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줄리언 반스가 1946년 생. 올해 일흔셋. 역자 신재실 선생이 1941년 생. 일흔여덟.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벌써 반스를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도 줄리언 반스와 존 파울즈의 책은 눈에 띄는 대로 구해 읽으려 하는 편이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의 상당수가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나왔고, 또 상당한 수가 추정하건데 계약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중판을 찍지 못하고 그냥 묵혀두고 있다는 점. 애석한 일이다. 이 책 <내 말 좀 들어봐>도 마찬가지. 제목이 예전 대통령 후보였던 허x영 씨의 노래 제목 같아서 그랬나? 하여튼 웬만하면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 1/2 장으로 쓴 세계 역사>처럼 세계문학전집으로 찍어도 좋으련만, 앞으로는 모르겠고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도 이 책은 인터넷 헌책방에서 발견해 사서 읽었다. 헌책의 등급을 ‘최상’으로 해놓았으나 상태는 개떡이었지만 즐겁게, 재미나게 잘 읽었다. 반스가 쓴 여섯 번 째 소설이라고 해설에 나와 있다.
 무대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시골 포도농장 근처 작은 촌락. 주요 출연진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죽마고우 스튜어트 휴스와 나이젤 O. 러셀. 나이젤은 학교 다닐 때까지 이 이름을 쓰다가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는 갑자기 정체도 모를 가운데 이름 “O”를 써서 ‘올리버 러셀’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더니, 정말로 은행 예금 통장에도 올리버란 이름으로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는 전형적인 완고한 잉글랜드인. 별로 유머 감각도 없고, 나이에 걸맞게 인생에 대한 뜬 구름 같은 선망이나 몽환 또는 개똥철학도 없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지내며 튼튼한 대영제국의 허리를 이룰 중산층의 일원이 될 소지가 무척 많은 학생이었다. 자기 머리가 그리 특출하지 않음을 일찌감치 스스로 알아 대학진학 대신 은행에 입사해 하루하루 정해진 일과를 똑같이 답습하면서도 별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재미없지만 확실한 인간. 이에 반해 올리버는 일찌감치 말썽쟁이 면허증을 취득하고, 온갖 화려한 수사로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남발하며, 프랑스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외래어를 섞어 풍부한 독서와 음악 감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현학적 재담을 가진 수재 형 낭만주의자이지만 이런 종류의 집단들이 가끔 그렇듯 대책 없이 인생을 소비하는 반쯤 건달. 감이 딱 잡히시지? 이건 내가 설명을 잘 해서다. 흠흠.
 우리의 바른생활 총각 스튜어트라고 어찌 리비도의 용출이 없을 수 있으랴. 그리하여 25 파운드를 내면 금요일마다 최대 네 번의 소개팅, 아니, 집단 미팅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가입해서 돈을 지불하고 나간 첫 번째 모임, 그곳에 필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여인을 찾아냈으니, 바로 쥘리언(프랑스 식), 아니 질리언 와이엇. 질리언은 미술 복원사로 기름, 그을음, 먼지, 때, 파리똥 등으로 오염돼 시꺼멓게 변한 고미술품을 각종 화학약품과 면봉에 묻힌 인간 여성의 침으로 싹싹 긁어낸 다음 다시 채색을 해 복원시키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다. 그렇게 잘 살다가 그녀 나이 열다섯 살 때 학교 교사이던 아버지가 열일곱 살 먹은 여학생하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특이한 집안내력이 있다. 하여간 나중에 둘이, 자신들이 이런 패자부활전에 돈까지 내고 참여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이야기하지 말자고 약속하는데, 그럴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얘기고, 급기야 우리 그냥 결혼이나 해버릴까, 이 단계까지 급진전한다.
