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가슴에 가장 깊게 각인된 책을 요새는 ‘인생책’이라고 한다. 내게도 있다. 바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 1970년대 후반, 하라는 대학 입시 공부는 제쳐두고 밤새는 줄 모르고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 <개선문>. 라비크와 조앙 마두와 칼바도스. 무려 4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다. 참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소설의 이야기도 아니고,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불안한 정세 묘사도 아니었다. 비 내리는 센 강을 가로지르는 어느 다리(‘알마 교’)에서 서로 빗겨 지나가며 우연히 만난 라비크와 조앙 마두. 1938년 11월의 센 강 위에서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이 비틀거리는 조앙을 부축하며 ‘저 아래로 가기엔(강물에 몸을 던지기엔) 너무 춥소.’라는 무정하고, 고독하고, 니힐한 대사와 지하 주점에 들어 칼바도스를 주문하는 장면이었다. “술을 주시오. 쓴 술이 아니면 안 되오.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쓴 술을 주시오. 칼바도스로.”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술을 주문하는 장면은 내 생각과 달리 간결했다. “칼바도스 두 잔.”
 어찌된 것일까. 오랜 세월 동안 시각과 뇌로 기억하는 대신 가슴 박동에 새겨졌던 <개선문>은 박동 수가 늘어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변형되어왔던 거다. 실제로 나는 그동안 여러 포스트와 심지어 사보에 기고한 글 속에서 내가 만들어놓고도 그것이 진짜 작품 속 대사인 것으로 알고 인용해왔다. “술을 주시오. 쓴 술이 아니면 안 되오.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쓴 술을 주시오. 칼바도스로.” 라고. 40년 전의 삼중당 문고판 <개선문>은 몇 십 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새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한 다른 번역본도 마땅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생긴다. “칼바도스 두 잔.” 여섯 글자가 네 문장으로 자체 확장되는 현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벌어졌다는 게 놀랍고 쑥스럽기도 하다.
 놀랄 만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월의 힘은 너무도 막강하다. 나는 책을 읽으면 스토리나 소설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기억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너무 많은 날들이 흘렀다. <개선문>은, 거의 완벽하게 처음 읽는 책이었다. 주인공과 러시아에서 망명한 훌륭한 조연 모로소프가 등장한다는 것, 라비크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만 기억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긴, 오늘 점심 먹으면서 냅킨 넉 장을 뽑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옆 테이블에 앉은 직원에게 냅킨 통 좀 건네 달라고 한 걸로 보아 이제 뇌 활동이 정상은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레마르크가 빼어난 반전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출간한 것이 1929년. 3년 후, 독일엔 불행하게도 히틀러를 수반하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가 집권해버린다. 나치 치하에서 반전주의자가 살 수는 없는 일. 레마르크는 이후 스위스, 미국을 거쳐 다시 스위스 로카르노의 침상에서 숨을 거둔다. 즉 스스로 망명객의 삶을 살았던 것. 그래 <개선문>에서도 주인공 라비크를 등장시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독일인과 유대인을 며칠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심지어 애인 시빌도 자신의 눈앞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가 사흘 만에 목매달아 자살해버린 다음, 자신도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탈출해 프랑스로 도피한 인물로 설정을 했다. 안나 제거스는 장편소설 <제7의 십자가>에서, 독일 내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수용소를 탈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나게 그린 바 있는데, 라비크는 그런 어려움을 뚫고 파리까지 도착했으니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력과 체격, 그리고 완력이 남다른 인물이란 점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밀입국한 독일의 유능한 외과의사로 실력은 있지만 손재주가 특출하지 않아 외과적 수술엔 한계가 있는 불운한 프랑스 의사 두 명에게 임시로 고용되어 수술을 대신해주고 건 당 약간의 보수를 받아 생활하고 있는 상태. 그러나 삼류호텔 앙테르나쇼날에서 살며 좋은 음식을 먹고 날마다 고급술을 거의 무한정으로 마실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은 된다. 그의 우울. 그건 베를린에서 고문을 받아 한쪽 신장이 파열되고, 이마가 찢어지고, 한 쪽 고환이 터져버릴 정도였던 고통의 기억과, 사랑하는 애인 시빌을 자살로까지 몰아간 게슈타포 장교 하케에 대한 공포, 혐오, 복수의 갈망에서 비롯한다.
 삼류 배우 조앙 마두. 동거하던 남자가 숨이 끊어지자 이제 세상에 자기 혼자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이기지 못해 비 내리는 새벽의 센 강변을 홀로 거닐던 여자. 삶의 의욕이 전혀 남지 않은 상태에서 따뜻한 지하 주점에 데리고 가 화주火酒를 사줘 몸을 덥힐 수 있게 해준 라비크와, 동거남이 죽은 바로 그 밤을 보내고 다시 삶을 찾은 여인. 러시아 백군 출신 망명자 모로소프에 의하면 창녀는 아니지만 걸레 수준의 헤픈 이탈리아 여자. 라비크는 이해한다. 그녀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항상 몰두해야 하는 별자리를 타고 났음을.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불행한 과거를 가진 남자와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여인이 만들어가는 불안의 일 년. 40년 전 한국의 한 고교생은 이 책을 읽으면서 붉게 밝아오는 새벽 놀을 바라보았었다. <개선문>은 여전히 내 인생책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9-03-27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80년 초에 읽었으니까 falstaff님보다 조금 늦게 읽긴 했지만 제게도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책이었지요. 저 역시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어요. 중학교 3학년때이니까 뭐가 뭔지 잘 모를때인데도 이렇게 쓸쓸한 것도 사랑이구나, 하기 전보다 더 허무하고 외로와지는 것도 사랑이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 감히 인생책이라고 말 못하겠는게 그 이후로 한번도 더 읽어본 적 없거든요. 저도 다시 읽으면 아마 완전 새로운 개선문을 읽게 되겠지요? ^^

