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방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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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위 ‘지만지’. 참 매력적인 회사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빛나는 소설들을 찾아 출간하는 특별한 출판사인데, 다만 책값이 오지게 비싸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x냥 님의 소개로, 이 출판사를 통해 처음 들었다. 서문과 몇 편의 단편으로 간신히 200쪽이 넘는 작은 책의 정가를 18,000원으로 책정한 것에 놀랐고, 5%밖에 깎아주지 않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얼마나 좋은 책이기에. 이런 책, 예를 들어 ‘한국문화사’란 기관에서 나온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같이 무지하게 비싼데다가 한 푼도 안 깎아주는 회사에서 나온 책 같은 건, 본전 생각이 나서 본문을 더욱 까다롭게 볼 수밖에 없다. 나, 돈 안 많거든. <다니엘 데론다>에 관해 다시 한 번 욕바가지를 쏟아 부을 생각은 없고, 오직 <여행가방>만 놓고 따져보면 200쪽짜리 책에 각주를 135번이나 달아, 매우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기는 했다. 물론 각주의 대부분은 읽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렸지만. 역자 김현정의 한국말 번역도 좋다. 오역 여부는 당연히 모른다. 키릴 문자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래도 한 때는 키릴 문자 읽을 줄은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길게 불평하는 건, 교정 교열에 관해서는 다른 출판사보다 나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책이 비싸잖아. 그러니 교정 교열도 더 잘해야지. 가격은 품질과 조금은 비례해야 하는 거 아냐? 그냥 간단하게 한 가지 예만 들자. 서문이 끝나고 첫 번째 본문 <핀란드제 축면사 양말>의 세 번째 문장.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
 역자 김현정이 실수했으면 교정 과정에서 발견했어야지. 구 지구(久 地區)가 뭐니? 신대륙(新大陸)의 상대 말이 구대륙(舊大陸)이 아니고 구대륙(久大陸)이란 말이지? 비싼 책 읽기 시작하면서 초장부터 초 쳤다. 이거 하나가 아니다. 몇 군데 더 있다. 그건 출판사에서 직접 찾아보고 고쳤으면 좋겠다. 한 번도 ‘꼼꼼하게’는 검토하지 않은 거 같다. 힌트를 주자면 한문표기가 아니라 한 문장에 같은 구절을 두 번 쓴 것도 있다면 될까.


 도블라토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 체제비판 적 소설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기 작품을 소련 내에서 출판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원고를 서방세계로 몰래 빼돌려 출간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이런 작가들 좀 있었다. 50년대에 벌써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원고가 빼돌려져 이탈리아에서 출판이 된 것을 시작으로 문인들의 해외출판 경향이 늘어가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이게 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파스테르나크는 나이 먹은 지바고 씨의 모자 밑으로 쌀알만 한 하얗고 포동포동한 이(蝨)가 이마를 타고 암벽 타듯 기어 내려오는 작품을 쓴 덕택에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에 의해, 상을 받으러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한 발짝이라도 국경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듣고 결국 한림원 방문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잖은가. 하여간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정권은 이후 (난 이이를 정말 싫어하는데 그건 별개로)솔제니친을 필두로 일단 약간의 세월 동안 콩밥을 먹인 다음 외국으로 추방해버리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여행가방>의 저자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더구나 도블라토프는 처자식들이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밖에.
 도블라토프한테 몇 달 동안 콩밥을 먹이고 나서, 다행스럽게 해외추방은 아니고, 미국으로 이민을 허가하는 장면이 ‘서문’의 첫머리에서 나온다. 이렇게.
 “비자 담당 부서의 이 재수 없는 년이 내게 말하더군요. ‘출국자 개인당 여행 가방은 세 개, 규정이 그래요.’”
 심심한데 한 번 까다롭게 굴어볼까? 여기서 '재수 없는 년' 앞에 지시대명사 ‘이’가 붙은 이유는 뭐지? 지금 서문을 쓰고 있는 시기가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원고는 다 출간을 하고, 이제 소련에서 있었던 과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 몇 가지를, 몇 개의 사물을 내세워 한 권의 책으로 쓰고 있는 시기. 그러니 원문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말 번역문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바로 지시대명사 ‘이’다. 빼는 게 제일 좋고, 그래도 쓰고 싶으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라리 ‘그’를 넣어야 하는 거 아냐? 이리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맞습니다. 책값이 비싸서. 이 정도면 나도 너무 집요한가? 좋다, 반성한다.
 까다롭게 굴면서 한 가지 말은 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썼다는 거. 도블라토프가 여행 가방 세 개 안에 들어갈 자기 재산목록을 챙겼다. 그랬더니 에그머니,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겨우 가방 하나만 채울 수 있을 뿐이었다. 여행가방. 합판에 천을 덧댄, 모서리마다 니켈 도금을 가방. 자물쇠가 고장 나서 빨랫줄로 칭칭 감아야 했던 것. 이것 하나만 가지고 도블라토프는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는데, 그동안 작가는 가방을 한 번도 풀어보지 않는다. 몇 달 후, 뉴욕에서 아내 레나와 딸 카탸와 합류하고, 다시 아들이 태어나, 아들이 좀 커져서 장난을 치기 시작해 견디지 못한 아내가, ‘지금 당장 벽장으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기 전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가방. 아이가 금고형에 처해진 벽장을 열어보니 아이는 가방 위에 올라 앉아 태연하게 아빠를 올려다보고, 이제야 생각이 난 아빠는 드디어 가방을 열어보기에 이른다. 그 속에선 더블 버튼 양복, 포플린 셔츠, 종이에 싼 단화, 인조 모피가 달린 벨벳 재킷, 가짜 물개 모피로 만든 겨울 모자, 핀란드제 측면사 양말 세 켤레, 운전기사용 장갑, 그리고 장교용 가죽 벨트가 나온다.
 가방 속에서 나온 자질구레한 낡은 의복들. 도블라토프는 잠깐 헛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 속에서 의복과 신발이 어떻게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필이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땅, 소비에트를 영구히(이럴 때 쓰는 한자 단어가 구‘久’다.) 떠나오면서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낡아 남루해진 물건들. 우린 이런 물품을 통해 누추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걸 추억이라고 칭하면서. 그러나 도블라토프의 추억은 결코 쓸쓸하거나 황량하지 않다. 오히려 신랄한 해학과, 규격화된 사회 속에서의 하찮은 반항과, 껄렁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미소 띤 애정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이것도 사소설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련 사회, 그중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초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해서, 사소설이란 범주에 가둘 수는 없을 것. 해학과 풍자와 허풍과 재미와 객기가 적절하게 뒤섞인 유쾌한 잡탕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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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값이 비싸면 더 꼼꼼하게 살피게 되더라구요.
지만지 책은 정말이지 비싸서 선뜻 사지 않게 되는데... 편집이 좀 이런 식이면....--;;
요럴 때는 책 자체와 출판사에 대한 별점을 따로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ㅎㅎ


