 통치할 수 있도록 투표하는 데 동의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두머리 자신은 영원히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단 말이요.) 지역 대표 촌로는 그 말에 속임수가 있다는 걸 깨닫고 이리 묻는다.
 “누가 우두머리에 강요합니까?”
 “국민들이요.”
 “국민이라면 우리를 뜻하나요?”
 대답을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만 있던 낯선 이를 보고 간계가 있다는 걸 안 촌로는 그냥 고맙다는 말만 전해 그들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 영원히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소. 심지어 남자가 여자와 결혼할 때에도 영원히 결혼하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 둘 중 한 명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결혼 관계는 끝나지요.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과 난 동의하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216~217쪽 요약해 다시 씀.)
 때는 바야흐로 전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초기. 이젠 문제의 사바나 지역 아바존에는 도무지 건기가 끝나지 않는 시절을 맞는다. 때 맞춰 정부는 여태까지 시공하고 있던 우물 굴착을 중도에서 뚝 끊어버려 아바존 지역에선 농사나 목축은커녕 마실 물도 부족한 상태에 이른다. 원래는 이 지역을 방문해 표를 좀 얻어 볼까 했던 대통령도 관계자의 보고를 듣고 방문을 취소해버린다. 당장 우물을 파야 하는 아바존 사람들은, 힘 있는 대통령이 오지 않겠다고 하니 당연히 약자인 지역민들이 우두머리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법이라 대표단 여섯 명을 수도로 파견을 하는데,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다. 이 파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 택시 운전수, 마약공급자, 강도, 깡패, 좀도둑, 실업자, 양아치 등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수 천 명의 아바존 출신자들이 모두 모여 대통령궁 앞에서 알현을 부탁하는 걸 보고, 이들이 지금 나더러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건가, 겁을 덜컥 먹은 대통령이, 이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대통령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한 동기동창이었고 심지어 영국 유학도 함께한 현재 신문사 편집장으로, 매사에 대통령의 의견을 거스르는 사설만 써재끼는 아켐을 납치, 숙청해버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원래부터 가상 국가 캉안에 형제처럼 친한 삼총사가 있었으니, 이들이 나중에 자라 공부 못했던 순서로, 샘은 대통령이 되고, 크리스는 공보처 장관이 됐으며, 하켐이 신문사 편집장 자리에 머물렀는데, 하켐이 야밤에 수갑을 찬 채 끌려가 분명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걸 알고, 이미 자신에 대한 샘의 우정도 종을 쳤다는 것을 인식한 크리스는, 이제 완전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대통령 샘을 피해 잠수를 타기로 결정한다. 자 어떻게 됐을까. 원래부터 스토리 전부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내가 여기서 크리스가 체포되어 죽기 바로 전에 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화해하면서 평생 자기가 죽인 하켐을 애도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게 사실일까, 거짓말일까.
 이 책의 스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숨겼다. 하나는 아바존의 촌로가 수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경구. 표범과 거북이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아무리 졸라도 이 두 가지는, 안 알려줌. 좋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의미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1-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헌책방에 가서리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를 찾아 보았는데 없더군요.
영어책으로는 있던데...

<아메리카나>는 그렇게 갠춘하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실종되어 버렸
습니다.

벤 오크리의 책도 어렵사리 구해 놓기는
하였으나 역시 읽지는 못했더라는.

<싸바나의 개미 언덕> 왠지 제목이 훈훈
합니다. 시간 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19-01-15 12:35   좋아요 0 | URL
옙.
제가 읽기로는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보다 더 재미 있더라고요.
<아메리카나> 어찌 됐는지는, ㅋㅋㅋ, 안타깝기보다 상황이 웃깁니다.
 