Falstaff 2019-03-27 14:41   좋아요 0 | URL
아, 10대 시절에 이 책을 읽으셨다니, 그것도 같은 삼중당 문고판을 읽으셨다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요즘 십대들은 헤세, 지드, 레마르크 등등엔 별로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세월이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서 그런지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hnine님도 언젠가는 재독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

노나 2019-04-1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책이시라니 너무 반가운 마음에..제가 94학번에 고등학교때 읽었으니 대선배님이시네요..저도 줄거리도 무엇도 기억이 나질않고 그때의 라비크의 고독한 분위기만이 뇌리에 남아있어요. 오래전이라 책이 사라져 다시 읽을수 있을까싶어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고.. 이젠 집에 한번 데려와야할 것 같아요. 옛추억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Falstaff 2019-04-19 10:39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다시 읽어보셔요. 세월이 참. 읽는 느낌이 상당히 다를 겁니다.
누추한 감상문을 즐겁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Arch 2020-05-1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이 지루할 때 상각났던 책. 개선문을 집어들었는데 라빅의 우울과 고독이 너무 위악적으로 느껴져요. 새로운 감각을 환기시키길 기대했는데 더없이 불안하고 유치한 느낌. 전엔 조앙과 라빅의 사랑이 정말 애처로웠는데 몇페이지 넘기고선 계속 갈지말지 고민이 되더라구요

Falstaff 2020-05-14 08:59   좋아요 0 | URL
Arch 님 의견이 옳습니다.
평양 감사도 싫으면 안 하는데 많고 많은 책 가운데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읽으실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저처럼 재미나게 읽은 사람도 있다는 거...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뭐.

다락방 2023-02-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우 김헤자가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책에서 언급하길래 읽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골드문트 님의 인생책 이라는 이 리뷰가 보이네요. 땡스투 는 골드문트 님께 드립니다. ㅎㅎ

Falstaff 2023-02-20 12:30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고맙습니다.
지금 취중이라... 천국이군요. ㅋㅋㅋㅋㅋㅋ
 