Falstaff 2019-01-14 10: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위에 쓴 약간의 결함과 가격 때문에 별 하나를 깎았답니다. ^^;

레삭매냐 2019-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에서 나오는 책들은 축약본이라는
썰이 있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Falstaff 2019-01-14 11:32   좋아요 0 | URL
지만지 책 가운데 ˝천 줄 읽기˝란 제목이 달린 책이 있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축약본 맞습니다. ˝큰 글씨 책˝은 글씨만 큰 글씨로 했는지, 큰 글씨에 맞게 내용도 축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무 표시 안 한 책은, 축약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하긴 티를 안 내고 줄이는 게 기술이긴 합니다만. ^^;
졸라의 <쟁탈전> 같은 경우엔 500쪽이 넘어가거든요. <쟁탈전>의 후속편이랄 수 있는 <돈>이 문학동네에서 나왔는데 그건 해설까지 600쪽. ㅎㅎㅎ 잘 모르겠습니다. 아닐 거 같습니다만....

잠자냥 2019-01-14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지만지 버전으로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2010년 뿌쉬낀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으로 읽은 터라 지만지 버전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ㅎㅎ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21572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근데 지만지 책값 정말 비싸긴하죠. 이 얇은 책을.... -_-;
참, 최근에 지만지에서 출간된 유진 오닐,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가 완역본인지 궁금해서 지만지에 완역본은 완역본이라고 표시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돌아온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참고로, 희곡선집은 발췌가 무의미하기에 거의 완역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초기 축약본으로 출간했던 것들도 차차 완역으로 재출간하고 있으며 축약본에는 제목에 ‘천줄읽기‘를 달아 완역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약본이라면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천줄읽기˝라는 제목이 됩니다.-

그리고 큰 글씨 책은 천줄읽기라는 표시가 없으면 축약본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 카렐 차페크 책 신청했는데 (도서관 정책상) 큰 글씨 책으로 구입해주는 바람에 -_-;; 큰 글씨 책으로 읽었는데요, 완역본이었습니다.

Falstaff 2019-01-14 12:40   좋아요 1 | URL
아, 이게 다른 출판사 책도 있군요! ㅋㅋㅋ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검색이 안 될 수밖에, ㅋㅋ.
제 짐작이 맞았군요. 큰 글씨 책도 축약은 아닐 거란 거. 근데 큰 글씨 책은, 지만지 소설 선집보다 훨, 훨씬 비싸서 감히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늙어 로또 맞았는데 이제 작은 글씨 안 보이게 되면 모를까 말씀이지요. 큰 글씨 책 차페크를 읽는 잠자냥 님. 하하하, 그림이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