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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살면서 가슴에 가장 깊게 각인된 책을 요새는 ‘인생책’이라고 한다. 내게도 있다. 바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 1970년대 후반, 하라는 대학 입시 공부는 제쳐두고 밤새는 줄 모르고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 <개선문>. 라비크와 조앙 마두와 칼바도스. 무려 4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다. 참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소설의 이야기도 아니고,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불안한 정세 묘사도 아니었다. 비 내리는 센 강을 가로지르는 어느 다리(‘알마 교’)에서 서로 빗겨 지나가며 우연히 만난 라비크와 조앙 마두. 1938년 11월의 센 강 위에서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이 비틀거리는 조앙을 부축하며 ‘저 아래로 가기엔(강물에 몸을 던지기엔) 너무 춥소.’라는 무정하고, 고독하고, 니힐한 대사와 지하 주점에 들어 칼바도스를 주문하는 장면이었다. “술을 주시오. 쓴 술이 아니면 안 되오.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쓴 술을 주시오. 칼바도스로.”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술을 주문하는 장면은 내 생각과 달리 간결했다. “칼바도스 두 잔.”
어찌된 것일까. 오랜 세월 동안 시각과 뇌로 기억하는 대신 가슴 박동에 새겨졌던 <개선문>은 박동 수가 늘어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변형되어왔던 거다. 실제로 나는 그동안 여러 포스트와 심지어 사보에 기고한 글 속에서 내가 만들어놓고도 그것이 진짜 작품 속 대사인 것으로 알고 인용해왔다. “술을 주시오. 쓴 술이 아니면 안 되오.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쓴 술을 주시오. 칼바도스로.” 라고. 40년 전의 삼중당 문고판 <개선문>은 몇 십 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새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한 다른 번역본도 마땅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생긴다. “칼바도스 두 잔.” 여섯 글자가 네 문장으로 자체 확장되는 현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벌어졌다는 게 놀랍고 쑥스럽기도 하다.
놀랄 만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월의 힘은 너무도 막강하다. 나는 책을 읽으면 스토리나 소설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기억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너무 많은 날들이 흘렀다. <개선문>은, 거의 완벽하게 처음 읽는 책이었다. 주인공과 러시아에서 망명한 훌륭한 조연 모로소프가 등장한다는 것, 라비크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만 기억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긴, 오늘 점심 먹으면서 냅킨 넉 장을 뽑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옆 테이블에 앉은 직원에게 냅킨 통 좀 건네 달라고 한 걸로 보아 이제 뇌 활동이 정상은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레마르크가 빼어난 반전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출간한 것이 1929년. 3년 후, 독일엔 불행하게도 히틀러를 수반하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가 집권해버린다. 나치 치하에서 반전주의자가 살 수는 없는 일. 레마르크는 이후 스위스, 미국을 거쳐 다시 스위스 로카르노의 침상에서 숨을 거둔다. 즉 스스로 망명객의 삶을 살았던 것. 그래 <개선문>에서도 주인공 라비크를 등장시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독일인과 유대인을 며칠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심지어 애인 시빌도 자신의 눈앞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가 사흘 만에 목매달아 자살해버린 다음, 자신도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탈출해 프랑스로 도피한 인물로 설정을 했다. 안나 제거스는 장편소설 <제7의 십자가>에서, 독일 내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수용소를 탈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나게 그린 바 있는데, 라비크는 그런 어려움을 뚫고 파리까지 도착했으니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력과 체격, 그리고 완력이 남다른 인물이란 점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밀입국한 독일의 유능한 외과의사로 실력은 있지만 손재주가 특출하지 않아 외과적 수술엔 한계가 있는 불운한 프랑스 의사 두 명에게 임시로 고용되어 수술을 대신해주고 건 당 약간의 보수를 받아 생활하고 있는 상태. 그러나 삼류호텔 앙테르나쇼날에서 살며 좋은 음식을 먹고 날마다 고급술을 거의 무한정으로 마실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은 된다. 그의 우울. 그건 베를린에서 고문을 받아 한쪽 신장이 파열되고, 이마가 찢어지고, 한 쪽 고환이 터져버릴 정도였던 고통의 기억과, 사랑하는 애인 시빌을 자살로까지 몰아간 게슈타포 장교 하케에 대한 공포, 혐오, 복수의 갈망에서 비롯한다.
삼류 배우 조앙 마두. 동거하던 남자가 숨이 끊어지자 이제 세상에 자기 혼자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이기지 못해 비 내리는 새벽의 센 강변을 홀로 거닐던 여자. 삶의 의욕이 전혀 남지 않은 상태에서 따뜻한 지하 주점에 데리고 가 화주火酒를 사줘 몸을 덥힐 수 있게 해준 라비크와, 동거남이 죽은 바로 그 밤을 보내고 다시 삶을 찾은 여인. 러시아 백군 출신 망명자 모로소프에 의하면 창녀는 아니지만 걸레 수준의 헤픈 이탈리아 여자. 라비크는 이해한다. 그녀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항상 몰두해야 하는 별자리를 타고 났음을.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불행한 과거를 가진 남자와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여인이 만들어가는 불안의 일 년. 40년 전 한국의 한 고교생은 이 책을 읽으면서 붉게 밝아오는 새벽 놀을 바라보았었다. <개선문>은 여전히 내 인생책이다.