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바진이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루쉰, 라오서와 함께 3대 문호로 꼽힌다는 책 소개를 보지 않고, 그냥 붉고, 희고, 분홍색의 장미가 빼곡한 치파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 그림을 사용한 책의 표지와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의 명성만 가지고 골라 일 년이 넘게 책가게 보관함에 넣어놓기만 했다가, 오래 묵혀두는 것이 미안해 이제 그만 읽어보자, 하는 심정에서 사 읽었다. 애초에 장미꽃이 만발한 (옆트임이 시각을 자극하는)치파오에 눈이 어두워진 나는 현대 중국문학에서 자주 읽을 수 있는 불륜과 집안 내 난교 같은 것도 등장할 것이란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중국소설에서 그런 걸 어디 한두 번 보는가. 더구나 부잣집이나 대갓집의 경우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 젊은 계모와 나이 찬 아들 사이의 남녀상열지사가 거의 고정화되어 있지 않느냐는 말이지. 예를 대볼까? 차오위가 쓴 <뇌우>. 또? 관두자. 하여간 그런 건 헛공상이었다. 중국판 리얼리즘 문학이랄까. 굳이 경향을 따지면 그렇다는 말씀.
 무대는 중국의 충칭. 해방이 되기 전까지 5년이 넘게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 상하이에서 살다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충칭으로 피난 와서 살고 있는 왕씨 부부와, 어머니. 이 세 명이 세상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의 푸가를 연주한다. 소설은, 서른네 살 동갑내기 부부와 쉰세 살의 어머니가 초장부터 등장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에 벌써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는 거. 비록 19세기 태생인 어머니는 전족을 했음에도 당시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교육과정을 마쳤으니 대단한 집안의 따님이었을 것이다. 왕원쉬안과 청수성은 대학시절 열정적인 청년 지식인으로 만나, 결혼이란 제도를 부정한 채 이상적인 학교를 세우는 교육운동의 꿈에 젖었다가, 전쟁 때문에 빈손으로 충칭까지 흘러들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상태. 여기에 가사를 제외한 노동능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원쉬안의 어머니는 며느리 청수성이 은행에 다니며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고, 열세 살 먹은 아들 샤오쉬안도 학비가 비싼 사립 기숙학교에 보내면서도, 며느리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아들의 정부’로 여기며 중국 여자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든 고부간 갈등을 유발한다.
 고부간 갈등이 발생하면 제일 골치 아픈 건, 아들이자 남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왕원쉬안. 이이가 애초에 대가 좀 센 체질이면 중간에서 적절하게 처신하며 중재를 할 수 있었겠지만, 바진이 만든 우리의 주인공은 자기의견 같은 건 어머니 배속에서 아예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충돌한 두 여자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회담을 통해, 당신 말이 맞지만 그래도 좀 참아줘 옛날 양반 아닌가, 어머니 말씀이 백번 옳지만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껍데기만 살짝 덮어놓는 재주 말고는 없다. 껍질 한 꺼풀만 벗기면 다시 피가 흐를 상처는 치료는커녕 소독 한 번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것만 가지고는 소설이 안 된다. 독자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뭔가 재미난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장치가 적어도 하나는 필요하다. 그래서 설치한 트랩이, 아내 수성이 다니는 은행에 아내를 사랑하는 두 살 연하의 천주임이 등장한다. 그래 이 둘이 점심시간에 비싼 커피 집에서 남자는 블랙커피를, 여자는 우유를 탄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는 현장을 주인공 왕원쉬안이 발견하게끔 유도하는 것. 때는 1940년대 중반. 왕원쉬안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밤 당장 마누라 수성을 작신 두드려 패고 싶지만, 교정쇄 검토하는 일을 하며 박봉에 시달리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호적에 오르지 않은)아내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천주임인지 뭔지 하는 어린애 뒤를 따라가, 오히려 자기가 맞아 죽을 거 같아 감히 결투는 신청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벽돌로 뒤통수라도 한 번 내려 칠 깡다구도 없다.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지? 그래도 언젠가는 중국 교육의 개혁을 위해 이상적인 학교를 짓고 운영해보고자 하는 웅대한 꿈을 꾸었던 몸. 이런 인물이 중일전쟁의 바람 속에서 주머니가 비게 되자마자 이렇게 누추한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 오호 애재라? 여기다가 왕 선생은 폐에 깊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기까지 한 상태. 당시 폐병이라 불리는 결핵에 걸렸다 하면 거의 죽을병이라 여기던 시절. 왕원쉬안도 예외는 아니라서 하루하루 기운이 빠지고, 기침을 하고, 객혈을 하고, 운신을 못하게 되는 것을, 왕원쉬안과 달리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환자와 그의 어머니란 19세기 여인이 효과적으로 만들어놓은 음울한 집구석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사회적 성공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호적상 동거녀 청수성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청수성이 자신을 사랑하는 두 살 연하의 천주임을 따라 집을 나가 자기 인생에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해로를 하느냐, 아니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구박과 질시를 인내하면서 불쌍하기 그지없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포복하고 있는 왕원쉬안의 곁을 지키느냐. 수성의 성격을 보면 앞의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1940년대 중반이라면 뒤의 선택이 정당할 거 같고, 그렇지? 애매하시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휩쓸린 작은 개인들의 비극과 나약성. 과연 어떻게 될지는, 안 알려줌.
 만일 누가 나더러 이 책을 선택해서 읽을까, 말까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읽어보라고 하고 나중에 귀싸대기를 한 대 맞을까, 읽지 말라고 해서 중국현대문학의 세 번째 ‘문호’가 쓴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는 기회를 막아버릴까. 거 고민된다. 그러니 내게 이런 거 묻지 마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우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7
주나 반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유명사 “Djuna”는 ‘주나’로 발음하는 모양이다. 1892년 출생. 이이보다 12년 빠른 1880년 영국에서 레드클리프 홀 여사가 태어나 반스 보다 8년 먼저인 1928년에 <고독의 우물>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리하여 여성 퀴어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고독의 우물>에서는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가 외동딸에게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남자 아이처럼 교육을 시킴으로 해서 성적 혼동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반면, 주나 반스는 어떻게 남녀 동성애자로 결정되었는지에 관해 아무 설명 없이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벌써 동성애 진행 중에 있다고 설정해버린다. 두 작품 공히 동성애적 표현이라고는 여성끼리 입맞춤 외엔 등장하지 않지만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었던 <고독의 우물>의 경우엔 런던 시장에 의하여 시중에 뿌려진 수많은 책을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주나 반스가 <나이트우드>를 썼을 당시엔 8년 전 홀의 경우를 심각하게 복기해서 출판사가 작품을 여러 방향으로 다시 편집, 홀과 같은 무참한 경우를 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원본은 “셰릴 J. 플럼이 편집한 Nightwood: The Original Version and Related Drafts (Djuna Barnes, Dalkey Archive Press, 1995)"가 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데, 이이가 여성작가라는 걸 알고 좀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생겼더라.