 그래 이 두 선남선녀는 시청 등기사무소에서 결혼에 이르는데, 문제는 재능 있는 반건달 올리버. 교회에서 혼인을 했다면 들러리가 되겠지만 등기소에서 했기 때문에 증인으로 참석한 올리버, 이 대책 없는 말썽쟁이 영어학원 선생이 그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질리언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이었다. 이거 말 돼? 말이 되지 왜 안 돼? 근데 말은 되도, 대부분, 모든 인간의 98% 정도는 그냥 가슴만 앓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약인 법, 달력이 넘어감에 따라 그냥 흐지부지 잊게 되는 거 아닌가? 당신 속에서도 아직까지 생각날 때마다 심쿵한 첫사랑이 있으나, 역시 시간의 힘에 의해 그저 잔잔하게 쓰림 정도로 간직하는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 없다고? 그럼 당신은 좀 불행하네. 그래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소설의 주인공이 못 되는 거다. 세상 두 번 사니? 오직 나 하나를 위해 남의 아내가 됐든, 남편이 됐든, 애인이 됐든, 일단 시도는 해보고 죽는 철없는 인간들. 이런 철없는, 진실하게 못된 인간들이 세계문학사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들이다. 이해하시겠지?
 자기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내와 밀월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스튜어트와 질리언이 뜨거운 밤을 보냈을 거라는 고통 속을 헤매다, 그걸 참지 못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올리버. 급기야 스튜어트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에 방을 얻어, 파란색과 흰색의 꽃으로만 한 아름을 들고, 스튜어트가 출근해 질리언 혼자 있는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꽃을 건네준 다음 큰 목소리로 한 마디 꽝.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후 오후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집 앞 길에 퇴근하는 스튜어트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스튜어트의 집에 전화를 해, 질리언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 또 선언을 하기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엔 장난으로 생각한 질리언은 어떻게 대답할 수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수화기를 놓고 마는데, 수화기를 놓는 순간 현관문을 여는 열쇠소리가 들리고 신혼의 남편 스튜어트가 들어선다. 아,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그냥 다 말을 해버릴까? 아니, 장난인지도 모르잖아.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니. 이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어느새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전화벨이 울리면 득달같이 전화기를 받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질리언의 몸에는 성적 흥분에 반응하는 각종 변화가 지극히 높은 단계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뻔한 스토리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은 철저한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는데, 누구의 시점인가 하면,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 미시즈 와이엇, 스튜어트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 주인 노파 다이어 부인, 툴루즈 근방에 별 구경거리 없는 농촌마을의 호텔 주인 리브 부인 등,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이다. 그래 각 문단이 시작할 때마다 굵은 글씨로, 이번 문단은 누구의 시점인지 밝히고 있다. 이리하여 내가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이 다른 사람이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과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독자는 즉각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어때? 재미나겠지? 그렇다.
 좋다. 이 책이 지금 품절 또는 절판 상태니까 스토리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전화벨 소리만으로 모든 성적 반응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상태가 됐으니 어쩌겠나.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이혼에 성공한다. 당연히 둘은,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론 돌이킬 수 없는 웬수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튜어트는 집 값의 절반을 질리언에게 지불해 런던에서 자기들이 살던 주택의 보유자로 남고, 질리언은 올리버와 재혼해 이번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근데 스튜어트가 생각하기를, 내 결혼식에 올리버가 왔으니, 올리버가 결혼할 때 나도 가야하는 거 아냐? 말은 맞는데 어째 좀 그렇다. 그리하여 평생을 갈 이 세 명의 난장판이 시작된다. 이후 셋은 각자 영국을 떠난다. 스튜어트는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버는 은행가로 성장했으며, 질리언이 툴루즈의 박물관에 복원해야 할 미술품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는 김에 올리버 역시 동네 학교에서 영어 회화와 작문을 가르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세 명의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 하나. 이 책이 아무리 지금 품절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다시 팔 거 같지 않지만, 어떻게 이 재미난 마의 트라이앵글이 해소되는지는, 다시 한 번 목에 핏대를 올리고 외치노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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