여행 가방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위 ‘지만지’. 참 매력적인 회사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빛나는 소설들을 찾아 출간하는 특별한 출판사인데, 다만 책값이 오지게 비싸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x냥 님의 소개로, 이 출판사를 통해 처음 들었다. 서문과 몇 편의 단편으로 간신히 200쪽이 넘는 작은 책의 정가를 18,000원으로 책정한 것에 놀랐고, 5%밖에 깎아주지 않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얼마나 좋은 책이기에. 이런 책, 예를 들어 ‘한국문화사’란 기관에서 나온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같이 무지하게 비싼데다가 한 푼도 안 깎아주는 회사에서 나온 책 같은 건, 본전 생각이 나서 본문을 더욱 까다롭게 볼 수밖에 없다. 나, 돈 안 많거든. <다니엘 데론다>에 관해 다시 한 번 욕바가지를 쏟아 부을 생각은 없고, 오직 <여행가방>만 놓고 따져보면 200쪽짜리 책에 각주를 135번이나 달아, 매우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기는 했다. 물론 각주의 대부분은 읽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렸지만. 역자 김현정의 한국말 번역도 좋다. 오역 여부는 당연히 모른다. 키릴 문자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래도 한 때는 키릴 문자 읽을 줄은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길게 불평하는 건, 교정 교열에 관해서는 다른 출판사보다 나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책이 비싸잖아. 그러니 교정 교열도 더 잘해야지. 가격은 품질과 조금은 비례해야 하는 거 아냐? 그냥 간단하게 한 가지 예만 들자. 서문이 끝나고 첫 번째 본문 <핀란드제 축면사 양말>의 세 번째 문장.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
 역자 김현정이 실수했으면 교정 과정에서 발견했어야지. 구 지구(久 地區)가 뭐니? 신대륙(新大陸)의 상대 말이 구대륙(舊大陸)이 아니고 구대륙(久大陸)이란 말이지? 비싼 책 읽기 시작하면서 초장부터 초 쳤다. 이거 하나가 아니다. 몇 군데 더 있다. 그건 출판사에서 직접 찾아보고 고쳤으면 좋겠다. 한 번도 ‘꼼꼼하게’는 검토하지 않은 거 같다. 힌트를 주자면 한문표기가 아니라 한 문장에 같은 구절을 두 번 쓴 것도 있다면 될까.


 도블라토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 체제비판 적 소설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기 작품을 소련 내에서 출판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원고를 서방세계로 몰래 빼돌려 출간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이런 작가들 좀 있었다. 50년대에 벌써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원고가 빼돌려져 이탈리아에서 출판이 된 것을 시작으로 문인들의 해외출판 경향이 늘어가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이게 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파스테르나크는 나이 먹은 지바고 씨의 모자 밑으로 쌀알만 한 하얗고 포동포동한 이(蝨)가 이마를 타고 암벽 타듯 기어 내려오는 작품을 쓴 덕택에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에 의해, 상을 받으러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한 발짝이라도 국경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듣고 결국 한림원 방문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잖은가. 하여간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정권은 이후 (난 이이를 정말 싫어하는데 그건 별개로)솔제니친을 필두로 일단 약간의 세월 동안 콩밥을 먹인 다음 외국으로 추방해버리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여행가방>의 저자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더구나 도블라토프는 처자식들이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밖에.
 도블라토프한테 몇 달 동안 콩밥을 먹이고 나서, 다행스럽게 해외추방은 아니고, 미국으로 이민을 허가하는 장면이 ‘서문’의 첫머리에서 나온다. 이렇게.
 “비자 담당 부서의 이 재수 없는 년이 내게 말하더군요. ‘출국자 개인당 여행 가방은 세 개, 규정이 그래요.’”
 심심한데 한 번 까다롭게 굴어볼까? 여기서 '재수 없는 년' 앞에 지시대명사 ‘이’가 붙은 이유는 뭐지? 지금 서문을 쓰고 있는 시기가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원고는 다 출간을 하고, 이제 소련에서 있었던 과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 몇 가지를, 몇 개의 사물을 내세워 한 권의 책으로 쓰고 있는 시기. 그러니 원문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말 번역문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바로 지시대명사 ‘이’다. 빼는 게 제일 좋고, 그래도 쓰고 싶으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라리 ‘그’를 넣어야 하는 거 아냐? 이리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맞습니다. 책값이 비싸서. 이 정도면 나도 너무 집요한가? 좋다, 반성한다.
 까다롭게 굴면서 한 가지 말은 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썼다는 거. 도블라토프가 여행 가방 세 개 안에 들어갈 자기 재산목록을 챙겼다. 그랬더니 에그머니,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겨우 가방 하나만 채울 수 있을 뿐이었다. 여행가방. 합판에 천을 덧댄, 모서리마다 니켈 도금을 가방. 자물쇠가 고장 나서 빨랫줄로 칭칭 감아야 했던 것. 이것 하나만 가지고 도블라토프는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는데, 그동안 작가는 가방을 한 번도 풀어보지 않는다. 몇 달 후, 뉴욕에서 아내 레나와 딸 카탸와 합류하고, 다시 아들이 태어나, 아들이 좀 커져서 장난을 치기 시작해 견디지 못한 아내가, ‘지금 당장 벽장으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기 전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가방. 아이가 금고형에 처해진 벽장을 열어보니 아이는 가방 위에 올라 앉아 태연하게 아빠를 올려다보고, 이제야 생각이 난 아빠는 드디어 가방을 열어보기에 이른다. 그 속에선 더블 버튼 양복, 포플린 셔츠, 종이에 싼 단화, 인조 모피가 달린 벨벳 재킷, 가짜 물개 모피로 만든 겨울 모자, 핀란드제 측면사 양말 세 켤레, 운전기사용 장갑, 그리고 장교용 가죽 벨트가 나온다.
 가방 속에서 나온 자질구레한 낡은 의복들. 도블라토프는 잠깐 헛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 속에서 의복과 신발이 어떻게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필이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땅, 소비에트를 영구히(이럴 때 쓰는 한자 단어가 구‘久’다.) 떠나오면서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낡아 남루해진 물건들. 우린 이런 물품을 통해 누추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걸 추억이라고 칭하면서. 그러나 도블라토프의 추억은 결코 쓸쓸하거나 황량하지 않다. 오히려 신랄한 해학과, 규격화된 사회 속에서의 하찮은 반항과, 껄렁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미소 띤 애정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이것도 사소설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련 사회, 그중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초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해서, 사소설이란 범주에 가둘 수는 없을 것. 해학과 풍자와 허풍과 재미와 객기가 적절하게 뒤섞인 유쾌한 잡탕밥.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9-01-1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값이 비싸면 더 꼼꼼하게 살피게 되더라구요.
지만지 책은 정말이지 비싸서 선뜻 사지 않게 되는데... 편집이 좀 이런 식이면....--;;
요럴 때는 책 자체와 출판사에 대한 별점을 따로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ㅎㅎ