 

 

 주나 반스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열고 읽기 시작하는데,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같이 읽어보자.


 “1880년 초,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저 민족의 영속이 과연 권장할 일인지에 대한 근거 있는 의구심에도 아랑곳 않고, 강장한 기백과 군사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빈 태생의 여성 헤트비히 폴크바인이, 캐노피가 달리고 휘장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갈래진 나래가 박혔으며 공단 겉감에 폴크바인가家의 문장을 올 굵고 색 바랜 금사로 우뚝 뜬 깃털 침대보가 덮인 휘황한 선홍빛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으로 독자를 낳았으니, 이는 의생이 임부의 죽음을 내다본 지 꼭 이레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1)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민족 : 유대인
 2) 폴크바인 가의 문장을 금사로 뜬 깃털 침대보 : 적어도 남작 이상의 귀족
 3)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 : 귀한 자손의 출생
 4) 의생 : 醫生 ‘옛’ 의술로 질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이런 모든 것을 합치고, 길고 화려한 문장을 고려해볼 때, 첫 문장부터 확 끼쳐오는 의문점.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역자 이예원이, 원래 화려한 문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일까, 하는 것. 이 책 읽으면서 그래도 우리말 단어 깨나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나는, 적어도 스무 번 이상 사전을 뒤져 정확한 낱말의 뜻을 찾아봐야 했다. 같은 말이라도 현재 쓰고 있는 단어와 다른 표현을 즐기는 것이 역자의 습관일까?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민인에게 유락을 제공하라는 명”이라는 표현. 민인은 ‘인민’과 같은 말이고, 유락은 놀며 즐긴다는 뜻이라 “그리스도인에게 놀며 즐길 거리를 주라는 명”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굳이 이리 쓴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 알려드릴까? “구합媾合(책에서 인용한 한문의 ‘구’는 계집녀변이 아니라 책받침이지만 두 단어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한글에선 지원이 안 된다)”이 무슨 뜻인 줄 아시나? 나도 한문 좀 알고 산다 했다가 코피 났다. 성교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화려한 옛 문장체로 번역하는 것도 젊은 역자로서는 쉽지 않을 터. 그럼에도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만 원 건다, 번역해야 하는 원본이 옛 문장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유려하고 재기가 번득이며 읽는 재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래 처음엔 감탄을 해가며 읽어 나가게 되지만, 이런 효용에는 한계가 있는 것.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심정으로 접어든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톤을 유지하는 입심에는 껌뻑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이비 의사 매슈 오코너의 무한정한 수사가 펼쳐지면, 이이의 장광설이 나오는 장章마다 페이지 수가 늘어갈 정도인데, 그 화려한 변설에 넋을 잃을 정도. 오코너 선생도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어서 나중엔 결국 이렇게 절규하게 된다.


