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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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한밤이여, 안녕>으로 내 혼을 빼놓은 작가.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작품은 이 두 가지 말고 없었는데 작년에 현대문학사에서 단편집이, 올해 1월에 <어둠속의 항해>가 연이어 나왔다. 1월에 두 권을 사서 가지고 있다가 이제 한 권을 읽었다. 역시 진 리스.
 가끔 황량한 소설을 읽는다. 이런 걸 쓰는 작가들의 가슴 속에도 역시 고통과 고독과 상실이 가득하리라. 어차피 글 쓰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이니까. 그러나 독자가 이런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작가나 작가가 쓴 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걸 임계점이라고 해두자.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입각해서 글을 쓸 경우, 고통, 고독, 상실 등의 추상명사를 어떻게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일 듯하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감정의 임계점을 넘는 소설 표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표현한 추상명사들에 동의할 수 있는 한계. 이 한계는 거꾸로 독자의 동의와 공감 수준이 극대화 되는 지점이고 그걸 임계점이라 하자.
 나는 임계점에서 조금 거리를 둔, 임계점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이 안전해서. 임계점이 무서운 건, 그 점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폭발해버리기 때문. 독자인 나는 임계점을 넘는 작품들을 읽으면 조금도 봐주지 않고, 때론 매우 모질게 ‘질퍽거린다’느니, ‘통곡의 벽’이라느니, ‘궁상맞다’라고 독후감을 쓴다. 특히 추상명사들이 그대로 문장 속에 들어 있을 경우엔 절대 봐주지 않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난 진 리스를 좋아한다.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해 열여섯 살에 영국으로 온 진 리스는 외증조모에서 내려온 피부색과 낯선 영어발음으로 매우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책의 앞날개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영국에 도착한 이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왕립연극학교에서도 언어 문제로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전전하다가, 부유한 연상의 연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으며, 10대 후반에 낙태수술을 경험한다. 몸은 영국에 있지만 정처 없는 삶을 산 셈이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러 진 리스는 그의 책 <어둠속의 항해>에 당시 자신이 겪었던 혼란과 소외와 고독과 절망과 가난과 헛된 사랑과 실연과, 무엇보다 낙태의 경험을 온전히, 그러나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결코 임계점을 넘지 않고, 주인공 애나의 입에서 추상명사가 나오지 않으면서도, 때론 절박하게, 때론 아무렇게나, 때로는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발언하는 속에서 독자는 런던 속의 어린 이방의 아가씨가 절절하게 빠져있는 혼돈과 절망의 정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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