Falstaff 2019-01-14 10: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위에 쓴 약간의 결함과 가격 때문에 별 하나를 깎았답니다. ^^;

레삭매냐 2019-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에서 나오는 책들은 축약본이라는
썰이 있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Falstaff 2019-01-14 11:32   좋아요 0 | URL
지만지 책 가운데 ˝천 줄 읽기˝란 제목이 달린 책이 있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축약본 맞습니다. ˝큰 글씨 책˝은 글씨만 큰 글씨로 했는지, 큰 글씨에 맞게 내용도 축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무 표시 안 한 책은, 축약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하긴 티를 안 내고 줄이는 게 기술이긴 합니다만. ^^;
졸라의 <쟁탈전> 같은 경우엔 500쪽이 넘어가거든요. <쟁탈전>의 후속편이랄 수 있는 <돈>이 문학동네에서 나왔는데 그건 해설까지 600쪽. ㅎㅎㅎ 잘 모르겠습니다. 아닐 거 같습니다만....

잠자냥 2019-01-14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지만지 버전으로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2010년 뿌쉬낀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으로 읽은 터라 지만지 버전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ㅎㅎ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21572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근데 지만지 책값 정말 비싸긴하죠. 이 얇은 책을.... -_-;
참, 최근에 지만지에서 출간된 유진 오닐,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가 완역본인지 궁금해서 지만지에 완역본은 완역본이라고 표시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돌아온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참고로, 희곡선집은 발췌가 무의미하기에 거의 완역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초기 축약본으로 출간했던 것들도 차차 완역으로 재출간하고 있으며 축약본에는 제목에 ‘천줄읽기‘를 달아 완역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약본이라면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천줄읽기˝라는 제목이 됩니다.-

그리고 큰 글씨 책은 천줄읽기라는 표시가 없으면 축약본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 카렐 차페크 책 신청했는데 (도서관 정책상) 큰 글씨 책으로 구입해주는 바람에 -_-;; 큰 글씨 책으로 읽었는데요, 완역본이었습니다.