 “듣고 싶었던 건 이제 다들 들었을 테니 이만 날 풀어주면 안 되겠어요. 이제 그만 놓아주면? 난 인생을 허투루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허투루 이야기했어―추잡한 무리의 와중에서, 가증스럽게―알아, 다 끝났다는 거, 모두 끝났어, 한데 날 빼고는 아무도 그걸 모르지―코가 비뚤어져 개가 됐대도―너무 오래 버텼어―” (231쪽)


 그렇다. 헤트비히 폴크바인 남작부인이 마흔다섯의 나이에 사내아이를 낳고 “장려한 몸짓으로 돌아누우며 아이를 펠릭스라 명명”하고 숨은 거둔 다음, 독자는 당연하게도 책을 이끌고 가는 주인공으로 바로 이 아이, 펠릭스라고 생각하게 되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펠릭스는 기도(이탈리아계 유대인이니 Guido, ‘귀도’일 것 같긴 하지만)를 낳고, 기도는 끝내 자손을 내지 못하고 쉰아홉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럼 스토리는 어떻게 되고, 또한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어떻게 여성 퀴어 소설이 되느냐고? 좋다. 가르쳐드린다. 펠릭스는 로빈과 결혼해 발육이 부진한 기도를 낳고, 로빈은 집에서 이렇게만 살기엔 도저히 근질근질해 참지 못하고 가출해 미국으로 날라버린다. 거기서 동성의 애인 노라를 만나 좀 살다가, 함께 파리로 건너와 잠깐 지내는 동안, 네 번의 결혼 이력이 있는 영국 과부 제니 페더브리지가 로빈한테 반하게 되는 데, 어느 날 밤, 다섯 명이 탄 마차 안에서 과부 제니가 로빈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 피를 철철 흘렸음에도, 오히려 노라를 버려둔 채 제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 버린다.
 여기서 제니와, 특히 노라가 겪는 번민과 사랑이 스토리의 주요 줄기가 되고, 무면허 의사 오코너 선생의 변설이 기막힌 향신료로 작용하는 소설. 이리 내용을 밝히는 건, <나이트우드>라는 작품의 진짜 매력은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그리 자극적이지도 않고, 흥미를 유발하지도 않는 그냥 그런 스토리에 있지 않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몇 몇 인간의 심리상태를 찬란한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3-2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가 범접하기 힘든가 봅니다 ~ㅎㅎ

Falstaff 2019-03-21 09: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우리말에도 동음이의어가 많다는 걸 새삼스레 발견했습니다.
사전을 옆에 두고 읽으시면 더욱 재미나게 즐길 수 있을 거 같더군요.
 
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한밤이여, 안녕>으로 내 혼을 빼놓은 작가.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작품은 이 두 가지 말고 없었는데 작년에 현대문학사에서 단편집이, 올해 1월에 <어둠속의 항해>가 연이어 나왔다. 1월에 두 권을 사서 가지고 있다가 이제 한 권을 읽었다. 역시 진 리스.
 가끔 황량한 소설을 읽는다. 이런 걸 쓰는 작가들의 가슴 속에도 역시 고통과 고독과 상실이 가득하리라. 어차피 글 쓰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이니까. 그러나 독자가 이런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작가나 작가가 쓴 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걸 임계점이라고 해두자.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입각해서 글을 쓸 경우, 고통, 고독, 상실 등의 추상명사를 어떻게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일 듯하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감정의 임계점을 넘는 소설 표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표현한 추상명사들에 동의할 수 있는 한계. 이 한계는 거꾸로 독자의 동의와 공감 수준이 극대화 되는 지점이고 그걸 임계점이라 하자.
 나는 임계점에서 조금 거리를 둔, 임계점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이 안전해서. 임계점이 무서운 건, 그 점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폭발해버리기 때문. 독자인 나는 임계점을 넘는 작품들을 읽으면 조금도 봐주지 않고, 때론 매우 모질게 ‘질퍽거린다’느니, ‘통곡의 벽’이라느니, ‘궁상맞다’라고 독후감을 쓴다. 특히 추상명사들이 그대로 문장 속에 들어 있을 경우엔 절대 봐주지 않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난 진 리스를 좋아한다.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해 열여섯 살에 영국으로 온 진 리스는 외증조모에서 내려온 피부색과 낯선 영어발음으로 매우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책의 앞날개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영국에 도착한 이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왕립연극학교에서도 언어 문제로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전전하다가, 부유한 연상의 연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으며, 10대 후반에 낙태수술을 경험한다. 몸은 영국에 있지만 정처 없는 삶을 산 셈이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러 진 리스는 그의 책 <어둠속의 항해>에 당시 자신이 겪었던 혼란과 소외와 고독과 절망과 가난과 헛된 사랑과 실연과, 무엇보다 낙태의 경험을 온전히, 그러나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결코 임계점을 넘지 않고, 주인공 애나의 입에서 추상명사가 나오지 않으면서도, 때론 절박하게, 때론 아무렇게나, 때로는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발언하는 속에서 독자는 런던 속의 어린 이방의 아가씨가 절절하게 빠져있는 혼돈과 절망의 정처를 발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일 년 반쯤 됐나. 그때까지 나는 한국 페미니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당시 김연의 소설 <그 여름날의 치자와 오디>를 읽으면서 책 안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개새끼들인 것이 마땅하지 못해 “여자와 남자, 좀 서로 좋아하며 살자.”라고 독후감을 끝맺었다가, 아직 정신 못 차린 ‘개저씨’가 돼버린 일화가 있다. 그때 생각이 나서 해당 포스트를 다시 읽어보니, 지극히 국한된, 어쩌면 고립된 사회생활을 했던/하는 나는 여성계 일부에서 벌이고 있던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에 완전 무식했으며, 당연히 여성주의자들이 남자란 포유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무지해 그런 독후감이 나왔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그냥 그런 경험이 있다, 하는 수준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니.
 그리하여 같은 이유로 버지니아 울프가 90년 전에 행했던 강연을 기초로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 관해서, 비겁하고 소심한 나는 독후감 쓰기를 주저한다. 울프는 에세이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①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② 여성이 쓴 픽션, ③ 여성에 관해 쓴 픽션으로 구분해서 고민을 하며, 여성이 픽션을 제대로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연 500 파운드(지금 가치로 한 5천만원 가량?) 정도의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셰익스피어 시절부터 여성이 ‘픽션의 생산’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현상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궁극적으로 성 해방까지 차분하게 논조를 끌어가고 있다.
 그게 90년 전이다. 아무리 자질이 있어서, 예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질을 능가하는 여동생이 매리(이런 이름이라고 가정하자)가 있었더라도 결코 희곡을 쓰는데 필요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집에서 야반도주해 런던의 극장과 접촉했더라도 치욕적인 대우만 받았을 것이며, 결과,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으로서 신세까지 망쳤을 것이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울프의 정당한 가정법이다. 여성에게 돈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백번 옳았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픽션을 생산하는 일 또는 직업에서는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세계적으로 봐도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문학상’들의 수상자 면면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월등하게 많다. 문학상 수상작 말고 아깝게 떨어진 후보작 작가들까지 포함하면 여성작가가 남성작가의 두 배 이상 안 될까? 여성에게 돈과 공간이 주어지자 당장 이런 일이 생겼으니 울프의 선견이 정당했다는 걸 우리나라에서보다 어떻게 더 잘 보여줄 수 있는가 말이지.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건, 내겐 마치 역사책을 읽는 것과 비슷했다. 과거엔 이런 주장까지 할 정도로 어쩌고저쩌고.
 우리나라 문학판에서의 과도한 여초현상에 관해 뭐 할 말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자.
 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토론을 지나치게 싫어한다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