Falstaff 2019-01-14 12:40   좋아요 1 | URL
아, 이게 다른 출판사 책도 있군요! ㅋㅋㅋ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검색이 안 될 수밖에, ㅋㅋ.
제 짐작이 맞았군요. 큰 글씨 책도 축약은 아닐 거란 거. 근데 큰 글씨 책은, 지만지 소설 선집보다 훨, 훨씬 비싸서 감히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늙어 로또 맞았는데 이제 작은 글씨 안 보이게 되면 모를까 말씀이지요. 큰 글씨 책 차페크를 읽는 잠자냥 님. 하하하, 그림이 그려집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히 읽은 <인생 사용법> 한 권으로 난 뻑 갔다. 이거 뭐야. 누구야? 그림을 찾아보니 거 참 불량하게도 생겼네. 완전히 동네 양아치 형 같다. 근데 거 참, 어떻게 <인생 사용법> 같은 책을 쓰려 마음을 먹게 됐는지, 아예 불가사의 자체였다. 뭐라 할까? 레고? 한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레고 조립하는 것처럼, 또는 해체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뜯어보고, 고쳐보고, 돋보기를 들이내보다가 난데없이 팽개치기도 하는 모습이, 보통의 소설가라면 이 책 한 권의 에피소드 가지고 적어도 열권이 넘는 장편 소설을 쓰겠는데, 하는 심정. 아,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하여간 <인생 사용법>을 읽은 다음에(근데 그 책이 조금 비싸긴 하다.) 페렉에 꽂혀서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잠자는 남자>를 읽었고, 지금 막 다섯 번째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읽기를 마쳤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긴 거하고 똑같이 정말 동네 양아치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으면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이자 전직 웨이터의 거부, 70명의 백만장자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한 양조장 사장 헤르만 라프케. 이 거대 부호이자 미술애호가, 1913년 빌헬름 2세 황제 통치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독일인회 주최로 대규모 행사를 벌이는데 행사의 일환으로 그의 회화 컬렉션을 전시하게 된다. 많은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은 하인리히 퀴르츠가 양조장 사장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게 왜? 거울 속의 거울. 양조장 사장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 인물의 배경이 되는 벽면에 그가 거금을 들여 모은 수집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고, 화가 퀴르츠의 그림 속에도 과거의 명작들이 다들 제각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더러(마네가 그린 졸라의 초상 속에 벽에 걸린 자기 그림의 모사화가 걸린 것처럼), 그림 속에 또 미술애호가 라프케 사장을 그리고 있는 화폭이 있었다. 그래 그림 속의 그림에 다시 벽면에 가득한 명작들이 들어 있고,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에도 또 그렇다. 그리하여 이론상으로는 무한대 계속되는 거울 속의 거울 현상. 세 번째 그림 속의 화면은 가로 11cm, 높이 8cm. 첫 번째 화면에서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두 번째 화면에선 조금 변형되고, 세 번째에서도 다시 변형시킨 특색 때문에 이 그림이 장안의 화제가 된다. 이쯤에서 미술평론도 했던 페렉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소설’ 즉 ‘구라’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가로 11cm, 세로 8cm 안에 초상을 비롯한 모든 세부사랑은 그려 넣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을 텐데, 독자가 갖는 권리,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다.
 이쯤에서 머리에 떠오른 또 한 명의 구라꾼, 로베르토 볼라뇨. 그가 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볼라뇨가 그의 책에서 숱한 나치 동조 문인들의 이름을 만들어서 마치 정말로 나치에 협력해 돈을 보내주는 등, 아메리카에서 파시즘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어찌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처음엔 단박에 넘어갔다가, 어째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도 많다, 싶어 정신차려보니 여태까지 다 구라였던 기억.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서도 양조장 사장 헤르만 라프케가 이제 나이 들어 죽자, 그의 소원대로 최고의 박제사에게 자신의 몸을 박제로 떠서 화가 퀴르츠가 그린 그림과 거의 비슷하게 만든 지하의 방에서, 초상을 그리던 의자에 앉아, 초상화와 함께 묻힌다는 내용까지 읽고, 하, 이것도 구라구나. 확신을 하게 됐다. 그래도 얼마나 능글맞게 거짓말을 잘 하는지 화가 이름 '하인리히 퀴르츠‘를 구글 검색까지 해봤다는 거 아닌가. 근데 등장하는 옛 화가들의 명단에 솔찮게 진짜 화가의 이름도 등장하니 검색해보기 전까진 정말 긴가민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드가가 그린 <무용수들>은 1896년 1월에 화가에게 직접 6만 프랑을 주고 구입하고, 메종도레 식당에서 드가와 함께 콜체스터 특산 굴을 먹었다는데, 이땐 이미 빌어먹을 페렉이 지금 구라 중임을 알고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드가가 그린 <무용수들>이 한 두 작품이냐 이거지.

 

참 매력적인 작품 <La Classe de Danse> 왼쪽 아가씨가 등이 가려운데 안타깝게도 손이 닿지 않는 거 같아!


 그런데, 15쪽에 시작해 100쪽에서 끝나는 단편 소설에 관해서는 여기까지만 이야기 해야겠다. 아직 덜 얘기한 나머지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는, 마지막 두 페이지에 나오는 바, 그것까지 밝히면 이 독후감을 읽는 페렉 애호가 또는 애호가 준비생들에게 귀싸대기 몇 방 얻어 터져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 정말 인간으로 하여금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런 게 하나 마지막에 잔뜩 힘을 주어 도사리고 있다는 거 정도는 미리 알아도 뭐 크게 관계가 있을까.
 근데. 그게 뭐냐고?
 안 알려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